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에 몰래 짱박혀 농땡이를 부리던 나는 우연히 한 서류철을 발견했지. 서류 같은 거랑은 안 친한 나지만 그 서류 겉에는 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제목이 붙어있었지 뭐야.
‘T-75 워울프에 대한 보고서’
나에 대한 보고서였어.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를 위시한 T-75 워울프에 대한 보고서.
사실 내가 읽으면 안 되는 보고서였만…… 뭐 그런 말도 있잖아.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뭐, 나는 고양이라기보다는 늑대지만. 호기심이라는 놈이 그만큼 무섭다는 거지.
나는 참지 못하고……아니 애시당초 참지도 않았지만서도 어쨌든 읽었어.
오래 걸리지는 않았어.
어쨌든 그 보고서를 전부 읽은 후 나는 내가 있는 장소도 잊고 담배를 물었어.
다행히 불을 붙이기 전에 화재감시기의 존재를 떠올려서 불을 당기지는 않았지만, 담배를 태우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어서 나는 농땡이를 부리던 것도 잊고 자료실을 나섰어.
밖에서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지.
보고서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전과는 괜찮지만 군인으로서는 실격.’
보고서를 읽은 나는 나답지 않게 충격을 받았어.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뭉개졌다기보다는…….
만약에 특정한 직업을 가진 자가 그 직업에 적성이 안 맞으면 어떻게 될까?
인간님이라면 그냥 전역하고 다른 직업을 찾으면 되겠지. 자존심은 조금 상하겠지만.
하지만 나는 바이오로이드야. 처음부터 특정한 용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나는 군인으로 만들어졌고 그런 내가 군인 실격이라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래. 폐기 처분.
보고서에 따르면 나뿐만이 아니라 내 자매들 전부 다.
불합리하다는 생각, 억울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이런저런 고민을 해봤지.
그리고 담배가 필터까지 타들어 갈 정도로 고민한 후 나는 담배꽁초와 고민을 집어던졌지.
나의 결론은 간단했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난데. 그 문제조차도 나의 일부인데. 끙끙 앓아봤자 고칠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기로 했지.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도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말이지.
브라우니들이 대책 없이 긍정적이라고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거든.
자랑은 아니지만 말이야.
* * *
보고서를 읽고 난 이후의 내 삶은 변하는 게 없었어. 말했잖아. 알게 뭐냐고. 그냥 이렇게 살다 가겠다고.
명령이 내려와도 기분 내키는 데로 하고, 싸우라고 하면 열심히 싸우고, 먼저 죽어버린 동료들을 그리워하고, 뭐. 스펙타클하지만 판에 박힌 하루하루를 보냈지.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운명을 만났어.
“메멘토 모리라구, 친구.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게.”
“하하. 내가 어떻게 죽음을 잊고 살겠나. 내 생명은 언제나 사신의 손아귀 위에 올라가 있는데. 지금 이 순간조차 말이야. 죽음과 마주하고 있기에 현실을 즐겨야하지 않겠나. 카르페 디엠! 지금을 살게!”
“자네는 죽음을 곁에 두고 있는 자네의 삶을 사랑하는군.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그것도 좋지. 신은 우리를 사랑해주지 않으니 말일세.”
바로 다음 날 서로를 죽여야 하는 두 남자는 마주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서로의 목숨을 겨눠야 하는 권총을 옆에 두고서도 두 사람은 웃고 농담하고 떠들었다.
그렇게 밤새워 마시고 웃고 떠들던 두 남자는 날이 밝자 각자의 무기를 들고 술집을 나섰다.
그리고 무신론자가 된 신부와 낙천적인 시한부 결투사는 결투를 벌이는데.
……이 이상은 스포일러이니 직접 영화를 보도록.
그래. 난 영화 하나를 보게 된 거야. 그리고 난 그 영화를 보고 전율했지. 그리고 며칠 동안 그 영화를 보고 보고 계속 봤지. 아마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해서 그 영화를 봤을 거야.
전투를 준비하던 중. 나는 문득 내 소총의 무게를 알아차렸어. 묵직했지. 그 무게는 내 삶의 구속구 같았어. 내 삶의 방향을 억지로 고정하는 족쇄였어.
그래서 버렸어. 대신에 병기고에서 권총 두 자루를 꺼내 들고 전장으로 나섰지.
즉결 처형감이었지만 알게 뭐야.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그리고 날 본 칸 대장은 그냥 씩 웃고 말더라고. 역시 칸 대장이야. 칸 대장이 남자였으면 당장 안아버렸을 거야.
어쨌든 그날 전투는 치열했어. 외줄을 타면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처럼 까딱했다간 그대로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아슬아슬했지. 하지만 나는 생사의 경계에서 해방감을 느꼈지.
