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은 영화 '너의 이름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직 작품을 시청하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세요.
무심한 입을 통해 나는 죽음의 소식을 들었네,
무심히 나는 그 소식을 들었네.
-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
오늘 조조로 영화를 모두 보고서 떠올린 글은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의 문구였다.
정열적이지만, 결코 이뤄질 수 없었을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던 소설.
내용도 전혀 다르고, 이미지도 달랐지만,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은 그 표현과 섬세함에 현대적 감각이 남아있기에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첫사랑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을지도. 좋은 책이니 읽어보세요.
그렇게 생각을 하며 영화 내내 나는 이 영화의 테마를 첫사랑, 혹은 사랑 그 자체라 생각하고 읽었고,
또 무수한 기호적 연출과 스토리의 진행에서 찬란한 순간에 대한 비유와 대유를 이곳 저곳에서 발견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대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롤랑 바르트적인 해석으로 '사랑하는 주체'의 모습이 어떻게 영화 속에서 나타났는지,
또 이런 기호적 연출과 구성을 통해 영화의 평론을 해보려는 게 주된 목적이다.
그리고, 오타쿠 및 서브컬쳐 계열에서 세카이계의 사건을 조금 축소하여 보여주는 이 연출들에 대한 해석 시도는 이미 충분히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의 기호적 표현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 시작한 글이다.
플립 플래퍼즈 때도 그러했듯이, 절대적 정답도 아니며,
미학 쪽의 전공자도 아니고, 반드시 맞는 해석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럽기에,
언제나 해석의 다양성은 긍정하고 싶다.
(이미지는 모두 해외 블로그에서 가져왔으며, 트레일러와 예고편의 장면만 사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무수한 것들을 잊어간다. 시간의 파도에 쓸려나가는 기억의 모래알들이 사라지는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이전 작품, '초속 5cm'는 그런 흐름에 따른 잊음이라는 순리와 순간의 찬란함을 담아냈었다.
그리고 최근 개봉한 '너의 이름은.' 또한 그런 사랑의 대유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왜, 나는 이 이야기에서 어떤 사랑의 기호들을 떠올렸는가?
나는 너의 이름은.이 가지는 사랑의 단상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란
너의 이름은.에서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서사가 존재하느냐는 비판이 있곤 한다.
서로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사건의 서사는 존재하지 않고, 당연히 그렇게 될 뿐이다.
이는 신카이 마코토가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랬듯이, 이별의 순간을 사건의 발생이 아닌 시간의 연속으로 표현함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초속 3cm에서 이별에 이유가 되는 사건을 찾으려는 시도가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너의 이름은.에서 사랑에 빠지는 사건의 유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사랑은 원래 이유 없이 찾아오며,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표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요소가 바로 '시선의 교환'이다.
나는 영혼의 교환 그 자체를 이미 사랑의 서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 속에서 절대적인 주체이다. 절대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주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가 확증할 수 있는 단 한가지는 우리의 주체성이다.
하지만 최초로 내면에 타자를 들이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하는 지점,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왜 타인의 시선이 되고 싶어하는가? 나를 사랑해줘, 라고 욕망하는가?
사랑 또한 자신의 절대적 주체성을 보장한다면, 가슴 아픈 짝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주체가 바라는 것은 나 자신이 사랑을 한다는 주체성도 있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나를 봐주길 바라는 시선 또한 지니고 있다. 그러니 사랑은 타자를 자신 안에 두는, 혹은 두고 싶어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식상하기까지한 영혼의 교환이라는 요소는 어째서 사랑의 이야기에 단골처럼 쓰이는가?
우리는 사랑 속에서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타자를 내면화 시키려고 노력하곤 한다.
사랑을 하는 객체는 주체가 절대 될 수 없는 '대타자'로 존재하며, 우리가 마주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소타자'이다.
이미지화 되어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존재하는 '소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런 사랑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타자의 시선이 된다는 건 그 자체로 사랑을 뜻한다.
