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했던 전투가 있었던 그 날 저녁. 사령관은 스틸라인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서 술자리를 마련했다.
내일 비행이 있는 임펫과 피닉스는 일찌감치 술자리를 벗어나고, 남은 참석자들 모두가 적당히 알딸딸해진 때에 사령관이 제안했다.
“우리 야자타임이나 한 번 할까?”
이 제안을 거절할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이는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음. 좋은 생각이십니다. 일전에 시스터 오브 발할라에서 야자타임을 갖고 모두의 우애가 돈독해졌다 들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스틸라인의 전우애도 한층 굳건해지겠지요.”
그나마 사령관을 막을 수 있는 마리조차도 이런 소리를 했으니 야자타임을 갖는 것은 확정된 것이리라.
야자타임. 일정 시간 동안 계급을 떠나서 혹은 계급을 역전하여 하급자들이 상급자에게 지금까지의 불만사항을 허심탄회하게 늘어놓거나 울분을 토하는 것. 참석자들의 상호 동의하에 하는 일이기에 후한은 없는 놀이이다.
……이론상은 그렇다는 거다.
속이 좁은 상급자는 이 놀이를 하면서 일어난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나중에 보복을 하거나, 정도를 모르는 하급자는 도를 넘는 짓을 자행하여 분위기를 망치거나 폭력사태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레프리콘은 직감했다.
‘아, 이거 백퍼 ↗된다.’
레프리콘의 상관들은 지나치게 FM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도만 잘 지키면 딱히 터치하지 않는 좋은 상관들이었다. 그리고 레프리콘의 후임인 브라우니는 가끔 사고를 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하급자이기도 했다. ……가끔씩 치는 사고가 재앙급이라서 문제지.
브라우니는 술기운으로 붉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오? 그러면 제가 제일 높게 되는 검까?”
레프리콘은 알아차렸다. 재앙의 시동이 걸린 것 같았다.
사령관이 웃으면서 답했다.
“하하. 그렇습니다. 브라우니 일병님.”
벌서 시작되었나 보다.
앞으로 있을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자신뿐이라고 자각한 레프리콘은 브라우니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했다.
“야, 이프리트. 너!”
난데 없이 지목당한 이프리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가리켰다.
“나?”
“나? 나아? 지금 나랑 말까자는 거냐? 야씨, 언제부터 병장 나부랭이가 상병이랑 말까게 됐냐?”
레프리콘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이프리트에게 사과했다. 지금 레프리콘이 그나마 갈굴 수 있는 자는 같은 병인 이프리트와 노움뿐이었다. 그나마 실키까지도 가능한 것 같지만 실키는 이미 뻗어서 저기 구석에서 자고 있었다.
레프리콘의 계획은 이것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병장들을 갈구는 것으로 시간을 끌어 야자타임을 끝내는 것이다. 브라우니가 입을 열기 전에 말이다.
브라우니가 입을 열면 재앙이 시작된다.
“……죄송합니다. 레프리콘 상병님.”
이프리트는 사과했다.
“사과하면 군생활 끝나냐? 사과할 짓을 왜 해?”
그리고 레프리콘이 자신도 지금까지 몰랐던 갈굼의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이 갈굼이 얼마나 참신하고 능수능란한지 산전수전 다 겪은 병장 이프리트까지 감탄할 정도였고, 극한의 갈굼을 당한 노움은 이미 한참 전에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마리는 자신의 부대 내 부조리가 이렇게 심했나 하면서 한탄을 할 지경이었다.
이 갈굼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했다간 악습의 모방 위험이 있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폭풍같은 갈굼의 향연이 한 차례 지나가고 브라우니가 입을 열었다.
“이봐…….”
레프리콘은 다시 갈굼을 시작했다. 그러나 브라우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모두 주모옥!”
참석자들의 시선이 브라우니로 모였다.
레프리콘은 어떻게든 브라우니가 말을 못 하게 하려고 했지만 브라우니는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레프리콘. 쉿. 너무 말 많다. 5분만 조용히.”
병장들한테 찍혀가면서까지 노력했는데 재앙을 막을 수는 없었다.
브라우니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이봐. 사령관.”
시작부터 최고통수권자를 지목했다.
“여기 와봐.”
“옙. 브라우니 일병님.”
‘↗됐네.’
레프리콘의 생각과는 별개로 사령관은 웃으면서 브라우니에게 다가갔다.
“여기 무릎 꿇고 앉아.”
최고 지휘관이 최말단 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짜 ↗됐네.’
레프리콘은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차마 볼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눈을 가렸다.
그래서 그녀는 보지 못했다.
“헤헤.”
브라우니는 웃으면서 사령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술자리 참석자들의 얼굴에 ‘이런 수가 있었네?’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브라우니는 사령관에게 명령했다.
