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유진: 패 2장]
[재버워키: 패 0장]
유진 역시 기나긴 궤변을 듣는 것에도 한계가 있던 참이었다.
저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 것일까.
'초융합'의 패 코스트는 가뜩이나 어드밴티지를 깎아먹는 융합 소환을 빈번히 하는 덱 입장에서는 상당히 무겁게 다가왔을 터. 그렇게 해서까지 패를 다 썼으면서 자신의 LP를 다 깎아내지도 못했으니 실책이라고 봐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진은 재버워키가 세트한 카드의 성능 확인을 빼먹지 않았다. 분명 저 카드에는 '알버스'나 '초융합'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몬스터를 소재로 융합 소재로 삼아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에어로그린'으로 당장 필드의 카드를 치운다고 해도 이미 뒤집힌 함정은 발동 조건이 채워진 상태.
당장 막을 만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맞더라도 최대한 손해를 덜 보는 방법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메인 페이즈. '에어로그린'의 ②의 효과로, 이번엔 '실낙인'을 패로 되돌린다."
체인은 걸리지 않는다.
[재버워키: 패 1장]
"그 다음 '탐욕의 항아리'. 묘지의 몬스터 5장을 덱으로 되돌린 다음 2장 드로우, 그리고 묘지에서 '방해받은 파괴수의 잠'을 제외하고 ②의 효과를 사용. 덱에서 '파괴수' 1장을 가져온다."
[서문유진: 패 4장]
"지속 마법 '파괴수의 출현기록'. 그 다음 '루벨리온'을 릴리스하고, 패에서 '점사파괴수 쿠모구스'를 상대 필드에 특수 소환."
[점사파괴수 쿠모구스: 곤충족 / 땅 / 레벨 7 / ATK 2400 / DEF 2500]
[서문유진: 패 2장]
"'파괴수의 출현기록'의 ①의 효과. 패에서 '파괴수'가 특수 소환될 때마다 이 카드에 '파괴수 카운터'를 1개 놓는다. 이어서 ②의 효과로 필드에 있는 '파괴수'를 파괴하고, 덱에서 다른 '파괴수' 하나를 컨트롤러의 필드에 특수 소환한다. '괴분파괴수 가다라'를 수비 표시로 특수 소환. 이걸로 파괴수 카운터 1개 더 추가!"
[괴분파괴수 가다라: 곤충족 / 바람 / 레벨 8 / ATK 2700 / DEF 1600]
[파괴수의 출현기록: 파괴수 카운터 0 → 2]
'이제…. 어, 잠깐…!?'
또 꺼낼 카드가 없을지 궁리하던 유진은 그제서야 뒤늦게 떠올렸다. '에어로그린'으로 '가다라'를 패로 되돌렸다면 또다시 상대 몬스터를 잡아먹을 수 있는 '파괴수'를 갖출 수가 있었음을.
어차피 지금의 자신에게 융합 소환 자체를 견제할 수 있는 카드는 주어지지 않았으니 '실낙인'을 건드릴 의미 따위는 없지 않았는가.
'또 이러기야? 이런 상황에서? 제발…, 아니.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어리숙함에 이가 갈릴 것만 같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더 꺼낼 것이 없음을 확인한 유진은 그냥 공격에 들어가기로 한다.
"배틀! '에어로그린'으로 '가다라'를 공격!"
웅크리며 내려앉은 거대 나방을 회오리에 실린 킥으로 내려찍음으로서 격퇴한다.
그러나 이것이 끝. 실책을 저질렀기에 별다른 데미지도 주지 못했다. 정녕 여기서 더 깎아내릴 수 있을 것인가.
"메인 페이즈 2. 카드 1장을 세트하고 턴……."
"잠깐, 그 전에 함정 카드 '낙인추방'을 발동."
"그럼 '증식의 G'로 체인!"
[서문유진: 패 0장]
"오호, 아직 턴도 안 끝났는데 과감하네. 어쨌든 이걸로 묘지에서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를 특수 소환."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1800]
[서문유진: 패 1장]
'온다!'
"그리고 어둠 속성의 '드라마트루기아'와 융합 몬스터인 '가루라'를 제외, 엑스트라 덱에서 레벨 8의 '포식식물(프레데터 플랜츠) 드라고스타페리아'를 융합 소환! '드라마르투기아'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귀환이야."
[프레데터 플랜츠 드라고스타페리아: 식물족 / 어둠 / 레벨 8 / ATK 2700 / DEF 1900]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1800]
[서문유진: 패 3장]
패를 늘리기는 했지만 결국 이번에도 성가신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유진 자신의 몬스터는 남았다는 것일까. 역시 바람 속성을 소재로 삼는 몬스터를 넣지 않았기에 '에어로그린'이 소재로서 휘말리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엔드 페이즈에 묘지로 간 '알비온'의 ②의 효과. 덱에서 '낙인흉명'을 세트. 그럼 진짜 내 턴이지."
[재버워키: 패 2장]
[서문유진: 패 3장]
패를 확인한 재버워키가 아쉬움을 드러낸다.
"할 게 없네. 그대로 배틀, '드라마트루기아'로 '에어로그린'을 공격.'
[서문유진: LP 4400 → 3200]
"이어서 '드라고스타페리아'로…."
"속공 마법 '희생양'! '양 토큰' 4마리를 특수 소환!"
[양 토큰: 야수족 / 땅 / 레벨 1 / ATK 0 / DEF 0]
[양 토큰: 야수족 / 땅 / 레벨 1 / ATK 0 / DEF 0]
[양 토큰: 야수족 / 땅 / 레벨 1 / ATK 0 / DEF 0]
[양 토큰: 야수족 / 땅 / 레벨 1 / ATK 0 / DEF 0]
"…'양 토큰' 하나를 공격."
