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굣길. 조금씩 서쪽으로 향하는 해는 하늘을 검은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시도는 오늘은 어떤 반찬으로 저녁을 만들어야 될까, 토카가 얼마나 먹을지, 코토리가 집에 들어올지 다양한 변수를 생각하며 길을 거닌다. 라타토스크에서 식비를 지원해 주는 덕에 살림에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기왕 먹는 거라면 효율적으로 먹는 편이 시도에게는 익숙했다. 그런 지극히 일상적인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 사이 시도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응?”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기척에 시도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던 시도가 앞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우왓!”
시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방금전만해도 아무것도 없던 시도의 앞에 한 소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시도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릴까. 금발에 적안, 그리고 오른쪽 머리를 묶은 소녀이다. 시도는, 어째서인지 그 소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
“뭐야, 마유리잖아. 깜짝 놀랐잖아.”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는데.”
“어이어이, 누구든 자기 앞에 이렇게 사람이 서 있으면 놀랄 수밖에 없다고.”
“미안.”
참으로 간단하고도 명쾌한 대답이다. 하지만 시도는 어서 집으로 가야 하기에, 일단 사정을 설명한다.
“……내일 시간 있어?”
“응? 내일? ……물론이지.”
“내일 오전 10시에 여기서 기다릴게.”
“굳이 여기서……?” 말하기가 무섭게 그녀는 사라진다. 어디서 만나는지는 그녀의 자유지만 그래도 데이트약속치고는 약속장소가 너무 평범하다. 원래 이런 곳을 좋아하는 건가.
“……어라. 이거 데이트 약속인가.”
시도는 뒤늦게 자신이 데이트신청을 받은 것을 인지한다.
“…뭐 괜찮겠지.”
다음날, 시도는 오랜만에 인컴없는 데이트를 하러 약속장소로 나온다. 한결같은 복장과 자세로 그를 기다려 주는 마유리를 시도는 볼 수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응, 약속시간 30분전부터 기다렸는데 말이지.”
“너무 솔직한 거 아니야?!”
“……농담이야. 자, 가자.”
어쩐지 마유리가 리드하는 데이트가 된 것 같지만 이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시도는 생각했다.
그녀를 따라 시도가 도착한 곳은 전에 코토리를 공략할 때 왔던 곳인 오션파크였다.
“여기 오고 싶었던 거면 근처에서 만나지.”
“……너랑 좀 같이 걷고 싶었어.”
“응? 뭐라고?”
“됐어. 얼른 들어가.”
시도는 마유리가 인도하는 대로 이곳저곳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코토리와 함께 즐겼던 범퍼카, 자이로드롭, 유령의 집, 롤러코스터 등. 풀에어리어에서 수영복을 입은 시오리양을 보고 싶다고 조용하고도 강하게 주장하는 마유리였지만, 시도는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코토리가 강압적인 태도와 자신의 약점으로 자신을 쥐락펴락한다면, 마유리는 왠지 안 해주면 굉장히 섭섭해 할 것 같은, 어쩐지 해 줘야할 것 같은 의무감같은 것이 들었지만, 시도는 남자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거부했다.
어느덧 해는 중천을 지나 노을이 되어 거리를 오렌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갈까?”
“잠깐만.……유원지에서의 마지막은 저걸 즐겨야 하지 않겠어?”
시도는 자신있게 대답하며 관람차를 가리킨다. 그렇다. 유원지에서의 피날레는 역시 돌아가는 관람차안에서 노을을 감상하며 데이트를 마무리 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두 연인……이라는 데까지 상상을 하자 시도의 얼굴이 붉어졌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은 건지 대기열은 길었지만, 드디어 관람차를 탄 시도는 마유리와 마주 앉아 멋진 노을을 감상한다. 이 시간만큼은 왠지 둘 다 엄숙해졌다.
“……오늘 나 때문에 억지로 나온 건 아니지?”
“당연하지. 나도 오늘 데이트, 정말 즐거웠어.”
“……나도 그래.” 라고 말하며 그녀는 수줍게 웃는다. 시도는 그 미소가 정말 눈부시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아련하다고 느껴졌다. 데이트 중에도 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을 생기있는 표정을 보여줬지만, 어딘가 쓸쓸한 듯한 인상을 줬다. 뭔가,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던 것 같다. 자신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던, 사라질 수 밖에 없던 운명을 지닌 누군가를, 시도는 만난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막연히 그런 것 같다, 라는 느낌이 들 뿐 확실한 기억은 없었다.
이윽고 관람차가 가장 높은 위치에 서자 주위의 정경이 시도와 마유리를 반긴다. 노을빛으로 물든 거리와 건물들은 타오르는 듯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듯 했다. 마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에 손을 대고 바깥의 풍경을 바라본다.
“이제는……슬슬 헤어져야겠네.”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을 그녀는 한다.
“뭐 그렇게 말해. 금방 또 만날텐데.” 시도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재빨리 말을 한다. 하지만 왜 그녀를 안심시켜야 하는 지는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만약 시간이 느리게 간다면 좀 더 즐길 수 있었을까.”
“……내가 아는 누군가를 보면 그런 일이 불가능하진 않아. 하지만 되돌릴 수 없으니까 사람들은 순간순간을 더 열심히 사는 게 아닐까.”
“그렇네. 이 순간은 다시 똑같이 반복되지도 돌아오지도 않겠지.”
시도가 탄 관람차가 땅에 닿자 직원이 문을 열었고 두 사람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어.......”대답하려는 시도의 입을 마유리는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일이라 시도는 순간 멍해져서 마유리가 떨어져도 사고회로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잘 가.”
“어....아..자...잘가!”
바보같이 말을 더듬거리며 말을 한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시도는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런데 왤까. 지금 그녀를 향해 달려가서 붙잡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유따윈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다. 시도는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숨이 목 끝까지 올라오도록 달려도 그녀의 뒷모습은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다.
“마...마유리!!”
그는 목이 찢어지도록 애타게 이름을 불러보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걷는 속도를 줄이지도 않은 채 걸어가기만 하고 있었다.
닿아야 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그의 손도. 목소리도. 그녀는 그에게서 점차 멀어져 어느새 빛이 되었고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마유리!!!!!!!”
“...빠! 오빠!!!”
“헉!” 일어난 시도가 옆을 보자 시도의 여동생 코토리가 간만에 백색리본을 묶고 시도를 애처로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나쁜 꿈이라도 꿨어? 식은 땀 좀 봐.”
자신이 꿈을 꿨다는 현실을 인지하자, 꿈속에서 위태롭게 쌓여왔던 시도의 감정이, 둑을 무너뜨린 것처럼 흘러나와 시도의 뺨을 타고 내렸다.
“오......오빠?! 갑자기 왜 그래?!”
“....아니야, 정말, 괜찮으니까........”
꿈에서라도 그녀를 만난 것은 그녀가 시도와 모두의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슬픈 기억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려는 것이었을까. 시도는 어느쪽이 진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즐거웠다고 말한 마유리의 표정만큼은 마치 방금 본 것처럼 시도의 기억에 새겨졌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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