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순간을 만드는 TRPG 현대미술,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전시
지난해에는 좋은 게임미술 전시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현대미술이라는 존재 자체가 대중들과 멀어졌기에, 또 으레 크게 부각되는 좋지 않은 사례들로 인해 널리 퍼져있는 현대미술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는 무관심을 딛고 이를 소개하는데에는 생각보다 큰 결심이 필요하고, 더 기사화에 적합한 케이스를 고르고 고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정작 전시를 본 후에도 기사화를 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상희, 2024)
이 공간의 분위기에 바로 몰입하고,
압도되는 것도 오직 오프라인 전시에서만 가능한 경험이 아닐까.
때문에 가장 먼저 생각났던 건 레거시 보드게임이었다. 퍼포먼스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이 정확하게 레거시 보드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게임판에 흔적을 쌓고, 엔딩을 맞이하는 과정을 떠올리게 했다. 마치 모두가 턴을 돌아가며 레거시 보드게임을 하듯이, 단지 그 턴이 한시간 반짜리일 뿐이었다.
가장 먼저 게임의 시놉시스를 듣는다. 무대는 어느 쇠락한 한적한 시골 소도시이다. 이 마을은 플레이어의 ‘고향’ 으로 플레이어는 각자의 어떠한 사연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톨게이트는 폐쇄되고 도시는 격리되었다. 그 이유는 흰개미떼의 습격으로 도시가 황폐화 되고 사람들이 실종되었기 때문. 안개가 자욱한 무너져가는 도시로 플레이어는 저마다의 이유로 들어선다.
캐릭터 시트는 생각해보면 애초에 나의 답을 적는 공간이다.
전직 소방관이라는 배경을 받은 기자는 대략 내 또래의 낙향자로 설정했다. 사고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일거리나 얻을 겸 친구를 찾으러 간다는 식으로. 그 말을 듣고 작가는 지도 위에서 목표 지점을 설정했고, 수많은 스티커가 붙은 지역에서 시작해 도시 복판을 통과하여 아무 것도 붙여져있지 않고 오직 지형만 그려져있는, 즉 아무도 이전에 가지 않고 플레이하지 못했던 지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 공간에서 계속 대화하고, 서로 질문을 주고 받으며 게임은 진행된다.
그 방식은 TPRG와 거의 같다. 단지 조금 덜 체계화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TRPG 플레이어라면 알다시피 TRPG 에서의 꽃은 체계화 만큼이나 그 안에서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는 수많은 자유로운 발화와 방향성이다. 그런 면에서 이 퍼포먼스는 충분히 TRPG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퍼포먼스에 맞도록 훨씬 가볍게 개조된 느낌을 준다.
아무 것도 없이 오직 점으로 된 지형만 있던 지도가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경험이 축적되며 채워진다.
처음에는 커다란 별 표시 모양이 무엇인지 몰랐다. 여기에 접근하자 사람 형상을 했지만 무언가 신비하고 영체적인 모습을 하고 있고,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살펴본다 라는 선택을 하자, 작가=마스터는 지난 플레이어들의 캐릭터 시트 중에서 하나를 들고온다. 그렇다. 이미 이전에 플레이한 플레이어들이 죽은 흔적이고, 그들의 시체가 일종의 영체처럼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각각의 큰 별에는 모두 유언이 쓰여져 있었다.
다른 사람의 캐릭터 시트를 받아드는 순간이, 이거 '멀티플레이' 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장면
소울 시리즈의 영체 같은 느낌도 조금 났다.
주사위 굴림의 값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플레이어는 리롤 기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 리롤의 대가는 캐릭터 시트에 적힌 개인적인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다. “당신에게 고향이란 무엇인가요?”, “고향에 두고 온 것은 무엇인가요?” 짧지만 굉장히 고민을 하게 되는 질문이다. 결국, 이 퍼포먼스는 내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한 것이다. 내 생각을 꽁꽁 싸매고 싶다면, 마스터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다면 나쁜 주사위값을 감내하면 된다. 하지만 한 번쯤 고민하여 결론을 내리고 살며시 누군가에게는 털어놓아도 좋을 것 같다면, 주사위를 한 번 더 굴릴 수 있다.
수많은 질문들, 결국 모든 현대미술은 '좋은 질문을 던지기' 다.
기자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쭉 서울에 살았고 지금도 서울에 살고 있지만, 고향을 묻는 질문에 여지 없이 바로 어릴적부터 30년 가까이 살았던 동네를 떠올릴 만큼 확실히 어느 공간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누군가에게나 보편적인 감정이 아닌가.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 기호로 가득한 지도를 보고 실제 모습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 고향의 모습을 대입하게 된다.
그래서 크게 돌아보면, 게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작가=마스터가 계속해서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나는 그에 대답하는, 그러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겪는 셈이다. 항상 느끼는게 사람들은 직접 말로 내뱉기 전 까지는 어떤 생각을 확실하게 하지 못한다는 생각인데, 작가는 계속해서 나의 발화를 유도함으로서 동시에 내 생각을 유도한다. 마스터는 계속 나에게 질문을 하면서 동시에 좋은 청자가 되어준다.
게임 속에 비유적으로 들어간 이런저런 사회문제도 좋지만, 이 퍼포먼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평소에 정리하지 않았던, 또는 누가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기보다는 망설이거나 얼버무리게 되는 개인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한껏 진지하게 대면할 기회가 되어준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쉬이 말하지 않는, 또는 아예 생각하거나 말할 기회가 없었던 이야기들이다.
