청년은 맥빠진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자신이 여기 오면서 했던 기대는 이런 게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와, 그런 친구를 죽게 방조한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모시킬 어떤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였건만 오히려 그런 세상의 견고함과, 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 뿐 아닌가. 자신과 같이 시대의 흐름에 대항하려는 자들은 폭력에 매달려 극단적인 최후의 반항을 준비하고 있고, 오는 길에 만났던 안드로이드는 자신이 향해야 할 증오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욱 알 수 없게 만들었다.
터덜거리며 한참을 걸어서 사거리로 나와 정류장 방향으로 향하려는데, 차도를 사이에 둔 길 건너편에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는 길에 만났던 안드로이드였다. 그녀는 대로 옆에 누군가가 갖다놓은 화분들 앞에 쪼그려 앉아서, 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꽃의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손 끝으로 꽃을 살짝 밀어 보기도 하며 아이와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 여인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던 우아함과 아름다움, 천진난만함을, 그저 쇳덩이에 가짜 감정을 불어넣은 움직이는 기계로만 생각했던 안드로이드에게서 발견하게 된 청년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가 알고 있던 세상은 오늘 계속해서 무너지고, 새롭게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
청년이 그렇게 떨어져서 그녀를 쳐다보는 와중에, 화분이 놓여져 있던 길가의 한 건물에서 왠 남자가 꽃이 담겨있는 화분 여러개를 더 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건물은 꽃가게였고, 화분을 옮겨놓은 건 그 가게의 주인인 듯 했다. 가게 주인은 화분을 가지고 나오다, 그녀가 꽃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상인 특유의 넉살좋은 미소를 띄며 말을 걸었다.
"어이쿠, 손님. 꽃 사시려구요? 안에 들어가면 더 좋은 꽃들이..."
"아, 죄송합니다. 꽃이 예뻐서 그저 바라본 것 뿐이에요."
그녀가 황급하게 일어나면서 말하자, 주인이 여자의 행색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아까 그 사람 좋은 얼굴은 어디로 가고, 고약하게 찌푸려진 얼굴을 한 채 흡사 몰래 들어온 도둑고양이를 쫒아내듯 손사레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뭐야, 안드로이드였어? 젠장. 손님 안 오니까 얼른 가라고. 마수걸이도 안 됐는데 재수 없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냥, 종종걸음으로 급하게 자리를 떠나갔다. 청년은 그 광경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비록 그들이 기계일지라도, 이런 식의 대우는 합당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 계속 머릿속에서 뭉클거렸다.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건너 꽃가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아직도 재수 없다는 듯 여자가 떠나간 방향을 향해 침을 뱉는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장미 꽃 한 다발, 얼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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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가게 앞에서 꽃을 들여다보다 크게 혼이 난 그녀는, 평소에 자신이 맡았던 버스 정류장 근처의 대기지점으로 발을 옮겼다. 필요하다면 하루 종일 서서라도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아무도 없는 컴컴한 새벽이 되어, 그녀가 마음 한 켠에서 인간들이 말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될 지라도. 누군가의 부탁이 있거나, 자신을 만들어낸 본사에서 할당된 명령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자기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할당된 구역 내에서 걷고, 얘기하고, 숨쉬는 것밖에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안드로이드인 걸까. 어째서 자신은 기계인 걸까. 그들이 바랐고, 그들이 원하기에 인간과도 같은 모습과 감정을 갖추었건만 정작 사람들은 그런 안드로이드들을 두려워하고 홀대하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처럼, 자신과 같은 안드로이드들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인간들에게는 더 없이 불쾌하고 역겨운 일로 비추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1세대처럼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완전한 기계형이었더라면 나았을텐데. 그녀는 부정적 감정이나 사고가, 신체 기능의 저하를 가져온다고 적혀 있는 매뉴얼의 내용을 떠올리며 애써 머릿속에 연달아 떠오르는 생각들을 끊어버리려 하였다. 그렇게 계속 걸어가고 있던 그녀를 향해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잠깐 기다려요. 같이 갑시다."
흠칫하고 놀라 목소리의 근원을 쳐다보니, 아까 길을 안내해주었던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눈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아까 꽃가게 앞에서 당했던 일이 생각나, 이 남자도 자신에게 뭔가 해꼬지를 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무서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애써 얼굴 표정을 고치고 평소에도 항상 말하던 그 문구를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길 안내를 바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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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좀 걸읍시다."
"어디로 가시려구요? 버스 정류장이라면..."
"아무 데나. 그리고..."
청년은 손에 들고 있던 장미꽃 다발을 안드로이드 여자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꽃을 받아든 그녀는 매우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르는 표정을 한 채, 말도 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멈춰버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청년이 물었다.
"묻고 싶소. 지금 기분이 어떻소?"
"....."
"부탁이니 제발 말해주시오."
재촉하는 청년의 말에, 그녀는 눈을 꾹 눌러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였다.
"기뻐요. 저는 꽃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손님과 같은 인간분들이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꽃의 향기를 맡으며,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장미꽃 다발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청년은 그 모습을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길 한 쪽에 나무로 된 벤치 하나가 있는 것을 본 청년이 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길 안내를 하는 게 목적인 건 알지만, 앉아서 잠시동안 얘기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인간인 내가 하는 부탁이니까. 안 그렇소?"
"그건.. 규정상으로는 가능해요."
말로는 그랬으나, 그녀는 조금 기쁜 듯이 보였다.이윽고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안드로이드는 벤치에 조심스럽게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