사랑을 하는 순간은 타인이 나를 이해하길 바라는, 그리고 자신이 타인을 이해하길 바라는 욕망이 발생하는 시점이며,
서로의 몸이 바뀌며 시선이 교환되는 이 지점은 그 자체로 사랑의 발생과 과정이 된다.
결국, 서로가 서로가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의미 자체로 이미 사랑의 경험, 혹은 사랑의 경험에 대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미츠하가 데이트를 응원하며 스스로의 대체를 '취소'하는 부분에서 사실 더 세밀하게 드러난다.
타키가 되어 타키의 시선으로 많은 것들을 보았고 또 그의 연정의 마음을 알았던 미츠하는 그 사건으로 자신의 사랑을 저도 모르게 '취소'했다고 할 수 있다.
미츠하는 대체 왜 눈물을 흘리는가? 타키는 왜 자신을 의심하면서도 데이트를 지속하려 했는가?
이는 일종의 언어의 폭발이다. 타자가 절대 내가 될 수 없음을, 나와의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는 사랑의 무게에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지우기 마련이다.
내 감정에 거리를 두려는 시도와 사랑의 취소는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서툴다는 것은 이러한 거리의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는 경우를 대게 뜻한다. 그러니 사랑에서 취소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의 무게로 인한 취소이며, 이를 눈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두 사람이 오래 전의 이름을 나눴던 서로이며, 또한 이는 근본적으로 두 사람의 기저에 존재하는 사랑의 형태-대유로서-이기도 하겠다.
타키와 미츠하가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서로를 취소하려는 시도가 의미 없는 이유가 이런 사랑의 변태적인 성질에 근거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은 사랑의 주체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자각하는 순간을 맞이하곤 한다.
사랑의 대상을 취소한다고 사랑을 취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타키의 데이트 날을 아쉬워하는-그렇다고 생각하는-미치하의 눈물과 좋아하는 선배와의 데이트에서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타키의 의심은 동일한 사랑의 취소이다.
그러니 두 사람은 이미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었던 셈이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시작과 취소, 마음의 혼란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혜성 충돌이라는 사건과 시간대의 어긋남을 통해 깨어지게 되는데, 이 사건을 통해 사랑을 하는 주체가 보여주는 건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부재'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이 둘은 사랑의 주체가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을 보여주는 가장 주된 줄기이며, 다른 요소들 또한 다루게 될 것이다.
서로의 몸이 바뀌며 서로가 되는 순간-사랑-을 경험한 두 사람은 결국 큰 사건 하나를 통해 서로 교환될 수 없는 위치에 다다른다.
이는 바로 '부재'이다.
영화 내에서는 물리적 접점의 불가능으로 표현했지만,
사랑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이야기로 물화했을 뿐 같은 맥락이라 여길 수 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것은 부재의 오묘한 순간이다.
부재는 떠난 이에게 성립되지 않고, 남은 이에게 성립하는 요소이다. 현존하는 나의 상황, 부재를 당한 나는, 부재하는 당신으로부터만 성립된다. 이 부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은 '주체인 나와 타자인 당신의 정수 그 자체는 결코 교환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전의 '취소'에서 느끼던 그 간극의 결정체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에서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오갈 수 없는 빈 자리만이 남는다.
이전까지 오고갔던 영혼의 교환-사랑-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동시에 이 부재의 문제는 사랑의 주체인 나와 대상인 타자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시도임과 동시에,
물질적 부재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느낄 수밖에 없는 정신적 부재와 간극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받아주는 관계에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느끼곤 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가 될 수 없기에 구분되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타인인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현존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이한 역설이다.
우리는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근본적 부재를 가지고 있기에 사랑에 있어 근본적 결핍과 부족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부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사랑의 주체는 사랑하는 객체인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
서로에게 늘 떠나고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이야말로 사랑의 주체가 사랑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타키는 '부재당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미치하를 찾아나선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도 잘 모른 채로 데이트를 끝마친 타키는, 물리적인 관계가 끊어지기 시작한 부재 앞에서 미치하를 찾아나선다. 왜? 부재를 통한 사랑의 확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부재한 상황에서 다시금 사랑을 깨닫는 순간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영리하게 물리적 부재의 이야기를 통해 부재에 대한 타키의 반응을 매우 잘 이끌어낸다.
