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는 없었다.
그날 아침은 조금 구름이 끼기는 했으나 그럭저럭 해님이 모습을 드러냈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오는 좋은 날씨였다.
“오늘 날씨 참 좋지 말임다.”
“야! 모포 터는 동안에 딴데 보지 말라니까!”
병사들은 연병장에 모여 일광건조를 하며 시시덕거렸고, 이들을 관리하는 간부들도 작은 비행 정도는 눈을 감아줄 정도로 평온했다. 오랫동안 일에 치였던 고위 장교들도 그간 고생한 보람이 있는지 일거리가 없어서 느긋하게 기호품을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
부대 지휘관인 불굴의 마리조차도 필요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전원 영내 휴가를 줄 정도로 평온한 하루다. 하루였다.
“일광건조 끝나면 저 종일 잘 거지 말임다. 요즘 수면이 부족한지 피부가 푸석푸석하지 말임다.”
“군바리가 무슨 피부 관리하는 소리를.”
“아! 군바리라서 더 철저히 관리해야하는거 모르심까? 아차하다간 순식간에 ㅁㅁ남다!”
“그래라. 그래. 나는 오랜만에 책이나 읽을까.”
“요즘 어떤 책 읽으심까?”
“『악녀에게 영광을』이라는 로맨스 판타지인데……”
“그거 마지막에……”
“야씨! 너 지금 아무렇지 않게 스포일러하려고 했지!”
말하는 것은 험악해도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의 얼굴에는 기쁨이 머무르고 있었다. 오랜만의 휴가는 몸과 마음에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 부대에 속한 다른 모든 부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각자의 기대와 계획을 세우고 보람차게 오늘 하루를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씨바. 왜 하필 오늘 근무에 걸렸는지 모르겠슴다.”
“닥쳐, 나도 존나 심란하니까.”
근무를 서고 있는 브라우니 9781와 이프리트 312는 등 뒤에서 풍기는 즐거운 기분에 반비례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교대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종일 쉴 수 없다는 것이 즐거운 기분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리를 하더라도 그들은 군인이었다. 입으론 불만을 토로해도 경계근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초기에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응? 이뱀. 저기 보시지 말임다.”
“뭐가?”
“지금 위치 마킹하겠슴다. 했슴다. 보시지 말임다. 저거 땅이 융기된 거 같지 않슴까?”
“그런 느낌이긴 한데……보고해야겠다.”
이프리트는 통신기기를 집어들었다.
“아. 아. 여기는 G7초소, G7초소 상황실에 보고 대기 중. 이상.”
“여기는 상황실, G7초소 보고하라. 이상.”
“전방에 특이사항 발견. 땅이 융기된 것으로 보임. 자세한 좌표는 전술지도로 업로드 하겠음. 업로드 완료. 이상.”
“확인했다. 융기는 진행되고 있는 중인가? 이상.”
“단발적인 변화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는다. 진동 감지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가? 이상.”
“진동 감지기에는 별다른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이상.”
통신이 계속 되는 중 브라우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이프리트를 불렀다.
“이뱀! 이뱀! 이뱀!”
“야씨, 통신 중이잖아. 시끄럽게 하지마.”
“융기 지점이 더 늘어났지 말임다!”
“뭐? 상황실. 융기 지점의 증가 확인. 융기 지점의 증가 확인. 좌표를 업로드 하겠다. 이상. 야! 융기 지점 전부 좌표 찍어서 전술지도에 올려.”
“했슴다!”
“좌표 갱신 확인했다. 지금 정찰 드론을 보내겠다. 특이사항 전부 보고 하도록. 이상.”
“알겠다. 상황실. G7……”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땅이 흔들렸다. 먼 곳에서 일어난 폭발이었지만 그 폭발이 얼마나 강력한지 폭발로 솟아오른 흙더미를 부대 모든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진동과 튄 흙더미 때문에 몸을 웅크렸던 브라우니 9781와 이프리트 312은 진동과 쏟아지던 토사가 멈추자 고개를 들어 전방을 확인했다.
“오, 씨바.”
브라우니는 욕설을 내뱉었다.
이프리트는 다급하게 통신기기를 집어들었다.
“여기는 G7! 여기는 G7! 상황실에 보고! 전방에 철충 확인! 철충 확인! 입감되었나? 이상!”