용의 모습을 한 식물형 괴물의 꼬리가 필드에 갑자기 튀어나온 양 한 마리를 채찍처럼 후려친다.
나무줄기처럼 굵고 거친 저 꼬리에 얻어맞는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를 생각하니, 유진은 눈을 질끈 감아버릴 것만 같다. 아마도 세트 카드가 없었으면 그 고통을 직접 체감해야 했을 것이다.
"카드 1장을 세트. 턴 엔드야."
재버워키는 '실낙인'을 다시 꺼내지 않고 턴을 마쳤다. 그 말인즉, 저것은 융합 소환을 실행시키는 카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 편, '희생양'을 발동한 턴에는 다른 소환이 일체 불가능하다는 리스크가 있었기에 다른 링크 몬스터를 되살리는 '에어로그린'의 효과가 발동하는 일도 없었다.
"내 턴!"
[서문유진: 패 4장]
[재버워키: 패 1장]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파괴수' 카드가 유진의 패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혀를 차기도 전에 재버워키가 바로 카드를 써 오기 시작한다.
"바로 실례할게. 함정 카드 '삼위일택'."
"그건…."
"융합, 싱크로, 엑시즈 중에서 하나를 선언하고, 둘 다 엑스트라 덱을 확인해서 선언한 몬스터가 많은 쪽이 3000 LP를 회복할 수가 있어."
생소하지만 지식이 아예 없지만은 않은 카드. 활용도를 장담하기 힘든 그런 카드가 목숨이 걸린 듀얼에서 갑자기 등장한다는 것은 유진에게 알 수 없는 긴장을 안긴다.
이 등장은 마치 자신이 전력을 다해 올 것을 당연히 짐작했다는 듯한 전개가 아닌가.
"그래. 서로 알아가는 거야. 뭘 숨겨놨는지, 뭐가 남았는지. 내가 선언할 건 융합 몬스터. 자, 확인해야겠지?"
조롱이든, 다른 무언가의 감정이든 품었을지 모를 음흉한 시선을 보내며 재버워키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꺼림칙한 기분에 휩싸여도 유진은 카드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D-패드 화면에 표시되는 재버워키의 엑스트라 덱 리스트를 살펴보니, 예상대로 보라색 테두리의 카드들이 즐비해있었다.
그런 가운데 예상했던 카드들과 처음 보는 카드들이 섞여 있는 카드들을 확인한다. '데스피아'나 '알버스' 융합체가 대부분인 가운데, 아무리 봐도 문제의 '초융합'으로 꺼낼 것을 염두에 둔 듯한 카드가 아직 더 남아있다.
'이건, 잠깐만….'
이들은 앞으로 있을 위협을 암시하면서도, 지금까지의 흐름과는 크게 다를 것 없을 플레잉을 예상케 했다. 융합 소환을 저지한다면 승산은 있다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재버워키의 미래를 들여다본 것이나 다름없으니, 대비책을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갖춰보기로 했다.
"음, 역시 파랗구나."
문제는 저쪽도 마찬가지라는 것일까. 듀얼을 진행하면서 수가 줄기는 했어도 여전히 파란색 비중이 많은 행렬을 보고 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드러낸다.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승리할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잘 봤어. 융합 몬스터는 내쪽이 더 많으니까 라이프 회복은 내 차지네."
[재버워키: LP 450 → 3450]
단번에 재버워키의 LP가 유진을 근소하게 앞질러버린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ET레인저'를 비롯한 링크 몬스터를 주력으로 쓰는 자신이, 융합 소환이 주력인 '데스피아' 덱의 사용자를 제치고 LP 회복이라는 보상을 얻을 가능성 따윈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준비해 둔 카드가 저것뿐이라는 것은 이제 눈앞에 버티는 몬스터들만 조심하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땅 속성 몬스터인 '양 토큰' 2마리를 소재로, 엑스트라 몬스터 존에 'ET레인저 지오옐로'를 링크 소환."
[ET레인저 지오옐로: 사이킥족 / 땅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링크 소환한 '지오옐로'의 ①의 효과."
"체인해서 '드라마트루기아'의 ①의 효과를 사용. 효과 몬스터 1장의 효과를 무효로 하지."
예상대로 첫 효과는 막혔다.
"그럼 '지오옐로'와 나머지 '양 토큰'을 소재로 '트로이메어 케로베로스'을 링크 소환."
[트로이메어 케로베로스: 악마족 / 땅 / LINK-2 / ATK 1600 / 링크 마커 ←↑]
"'케로베로스'의 효과. 패 1장을 버리고, 특수 소환된 몬스터 하나를 파괴한다."
"'드라고스타페리아'의 ①의 효과. 상대의 앞면 표시 몬스터 1장에 포식 카운터를 놓는다. 물론 '케로베로스'한테."
[트로이메어 케로베로스: 포식 카운터 0 → 1]
[서문유진: 패 3장]
"그리고 포식 카운터가 놓인 몬스터의 효과는 무효로."
그 다음 수도 막혔다. 유진은 남은 카드를 살핀다.
"그 다음 2장째 '카구야'를 소환."
[페어리테일-카구야: 마법사족 / 빛 / 레벨 4 / ATK 1850 / DEF 1000]
"'카구야'가 소환되면 덱에서 공격력 1850의 마법사족 몬스터 하나를 서치할 수 있어. 3장째 '카구야'를 가져오고, 계속해서 '카구야'의 ②의 효과를 사용. 자신과 '드라마트루기아'를 패로 되돌린다."
