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 박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단순한 외형의 박스 건물. 주변에는 시가지용 회색 위장도색이 되어 있는 군용 수송차가 몇 대 세워져 있고, 가로수 대신 기관총과 다련장 미사일 포대. 가로등이 아니라 야간 전투용 서치라이트가 죽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건물 뒤편에는 로켓 발사대처럼, 수직형 캐터펄트가 올라와 있어 공군 소속의 격납고처럼 보였다. 다만 이 군 기지처럼 보이는 건물이, 너무 눈에 띄기 좋은 대도시 한복판에 있다는 것 때문에 마치 영화 촬영을 위한 세트장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얼른 출격 준비하고 대외 파일럿들 조종석에 앉혀!”
“어디 간 거야! 빨리 찾아내! 반응 보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출격만으로도 빠듯한데 촬영할 시간까지 뺏기면 우리 다 모가지야!”
격납고 안에는 붉은 얼룩이 진 작업복 입은 사람들과, 검은 선글라스에 정장 입은 사람들. 카메라와 마이크 조명을 들고 있는 방송국 직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화려하고 늘씬한 중세 기사의 갑옷을 입은 것 같은 거인 하나가 서 있다. 그 거인은 이마에 네 개의 블레이드 안테나 형태의 뿔과, 보조 카메라로 보이는 보석 모양 장식이 붙어 있다. 얼굴은 눈동자 같은 렌즈 위에 길고 날카로운 육각형 반투명 커버를 씌우고, 기사의 투구 가리개 같은 마스크가 그 아래쪽을 뒤덮었다.
본체는 어깨와 팔은 각자 F-14 전투기의 날개와 머리 부분에서 따온 것 같은 날카롭고 예리한 외형에, 본체는 에이브람스 M-1 중전차를 떠올리게 만드는 각지고 두터운 흉부와 허리. 기다란 날개가 붙은 백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리는 전투기의 본체 같은 늘씬한 허벅지와, 메인 엔진 같은 화려한 곡선의 정강이 부분이 가장 눈에 띄었다.
마치 여러 대의 전투기와 전차. 여기에 기사를 합쳐놓은 것 같은 거인 뒤편에서, 한 쌍의 소년 소녀가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소년과 소녀 둘 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군데군데 주름이 잡혀 있고. 머리카락도 약간씩 하얗게 새어 있어. 아무리 봐도 30대 이상은 훌쩍 넘긴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키와 아직 덜 자란 빈약한 체형. 그리고 중학교 교복을 그대로 입은 모습에서, 이들이 아직 소년 소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정작 조종하는 건 우리가 하는데, 우리는 카메라에 비춰져서도 안 되고 남들 눈에 띄지도 말라네. 씨발 세상 구해놓고도 땅개 취급 받는 현역 군발이 보다 못한 대접이야.”
소년 쪽이 담배를 입에 문 채 코웃음을 치면서 비아냥거렸다. 이에 소녀는 소년에게 담배를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고,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녀에게 담배를 건네줬다. 소녀 역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뒤, 불평을 내뱉었다.
“누가 아니래. 그래도 땅개 새끼들은 기간만 채우거나, 다 채우기 전에 죽어도 ‘국민’ 취급 받지. 우린 뒈지면 그냥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 된다는데. 겨우 장래 취업자리 때문에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야?”
“그거 들었어?”
소년이 질문을 던지자, 소녀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되물어봤다.
“이번엔 또 무슨 얘기인데?”
“취업을 시켜준다고 해도, 대부분 간신히 먹고 살 정도로 조잡한 일거리에다가 조종사들은 대부분 쉽게 늙어버리고 몸이 쇠약해지기 때문에 오래 못 버틴다.”
소년이 담배 꽁초를 아무데나 버리면서 대답하자, 소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거짓말….”
소년이 하얗게 샌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여주며, 소녀에게 한마디 더 던졌다.
“우리들 몸을 봐. 거짓말로 들려?!”
“그러면 우리는 대체 뭣 때문에 저딴 것에 타서 외계인들하고 싸우는 거야?”
소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다시 한 번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나도 다른 조종사 녀석한테 들은 얘기인데, 우리는 그냥 소모품이나 다름없대. 사회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만 뽑아서, 죽을 때 까지 조종사로 쓰다가 버린다는 거야. 지원을 해 줄 필요도 없고 비싼 봉급이랑 유지비를 내지 않아도 그만이고, 죽어도 사람들이 별 말 안 할만한 사람들만 골라서 조종사로 앉힌다고 했어.”