부재를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가 되는 순간을 공유했던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은 나와는 구분된 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곧 사랑의 결핍으로 이어지고, 역설적으로 사랑의 결핍은 사랑하는 주체인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부재하는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주체의 감정을 혜성 충돌과 시간대의 어긋남이라는 사건을 통해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매우 훌륭하게 부재의 역설을 표현해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으며,
영혼의 교환이라는 사랑의 시작 대유와 더불어,
시간대의 차이와 혜성 충돌은 서로 결국 교환될 수 없는 타자라는 부재의 인지를 이야기로 이끌어낸 셈이다.
상대가 부재하게 된 그 순간의 노골적인 결핍과 자신이 자신 혼자만으로 남게되는 순간-더 이상 바뀌지 않는-은,
곧 부재를 통해 격렬하게 인지하게 되는 사랑하는 주체로서의 현존을 자아내는 순간이 된다.
결국 이는 부재 앞에서 운명을 막으려는 시도까지 다다르는 일련의 과정이 곧 사랑이 되는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왜 이 영화가 세카이계냐는 질문은 이런 대답으로 성립할 수 있겠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세계의 비극은-부재의 확인,
결국 세계의 비극을 막는 서로의 사랑-사랑의 깨달음-이라는 오묘한 순환 구조.
(타키는 한 발 늦게 사랑을 깨달은 셈이지만...덕분에 잘 됐으니 해피엔딩해피엔딩.)
남겨진 타키가 '부재'를 현존으로 이어가려는 노력 이전에, 잠시 짚고 넘어가야할 점 또한 있다.
타키가 미츠하의 하나하나를 찾아가며 내가 알고 있던 미츠하가 누군지 끊임없이 주장하고,
또 3년 전의 비극을 알게 되고서 비극을 힘겹게 인정하는 지점에서 또 하나의 사랑의 단상을 찾을 수 있다.
롤랑 바르트가 그랬듯이, 사랑의 주체에게 보이는 방식 중 하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천천히 '읽어내려'고 한다.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무수한 기호를 찾아내려고 하고, 또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 하려고 한다.
이는 일종의 해독의 과정이다. 상대라는 '대타자'를 이해하려고 하는 독해력의 문제.
하지만 이런 '읽음'은 편법에 가깝다. 그 사람을 읽고서, 빠짐없이 정의하고 분류하려는 시도를 독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분류와 정의는 언어에 상대를 가두는 행위에 불과하다.
해독이 끝났다는 착각 끝에서 사랑하는 주체는 억울해한다.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아무리 해도 널 이해를 못하겠어."
하지만 원래 타자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관측하는 것은 타자의 이미지일 뿐.
이렇게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결국 묘한 모순에 빠져들게 되곤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 자신은 누구보다도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는가?
우리는 사랑 앞에서 서로를 몽땅 이해한 것처럼 흔히 행동하곤 한다.
피상적으로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더 깊게 간다면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하지만 이는 절대적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절대 알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어떻게 사랑하려 하는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방식을 롤랑 바르트는 신에 대한 축성과 같은 것이라 이야기한다.
사랑을 하며 더욱 깨닫게 되는 사실, 상대를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불확실이나 불투명과는 다르다.
사랑에서 지혜로워진다는 이야기는, 외관으로 대표되는 이미지의 껍질을 깨는, 실체의 감각 안쪽을 이해하는 명백함이다.
그러니,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은 미지의 상대에게 우리는 영원히 질문을 던지며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해소되지 않을 의문을 간직하면서도 앎을 추구하는, 일종의 종교적 믿음처럼.
누구로부터 받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손목끈으로부터 이어지는 묘한 질문의 연결고리처럼.
이런 비유의 표현은 또한 구치카미사케를 마신다는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된다.