"'드라마트루기아'라. 마침 덱에 또 있으니까 묘지로 보낼게. 이걸로 '카구야'는 또 무효."
이번에도 역시 막혔다. 하지만 유진은 여전히 침착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상대의 견제 수단을 차근차근, 그리고 수월하게 빼낼 수가 있었으니까.
"계속해서 묘지에 버린 2장째 '기교와'를 제외하고 ②의 효과를 사용. 묘지의 '기교진'을 되살린다."
[기교진-타카쿠라미츠하노오카미: 기계족 / 물 / 레벨 10 / ATK 2950 / DEF 2950]
"몬스터는…, 이 정도면 됐겠지."
링크 2 몬스터를 소재로 썼으면서 링크 3의 '유니콘'을 두고 굳이 링크 2를 꺼낸 이유. 그것을 유진의 엑스트라 덱을 확인한 재버워키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준비를 갖췄는지도.
"지금 꺼낼 거야?"
"그래. 암만 뭐가 나올지 알아봤자, 막을 수단이 없으면 소용없겠지."
유진의 비아냥을 듣고도 재버워키는 히죽이는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소환 조건은 효과 몬스터 4장. 거기에 상대 몬스터 하나도 소재로 삼을 수가 있어."
"오호."
"아까 내 몬스터 뺏어갔으니까, 이번엔 내 쪽에서 갚아줄 차례야. 나는 '케로베로스', '기교진', '카구야' 그리고 '드라마트루기아'를 링크 마커에 세트!"
여느 때처럼 필드에 나타난 링크 마커에, 가장 높은 타점을 보유한 적진의 '드라마트루기아'가 억지로 빨려나가듯 소재가 되어 사라진다.
"링크 소환! 모든 것을 근절하는 어둠 속의 유일한 빛! 링크 5 '닫힌 세계의 명신(사로스=에레스 쿠르누기아스)'!"
유진의 몬스터, 그리고 재버워키의 몬스터까지 소재로 삼아 링크 마커로부터 나타난 것은, 금빛 프릴로 장식된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신.
흑요석처럼 검은 머릿결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붉은 눈동자의 대비가 도도한 미모를 돋보이고 있었다. 드레스 뒤에 달린 망토자락은 검은 날개처럼 제 스스로 공중에 펄럭이고 있다.
그 주위에는 그림자처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용 한 마리가 떠도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사로스=에레스 쿠르누기아스: 악마족 / 빛 / LINK-5 / ATK 3000 / 링크 마커 ↑↗→↓↘]
"쿠르누기아스'가 링크 소환되면, 상대 필드의 모든 앞면 표시 몬스터의 효과를 무효로 할 수 있어."
"효과는 이미 썼지만."
여신의 등장과 함께 주변을 자극하는 빛에 '드라고스타페리아'가 움츠러든다.
"배틀, '쿠르누기아스'로 '드라고스타페리아'를 공격!"
이어서 여신은 그 몬스터를 향해 지팡이를 들어올린다. 끝부분에 달린 흑옥으로부터 빛을 빨아들일 기세의 시커먼 오오라가 뿜어져나왔다.
오오라가 만들어낸 어둠의 파장은 '드라고스타페리아'를 감싸더니, 현세로부터 괴리시키듯 그 모습을 깔끔하게 지워버린다.
[재버워키: LP 3450 → 3150]
재버워키는 세트한 '낙인흉명'을 잠시 흘겨보았다.
묘지에서 특수 소환하는 효과를 턴마다 막아대는 효과를 가진 '쿠르누기아스'가 있는 이상, 이 카드는 현 시점에서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공격을 마치고 단지 서있을 뿐인 '쿠르누기아스'의 시선은 그녀에게 엄중한 감시를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곤란하네. 진짜로 그런 게 나올 줄이야."
그런 재버워키의 불평이 진심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유진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특수 소환의 한 축을 막는 것만으로도 전력을 막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낙인흉명', '드라마트루기아'처럼 성가신 카드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이 카드가 버텨주는 동안은.
"카드를 1장 세트. 턴 종료시에 묘지에 있는 '지오옐로'의 효과로, 묘지에서 '파이로레드'를 부활."
[ET레인저 파이로레드: 사이킥족 / 화염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그럼 내 턴이네. 잘 뽑혀야 될 텐데."
[재버워키: 패 2장]
[서문유진: 패 2장]
딱히 긴장한 내색을 보이지도 않던 재버워키는, 마치 놀람을 가장한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뽑힌 카드를 확인한다.
'호오. 마침 딱 나와줬네."
"뭐가."
"운명을 정할 수 있는 카드 말야. 마법 카드 '컵 오브 에이스'."
발동이 이뤄지면서 필드를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한 카드를 보며, 유진은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을 적극적으로 즐긴다는 티라도 내겠다는 듯이 도박 카드를 사용하다니, 목숨을 건 상대를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
"정위치면 내가, 역위치면 네가…"
"스톱!"
설명을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유진이 바로 말을 자른다.
'스톱'이라는 말에 정지한 카드는 뒤집히지 않고 올바른 방향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급하긴. 어쨌든 정위치니까 2장 드로우할게. 고마워."
[재버워키: 패 3장]
그 결과는 유진에게는 결코 좋은 전개가 아니었다. 짜증이 치솟은 가운데 조금은 여유를 두는 게 낫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새롭게 패를 뽑아든다. 그것은 다시 상황을 뒤바꿀 가능성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 된다.
기껏 불러낸 여신으로도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을 정도로.
그러나 더 결정적으로 변수를 틀어막을 수단이, 유진에게는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그럼 세트한 함정 카드 '차원 장벽'을 발동!"
"어머."