소총과 권총의 무게 차만큼의 해방감이 아니었어.
내가 향해야 할 삶의 방향을 깨닫고, 있는 힘껏 내달렸기에 느낄 수 있는 해방감. 쭉 뻗은 고속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릴 때 느낄 수 있는 해방감이었어.
정체되어 있던 내 삶이 격렬하게 흐르기 시작한 거지.
어쨌든 그 전투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괜찮게 끝났어. 단순한 지연전을 섬멸전으로 바꿔버렸다나?
그러나 제식소총을 함부로 버린 보병을 높으신 분들이 좋게 볼 리 없잖아? 나는 처벌위원회에 호출되었지.
높으신 분들은 나를 처분하려고 처음부터 마음먹었던 것 같았어. 이번 전투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내 태도를 들먹였던 것을 보면 말이야.
그러나 소수의 높으신 분들은 이번 나의 활약을 눈여겨 보더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칸 대장이 적극적으로 나를 변호해줬어. 아니, 단순히 변호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단순 전투용 바이오로이드 T-4 케시크였던 자신이 신속의 칸이라는 지휘용 바이오로이드로 거듭났던 사례를 들면서 나를 재설계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
자칫했다간 칸 대장도 바이오로이드 주제에 인간님에게 반박하냐며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어.
그러나 결과는 해피엔딩.
나와 칸 대장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어. 그뿐만이 아니라 칸 대장의 주장대로 재설계를 하기로 했지. 나뿐만이 아니라 나와 같은 T-75 워울프 전부다.
이 위기를 모두 넘긴 나는 칸 대장을 품고 싶은 욕망이 극대화되더라고. 하지만 알다시피 나와 칸 대장 둘 다 여자잖아. 그럴 수는 없었지.
그냥 결과가 나온 날 저녁에 내가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술을 들고 칸 대장을 찾아가서 술을 마셨지. 그 뿐이야.
아니, 아니지. 약간 특별한 사건이 있기는 했어.
술을 마시면서 내 운명인 영화를 함께 봤어. 칸 대장은 나만큼 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칸 대장에게 부탁해서 외부와 연결이 되는 지휘관용 단말기로 내 운명을 바꿔준 영화의 평을 찾아봤지. 찾아보지 말았어야 했어.
겉멋만 든 B급이라는 평이 많더라고.
그 평가를 본 나는 군인 실격이라는 나에 대한 보고서를 봤을 때보다 더 좌절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지.
다른 사람들의 평가 따위 알게뭐야. 내가 좋게 보면 됐지.
* * *
내 삶은 격렬하게 흘러갔지.
사막, 평지, 도시, 설원, 해변, 산악, 임야에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싸웠어. 수많은 전우를 만났고, 수많은 전우를 잃었지. 적? 적은 전부 죽일 놈들이고.
그렇게 40년을 살았어.
딱히 한 것은 없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버티면 그래도 이것저것 생기는 것은 있더라고.
“상사, 또 그 영화 보나?”
내 개인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을 때 칸 대장이 찾아왔어.
“알잖아, 대장. 나한테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신도가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계급, 개인실, 개인용품, 전우. 내 40년의 결과물.
나는 영화를 정지시키고 물었지.
“그런데 무슨 일이지?”
“전투다.”
칸 대장은 짧게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를 했지.
방을 나서기 전 나는 스크린을 보았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 직전이었지.
그러나 볼 시간은 없었어. 시간은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자원이니 말이야.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그래도 아쉬움은 있어서 기도문을 외우듯이 그 세 문구를 중얼거리며 나는 전장에 나섰어.
* * *
끝없는 철충의 무리가 우리를 둘러쌌어. 영락없이 죽을 판이었지. 하지만 우리 칸 대장은 그 속에서도 퇴로를 찾아내더라고. 대단하지, 우리 대장?
칸 대장의 지휘 아래에 우리 자매들은 열심히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어.
안 쪽팔리냐고?
쪽팔릴게 뭐 있어? 살아서 패배하면 살아서 승리할 날도 오겠지.
하지만 말이야. 삶이란 살고 싶다고 살아남는 것은 아니더라고.
“대장!”
최후미에서 나와 함께 자매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던 칸 대장이 철충의 포격에 휘말렸어.
내가 다급하게 대장을 찾으니 다행히 대장은 크게 다치지는 않았더라고.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
대장의 기동 유닛이 박살 난 거야.
기동성을 생명으로 하는 우리에게는 생명이 박살난 거나 마찬가지였지. 더군다나 지금처럼 후퇴하는 상황이라면 말이야.
“상사. 명령이다. 먼저 가라.”