이 갯벌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탈출 소감을 좀 더 멋있는걸 적을걸 그랬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장소가 오브젝트와 결과로 채워졌다.
게임이 끝나면 전시장에 불이 켜진다. 처음에 어둠에 가려져 있던 벽면의 보드들은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의 기록이다. 그들의 유언, 탈출 소감, 캐릭터 시트, 그리고 여러 기록들. 웃긴 것도 있었고, 사뭇 진지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플레이어의 최후는 퍼포먼스 인스타그램에 기록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전시가 그저 개인의 경험, 퍼포먼스를 넘어서서 하나의 함축된 미술 작품이 된다.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각각의 아이콘과 플레이 흔적들로 있었던 일을 파악하고, 그 뒤의 자료들도 살펴보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
기자가 남긴,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 는 “적당히 연민해서” 였다. 비록 도시에 고립된 부상 낙오병을 구하기 위해 탈출하기로 했지만, 그 과정에서 조수를 잃었고, 중간에 마주친 할머니, 아이, 그리고 박사는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이 퍼포먼스가 완벽하게 밸런싱 된, 게임 플레이로서의 각별한 재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그저 재미가 아닌 다른 결과물을 준다. 앞서 말한 리롤 기회를 위한 질문은 그를 위한 노골적인 수단 중 하나다. 게임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프로세스이고, 그 프로세스를 조금 뒤틀고 몇가지를 첨가하여 나에 대한 질문지가 되어준다. 어쩌면 하나의 로흐샤흐 테스트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개인의 경험과 생각이 레거시 보드 게임과 TRPG를 적절히 섞은 방식을 통해 하나의 지도 위에 모여질 때, 뭔가 흥미로운 결과물이 된다. 이 게임의, 이 퍼포먼스의 지도는 그저 기호보다 더 많은걸 함축하고 있고, 그 배후에는 수많은 시나리오와 개인들의 성향, 생각이 숨겨진 셈이다.
인스타그램에 모든 이의 플레이 결과가 기록된다.
또 하나 반가웠던 점은 정말로 게임을 깊이 이해하는 미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게임미술이었다는 점이다. 미술 퍼포먼스이고, 한정된 시간 동안 진행되어야 함에도 비록 완벽한 룰북과 상호작용 시스템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게임으로서의 구조를 갖추고, 여러가지 플레이의 근거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게임을 할 때 느끼는 감각을 토대로 개인적인 사유에 접근하도록 하는 그 절묘함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게임을 단순히 소재로 하는게 아니라 게임의 형태까지 빌려 만들어지는 전시는 종합적으로 뛰어나기 무척 어렵다. 실제로 그런 경우에는 실망한 작품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게임으로서도, 미술작품으로서도 흥미로웠다.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나는 왜 고향을 떠나왔는가? 나는 고향에 무엇을 두고 왔고,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전시부터 며칠동안 기자를 멤돌았다. 어느 순간 마주친 내 진심에 스스로가 당황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런 의미의 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현대미술의 중요한 가치가 아닌가 하고 늘 생각해왔다.
어쩌면 수많은 이들의 답안지, 그리고 고민의 흔적.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는 며칠 간의 지배적인 경험으로 남을 만큼, 의미 있었다. 정말이지 꼭 디지털 아카이빙이 이루어져서 모든 다른 이들의 기록을 한 번쯤 살펴보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게이머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예술적인 게임과 닮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게임계와 미술계는 서로를 향해서 지속적인 방향성을 가져왔다. 게임계에서 출발한 흐름은 흔히 예술적인 게임들, 이를테면 ‘스탠리 패러블’ 같은 부류로 진화해왔다. 미술계도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의미있는 진전이 있어왔지만, 불만족스러운 경우도 많았다. 진정으로 게임의 방식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고집을 부리거나, 또는 너무 게임의 방식을 받아들여서 ‘게임으로서의 미술, 미술로서의 게임’ 이 아닌 그저 못만든 게임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사이사이 좋은 작품들도 있었지만, 게이머로서의 입장과 현대미술 애호가로서의 입장을 모두 가진 입장에서는 완전하다고 생각할 사례가 많지 않은게 사실이었다.
때문에, 모든 전시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기사를 올리게 된 이유도 퍼포먼스에 참여할 누군가의 경험을 전혀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컸다. 좁은 지하 공간에 마련된 전시이지만, 기자가 느꼈던 만족감, 그리고 미술로서의 의미는 어느 대형 미술관에 있었던 작품들보다도 높았던 것 같다. 또 100% 예약제로 운영되는 퍼포먼스이기에 이미 모든 슬롯이 차버려 더 많은 플레이어를 모집할 수 없기 때문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은, 오프라인 미술 전시라는 한계상 경험의 전달이 어렵고 오직 개인의 체험으로서만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디지털 게임처럼 광범위하게 퍼블리싱 될 수 없고, 아무리 열심히 글을 적고 사진을 전하더라도 온전하게 그 경험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우면서도, 바로 그게 아직도 현대미술이 온전하게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디지털 게임과는 다른, 그런 실존적인 경험이 녹아있기 마련이니까.
때문에 불완전하게나마 이 경험을 꼭 널리 공유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고, 그게 이 기사를 만들게 됐다. 이런게 있다고, 이런 경험을 꼭 해보셨으면 한다고. 한 번 쯤은, 이런 전시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미술관에 열 번을 가서 아홉 번 실망하고 한 번 의미를 얻더라도, 그 한 번의 의미가 정말 깊게 깊게 기억 속에 남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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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규 기자 sawual@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