무슨 카드를 뽑아서 꺼내던 결국 그녀의 덱은 '낙인' 테마를 중심으로 융합 소환을 구사하는 전술을 보일 터.
그것을 예상한 시점에서 그는 이 카드의 투입을 빼먹지 않았다.
"융합, 싱크로, 엑시즈 중에 내가 선언한 소환법을 그 턴동안 막아버릴 수 있어. 물론 선언할 건 '융합 소환'이야."
"흐음."
이번에도 곤란하다는 시늉일까.
잠시 고민하듯 패를 찬찬히 바라보던 재버워키는, 늦게나마 결심했는지 필드를 버틸 카드를 꺼내들기 시작한다.
"그럼 '대욕의 항아리'. 제외된 '알버스', '마스카레이드', '메르쿠리에'를 덱으로 되돌리고 1장 드로우. 그 다음 네 묘지에 있는 '카구야'를 제외하고, 패에서 2장째 '비스테드 살로니르'를 특수 소환."
[비스테드 살로니르: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6 / ATK 2500 / DEF 2000]
"''살로니르'를 묘지로 보내고, 묘지에 있는 '루벨리온'을 부활."
[더 비스테드 루벨리온: 드래곤족 / 빛 / 레벨 8 / ATK 2500 / DEF 3000]
'루벨리온'의 특수 소환은 발동하는 효과가 아니기에 '쿠르누기아스'로도 막지 못한다.
벌써부터 빈틈을 파고드는 것에 유진은 한 층 더 경계한다.
"묘지로 간 '살로니르'의 ②의 효과로 덱에서 '낙인' 마법이나 함정을 묘지로 보낼 수 있어. '낙인단죄'를 묘지로. 여기에 묘지에서 '낙인단죄'를 제외하고 ②의 효과를 사용. 묘지에서 '혁의 낙인'을 회수. 여기에 '루벨리온'의 효과로 덱에서 '복낙인'을 필드에 세팅."
여기에 장애물이 될 마법 / 함정 역시 재버워키의 필드를 차곡차곡 채워나가고 있었다.
"배틀. '루벨리온'으로 '파이로레드'를 공격."
'루벨리온'의 손등, 가슴 중앙, 그리고 이마에 달린 붉은 구슬이 빛난다. 몸 전체를 뒤덮을 기세로 증폭하기 시작한 붉은 빛은 '루벨리온'이 뻗은 양팔 끝으로 옮겨가면서 한 덩어리로 응축되고, 이를 떠밀듯 적에게 발사한다.
목표물이 된 '파이로레드'는 빛에 휩쓸려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서문유진: LP 3200 → 2500]
그러나 이를 위해 공격 표시로 전환한 '루벨리온'은 더이상 '쿠르누기아스'를 버텨낼 수 없을 터.
"메인 페이즈 2. 지속 마법 '실낙인'을 다시 발동. 그리고 카드를 2장 세트."
이를 대비하기 위함인지 재버워키는 패를 전부 필드에 꺼내들었다. 적어도 하나는 방금 회수해 온 '혁의 낙인'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차원 장벽'의 구속이 풀리는 다음 턴에 곧바로 융합 소환을 밀어붙일 생각임을 유진은 알 수 있었다.
'실낙인'이 나와버린 이상 현 상황에서 이를 제지할 방법은 없다. 선택을 더욱 신중히 기해야 한다.
"그럼 엔드 페이즈에 '파이로레드'의 효과. 묘지에서 '에어로그린'을 부활."
[ET레인저 에어로그린: 사이킥족 / 바람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좋아. 네 턴이야."
"……."
[서문유진: 패 3장]
[재버워키: 패 0장]
'쿠르누기아스'로 적을 직접 때려부술 필요조차 없다. '에어로그린'의 효과로 '루벨리온'을 패로 되돌린 다음 남은 몬스터들로 일제 공격을 가하기만 하면 승리가 이뤄지니까.
그러나 막연히 그 전술을 택하기엔 세트 카드의 존재가 거슬렸다. 대상으로 지목하는 순간 '루벨리온'은 '혁의 낙인'에 의해 융합 소재가 되어 빠져나갈 것이 분명하다. 물론 딱히 지목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활용해야 좋을까.
"혹시, 지금 행복한 고민 중?"
"역시…"
"응. 아직 그럴 때 아니거든. 세트한 '혁의 낙인'을 지금 발동. 이걸로 묘지에서 '드라마트루기아'를 즉시 회수."
또다른 시련을 자꾸만 안기려는 데에 주저함이라고는 없다. 유진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패에 있는 '드라마트루기아', 필드의 '루벨리온'을 제외하고 융합 소환. '쿠에리테스'를 다시 무대로! 물론 '드라마트루기아'도 같이."
[데스피아안 쿠에리티스: 악마족 / 빛 / 레벨 8 / ATK 2500 / DEF 2500]
[데스피아 드라마트루기아: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1500]
그 예정조화에 끼어들 틈은 없다. 다시 나와버린 '실낙인'은 융합 소환 전후에 상대가 어떤 간섭도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으니까.
"이어서 융합 소환을 마쳤으니 '실낙인'의 ②의 효과. 이번엔 덱에서 '헌원의 상검사'를 서치. 그리고 융합 소환 중에 카드가 제외됐으니까 '복낙인'의 효과. 제외된 '루벨리온'을 덱으로 되돌리고 1장 드로우."
나름 견고한 견제책이다. 자신의 운명을 농락할 융합 몬스터에게 손끝 하나도 건드리게 두지 않겠다는 기세가 보인다.
그러나, 기어이 건드릴 수 있는 수단이 유진에게는 드디어 잡혀있는 것이었다.