“사령관. 머리 쓰다듬어 줘.”
사령관은 미소 지으며 그렇게 했다. 사령관의 손이 브라우니의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브라우니는 그 손길이 기분이 좋은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있지. 오늘 진짜 힘들었다? 오늘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힘들었어. 하루하루 철충을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싸웠어. 전우들도 많이 잃었어. 우리가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죽어가며 버티는 게 임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희망이 없는 싸움을 계속하면서 우리는 지쳐갔어. 인간님이 없어진 세상에서 우리가 이렇게 버티는 것에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도 들었어.”
즐거웠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레프리콘은 자신이 생각했던 재앙이 일어나지 않자 슬그머니 눈을 가렸던 손을 치웠다.
브라우니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미래가 없는 무의미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우리 앞에 사령관이 나타났어. 인간님이 다시 나타났어. 후후후후. 나 그때 너무 기뻐서 울었어. 다른 사람들 몰래.”
그때를 떠올리고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는지 브라우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브라우니는 사령관의 바지에 눈을 비며 눈물을 닦았다.
“사령관이 나타나니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싸움에 의미가 생겼어. 인간님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버티는 것. 우리가 잘하는 거잖아. 버티는 거. 사령관이 나타난 덕분에 전우들의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어.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던 과거도 사령관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 자랑스러워졌어.”
브라우니의 눈이 슬슬 감기기 시작했다. 피로감과 술기운 그리고 사령관의 손길로 인해 잠이 오는 것이리라.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거야. 스틸라인. 아니 스틸라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전우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 생각해. 사령관은 단순히 인간님이나 우리의 지휘관이 아니야.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야.”
브라우니는 작게 하품을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 기운을 짜내서 말했다.
“고마워, 사령관. 우리에게 와줘서. 그리고……"
브라우니는 힘이 다한 듯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그러나 이 말 만은 전하고 잠이 들었다.
"좋아해. 진짜진짜 좋아해.”
브라우니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브라우니가 말을 끝내자 방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침묵에는 뭐라고 형용키 힘든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니라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한참 후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브라우니를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브라우니가 깰까 조심스러운 태도로 방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자신의 침실일 것이다.
다른 때라면 부러워할 다른 이들은 오늘 만큼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마리도 그렇게 생각하였기에 말했다.
“야자타임은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지. 모두 정리하자.”
* * *
다음 날 아침. 브라우니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자기 옆에 가로 누워 있는 사령관의 얼굴이었다.
“일어났어?”
“오? 사령관 각하? 저희 생활관에는 무슨 일이심까?”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보인 게 최고 지휘관인데도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담대하고 친화성이 강한지 알 수 있었다.
“글쎄. 좀 더 주위를 둘러보고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브라우니는 그렇게 했다. 낯선 방이었다. 그러나 낯선 방이라고 하더라도 정체를 추측할만한 것들이 많았다.
“각하의 방임까?”
“그래.”
“제가 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못 해?”
브라우니는 잠시 생각한 후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또 사고 쳤슴까?”
브라우니의 말에 사령관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하하! 사고라면 사고지. 그런데 네가 걱정할 만한 사고는 아니야.”
“다행임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기억이 끊긴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브라우니는 불안해하며 지난 밤에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사령관은 그런 브라우니를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웠다.
“브라우니.”
“예?”
사령관은 자신의 얼굴을 브라우니의 얼굴에 가까이했다. 브라우니는 그 행동의 의미를 눈치챘다. 그녀는 당황했으나 아주 잠깐이었다. 브라우니는 눈을 감았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짧지만 충만한 입맞춤이었다.
입맞춤이 끝나고 브라우니와 눈을 마주치며 사령관이 말했다.
“나도 좋아해. 진짜진짜 좋아해.”
그렇게 말하고 사령관은 브라우니의 몸을 쓰다듬었다. 브라우니는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 * *
EX.
“야. 레프리콘. 레드후드 대령님께서 부르셔.”
레드후드의 호출에 레프리콘은 직감했다.
‘아, ↗됐네.’
레프리콘이 레드후드의 집무실로 가기 위해 이프리트의 옆을 지날 때 이프리트가 속삭였다.
“너 갔다오고 나 좀 보자.”
‘진짜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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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인에서 야자타임하면 폐급전설 브라우니를 찍는게 정석이겠지만 전 정석 아닌 것을 쓰고 싶었습니다.
브라우니는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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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생활은 중간만 하면 된다지만 중간에 끼이면 답 없죠... | 21.05.28 10: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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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갭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 21.05.28 15: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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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의 행복을 위해 레후는 희생당한 겁니다 | 21.05.29 14:2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