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표 결정전은 나가지 못했고, LT유스 예선 결승에서도 미끄러졌다.
그래도 두 대회를 모두 탈락한 남해의 일상은 계속되었다.
평소처럼 수업을 듣고, 평소와 같이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학교가 끝나 하교시간이 되면 교회로 돌아갔다.
“야 듀얼 한판 할래?”
“응? 아니… 됐어.”
원형의 듀얼 제안을 남해는 멋쩍은 표정으로 거절했다.
이번만이 아니었다. LT유스의 탈락 이후 남해는 학교 안에서 듀얼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한 번 불이 붙으면 반드시 승리해야 직성이 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반드시 최선의 수를 찾아내는 집념과 근성도 보이지 않았다.
도망쳤다면 하지 않아도 됐을 듀얼을 해서 가이저를 잃었고 용연은 떠났다.
용연은 떠나고 가이저가 없어진 전력으로 교대표를 탈락했다.
그리고, 그런 전력으로 LT유스라고 오를 수 있을 리 없었다.
“너… 진짜 괜찮냐?”
“응. 왜…?”
“아니… 너 지금 뭔가… 그… 혼이 나간 거 같아.”
맞다.
LT유스마저 탈락한 그날, 남해는 교회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 한참을 구토하며 속에 든 걸 모조리 비워냈다.
스스로가 너무 혐오스럽고 한심했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으로 가진 기회와 명예를 모조리 날려버렸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방법도 모르겠다.
“쟤 왜 저러냐? 뭔 일 있대? 혹시 미자 걔?”
“있을 거면 진즉 그랬지. 그리고 미자 걔랑은 여름방학 전에 서로 일정 안 되서 갈라졌잖아. 게다가 남해 쟤 미자랑 사귄 적도 없고.”
“엥, 진짜? 난 왜 몰랐지?!”
“너 야자 째다가 붙들린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그… 그렇군…”
원형과 준오도 남해에게서 느껴지는 그 어두운 기운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뭔 일이 있던 건 맞는데, 그게 무슨 일인지를 모르니 참 답답했다.
금선과 낙랑조차도 남해가 대체 어디부터 꼬였는지 모르고 남해 본인 역시 설명을 거부하고 있으니 이해할 수 없었다.
“지민이 넌 알겠냐?”
“뭔지는 알겠는데… 그러면 지금은 건드릴 때가 아냐.”
오늘은 그때 우산을 받았던 그날처럼 낙랑과 금선도 일정이 맞지 않아 남해는 혼자 교회로 가야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남해는 도통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안 그래도 잠을 설쳐서 피곤하기까지 했던 남해는 꾸벅, 꾸벅 졸다…
덜컹-!
“으… 으… 으?”
내려야 되는 정류장을 지나치면서 깨고 말았다.
남해는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있나, 급하게 다음 정류장에서라도 내리기 위해 하차벨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 씨… 이게 뭐야…”
삑-! 버스에서 내린 남해는 괜히 투덜거렸다. 딱 한 정거장. 버스를 타고 가기엔 너무 가깝고, 남은 배차간격도 한참.
한숨을 푹 내쉰 남해. 남해가 내린 선택은 그냥 걸어서 귀가하는 것이었다.
날씨는 춥고 바람은 거세다. 거기에 몸은 힘들고 언덕길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긴지 모르겠다.
가로등도 아직 켜지지 않았는데 구름은 두꺼워서 벌써부터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버스에서 잘못 내리지 않았다면 평소에는 다니지 않았을 방향이라 생각하니 더 억울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이나 언덕길을 오르던 남해는 문득 포장마차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요즘은 포장마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어두운 길거리라 그럴까, 그 포장마차는 유독 냄새도 맛있고 모습도 밝게 빛나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빨려 들어가듯 남해는 포장마차 안에 들어갔다.
“아직 장사 준비 덜 됐어요.”
포장마차 주인은 일이 바쁜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한참 어수선한 안쪽을 정리하고 있었다.
남해는 그 말을 듣지 못하고 멍하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보니 주머니에 돈은 있던가.
“응?”
손님이 아직도 앉아있는 것을 본 포장마차 주인은 남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돈은 있니?”
남해는 급하게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하긴. 아직 열지도 않은 가게에 들어오는 정신도 놓고 다니는 사람이 지갑은 제대로 챙길 리 없지. 친구들도 제대로 못 챙기지 너?”
남해에게 그 이야기는 최근 있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는 기폭제였다.
어쩌다 여기 들어와서 배도 고프고 날도 추운데 타박까지 받고 있을까.
“그렇지만… 이럴 줄 몰랐어요.”
“아저씨는 아주 많은 사람을 봤단다. 다들 말은 그렇게 하지.”
“제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어쩔 수 없었단 것만으로 뭐가 달라지니?”
정곡을 찔린 남해가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리던 사이, 포장마차 주인은 어느새 여기저기에서 이것저것 꺼내 남해 앞에 내밀었다.
“저… 돈 없는데요…”
“어제 팔다 남은 거랑 나 먹을 거 빼놨던 거니까 괜찮다. 그냥 먹고 가.”
“그나저나 이런 데에 포장마차가 다 있었네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아저씨는 널 맨날 보고 있는데.”
준비가 덜 됐던 것 치고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나왔다. 닭꼬치도 있고, 어묵도 있고, 따뜻한 어묵 국물도 종이컵에 한잔 담겨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배고프던 와중에 나온 먹을거리들에 남해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종이컵에 손을 가져갔다.
맛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녔지만 눈치를 살피며 기다리는 동안 적당하게 식기라도 한 걸까.
