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건물 입구로 들어서,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던 청년의 눈 앞에 꽤나 넓은 강당이 들어왔다. 대략 사오십명은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강당 한켠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인쇄기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자극적인 문구의 전단지를 토해내고 있었다.
청년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기자, 저 쪽에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던 사람 한 명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카키색의 바지와 다 떨어진 군복 상의를 입고,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청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왔소?"
"아, 예.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저어..."
그는 안경 너머로 의심스럽게 청년을 쳐다보았다. 청년이 이내 자신을 찾아왔던 남자의 생김새와 겪었던 일을 설명하자, 그제서야 안경잡이 남자는 다소 의심을 푸는 듯했다.
"잘 오셨소. 순수한 인류로서, 대업에 동참할 동지가 늘었군."
"하하.. 네."
남자는 덥썩 손을 들어 청년의 어깨를 붙들었다. 부담스러워진 청년은 그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말하긴 그렇고, 이쪽으로."
안경잡이 남자는 청년의 붙들린 어깨를 반쯤은 억지로 잡아끌며, 강당 앞 단상 옆에 있는 쪽문으로 그를 데려갔다. 쪽문을 열고 들어서자, 칙칙한 조명 아래 뭐가 뭔지도 알아볼 수 없는 상자들이 잔뜩 널린 방이 나타났다. 남자는 그 방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탁자로 청년을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기계를 꺼내는데, 청년의 집에 그를 찾아왔던 남자가 꺼냈던 바로 그 기계였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내가 그 친구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만사불여튼튼이거든."
청년은 그러려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기계를 확인한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벗어 접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어지자, 청년은 궁금했던 점을 묻기로 작정하고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설명이 듣고 싶습니다. 이 단체의 목적이 뭡니까?"
남자는 웃옷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 안경을 닦고 있었다. 청년의 당돌해 보이는 물음에, 그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보면 알 것 아니오. 저주받을 기계들을 때려부수고, 예전 삶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이지."
"방법은요. 그저 부수고 없애면 해결이 되기는 하는 겁니까."
"우리도 온건한 방법을 택한 적이 있었소. 실패했지만."
남자는 안경을 닦으며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하였다. 청년은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남자가 안경을 다시 쓰며 말했다.
"요즘엔 우리처럼 몸에 손 안 댄 사람을 찾기가 힘들지. 잘 빠진데다 튼튼하고, 고장날 일 없는 새 물건을 제쳐두고, 불완전하고 쉽게 부서지며, 세월의 흐름이 그대로 느껴지는 중고품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하지만 그게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몸이라면 다르오. 다르고말구."
"알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교체될 수 있는 부품으로 취급되다 못해, 생명이나 정신마저도 부서지거나 망가지면 망설임 없이 교체할 수 있는 세상. 그렇기에 그런 모든 것들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세상.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시대의 진실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친구가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었나.
"사람이란 참 웃기지. 하나 밖에 없는 목숨, 애지중지하며 살던 때가 차라리 나았어. 지금 이 세상을 보시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겠소. 생명이나 정신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니, 그 가치를 느낄 수도 없고, 존재의 무게를 느끼지도 못하는 거야. 살아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니, 죽음을 택해서라도 살아 있다는 걸 느껴보려는 발버둥이란 말이오."
"이런 사회 기조를 바꿔 보려는 게 목적이라면, 차라리 신체 개조를 한 사람들도 같이 동참하는 게 좋지 않나요."
"그럼 내 한 가지 물어봅시다. 당신은 왜 개조하지 않았소?"
"그건..."
청년은 왜 자신이 신체 개조라는 길을 택하지 않았나 생각해보았다. 단순히 돈이 없어서? 그건 아니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는 옛 생각을 따르는 것도 아니었고, 몇몇 드문 사람들처럼, 체질적으로 타고난 기계 알레르기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도 아니었다. 몸 여기저기를 바꿔 대체한다는 게,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해체해 부분부분으로 나눠버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말처럼, 자기 자신은 0과 1로 이루어진 이진수,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단순한 무언가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설명할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지만,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순수한 인간의 정신, 삶의 모습이었다. 그게 비록 불합리적이고 고리타분한 발상이라고 하여도.
"기계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갔소.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의 존재 가치를 땅바닥에 떨어지게 만들었어. 그것도 모자라 멍청한 사람들은 그런 기계를 부러워해 스스로 몸을 기계로 바꾸고 있지. 우리같은 순수한 인류만이 기계를 몰아내고, 전통적인 삶의 가치를 되돌릴 수 있소."
"우리는 소수고, 그들은 절대 다수입니다. 세상의 흐름은 이미 기운 게 아닙니까."
"당신은 해 보지도 않은 싸움을 이미 졌다고 단정하고 있군."
남자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잔뜩 쌓여있던 상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 중 하나를 열고 속을 뒤적거리다, 길다락 작대기 같은 것을 끄집어냈다. 청년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크게 놀랐다. 남자가 끄집어낸 것은 그저 쇠로 된 작대기가 아닌 살상무기. 총이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숨 쉬는 것도 잊은 청년에게,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전국에서 봉기가 조만간 있을 거요. 무기들도 이렇게 구비해놨고."
"도대체 몇 명이나 이 일에 합류하기로 한 겁니까."
"모르겠소. 수천 명일수도 있고, 수만 명일수도 있지. 아무튼 쉽게 꺾이지는 않을 거요."
