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스타] 출시를 한 달 앞두고 기대가 우려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체험
약 한 달 뒤면 그토록 기다려온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 정식 출시된다. 舊 소프트맥스는 주로 겨울방학 직전인 12월 중순에 ‘창세기전’을 발매했는데, 라인게임즈가 의도했는지 몰라도 전통 아닌 전통을 지킨 셈이다. 본작을 향한 높은 기대감을 방증하듯 어제(16일) 체험판 배포와 함께 시작된 한정판 예약은 결코 낮지 않은 가격임에도 곧바로 조기 마감됐다. 일반 패키지 역시 판매 호조를 보이며 사전 구매 특전이 빠르게 소진되는 중이라고 한다.
소싯적 ‘창세기전’을 즐긴 팬이라면 족히 서른이 넘었을 테니 이처럼 뜨거운 화력도 무리가 아니다. 개중에 최근작 ‘창세기전 3: 파트 2’로부터 셈하여도 무려 23년이 흘렀다. 어디 그뿐이랴. 라인게임즈 ‘창세기전’ IP 인수 및 리메이크 발표로부터 7년, 첫 영상 공개로부터 3년, 짧게나마 시연이 가능했던 LPG 행사로부터 2년이 흘렀다. ‘창세기전’ 삼부작이 완결되기까지 기간(1995~2000)보다 리메이크 발표 후 현재까지 기간(2016~2023)이 더 길 정도다.
오랜 기다림 끝에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 내달 22일 출시된다
한정판 예약 판매가 약 1시간 만에 조기 마감되는 화력을 보여줬다
프로젝트가 이만치 장기화되면 아무래도 갖은 부침을 겪기 마련이다. 도중에 개발 엔진이 유니티서 언리얼로, 발매 플랫폼이 닌텐도 3DS서 스위치로 변경되는 등 멀리서 봐도 우여곡절이 심했다. 국내 게임사로선 콘솔 타이틀 자체가 쉽지 않은 도전인데, 마치 맹인의 지팡이가 창졸간 효자손이 되었다 우산이 되었다 한 꼴이나 다름없다. 그걸로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어찌어찌 정식 출시라는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한 명의 팬으로서 벅찬 감흥도 느낀다.
물론 ‘창세기전’ 리메이크를 응원하는 마음과 별개로 그만한 가치가 없는 제품에 선뜻 지갑을 열 소비자는 드물다. 팬이야 선뜻 그럴 수 있겠으나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국내를 넘어 해외서 원작에 대해 잘 모르는 수많은 게이머와 마주하려는 작품이다. 따라서 정식 출시를 한 달여 앞두고 배포된 금번 체험판이 따끔하고 쓰라리되 유익한 불주사가 되길 바란다. 만약 당장 소유한 스위치가 없다면 지스타 2023 에픽게임즈 부스에서도 시연 가능하다.
리메이크 발표로부터 7년, LPG 행사에서 시연하고도 2년이 흘렀다
출시를 한 달 앞두고 배포된 체험판, 과연 만족할 만한 완성도일까
근 30년만에 다시 마주하는 G.S와 이올린
체험판 분량은 프롤로그와 챕터 1 ‘회색의 하이에나’, 챕터 2 ‘왕국의 유산’까지다. 안타리아 패권을 거머쥔 게이시르 제국은 재상 베라딘의 지시에 따라 대륙 각지 고대 유적을 발굴하는데, 도가 지나쳐 중립국인 비프로스트 공국령을 침입하기에 이른다. 그로 인해 흉흉한 소문이 돌고 몇몇 레인저와 발키리도 소식이 끊기자 모젤 공왕은 큰 상심에 빠지고, 최측근인 스트라이더 녹스에게 특별히 조사를 부탁한다. 이에 챕터 1 주인공인 G.S가 동행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월드맵이 일종의 인터미션처럼 쓰인다. 여기서 현재 파티에 소속된 유닛과 아이템을 점검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진입하면 이벤트신 혹은 전투가 펼쳐진다. 이를 완료하고 월드맵에 복귀, 또 그다음 내용을 진행하길 반복하는 것. 세계관과 인물 설정이 담긴 ‘안타리아의 서’와 상점도 월드맵서 방문할 수 있다. 군담(軍淡)물답게 ‘전황 모드’라는 기능도 존재하는데, 색깔 구분을 통해 각 세력의 범위를 보여준다.