소년이 뭔가 더 얘기하려 하자, 소녀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소년의 목을 조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듣기 싫어! 듣기 싫다고! 이미 나도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왜 굳이 입 밖으로 얘기를 꺼내는 거냐고!”
소녀는 소년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쯤에서야 손을 놓고 주저앉아 울었다. 그 때 소년이
“그래서…. 나한테 생각이 있어.”
촬영이 끝나 대외 파일럿과 촬영진들이 물러나기 시작할 무렵. 작업복 입은 사람들이 소녀를 불러냈다.
“야 촬영 끝났으니까, 두 새끼 다 당장 나와! 꾸물거리면 조종 기한을 더 늘려버릴 테니까!”
작업복 입은 사람들 중, 우두머리급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거인 등 뒤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태도는 두 사람을 거의 애완견보다 아래로 보는 것 같았다. 이에 작업복 입은 정비반 사람들은 큰 소리로 웃어댔다. 잠시 후. 소녀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 밖으로 나가고, 소년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불쾌한 작업복 입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한마디씩 던졌다.
“오늘도 기체 파손시키지 말고 조심해서 싸우라고. 안 그러면 우리만 개같이 고생하니까.”
한 직원은 그녀의 어깨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걸치면서 한마디 했다. 그의 시선은 이제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그녀의 가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며칠 연속으로 야근하게 만들지 말라고. 또 야근하게 만들면 알지?”
다른 한 직원은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가져가면서, 아랫도리 쪽을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 역시 그녀의 몸 곳곳을 핥는 것처럼 보며, 뭔가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인터뷰나 방송 출연만 담당하는 대외 파일럿은, 진짜 거인을 조종하는 소녀를 보면서 마치 비루먹고 털이 다 빠진 짐승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을 보냈다. 소년은 이를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소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정비반 사람들에게 간단한 대답을 남겼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소년과 소녀는 도망가듯 조종석에 올라탔고. 정비반 사람들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며, 각자 제자리로 가기 위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
“자기 딸내미 나이밖에 안 되는 년한테 손이나 대는 꼰대새끼들 죽어!”
스피커를 통해, 소녀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격납고 천장이 크게 울려 퍼질 정도의 큰 소리 때문에, 거인의 바로 밑에 서 있던 정비반 인원들은 물론, 이제 막 출구 쪽으로 나가려고 하는 대외 파일럿과 방송국 직원들까지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거인이 팔을 들어 정비반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손바닥으로 힘껏 내리 찍었다.
천둥이 치는 것 같은 굉음 사이에, 살점 으깨지는 질척한 소리와 뼈 으스러지는 껄끄러운 소리가 한데 섞였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참상에, 실전은 물론 전투 영상 한 번 제대로 보지 않은 대외 파일럿과,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할 법한 방송국 직원들은 큰 충격에 휩싸여 마치 뱀을 본 개구리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정비반 사람들을 한번에 눌러 죽인 거인은, 일부러 더 잘게 으깨버릴 생각으로 격납고 브릿지 바닥과 두터운 장갑판을 두른 손바닥에 들러붙은 시체들을 몇 번이나 더 비벼댔다. 그러자 손바닥 밑에서 붉은 웅덩이가 고이면서, 흙탕물 튀기는 소리가 대외 파일럿과 방송국 직원들의 귀를 자극했다. 여기에 진한 피비린내가 코를 확 찌르는 탓에, 대외 파일럿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닥에 신물을 토해냈다.
“하하. 하하하하! 너무 즐거워! 너무 즐겁다고! 좆 세울 줄만 아는 정비반 새끼들. 막상 죽여 버리니까 속이 시원하기만 하잖아!”
소녀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웃으며, 정비반 사람들을 으깨 죽인 손을 걷었다. 거인이 손을 떼자마자, 붉은 고깃덩이가 손바닥에 들러붙은 채 딸려 나왔고. 대외 파일럿은 결국 그 끔찍한 광경에 정신을 잃어버렸다.
“목숨은 우리가 거는데, 그 보답만 쉽게 가로채는 금수저 새끼들. 그리고 사실을 다 알면서도 아가리 싸물고 있는 방송국 새끼들도 다 죽어버려!”
이번에는 반대편 손을 뻗어, 대외 파일럿과 방송국 직원들을 세게 쥐어버렸다. 그러자 거인의 손에서, 방울토마토를 쥔 것처럼 붉은 과즙이 터지면서 손가락 사이로 몇 점의 고기조각과 함께 흘러나왔다.
“아하. 아하하하! 아하하하! 어때? 봤지? 너도 봤지? 이렇게까지 강한 힘이 있었는데 왜 선배들은 아무도 이 힘을 제대로 쓰지 않고 죽어간 걸까 응? 아하하하!”