상황을 확인한 칸 대장은 주저없이, 결연하게 명령을 내리더라고.
하지만 알잖아.
“하하하! 대장. 너무 어려운 명령은 내리지 말아줘. 나는 멍청해서 못 알아듣는다고.”
나는 군인 실격인걸. 공식적인 보고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몸이란 말이지.
나는 내 기동 유닛을 벗어 칸 대장 앞에 내려놓았어. 그리고 맨발로 철충의 무리를 향해 걸어갔지.
“워울프!”
칸 대장이 불렀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지.
“대장. 오래 묵은 원한을 이제야 갚을 것 같네.”
“뭐?”
“대장이 억지로 날 살렸잖아. 그러니 나도 억지로 대장을 살리려고.”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워울프 모두를 살렸지.
“워울프 331!”
칸 대장이 다시 나를 불렀어.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돌아보지 않았어.
“대장! 하나만 부탁할게!”
“…….”
“나 영화 보다가 나왔거든! 그거 나대신 끝까지 봐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봐준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일까. 그러면 소원이 없지.
“……알겠다.”
대장은 그렇게 말했어. 조금 더 기다리니 기동 유닛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어. 그것은 점점 더 작아지다가 결국엔 들리지 않게 되었어.
나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웃고 말았지 뭐야.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어.
40년. 참 오래도 살아남았어.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라면 몰라도 나 같은 인해전술용 저가 모델의 평균 생존시간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시간이지. 일종의 덤 같은 시간이랄까.
그것도 이제는 끝인가 봐.
하지만 말이야.
“메멘토 모리.”
내 삶은 언제나 죽음과 인접해 있었어.
“카르페 디엠.”
그러했기에 나는 지금을 살아야 함을 알았지.
“아모르 파티.”
그런 운명을 나는 사랑했어.
운명이란 삶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거야.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모든 시간이 운명이겠지.
삶만을 취하고 죽음을 버리는 것은 동전에서 한 면만을 취하겠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멍청한 소리란 말이야.
비록 만들어진 삶이라고 하더라도 내 운명은 나의 것이었고, 죽음 또한 나의 것이겠지.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내가 선택해서 맞이하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이겠어?
철충이 다가오고 있었어. 내 삶의 엔딩크레딧을 올릴 시간이란 말이지.
나는 담배꽁초를 내던지며 외쳤어.
“인생 끝내주네!”
* * *
주인이 없는 방에 들어선다. 주인의 방탕했던 삶을 나타내듯 정돈되지 않은 방이다. 그러나 그 방탕한 모습이 주인의 흔적이기에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온다.
영상 재생 플레이어다.
플레이어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멈추어 있었다.
방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던 장면이었다.
방 주인의 마지막 부탁을 떠올리고 영화를 재생했다.
“메멘토 모리라구, 친구.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게.”
“하하. 내가 어떻게 죽음을 잊고 살겠나. 내 생명은 언제나 사신의 손아귀 위에 올라가 있는데. 지금 이 순간조차 말이야. 죽음과 마주하고 있기에 현실을 즐겨야하지 않겠나. 카르페 디엠! 지금을 살게!”
“자네는 죽음을 곁에 두고 있는 자네의 삶을 사랑하는군.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그것도 좋지. 신은 우리를 사랑해주지 않으니 말일세.”
영화가 재생된다.
중간에서 보는 것이지만 옛날에 본 적이 있어서 이해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기 힘들었다.
계속 눈앞이 흐려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화가 끝이 났다.
엔딩크레딧이 올라왔다.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보면서 옛날에 본 평가를 떠올렸다.
겉멋만 든 B급이다.
동의한다. 겉멋만 든 B급이다.
그러나.
그 겉멋만 든 B급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했다.
칸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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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사람은 다 아시겠지만 이 글의 모티브는 낙원으로부터 온 초대장의 칸 스토리에 나왔던 331번 워울프 상사입니다.
그냥 기본 설정들을 얼기설기 짜맞추고 살짝 살만 덧붙인 수준이라 민망하긴 하군요.
쨌든. 라오 최애캐 탑 5에 들어가는 두 캐릭이 나오는 글을 써서 만족은 합니다.
그러니 스마조는 워울프를 상향하고, 스킨과 서약대사를 추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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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는..비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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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끕이 제 최애캐이니까... | 21.05.29 2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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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치트키니까. | 21.05.29 20:50 | |
(IP보기클릭)58.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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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b급이든 a급이든 s급이든 ss급이든 애정이 있다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 21.05.29 21:09 | |
(IP보기클릭)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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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영화에 대한 평가이지만 설정상 B급이고 폼생폼사인 워울프를 의미하기도 하죠. 최고다 워울프! | 21.05.30 11:0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