원작의 팬이라면 가슴 한 켠이 뭉클할 수밖에 없는 유명한 첫 장면
원작과 마찬가지로 월드맵이 일종의 인터미션과 같은 기능을 한다
인터미션서 확인 가능한 정보로는 체력, 영력, 기력 수치와 공격력, 마법력 등 능력치. 가드, 반격, 치명타 등 확률치. 그리고 보유 특성과 스킬이 있다. 특성은 다시금 기본 특성과 부가 특성으로 나뉘며 캐릭터에 따라 고유 효과를 갖기도 한다. 일례로 복수의 여신이라 불리는 이올린 팬드래건은 기본 특성 ‘네메시스: 다크아머 진영을 공격할 때 피해량, 치명타 확률 및 피해가 소량 증가’와 부가 특성 ‘얼음 가시: 빙결 상태의 적에게 물리 피해 증가’를 지녔다.
이처럼 월드맵이 사실상 인터미션이지만 몇 가지 제한 사항은 존재한다. 유닛 정보 확인 및 장비 교체는 되는데 회복은 안되는 식이다.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서 물약 섭취는 오직 전투 도중에 한 턴을 소모해야만 가능하다. 다행히 챕터 1의 경우 G.S와 스트라이더, 사라가 모두 굉장히 강력하여 무작정 돌파해도 별 문제가 안된다. 챕터 2는 파티 인원 제한보다 성기사단 머릿수가 더 많으므로 피해가 누적된 유닛은 적절히 교체하며 진행하길 추천한다.
먼저 유닛과 장비를 점검하고 각 스테이지에 맞춰 파티를 편성하자
이올린이 같은 주역 캐릭터는 설정을 반영한 고유한 특성이 존재
충실한 원작 재현 혹은 고민 없는 리메이크
스테이지 진입 시 곧장 이벤트신과 전투가 이어지기도 하지만 규모가 큰 전장이나 동굴, 숲에선 마치 쿼터뷰 액션 게임처럼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다. 인터뷰 당시 레그 스튜디오 이세민 디렉터가 ‘파이어 엠블렘’에 대해 언급했는데, 실제로 본작의 월드맵 → 스테이지 구조는 ‘파이어 엠블렘 에코즈: 또 하나의 영웅왕’을 연상케 한다. 스테이지서 조우하는 인카운트 심볼에 공격을 가하거나 당함으로써 전투 개시와 함께 유불리가 발생하는 점도 퍽 닮았다.
스테이지 탐색에서의 조작은 X 대시, A 공격 및 상호작용, B 회피 혹은 방어다. 파티를 대표하여 화면에 표시되는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공격 방식과 회피인지, 방어인지가 갈린다. 예를 들어 육중한 방패를 든 듀란은 당연히 전자에 해당한다. 공격 역시 찌르기, 베기, 원거리로 조금씩 성능차가 난다. 별거 아닌 듯 보여도 선제공격에 의한 피해 누적과 차례 획득이 갈수록 무시 못할 차이를 낳는다. 계속 선공을 얻어맞다간 아차! 싶은 사이에 파티 전멸이다.
마치 쿼터뷰 액션 게임처럼 스테이지를 직접 돌아다닐 수 있다
심볼 인카운트 시 선제공격을 하느냐 당하느냐로 유불리가 갈린다
심볼 인카운트 후 턴제 전투는 좋게 평하자면 SRPG로서 정통파, 나쁘게 말하면 구년묵이에 가깝다. 방금까지 리얼타임으로 돌아다녔던 스테이지가 격자로 구분되고 적과 아군 유닛이 소환된다. 자기 차례에 어떤 유닛부터 움직이는가 제한은 없다. 각기 다른 사거리 및 범위의 스킬들로 적과 교전하고 인접한 아군이 원호 방어 혹은 공격에 가세한다. 행동 종료 시 방향도 선택한다. ZOC(Zone of Control)는 없지만 유닛간 역학 관계가 전술의 핵심이다.
반면 아쉽게도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만의 차별화된 요소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유닛간 역학 관계, 체력과 영력 등 자원 관리, 그리고 기력이 모였을 때 화려한 연출과 함께 적들을 쓸어버리는 전매특허 초필살기까지. 1996년 원작을 복각할 뿐이라면 그걸로 괜찮을 터다. 하지만 SRPG도 나름대로 발전을 모색해온 장르인 만큼 이제와 30년 전 게임성을 답습하는 걸 오서독스라 포장해주긴 어렵다. 시대 변화에 걸맞은 발전상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SRPG로서 게임성은 좋게 말하면 정통파, 나쁘게 말하면 낡았다
스킬 범위가 제각기 다르고 원호 방어, 공격 등 역학 관계가 핵심
체험판서 불거진 기술적 문제, 기획적 한계
이 시점에 체험판 배포는 역시 판촉이 목적일 텐데, 물론 미려한 일러스트나 보이스 액팅처럼 기대에 부응하는 바도 적잖으나 그 이상으로 우려가 커지는 게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낡은 게임성 외에도 LPG 시연보다 확연히 저하된 그래픽, 다소 아쉬운 편의성 등이 거슬린다. 평범한 국산 SRPG의 콘솔 도전! 정도였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응원했겠으나 이건 ‘창세기전 2’ 리메이크다. 당장은 치솟은 기대치와 실제 완성도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금번 체험판의 문제는 기술과 기획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기술적인 문제는 빈말로도 그래픽이 뛰어나다 평하기 어렵다는 것. 제아무리 그래픽과 게임성은 별개라지만 최소한 꺼려지는 수준은 넘어야 하는데, 작금의 결과물은 그 경계선에 아슬히 걸친다. G.S가 기간테스 산맥 산등성이서 저 멀리 비프로스트 공국을 바라보는, 한껏 인상적이어야 할 도입부에 ‘그래픽이 좀…’하는 실망감이 먼저 고개를 치켜든다. 첫인상부터 엇나가는 셈이다.