"그럼 '쿠에리테스'를 릴리스. '도고란'을 상대 필드에 특수 소환!"
[노염파괴수 도고란: 공룡족 / 화염 / 레벨 8 / ATK 3000 / DEF 1200]
[파괴수의 출현기록: 파괴수 카운터 2 → 3]
"어이쿠."
'쿠에리테스'가 효과를 시전할 틈도 없이, 그 자리를 이전에도 이미 나타났었던 거대 괴수가 대체한다.
"여기에 '파괴수의 출현기록'의 ①의 효과! '도고란'을 파괴하고, 컨트롤러의 필드에 '가메시엘'을 특수 소환!"
[해귀파괴수 가메시엘: 물족 / 물 / 레벨 8 / ATK 2200 / DEF 3000]
"그 다음 3장째 '카구야'를 소환. ①의 효과로 덱에서 '페어리테일-백설'을 추가."
[페어리테일-카구야: 마법사족 / 빛 / 레벨 4 / ATK 1850 / DEF 1000]
[서문유진: 패 1장]
"계속해서 ②의 효과. 이번엔 네 필드의 '가메시엘'을 되돌릴 거야. 혹시 네 덱에도 그 카드가 있어?"
그 질문에 재버워키는 고개를 가볍게 저을 뿐.
드디어 효과가 수락되면서 '카구야'와 '가메시엘'이 동시에 모습을 감춘다.
[서문유진: 패 3장]
"좋아. 이걸로 '가메시엘은 패로 회수. 그 다음 남은 '드라마트루기아'를 릴리스하고, 패에 있는 '가메시엘'을 다시 특수 소환!"
[해귀파괴수 가메시엘: 물족 / 어둠 / 레벨 8 / ATK 2200 / DEF 3000]
[파괴수의 출현기록: 파괴수 카운터 3 → 4]
"'에어로그린'의 ②의 효과. '가메시엘'을 다시 한 번 패로 되돌린다!"
이것으로 재버워키의 몬스터 존을 깔끔하게 치우는 데에 성공했다.
내성이든, 타점이든, 어떤 강력한 몬스터를 내세운다고 해도 간단하게 파훼할 수 있게 해주는 테마. 그것이 질서 잡힌 문명의 도시를 뒤흔드는 혼돈의 상징 '파괴수'다.
그 자신들도 만만찮은 능력치를 자랑하는 괴물들인 만큼 이를 상대 필드에 내놓는다는 것만으로도 리스크가 되지만, 이를 극복할 수단이야 유진의 덱에 이미 갖춰놓은 뒤였다.
다만, 그 선택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아직 건너야 할 길이 남아 있었다.
"좋아. 배틀! '에어로그린'으로 상대에게 다이렉트 어택!"
"패에 있는 '헌원의 상검사'의 효과! 이 카드를 특수 소환하고, 그 공격을 무효로 하지."
[헌원의 상검사: 마법사족 / 빛 / 레벨 4 / ATK 1800 / DEF 1500]
'에어로그린'이 무방비 상태가 된 적에게 발차기를 날리려는 찰나, 그 주인을 보호하려는 듯 용맹해 보이는 청년 2인조가 궤도 앞에 불쑥 나타난다. 폭풍을 타고 가속도가 붙은 '에어로그린'의 발은 청년들이 방어를 위해 뻗은 칼자루에 가로막히고는 내쫓기듯 튕겨나갔다.
"칫, 그럼 '쿠르누기아스'로 '헌원의 상검사'를 공격!"
그러한 방어는 뒤이어 공격에 들어간 여신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지팡이가 내뿜는 검은 아우라의 일격은 두 청년의 모습마저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어찌 됐든 이번에도 재버워키의 LP를 깎는 데에는 실패.
"메인 페이즈 2. 카드를 1장 세트. 턴 엔드야."
"휴. 살았네."
[재버워키: 패 2장]
[서문유진: 패 2장]
"먼저 패에 있는 '스프리건즈 키트'의 효과. 내 묘지에 '일버스의 낙윤'을 소재로 하는 융합 몬스터가 있으면, 이 카드를 특수 소환."
[스프리건즈 키트: 야수족 / 어둠 / 레벨 4 / ATK 1700 / DEF 1000]
"특수 소환된 '키트'의 ②의 효과. 묘지의 '혁의 낙인'을 패로 가져온 다음, 패를 1장 덱 맨 아래로 되돌린다. 그 다음 '데스피아의 도화 알베르'를 소환. '알베르'의 ①의 효과로 방금 덱에 되돌린 '혁의 낙인'을 가져올게."
[데스피아의 도화 알베르: 천사족 / 어둠 / 레벨 4 / ATK 1800 / DEF 0]
"그 다음 효과 몬스터인 '키트'와 '알베르' 둘을 소재로, 링크 2 '프레데터 플랜츠 베르테 아나콘다'를 링크 소환."
[프레데터 플랜츠 베르테 아나콘다: 식물족 / 어둠 / LINK-2 / ATK 500 / 링크 마커 ↙↘]
큰 구렁이처럼 몸을 구불거리고 주둥이를 벌리는 식물형 괴물. 그것은 재버워키가 꺼내는 엑스트라 몬스터 중에서는 처음으로 융합 몬스터가 아닌 엑스트라 덱 몬스터였다.
물론 이미 확인이 끝났으니 계산 안에 포함은 되어 있었다.
다만 유진에게 의문인 것은, 저것을 왜 굳이 지금 꺼내느냐는 것이었다.
전에 사용한 '융합 재현'처럼 '베르테 아나콘다'는 LP 코스트를 지불하고 덱에 있는 '융합', '퓨전' 마법 카드를 복사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분명 패에 들어오지 않은 융합 카드를 쓰게 해준다는 것은 좋지만, 방금 전 '알베르'의 효과로 '낙인융합'을 직접 가져오는 것이 가능했을 터.