“확인했다. G7. 귀소 측에서 확인 가능한 적의 종류와 수는 얼마나 되나? 이상.”
이프리트는 다시 전방을 확인했다. 고개를 최대한 왼쪽으로 돌렸다가, 최대한 오른쪽으로 돌렸다.
“여기는 G7! 확인 불능! 전방 전체가 철충 무리로 가득 찼다! 철충의 공세다!”
* * *
불멸의 마리는 다급하게 상황실로 뛰어 들어왔다.
“상황은 어떻지?”
“지금 막 철충의 출몰을 전달받았습니다. 정찰 드론의 상공 도착까지 5초 남았습니다.”
5초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상황실 내의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천천히 5초가 흘렀다.
작전상황실에 있던 스크린에 G7 초소 전방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면은 꿈틀거리는 검붉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맙소사.”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적어도 마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전방의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마이크를 들고 외쳤기 때문이다.
“영내 총원 전투배치! 지금은 실전 상황이다! 철충의 공세다! 다시 말한다! 철충의 공세! 총원 전투배치!”
그러나 그녀가 방송을 하기도 전에 폭음과 토사의 비상을 본 스틸라인 부대원들은 이미 무장을 마치고 자신들의 위치로 달려가고 있었다.
평소에 훈련을 빡시게 한다고 욕하던 그녀들이었지만 정작 실제 상황이 되자 그 훈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송을 마친 마리는 곧장 다음 지시를 내렸다.
“철충의 종류를 분류하고, 즉시 대응팀을 구성하도록! 장기전이 될 수 있으니 비축된 자원을 확인 후 보고하라! 타 부대로 지원 요청을! 부상자가 발생할 수 있으니 병상을 충분히 확보하라!”
그 외에도 무수히 긴 명령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상황병들은 그녀의 명령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던 중에 통신 하나가 수신되었다.
“여기는 셀주크 여단. 포격 준비 완료. 이상.”
“여기는 마리! 귀 여단의 판단대로 포격을 시행할 것! 이상!”
“셀주크 여단. 입감. 본 여단은 자율포격을 시행하겠습니다. 이상.”
* * *
셀주크 여단은 전방으로 산개했다. 원래는 장거리 포격을 위한 AGS들이었지만, 지금 철충이 나타난 위치는 셀주크로서는 지근거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참호선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위치를 잡자 그녀들은 보조다리로 자신의 몸을 단단히 지탱한 후 두 개의 175mm 주포로 전방을 겨눈 후 통신망에 접속하여 알렸다.
“여기는 셀주크. 포격을 개시합니다. 전 우군은 안전거리를 확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전장의 신이 전장에 자신의 망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망치 한 번에 바닥이 뒤집히고 천지가 흔들렸다. 음속의 고중량 포탄에 철충은 스치기만 하더라도 그 형체를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망치가 철충 무리 한복판을 때리자 토사와 철충의 파편이 비산했다.
강렬한 충격과 화염이 철충들을 집어삼키고 포격 지점을 중심으로 50m가 넘어가는 공터를 만들어냈다.
최전방에 도착한 보병들은 지근거리에 착탄하는 포격을 보자 그 위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감탄은 길지 못했다.
셀주크의 포격이 만들어낸 빈자리는 순식간에 메꿔졌다. 포격의 흔적은 비산 후에 천천히 떨어지는 토사와 파편 외에는 없었다. 철충 무리의 물량과 밀도는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셀주크의 포격은 계속되었으나 철충의 무리는 쉬지 않고 스틸라인의 참호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이프리트의 140mm 박격포가 착탄하기 시작했다. 셀주크의 포격보다는 빨랐으나 구경과 구경장의 차이가 크다보니 그 위력을 실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스틸라인의 보병들이 참호에 도착하여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평상시에 참호를 구축 할 때에는 뭔 이런 귀찮은 것을 만드냐고 궁시렁거리며 땅을 파던 그녀들이었지만 지금은 그 참호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몰랐다.
그러나 참호가 주는 위안보다 철충의 무리가 주는 위압감이 더 컸다. 끝을 알 수 없는 철충의 무리. 이 무리들 앞에 그녀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느껴졌다.