아쉽지만 빈말로도 2023년 기대작처럼 느껴지는 그래픽은 아니다
공식 스크린샷(좌)과 체험판(우)의 그래픽 퀄리티가 상당히 다르다
프레임레이트라도 부드럽게 유지된다면 나름 괜찮겠으나 그조차 여의치 않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30fps서 버티지만 초필살기 같이 연출 규모가 커질 때마다 고비가 찾아온다. 스위치 메모리 성능이 개발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건 사실이나 어쨌든 소비자는 이미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과 ‘파이어 엠블렘: 풍화설월’을 경험했다. 현실적인 어려움과 별개로 상용 제품으로 판매되는 이상 마냥 도전 자체가 의의라며 싸고 돌 수 없다는 거다.
다음으로 기획적인 문제는 본작이 지나치게 소극적인 리메이크라는 것. 실제로 체험판을 플레이하며 불편하거나 어색하다 느낀 요소는 대부분 1996년 원작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국산 게임의 신화라고까지 불리는 ‘창세기전’에 함부로 수정을 가하기 부담스러운 마음은 이해하나 2023년작 SRPG로서 쇄신할 건 했어야 맞다. 이동키처럼 누구나 알 법한 건 짚어주면서 전투를 풀어가는데 진짜 중요한 정보는 도통 파악하기 어려운 점도 미묘하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30fps를 지키지만 초필살기가 발동하면 곧장…
몇몇 시스템은 너무 구년묵이라 편의성 측면에서 개선이 필요하다
모쪼록 제품판에선 달라진 모습 보여주길
체험판 덕분에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 어떠한 형태와 구성으로 만들어졌는지 미리 살펴볼 기회가 닿은 건 긍정적이다. 정식 출시까지 불과 한 달여 앞둔 시점에서 배포한 게 아니었다면 더욱 좋았을 터다. 어차피 일정이 수차례 지연된 마당에 뭇 게이머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접할 자리를 더 많이, 자주 만들어야 했다. 오랫동안 개발에만 천착하다 보면 객관적인 시야가 흐려지기 쉽다. 그것도 아니라면 문제를 알면서 꽁꽁 숨겼다는 것 밖에 안된다.
다만 소극적인 기획의 한계는 어쩔 수 없더라도 기술적인 문제는 벌써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금번 체험판은 올해 초 빌드로 제작했다는데, 지금이 11월이니 최소한 반 년 이상 업데이트가 누락된 셈이다. 최적화는 대표적인 후반 작업이므로 반 년이란 기간이 퍼포먼스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라인게임즈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현격히 떨어지는 빌드를 외부에 공개할까 싶지만. 아직은 제품판을 기대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는 거다.
체험판은 올해 초 빌드 기반이다. 반 년 이상 업데이트가 누락된 셈
최적화는 후반 작업이므로, 제품판의 퍼포먼스는 더 준수할 터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고전 명작 ‘창세기전 2’의 장중한 서사와 매력적인 인물들을 현세대기로 옮겨온다는 명분은 아직 유효하다. 6년 전 ‘창세기전 4’가 서비스 종료 수순을 밞을 때 유일하게 호평 받았던 이경진 IP 디렉터의 원화, 아직 초반부밖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잘 윤색된 듯한 대사, 충실히 수록된 성우 더빙까지. 설령 최신예 SRPG로서 애매한 결과물이 나오더라도 최소한 이올린과 흑태자의 이야기를 다시금 감상할 수는 있을 터다.
게임인 이상 게임으로서 완성도와 가치를 평가받아야 함은 물론이다. 오는 12월 22일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 정식 출시되면 본지에서도 당연히 리뷰를 발행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작품의 최종적인 완성도에 대해 전망하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앞서 이세민 디렉터가 전체 분량이 80시간에 달한다고 호언한 만큼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체험판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제 앞으로 한 달여, 정식 출시를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주면 어떨까.
'창세기전' 부활에 진심처럼 보였던 그들, 정말로 기망이었던 걸까
어느덧 25주년은 훌쩍 지났지만, 아직은 정식 출시를 기다려 본다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