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점점 식어만 가는 남자의 시신을 앞에 두고, 잠시나마 예를 표했다. 방법과 수단이 잘못되었지만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청년은 잠시 몸을 추스리다 일어나, 안드로이드 여자를 만났던 버스 정류장 쪽으로 몸을 옮겼다.
길을 걸어가다 보니, 도처에 시신이 보였다. 경찰로 보이는 제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누덕누덕 기워 입은 군복이나, 목 늘어난 운동복을 걸친 시신도 있었다. 도심 각지에서 인류해방전선에 소속된 사람들과 경찰 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청년은 피칠갑을 한 시신들을 볼 때마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으나, 애써 무시하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기계의 부속품인 듯한 전선과 쇳조각이 길가에 굴러다녔다. 청년이 발을 디딜 때마다 신발에 깨알처럼 작은 나사들이 버석거리며 밟혔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조심 땅을 봐 가며 움직이던 청년의 눈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툼한 무언가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청년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푸른 색의 정장을 걸친 여자의 인영이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던 것이다.
청년은 뭔가에 반쯤 홀린 듯이 그 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몸 여기저기에 총알 구멍으로 보이는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사이로 인간의 피와는 다른 파란 색의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양 쪽 팔은 억지로 뜯겨져 나간 듯 없어졌고, 뜯겨져 나간 피부 아래로 실처럼 가느다란 전선과 뭐가 뭔지도 모를 기계의 부속품들이 돌출되어 있었다. 청년은 망연자실하여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이제는 완전히 기계의 모습을 드러낸 안드로이드의 잔해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뒤집혀 있는 여인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 순간 여인의 고개가 돌아가며 길다란 검은 색 머리가 흩날렸다. 청년이 찾던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을 바라보고 대자로 드러누워 있는 여자의 잔해를 보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양쪽 눈 구멍은 시커멓게 비어 있고, 입을 쩍 벌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아직 그녀가 움직이고 있었을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었는지 예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청년은 그 얼굴을 계속 바라볼 자신이 없어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며 바삐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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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청년이 앞도 안 보이는 연기 속을 헤치고 다닐 때, 그가 애타게 찾던 밤색 커트 머리의 안드로이드 여자는 구두를 벗은 맨발로 힘겹게 몸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옆 구역의 안내용 안드로이드가 먼 발치에서 인간들에게 끔찍한 린치를 당하는 것을 보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두를 벗어던지고 몸을 피한 것이다. 원래 그녀는 단순히 안내 기능을 위한 지도만이 내장된 안드로이드 모델이었기에, 체력이나 움직임은 평범한 인간 여자의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그 지도 덕분에 사방이 보이지 않는 연기 속에서도 평소에 익혀 놨던 건물과 길을 통해서 쉽사리 몸을 피하였으나, 가려는 곳마다 도처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고, 자신의 담당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상태에서는 멀리 도망갈 수 조차 없었다. 그저 크게 원을 돌며 언제 잡힐 지 모를 죽음의 술래잡기를 하는 수밖에.
가쁜 숨 때문에 위아래로 움직이는 그녀의 왼쪽 가슴에는 얼마 전 청년이 선물했던 장미 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개인 사유물을 놔둘 공간이 없는 그녀로서는 그 꽃다발을 어딘가에 놔둘 수도, 들고 다닐 수도 없었다. 하여 나머지 꽃은 어떤 건물 앞에 있던 텅 빈 화단에 심어놓고, 그 중 가장 예쁜 꽃 한 송이만을 골라 외투 왼쪽 가슴의 주머니에 꽂고 다녔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장미꽃의 색이 바래고 시들어 바스라지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으나, 자신이 이 꽃을 꽂고 있는 모습을 나중에 청년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쉽게 버릴 수 없었다.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청년의 얼굴을 떠올리면 힘든 하루가 조금이나마 즐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청년을 생각하며 느리지만 열심히 움직이던 그녀의 발이 멈췄다. 뿌연 연기 사이로, 대략 20여 미터 정도 앞에서 후드티를 입고 총을 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려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느샌가, 각각 커다란 렌치와 쇠지렛대를 든 남자 두 명이 그녀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려고? 안내를 담당하는 안드로이드가 사람을 피하면 쓰나."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끝장이다. 그 단 한 마디만이 떠올랐다.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총을 멘 남자도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녀에게 총을 겨누며 말하였다.
"손 들고 무릎 꿇어. 더러운 기계 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 손을 든 채 덜덜거리는 양 무릎을 간신히 꿇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앞으로 당할 일을 생각하니, 두려움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그런 그녀를 남자들은 비웃으며 조롱했다.
"말 잘 듣는구만. 그래야지. 너희들은 그저 기계일 뿐이야. 우리가 죽으라면 죽는 그런 기계."