링크 소환을 해버렸으니 이번 턴에 '낙인융합'을 쓸 수가 없다지만, 저런 것을 굳이 꺼내지 않았어도 강한 융합 몬스터를 꺼내기가 어렵지 않았을 텐데. 더구나 그 효과를 쓰고 나면 그 턴에 다른 특수 소환이 막혀버리니 '낙인융합'으로 불러오기 좋은 '알비온'과 그렇게 상성이 좋은 편도 아니다.
그러나 곧 유진은 다른 선택지가 또 있었음을 가늠하고 다시금 소름이 돋는다.
상상해버린 것보다 더 끔찍한 전개가 기다리고 있음을 미처 알지 못한 채.
"이걸로 무대가 또다시 갖춰졌네."
서로가 서로의 목을 노리고 치기 위해 진영을 세운다. 그걸 위해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 피로를 부른다.
충분히 휴식을 취했을 유진이 긴장과 분노로 간신히 버티는 와중에도, 재버워키는 여전히 생생하게 미소짓고 있을 뿐.
"너한테 감사해야지. 몇 번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준 덕분에, 이렇게 쟁쟁한 배우들을 갖추도록 도와줬으니까."
최악의 사태를 짐작한 유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묻는다.
"…또 뭐가 있는데?"
"그거 알아?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 세 번 일어날 수 있다는 거?"
"무슨 뜻이냐고?"
"앙코르 타임이란 거지. 본 걸 또 볼 수록 재미는 떨어지겠지만, 그 끝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릴 수도 있으니까 기대하게 되거든."
예상 못한 사태도 아닌, 예상하고 있는 사태.
그것을 꼼짝도 못하고 맞이해야 된다는 상황이 오히려 더 끔찍하게 다가온다.
"세트한 '융합 복제(퓨전 듀플리케이션)'을 발동. 묘지의 '융합'이나 '퓨전' 마법 카드 하나를 제외해서 효과를 적용하는 함정 카드야."
"그럼 설마…!"
"그래. 내가 선택할 건 '초융합'. 이걸로 내 필드의 '베르테 아나콘다', 그리고 네 필드의 링크 몬스터 둘을 소재로 삼아줄게."
이번에도 먹구름과 함께 강렬한 소용돌이가 필드에 몰아치기 시작하자, 소재로 지정된 유진의 링크 몬스터들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빨려들어나갔다.
이전과 같은 참상. 그것은 적을 감시하며 위세를 떨치던 여신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전에 자신이 버텨내느냐 마냐다.
"깨어난 혼은 새로운 생명이 되어 날갯짓한다. 신의 힘이 함께 하는 그 인연이야말로 필연! 융합 소환, '성잔의 수호룡 알마두크'!"
[성잔의 수호룡 알마두크: 드래곤족 / 바람 / 레벨 9 / ATK 3000 / DEF 2500]
날갯짓 한 번으로 폭풍을 떨쳐내며 성스럽고도 건장해보이는 드래곤 한 마리가 포효한다.
그 드래곤의 이름은 '알마두크'. 유진이 이미 '삼위일택'으로 확인해놓은 몬스터이면서도, 유진 자신도 소지하고 있었기에 전부터 알고 있는 카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분명 링크 몬스터로 상대하기에는 까다로운 적이긴 하지만, 저 카드 하나의 소재를 갖추기 위해 셋이나 되는 링크 몬스터를 갖춰놓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터. 그러나 상대 몬스터까지 소재로 삼는 '초융합'을 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로가 어떤 카드를 쓰는지 이미 확인한 적이 있었기에, 그런 저격용 카드를 투입해뒀으리라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다. 그러니 엑스트라 덱에서 확인했을 때도 놀랄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지 않을 뿐이지 두렵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늦건 빠르건, 자신이 버티기 위해 시도해왔던 대책은 어떻게든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현 환경에서 승부를 판가름할 엑스트라 덱의 전력을 다 알았다고는 해도, 어떻게 그걸 꺼낼지, 어떤 식으로 쓰일지, 또 진짜로 쓰이기는 할지를, 덱까지 다 확인하지 않는 이상 온전히 다 막아낼 수 있을리가 없다.
그러니, 그것이야말로 그가 직면해야 할 운명이었다.
"어때, 뭐가 나올지 알아도 막을 수단이 없는 기분은?"
"……."
방금 전에 본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받는다.
머리가 얼얼해질 듯한 충격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유진은, 문득 떠올린 의문을 입 밖에 내뱉는다.
정확히는, 그 카드를 확인한 순간부터 들었던 의문이었다.
"…왜 그런 걸 진작 안 꺼냈어?"
링크 몬스터 세 마리. 그런 조건이 이미 전 턴에도 갖춰져 있었을 텐데. 그걸 꺼내면서 '아폴로우사'마저 깔끔하게 치웠더라면, 후속으로 내놓는 다른 융합 몬스터들로 자신을 끝장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 선택을 그 때 그녀는 하지 않았을까.
"글쎄. 생각 못 했다고 하면 믿어줄래?"
"아직도 날 무시해?"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너도 아까 기회를 놓쳤잖아?"
"……."
방금 전의 실책을 꿰뚫은 재버워키의 발언에 유진은 또 잠시 경직했다.
"난 프로 듀얼리스트도 카드 프로페서도 아니거든. 그런 일방적인 승부에만 집중했다간 중요한 재미를 놓치는 법이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승부가 허망하게 끝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재미?"