이전에 알고 있다고 생각해던 미치하의 모습을 모두 잃은 타키는, 황천으로 표현되는 사당 안에서 미츠하의 구치카미사케를 마시고서 다시금 미츠하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상대를 이해하고, 모두 자신이 이해하는 범주 내에서 받아들이려 하던 타키가 일순간 비논리 비합리적이지만, 남겨진 미츠하의 조각을 찾아간다는 사실은, 결코 알 수 없을 사랑의 대상 그 자체에 대해 받아들이고자 하는 시도가 된다.
종교적인 의미로나, 술을 마시고 미츠하의 삶을 보며 미츠하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타키의 미츠하 관측은 이런 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여지껏 피상적으로 알아왔던 미츠하. 미츠하가 '이런 삶이 싫음'에도 남겼던 구치카미사케를 통해,
알지 못했던 미츠하의 과거를 보며, 또 미츠하의 몸에 들어가 비극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특히 아빠 멱살을 잡는 순간-하며 깨닫게 된다.
나는 미츠하 그 자체가 될 수 없음을, 미츠하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음을.
허나, 그렇기에 미츠하를 찾아 해매고 있음을, 사랑의 주체로서 표현하게 된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우리는 사랑에서 상대가 가지는 특정성과 개성에 이름 붙이고자 하는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연애 중, 상대의 이름을 그대로 저장하기 보다는 애칭으로 칭하는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서로를 부른다는 특별함의 의미로 애칭과 이름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이다.
나를 미츠하라고 부르는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도 미츠하라고 부르는 타키를,
나를 타키라고 부르는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도 타키라고 부르는 미츠하를.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찾아 사랑한다.
우리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이상형의 모습이 아닌, 관계로서 특별해지는, 정의할 수 없는 아토포스(Atopos)로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는 그런 불러줌과 불러짐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싶어하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줬으면 하는 관계.
이름조차 모른다는 표현은, 달리 말하면 불러줄 수 있다면 완전해질 관계를 뜻하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끝났다.
우리가 첫사랑, 지나간 사랑들을 천천히 잊듯이
당연히 잊어가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지만,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남는다.
그리고 결국 그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해내려던 시도는 만날리 없었을 두 사람을 다시 엮이게 했다.
이렇게 에필로그까지 모두 관람한 관객인 우리들은 기쁘고 또 기쁘지만, 그래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럼 왜 도대체 왜 감독은 이런 먼 길을 돌아 다시 에필로그와 같은 식으로 끝을 맺었는가?
간단한 해피엔딩은 왜 불가능 했는가? 돌아오면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설정을 왜 굳이 넣었는가?
초속 5cm에서 그랬듯이 찬란했던 순간을 추억하는 사진처럼 끝내지 않았는가?
조금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피엔딩을 위한 선택?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감독의 영리함을 느꼈던 지점은 오히려 에필로그이다.
'잊어서는 안될 이름을 잊었다'는 사실을 끊임 없이 되뇌이는 주인공들의 언어는,
상대의 어떤 기호적인 '소타자'의 이미지를 모두 져버리고서 상대의 부재 자체를 끊임없이 되뇌이는 순간을 기억하려는 시도이다.
즉, 이름도, 생김새도, 나머지 무수한 것들이 모두 부재한 상황에서, 기억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대의 부재 자체를 자신의 현존하는 순간으로 치환하여 스스로의 마음 속에 끝까지 머무르게 했다는 점.
바로 그런 사랑의 주체로서 보여준 두 사람의 태도는 결국 단 하나의 결론으로 다다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부재한 순간을 인정해야 사랑을 하는 자신이 유지된다는 역설.
그걸 인정한 오랜 순간을, 이름을 묻는 지금의 한 순간.
OST로 사용한 노래엔 이런 가사가 있었듯이, "어제까지는 서장의 서장" "지금부터가 나야"
아름다운 사랑의 시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플립 플래퍼즈로 16년 말을 잘 끝냈는데,
17년 초엔 너의 이름은.으로 열심히 버닝하게 되네요.