공포를 느끼지 않는 병사는 없었다. 군용 바이오로이드인 그녀들은 처음부터 필요에 따라 설계되어 태어났지만 공포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공포의 완전한 배제는 무리한 활동으로 효율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최소한의 공포는 느낄 수 있게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간 남아있는 공포의 수용기조차도 막대한 공포를 마주하자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려고 했다.
바로 그때 부양음이 보병들 뒤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보병들 옆을 지났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서 멈췄다.
보병들은 최전선에서 휘날리는 붉은 깃발을 보았다.
스틸라인 부대의 마크가 찍혀 있는 붉은 깃발에는 후퇴는 없다(No retreat), 승리는 우리의 것(Victory is ours)이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그 깃발은 부양형 전차(Chariot)에 탄 한 명의 바이오로이드가 들고 있었다.
C-77 레드후드였다.
레드후드는 철충을 마주하고 병사들에게는 등을 보인 채 확성기를 들었다. 그녀가 말을 하기 시작하자 전차 밑에 설치된, 후방을 향한 스피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두렵나, 제군들!”
직설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병사는 없었다.
레드후드는 잠시 기다린 후에 말했다.
“나는 두렵다!”
레드후드의 고백에 병사들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드후드는 외쳤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그 누구겠는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종의 보존을 이어가지 못하고 그 대가 끊겨 옛날에 멸종되었을 것이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짐승도 마찬가지고, 인간님들조차도 마찬가지다! 비록 우리가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생명체인 이상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보병들은 레드후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은 가늘었으나 그녀의 등은 결코 작아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군들! 나는 더 두려운 것이 있다!”
철충 쪽에서 장거리 저격을 시작했다. 그 대상에는 셀주크와 레드후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총알이 빗발쳤으나 레드후드는 조금의 움츠림도 없이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두렵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우리의 의무를 저버렸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철충 무리로부터 인간님들을 지키지 못했다. 우리의 목숨보다 소중한 인간님들을 지키지 못한 것이 우리가 실패하고 의무를 저버렸음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총알 한 발이 더 날아들었다. 그 총알은 레드후드의 귀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레드후드의 귀밑머리가 떠올랐다. 그러나 레드후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 최전방에서 우리의 위치를 지키며 죽어가는 것이다!
이미 한 번 의무를 저버린 우리가 한 번 더 의무를 저버리면 우리는 무엇이 되겠는가!
짐승 새끼다! 짐승에게는 의무 따위는 없다! 단지 태어나서 먹고 자고 싸고 새끼를 치고 뒈지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의무가 있는 자는 짐승이 아니다! 우리에게 목적과 의무가 없던가! 있지 않느냐! 인간님에게 부여받은 목적과 의무가 있지 않느냐! 이 목적과 의무를 방기하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인격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총탄이 날아든다. 이번에는 정확하게 레드후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총탄은 레드후드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흉탄이 레드후드에게 적중했다. 레드후드의 모자가 떨어졌다. 보병들은 레드후드의 몸이 크게 휘청이는 것을 보았다. 가장 가까이 있던 병사들이 레드후드를 받치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나 레드후드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넘어가다가 발을 뒤로 뻗어 넘어지는 것을 멈췄다. 그녀는 비틀거리기는 했으냐 끝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멍하니 있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훔치고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다시 쓴 후에 확성기를 들었다.
“비루한 짐승 새끼처럼 뒈져가겠는가! 고결한 인격체로서 우리의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는가! 나는 제군들이 어느 것을 선택할지 알고 있기에! 싸울 때는 최전방에 설 것이고, 후퇴할 때는 최후미에 설 것이다! 사수 총원! 위치로!”
이 말을 듣고 물러날 바이오로이드는 없었다.
그녀들은 참호에 서서 철충들을 조준했다. 정밀하게 조준할 필요는 없었다. 대충 겨눠도 될 정도로 철충은 많았다. 너무 많았다. 원근감이 이상해질 정도로 철충은 많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철충 무리가 저렇게 가까워졌는데. 살기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가까이 오는 철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쏴야 하는 것 아닌가!
보병들의 마음 속에 이런 아우성이 휘몰아쳤지만 그들은 결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녀들은 충실하게 장교의 사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철충들이 충분히 유효 사정거리에 들어왔다고 판단한 레드후드가 기관총의 방아쇠를 누르며 외쳤다.
“사격 개시!”
=========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10.105.***.***
(IP보기클릭)121.143.***.***
(IP보기클릭)21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