"그래. 엔터테인먼트. 내가 이런 게임을 열고 즐기는 이유 말야."
그런 이유랍시고 꺼내는 말에 유진은 오히려 이를 갈았다.
"기 다음 승, 승 다음 전, 그리고 전 다음 결. 그렇게 빌드업을 갖춘 결이야말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어. 동료들과의 이별을 겪고 성장한 네가, 사력을 다한 끝에 맞이하는 것이 또다른 이별이라면. 그 때 비로소 깨달음을 얻고 뒤따라서 하나가 되는 결말이 찾아온다면…."
짝 손벽을 치는 소리와 함께 재버워키가 기도하듯 손을 모은다.
"…그만한 엔딩이 또 있을까? 그냥 한꺼번에 끝나는 것보다 낫잖아?"
"……."
본인만의 만족스런 결말을 맞이하기 위한 장난감. 그 중 하나로서 자신을 다루고 있다. 그것이 무시가 아니면 무엇인가.
유진은 치가 떨려온다. 본인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든 채 남들을 동의도 없이 끌어들이는 저 헛소리를 더이상 들어주기가 힘들다.
"안 끝나. 꼭 이겨서 그딴 소리 더 못하게 할 거야."
"그럼. 또 일어설 준비를 해야지. 쇼는 계속 되니까."
그런 유진의 분노를, 변함없이 재버워키는 흐뭇하게 대꾸하고만 있었다. 또 다음을 기대하라는 듯이.
"융합 소환했으니까 이번에도 '실낙인'의 ②의 효과. 이번엔 '메르쿠리에'를 서치."
'베르테 아나콘다'의 힘을 빌리지 않았기에 그녀에게는 아직도 특수 소환의 기회가 남아 있다. 그러니 패에 있는 또다른 카드를 마음 놓고 쓸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 '혁의 낙인'을 발동해서 묘지의 '드라마트루기아'를 회수. 패의 '드라마트루기아'와 '메르쿠리에'를 제외하고 '혁작룡 마스카레이드'를 융합 소환! 물론 이번에도 '드라마트루기아'가 함께!"
[혁작룡 마스카레이드: 악마족 / 어둠 / 레벨 8 / ATK 2500 / DEF 2000]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1800]
"'메르쿠리에'가 제외됐으니 ②의 효과. 이번엔 '낙인의 심판'을 서치."
[재버워키: 패 1장]
유진은 또다시 순식간에 전개된 몬스터들을 마주한다.
몬스터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자신에게 당장 눈앞의 적을 쓰러뜨릴 수단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발버둥친 끝에 넘어설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힌 이 상황, 거기서 주저앉는 모습을 즐길 생각이라면.
"그럼…"
"배틀 페이즈 전에 함정 카드 '위협하는 포효'!"
[서문유진: LP 2500 → 1900]
"이걸로 공격은 못해."
"…역시 재밌어."
한 번이라도 먹힌다면 그대로 끝났을 일격이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럼에도 재버워키는 흥미로워만 할 뿐이다.
"'거울의 힘' 같은 수단도 있을 텐데, 굳이 몬스터를 남기는 선택을 했단 말이지. 무슨 재미있는 계획이라도 있어?"
"있어도 알려줄 건 없어."
"호오."
그 선택의 효과는 분명 있었다. '거울의 힘' 같은 정직한 공격 반응형 카드는 그 전에 파괴되면 무용지물이거니와, 발동에 성공해서 몬스터를 파괴했더라도 세트한 '낙인흉명'을 써서 다시 공격해 오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공격 기회 자체를 차단해버리는 편이 낫다.
무슨 덱을 쓰는지 짐작을 해왔다고는 해도, 마치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까지 알았다는 것만 같다.
"더 할 게 있어, 없어?"
"음…, 카드를 1장 세트."
무슨 카드인지 다 읽힌다. 이걸로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립할 수가 있다.
유진은 그렇게 조금씩 희망을 쌓아갔다.
"그럼 엔드 페이즈에 '에어로그린'의 효과. 묘지에서 '지오옐로'를 부활!"
[ET레인저 지오옐로: 사이킥족 / 땅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서문유진: LP 1900 → 1300]
"이제 내 턴이야!"
[서문유진: 패 3장]
[재버워키: 패 0장]
그러나 유진의 LP는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설령 상대의 패가 없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그런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기회를 넘겨줬다간 그대로 끝일 것이 분명하다.
즉 희망의 불꽃이 켜져 있는 것은 지금뿐. 더 지체할 것은 없었다.
"'마스카레이드'를 릴리스하고, '가메시엘'을 상대 필드에 특수 소환."
[해귀파괴수 가메시엘: 물족 / 물 / 레벨 8 / ATK 2200 / DEF 3000]
[파괴수의 출현기록: 파괴수 카운터 4 → 5]
"카운터가 3개 이상 쌓여있는 '파괴수의 출현기록'을 묘지로 보내고 ②의 효과를 발동한다. 덱에서 '파괴수' 마법이나 함정을 가져올 수 있어. 내가 고른 건 2장째 '방해받은 파괴수의 잠'. 그리고 바로 발동!"
한 번 일어났을 지진이 또다시 도시의 필드를 강타한다. 이번에도 예외라고는 없이 진을 치고 있던 재버워키의 몬스터들이 스러져갔다.
"몬스터를 전부 파괴한 다음, 다시 필드에 '파괴수' 2마리를 각자의 필드에 꺼낸다. 그리고 '지오옐로'의 ②의 효과로 자신의 파괴를 1번 막아낼 수가 있어."