청년은 생명을 그렇게나 귀하게 여긴다던 이들이, 대량 살상의 상징인 총을 가지고 앞으로 끔찍한 일들을 벌일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래서야 오히려 기계들만도 못한 게 아닌가. 인간이란 이렇게나 폭력적인 동물이던가.
"그만두십시오. 이런 식의 싸움은 승산이 없어요."
"이미 늦었소.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고, 나는 말단에 불과하오. 나 같은 졸자가 멈출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왜 개죽음을 하려는 겁니까. 그런 총 몇 자루로 끝없이 몰려오는 기계들을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겁니까."
"인간이란, 죽음을 넘어서 무언가를 추구할 때 가장 인간다운 거요. 이런 미쳐돌아가는 세상에서 말라죽느니, 나는 죽더라도 인간답게 죽겠소."
청년은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이 단체의 존재를 알고 부풀었던 가슴이, 시커멓게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눈 앞의 남자와 같은 이들이 몇 명이나 더 있을까. 이들에게 휘말려 대체 얼마나 많은 생목숨이 사라져갈까.
"우리와 동참하시겠소? 아니면..."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총을 까딱거리며 청년에게 말을 던졌다. 청년은 못된 장난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그저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아 남자의 처분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앉아있는 청년을 보고 남자는 피식 웃으며 안경을 고쳐잡았다.
"동참하기 싫으면 안 해도 좋소. 젊은 생목숨을 억지로 내몰 수야 없는 노릇이지."
"...제가 지금 경찰이나 군부대에 달려가 연락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반발심에 내뱉은 말이었으나, 청년은 이내 후회했다. 남자가 들고 있는 총의 총구가 금방이라도 이쪽을 향해 불을 뿜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청년의 귀에 남자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이 있었소. 어렸을 적에 제 어미를 여의어서, 애지중지 키웠지. 덕분에 마음이 약해서 나한테 혼나기 일수였어. 사내자식이 뭐 그런 것도 못참느냐고 말이야. 어느 날 아들놈이 학교에 가고 나는 공장에 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소. 내달려서 병원에 갔더니, 내 아들이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는 뭔지도 모를 기계에 매달려서 누워있더군."
침울한 남자의 목소리에 청년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남자의 안경에 뿌연 습기가 낀 것 같았다.
"경찰을 통해 그 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소. 학교 식당에 먹을 걸 얻어먹으러 오는 떠돌이 개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서 잘 나간다는 놈 여럿이 이 개를 괴롭힌거야. 아니, 괴롭혔다는 말로 모자라지. 피 투성이가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깽깽대는 개를 발로 차고 있었다고 하니까.. 아무튼 그 광경을 보고 아들놈이 못 참고 막아선 거요."
"...."
"그런 내 아들을 놈들은 철저히 갖고 놀았소. 그 힘없는 개처럼. 놈들은 값비싼 개조 팔다리를 단 놈들이었어. 손을 으스러트리고, 다리를 부러트리고.. 아들이 숨을 쉬지 않게 되자, 그 놈들은 내 아들을 화단 구석에 버리고 갔소. 지나가던 학생 한 명이 신고를 했지. 그렇지만.. 너무 늦었어."
"...어떻게 됐습니까."
청년의 말에, 남자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읇조렸다.
"뇌사 판정을 받았소. 법정까지 갔지만 그 놈들, 돈 많은 놈들 아니랄까봐 빽이 좋더군. 신체 개조를 받은지 얼마 안 되어 조작능력이 떨어졌기에, 힘 조절이 안 되서 그런 사고가 벌어졌다는 식의 판결이었소. 기가 막혔지. 게다가 놈들 부모한테서 들은 말은 더 가관이었고."
"뭐라고.. 했는데요."
"'돈을 보내드릴테니, 아드님한테 쓰세요. 그까짓 두뇌 교체 얼마나 한다고..'. 내 아들은 전자두뇌 시술을 받지 않았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어. 하긴 이제는 전자두뇌 아닌 사람 찾기가 더 힘드니..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 했던 우리가 별종이었던 거요."
"....."
"그 돈으로 아들의 뇌를 전자두뇌로 교체해보려 했지만 의사 말로는 무리라고 했소. 뇌사 상태이기에 아예 데이터화가 불가능하다더군. 그리고.. 그렇게 아들을 떠나보냈소."
남자의 말을 들은 청년은 눈을 감았다. 친구에 이어, 누군가의 비극을 이렇게 가까이서 전해 듣게 되다니. 가슴이 갑갑했다. 이 남자의 슬픔와 증오를, 무슨 말로 돌릴 수 있단 말인가. 청년은 눈 앞의 남자가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 알고 있으면서도, 말릴 수 없었다. 모든 걸 체념한 청년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건물 밖을 향했다. 남자가 그런 청년의 등 뒤를 향해 소리쳤다.
"말해 보시오. 내가 이상한 거요, 아니면 이 세상이 이상한 거요? 사람의 생명이나 정신이, 돈 몇푼에 살 수 있는 기계로 대체되는 세상. 그렇기에 우리 인간의 가치가 그 돈 몇푼 값어치밖에 안 되는 세상. 바로 이 세상이 미친 거 아니오?"
여기서 가만히 있다간 남자의 슬픔과 증오가 자신까지 물들여 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안 오느니만 못했다는 생각과 함께, 청년은 남자의 북받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