"재수 없는 년. 저 표정 좀 봐. 잘도 만들었군. 쇳덩이 주제에 사람 흉내를 내다니."
남자들의 조롱에도 그녀는 무력하게 무릎꿇고 있어야만 했다. 다리에 이어 이제는 손까지 떨려왔다. 렌치를 들고 있던 남자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 웃다가, 그녀의 가슴에 꽂혀있는 장미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 좀 보게. 이게 뭐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남자는 그녀의 가슴팍에서 잽싸게 장미를 낚아챘다. 그녀는 놀라서 고개를 들고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계절에 장미가 아무데서나 자랐을 리도 없고.. 이제 보니 도둑년이었군."
"그건 선물받은 물건이에요. 돌려주세요."
"얼씨구, 거짓말까지. 이거 완전히 별종이구만. 누가 너 같은 기계한테 꽃을 선물한단 말이야."
"정말이에요. 저희는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남자는 울상을 하며 꽃을 돌려달라고 외치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안드로이드가 지켜야 할 수칙 중 하나였다. 총을 든 남자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 짜증이 난 건지, 크게 외쳤다.
"이러다 여기서 제사 치르겠군. 빨리 처리하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자고."
"그래야지. 그래도 편하게 총알 한 두 발로 보낼 수야 있나. 우리가 당한 걸 생각해 봐."
렌치를 든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장미를 휙 내던지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땅에 떨어지는 장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샌가 반대편에서 쇠지렛대를 든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꽃에 한눈을 팔고 있던 그녀는 무기력하게 땅에 엎어졌다. 그런 그녀의 등을 남자가 지긋이 발로 밟았고, 렌치를 든 남자가 몸을 숙여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올렸다.
"듣자하니 너희들은 인간이랑 똑같다던데. 감정이나 감각도 인간과 동일하다고 말이야."
"그.. 그래요. 저희 4세대 모방형 모델은 인간의 것과 완벽히 동일한 감각기를..."
"그러면 이게 어떤 감각인지 말해 봐."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렌치로 그녀의 오른쪽 손등을 내리찍었다. 만들어진 이후로 평생 느껴본 적 없는 끔찍한 고통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시끄럽구만. 사람이 아니니 진짜인지 연기인지 알 수가 있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인간의 모든 것을 모방한 4세대 모방형 모델은, 체액과 반사적인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인간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비록 인간의 것과 성분은 다를지언정,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평범한 여자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와 똑같았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것 좀 보라구. 가짜 눈물이야. 역겹지 않나?"
허나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남자는 오히려 더 불쾌해 하는 것 같았다. 그녀를 억지로 밟아누르던 남자가 킥킥거리며 덧붙였다.
"아마 연기일 걸. 최신 모델은 원하는 대로 통각도 차단이 가능하다던데."
"그렇다면 실험해 봐야겠군."
그녀는 반문하고 싶었다. 그건 군용 안드로이드 모델에나 있는 기능이라고. 자기 같은 평범한 안드로이드는 보통 인간 여자와 별 다를 게 없다고. 그러나 고통으로 인해 벌어진 입은 그저 뻐끔거릴 뿐이었고, 그러는 사이 남자의 손에 들렸던 렌치가 다시 한 번 그녀의 손등을 내리찍었다. 또 다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꺽꺽거리며 몸을 파들거리는 그녀를 보고는 남자들이 저들끼리 중얼거렸다.
"시시하군. 역시 연기였던 모양이야. 소리조차 안 나오잖아."
"알 게 뭐야. 이번에는 머리 쪽으로 해 보라구."
그녀는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왜 안드로이드이고, 이런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지. 어째서 이런 무자비하고 이유없는 폭력에 대들 수조차 없는지. 눈물로 흐려진 눈 앞에, 며칠 전 만났던 청년이 준 장미꽃이 바닥에 뒹구는 게 보였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해줬던 사람. 순간 마음 속의 원망이 사그라들고,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의 렌치를 든 손이 크게 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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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렸던 렌치가 내려가려는 순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총을 겨누고 있던 남자가 뒤로 픽 쓰러졌다. 렌치를 든 남자가 놀라 넘어지고, 그녀를 발로 누르고 있던 쇠지렛대를 든 남자가 급히 달아났다. 연기 사이로 권총을 쥔 손이 나타났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넘어진 남자에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꺼져. 당신도 쏴 버리기 전에."
말이 끝나자마자, 넘어졌던 남자는 렌치를 챙길 틈도 없이 우왕좌왕하며 도망갔다. 잠시 뒤, 연기 사이로 총의 주인이 나타났다. 청년이었다. 뾰족하게 울려퍼진 그녀의 비명소리를 쫒아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급한 마음에 되는 대로 총을 쏘긴 했으나, 그로 인해 사람을 죽였다. 이제 그는 살인자가 된 것이었다.
그런 청년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안드로이드 여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청년에게 다가와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비비며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