국물은 입 안이 델 정도로 뜨겁지 않으면서도 전신에 온기를 퍼트릴 수 있을 정도로 따뜻했다. 한 번 시동이 걸리고 나니 남해는 멈추지 않았다.
어묵도 맛있었다. 육수가 깊게 배었으면서 어묵 자체의 맛도 빠지지 않았다. 이런 어묵은… 원래 세계에서도 먹어본 적 없었다.
닭꼬치도 흔한 냉동 싸구려 닭꼬치지만 배가 고팠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랫만에 먹는 맛이라 그랬을까?
몇 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꼬치만 남고 고기는 게눈감추듯 사라졌다.
“으하하하하! 어떠냐, 기운 좀 나니? 사람이 어깨 좀 펴고 살아야지!”
주인의 웃음소리에 남해는 자기가 너무 빨리 먹었나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다.
포장마차 주인은 남해가 먹고 남은 그릇을 치우고 아래에서 작은 포도주스 캔음료를 둘 꺼냈다.
“원래 그런 거다. 누구나 넘어질 때가 있고, 곁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느낄 때가 있어. 하고자 했던 일도 실패하고…”
주인아저씨의 말을 남해는 홀린 것처럼 들었다.
그냥 포장마차 사장 아저씨일텐데, 왠지 저 아저씨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꼭…
“그럴 때는 이렇게 멈춰서서 배라도 채우고… 다시 생각해보면 되는 거야. 빈 속으로 억지로 나아가봐야 완전히 비어서 부서질 일만 남았으니까.”
냉장고에서 막 꺼냈는지 음료 캔은 방금 먹은 음식들과 대비되게 아주 차고 시원했다.
자기 몫의 캔뚜껑을 따고, 또 하나의 캔뚜껑을 딴 다음 주인이 건넨 두 번째 캔을 받은 남해는 이번에는 그냥 바로 음료를 마셨다.
“아, 그렇다고 멈춰서라는 말이 아예 다 던지란 건 아니야. 기회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니까 기회를 모두 잃었다고 절망할 게 아니고, 다음 기회가 왔을 때 붙잡을 준비를 속에 가득 채워야지.”
“제게 기회가 더 있을까요?”
“글세? 혹시 모르는 거 아니냐? 천재일우의 마지막 기회가 하늘에서 정말로 뚝 떨어질지.”
남해는 주인아저씨의 이야기를 멍하니 듣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볍게 인사하며 포장마차 밖으로 나왔다.
다시 교회로 향하던 남해. 문득 언덕을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가로등은 켜지지 않았고 차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 포장마차가 있어 길이 어둡진 않았다.
그 모습이 남해는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다. 마치 교회에 걸려있던 그림에서 본…
“…등불 같네.”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속을 든든히 채운 덕분일까. 지금까지 오른 길보다 남은 길이 더 멀었음에도 남해는 추위와 바람이 아까만큼 매섭지 않았다.
마침 때맞춰서 가로등 불빛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언덕 꼭대기에 있는 교회가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서는 마침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남해의 발걸음 소리는 미사 소리에 묻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히 방으로 돌아간 남해가 방의 불을 켜니 뭔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 위에 아침에는 없던 것들이 놓여있었다.
“이건…”
목사님이 남긴 쪽지와 카드들이었다.
오늘 아침 같았다면 그냥 적당히 책상 한구석으로 치워버리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카드의 숫자에 조금 놀란 남해. 카드를 한 장씩 이름과 효과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원래 내 덱에 있던 카드인데, 잘 쓰지도 않는 나보단 네가 쓰는 쪽이 더 나을 거 같구나.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지 생각해봤다만…
한참이나 목사가 남긴 쪽지를 읽고서 남해는 침대 위에 앉은 다음 팔의 D-패드를 풀었다.
그러곤 덱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나갔다.
그래, 절망하고 멈춰설 수는 있지만 아직 다 끝난게 아니니까. 동계 교대표도 남아있고… 아직… 세상이 무너진 건 아니니까.
잠시 미사 사이의 쉬는 시간, 목사가 아침에 본 남해의 얼굴이 기억나 남해의 방 앞까지 왔다. 그렇지만, 문틈으로 살짝 보인 남해의 모습에 목사는 별 말 없이 조용하게 문을 닫고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갔다.
때르르릉-
“아, 은월이냐?”
-“나형, 나형!! 남해 걔가 LT유스 몇위로 탈락했죠?!”
전화를 받자마자 목사의 귀에 시끄럽고 다급한 목소리로 채은월 교장의 목소리가 꽂혔다. 목사는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되짚어봤다.
본선 진출한 건 금선이고, 남해는…
윤열이네 조카한테 졌지.
윤열이네 조카가 거기서 이기고 본선에 진출했으니까…
“조 2위로 탈락했지?”
-“형 혹시 피버 듀얼리그 때 기억나요?! 그때 한 명 기권해서-”
“아 그래, 하나 자리 비었다고 와일드 카드로 조 2위만 모아다 딱 한 명 본선에 올려줬…”
목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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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치스의 원래 용도가 교회에서 술 못 마시는 사람들에게 포도주 대신 쓰던 음료거든요 설마 웰치스로 안 보이면 어쩌지 했는데 바로 그 생각부터 들었다고 하니 성공이네요 | 24.02.06 19: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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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스포츠계에서나 드라마틱한 사연 하나씩은 있지요. 그쪽 업계도 잘 되길 바래요. | 24.02.06 2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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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희망고문실 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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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이번에도 낚시일까요? 알려드리지 않스빈다! | 24.02.06 2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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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원챈스 | 24.02.06 2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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