소녀가 탑승한 거인은 두 손을 마구 휘저어 격납고 브릿지를 치워버린 뒤, 그대로 걸어 나가려 했다. 그 때. 비상사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터지면서, 소녀와 소년이 앉아있는 조종석 안까지 흘러들어왔다.
“다 몰려오라고 그래! 내가 전부 다 밟아 죽여 버릴 테니까!”
소녀는 모니터를 통해, 잔뜩 경악하고 있는 경호원들과, 비상 사이렌이 울려 이제 막 들어온 경계근무중인 병사들을 노려봤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몇 백배 혹은 몇 천배나 커 보이는 것 같은 거인을 올려다보며, 잔뜩 겁을 집어먹은 기색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발을 들어, 그 경호원들과 병사들을 밟으려고 하는 순간.
조종석 뒷좌석에 앉아 있던 소년이 조용히 일어나, 호신용 권총을 뽑은 뒤 소녀의 등 뒤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과 함께 소녀의 등 한가운데를 총알이 뚫고 지나가, 가슴까지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총알은 조종석 계기판에 박혀버렸고, 뒤이어 소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더럽혀졌다.
“너, 너 이 새끼 대체 뭘 한 거야? 뭣 때문에 이런 짓을. 우리 둘이서 이걸 갖고 이 더러운 세상을 뒤엎어버리기로 했잖아!”
소녀는 피가 흘러나오는 가슴을 움켜쥔 채, 고통에 겨운 목소리로 소년을 질책했다. 하지만 소년은 싸늘함과 비아냥거림이 가득한 미소를 지은 뒤, 거의 다 태운 담배를 바닥에 뱉으며 대답했다.
“병신. 이거 말고 저 밖에 이런 거인이 수십 대. 전 세계로는 수백 대가 널려 있는데, 그거 조종하는 새끼들이 다 우리…. 아니 너랑 생각이 똑같은 줄 아냐? 어차피 이거 끌고 나가봤자 다구리 처 맞고 이 더러운 관짝이랑 같이 파묻히는 게 고작이라고 알아?!”
“뭐? 뭐라고?!”
소녀의 얼굴에 고통과 함께 당혹감과 배신감이 한꺼번에 뒤섞여,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소년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이번엔 소녀의 머리를 총으로 겨눴다.
“무려 높은 분에게 직접 부탁받았지. 요즘 네 상태가 뭔가 이상한 것 같으니까 잘 감시하다가, 수상한 기색이 드러나면 없애버리라고. 대신 배신자를 없애버리면 바로 목표치를 전부 다 채운 걸로 간주하고 이딴 괴물새끼를 모는 일에서 빼준다고 했….”
그 때 소년의 뱃속에서 시계 알람 같은 신호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소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크게 놀라 배를 만지작거리며 경악에 가득 찬 비명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이거 씨발! 이게 뭐냐고! 이 개 같은 년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소녀는 피식 웃으면서 엄지손가락 크기의 기폭장치를 흔들어 보였다. 기폭장치는 어디에 숨겨뒀는지는 몰라도 끈적끈적한 액체에 담긴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뭐긴 뭐겠어. 나도 윗분들이랑 거래를 좀 했지.”
그녀가 말을 끝맺자마자, 뱃속에서 울리던 신호음이 폭발음으로 바뀌고. 소년은 눈과 코. 귀와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소녀는 조그만 기폭장치를 손에 쥔 채 소년의 뒤통수에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병신. 그 부탁 너만 들은 줄 아냐? 파벌이랑 사상은 달라도 위에 있는 새끼들 생각은 다 똑같다니까.”
소녀는 그렇게 말한 뒤, 기폭장치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소년을 흐릿해지는 눈으로 쳐다보며,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소년은 죽음을 맞이한 것과 동시에, 아이스크림처럼 천천히 녹아내리며 조종석 바닥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하고 나도 똑같아. 그 새끼들하고 다를 거 없는 쓰레기였어. 그래. 그래서 이딴 괴물을 타게 되는 거….”
소녀는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조종석 시트 위에서 천천히 녹아내려, 잠시 후에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2120년 외계인이라는 다른 세계에서 온 적에 대응하기 위해, 모든 국가가 하나로 뭉쳐버린 지구연합. 그 지구연합에서도 가장 심한 격전지 중 하나인 사우스 아일랜드. 오늘도 대한민국 소속 대 외계인 병기 ‘바스티타스’의 조종사 두 명이 등록 말소되었다.
헤비메탈 포 버서크랑 동시 연재하는 소설입니다. 이쪽도 재미있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