좋은 영화였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된 듯 해 기쁩니다.
초속 5cm가 여러모로 생각나지만, 더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사실 이 이야기 전체를 첫사랑의 비유로 표현할 수도 있을 듯 한데, 너무 길어져서 해당 내용은 들어냈습니다.
또 다루게 될 시간이 있겠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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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읽고 나니 타액으로 맺어진 인연이라니! 하고 감탄한 제가 구제불능이라고 느꼈습니다.
(IP보기클릭)1.11.***.***
타키와 미츠하의 사랑의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말이 종종 들려오는데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 몸이 바뀌며 마주하는 서로의 순간들 자체가 연인들의 사랑의 과정이었죠.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건 그 사람의 세계를 마주한다는 거라는 아주 좋은 글이 있었는데 딱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의 순간은 언제나 끝나기 마련이니, 이 영화가 아련한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배드엔딩이었으면 굉장한 데미지를 입었을거에요.
(IP보기클릭)175.215.***.***
고찰이 섞인 리뷰는 언제나 추천.... 신감독의 작품은 생각해볼만한게 많죠 그리고 어느정도 상업성을 잡은 너의 이름은도 마찬가지입니다.
(IP보기클릭)210.106.***.***
뭐야 흔해빠진 읽어도 읽어도 좋은글이잖아 추천이나 먹어라!
(IP보기클릭)27.1.***.***
이거 오른쪽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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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읽고 나니 타액으로 맺어진 인연이라니! 하고 감탄한 제가 구제불능이라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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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바쳐 이승으로 돌아온다는 메타에 사랑하는 사람이 마신다는 사실 자체를 연관지을 수 있지 않나..싶었네요 ㅋㅋㅋㅋㅋ | 17.01.06 0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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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이 섞인 리뷰는 언제나 추천.... 신감독의 작품은 생각해볼만한게 많죠 그리고 어느정도 상업성을 잡은 너의 이름은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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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와 미츠하의 사랑의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말이 종종 들려오는데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 몸이 바뀌며 마주하는 서로의 순간들 자체가 연인들의 사랑의 과정이었죠.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건 그 사람의 세계를 마주한다는 거라는 아주 좋은 글이 있었는데 딱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의 순간은 언제나 끝나기 마련이니, 이 영화가 아련한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배드엔딩이었으면 굉장한 데미지를 입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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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흔해빠진 읽어도 읽어도 좋은글이잖아 추천이나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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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런 순간순간에 대한 포착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글에선 길어져서 담지 못했지만, 너의 이름은.에서 감독이 포착했던 모티브는 첫사랑, 혹은 지나간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첫사랑은 이름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지만, 분명히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죠. 초속 5cm가 어린 사랑과 사랑의 이별을 천천히 끌어내는 과정을 보여줬듯이, 너의 이름은.에서는 이런 아련한 첫사랑과 지나간 사랑에 대한 순간을 포착하여 세카이계 이야기와 접목하여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 17.01.06 21: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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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으로, 세카이계와 접목을 시켰다고 하셨는데, 등장인물들의 행위가 세계 그 자체의 재앙적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미묘한 점이 있네요. 혜성은 재앙 그 자체로는 국지적이고 독립적인 사건이고, 오히려 혜성의 존재가 두 인물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세카이계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당장 열거되는 유명한 세카이계 작품들만 해도 카타스트로피의 주체 자체가 주인공들입니다. | 17.01.07 19: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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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르신건 아니라고 봅니다. 좋은 영화였지만 완벽한 건 아니죠. 이야기 후반의 진행은 정말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으로 납득되지는 않는 느낌이였죠. 즉 준비된 관객들 - 시간여행/로맨스의 정형을 좋아하시는 - 에게는 효과적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이런 장치는 이미 식상해진 상태인데 짧게 넘어가버리면 "아 또 이거냐" 라는 느낌만 들죠. | 17.01.07 19: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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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달리고 다시한번 정독했습니다 읽고 다시 보니 더욱 새롭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 17.01.10 01: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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