[점사파괴수 쿠모구스: 곤충족 / 땅 / 레벨 7 / ATK 2400 / DEF 2500]
[괴분파괴수 가다라: 곤충족 / 바람 / 레벨 8 / ATK 2700 / DEF 1600]
두 마리의 괴수와 함께 유진의 필드에 어느샌가 나타나 있던 광물의 벽이 땅으로 스르르 꺼지자, '지오옐로'가 지진으로부터 무사하다는 것을 과시하듯 모습을 드러냈다.
"아하, 파괴할 역할은 따로 있었구나."
아군의 전멸이 다시 찾아오고, 또다시 도시의 면적을 채우는 괴수들을 바라보면서 재버워키는 오히려 만족스러운 듯 끄덕인다.
"근데 안심하기는 이르거든. 내가 세트한 카드 잊었어? 함정 카드 '낙인흉명'. 이걸로 묘지나 제외 상태의 융합 몬스터를 되살릴 수가 있지. '쿠에리테스'를 다시 무대로."
[데스피아안 쿠에리티스: 악마족 / 빛 / 레벨 9 / ATK 2500 / DEF 2500]
방금 전에 제거한 흑기사가 다시 창을 휘두르며 나타난다.
저것보다 공격력도 더 높은 '알마두크'는 링크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는, 유진에게 있어서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몬스터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공격할 때의 이야기.
상대 턴을 버틴다면 오히려 저 카드 쪽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저쪽 역시 융합 몬스터가 아닌 몬스터, 즉 링크 몬스터의 천적으로서 기능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순간에 저 카드의 저주를 피해가고 싶거든 타이밍을 잘 노릴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LP를 깎아먹는 '마스카레이드'를 치웠으니 유진은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고 카드를 써나가기로 했다.
"마법 카드 '드리야드의 자비'. 묘지에서 '하루 우라라', '증식의 G', '드래고사크', '기교진'을 제외하고 2장 드로우. 그리고 '페어리테일-백설'을 소환."
[페어리테일-백설: 마법사족 / 빛 / 레벨 4 / ATK 1850 / DEF 1500]
[서문유진: 패 2장]
"소환된 '백설'의 ①의 효과로 상대 필드의 몬스터를 뒷면 수비 표시로 바꾼다. 대상은 '쿠에리테스'!"
저번과는 달리 '쿠에리테스'의 효과를 체인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공격력 0 짜리의 무방비한 아군을 또다시 만들지 않으려면 그러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 '가다라', '백설'을 소재로 링크 2 '아이:피 마스카레나' 링크 소환."
[아이:피 마스카레나: 사이버스족 / LINK-2 / 어둠 / ATK 800 / 링크 마커 ↙↘]
소재가 될 몬스터를 하나 마련해놓는다. 이걸로 대책은 갖춰졌다.
"계속해서 간다! '지오옐로', '마스카레나'를 링크 마커에 세트, '코스모화이트'를 다시 링크 소환!"
[ET레인저 코스모화이트: 사이킥족 / LINK-4 / 빛 / ATK 2500 / 링크 마커 ↑←↓→]
'탐욕의 항아리'로 회수에 마친 에이스 카드를 무사히 다시 꺼낼 수가 있었다.
그는 정말로 돌아왔다. 그 짧은 순간이라도 자신은 버텨냈다.
'저것이 'ET레인저….'
다음은 자신 차례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듀얼을 묵묵히 지켜보던 리퍼는, 그 카드 역시 주목한다.
'ET레인저' 카드 자체는 유노가 그와 접촉하여 듀얼을 펼치면서 이미 정보를 알고 있었다.
신뢰를 빌미로 저 카드의 정보 역시 유진과의 카드 교환 중 알아놓은 참이다.
단순한 솔리드 비전과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 그 모습과는 달리 확실히 평범한 카드는 아니었다. 리퍼가 쓰는 '엔보이드' 시리즈와도 분명 다르다.
그 모습이 출력된 것만으로 어둠의 듀얼을 담당하는 디젠이 빛을 띄기 시작하니까. 마치 컴퓨터의 CPU에 부하라도 걸린 듯이, 원동력이 되는 어둠 에너지의 흐름이 간섭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저 듀얼 자체를 끊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힘이 되지는 못하지만, 분명 어둠의 힘과 관계가 깊은 재버워키에게는 변수나 다름없는 카드다.
그것을 유진은 위저드라는 인물과의 듀얼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입수한 카드라고 설명했다. 모종의 특수한 인증 과정을 거쳐야만 출력이 가능하도록 프로그래밍이라도 되어 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직까지 재버워키의 손길이 닿지 못한 것도 당연은 할 터. 그로서는 이 상황을 제 손으로 타파해나갈 가능성을 안겨주는 비밀 무기인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저 듀얼 끝에 재버워키가 무사하기라도 한다면, 저런 카드를 가만히 놔둘리가 있을까.
그 순간 자신은 분명 행동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
한 편, 재버워키는 자신이 세트한 카드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스카레나'을 소재로 한 링크 몬스터에게 효과 파괴는 통하지 않으니, 이걸로 '코스모화이트'를 대처하기는 불가능. 그 때 위저드 역시 비슷한 쓴웃음을 지었으리라.
그러나 그 다음 나타날 몬스터들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둘이 그런 생각에 들어가는 사이 유진은 그 카드의 능력을 다시금 발휘할 기회를 마련한다.
"링크 소환한 '코스모화이트'의 ②의 효과. 자신의 링크 앞에 'ET레인저'를 링크 소환한다! 나와라, '하이드로블루'!"
[ET레인저 하이드로블루: 사이킥족 / 물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ET레인저 코스모화이트: ATK 2500 → 3000]
"링크 소환된 '하이드로블루'의 ①의 효과로, 덱에서 물 속성 이외 몬스터를 특수 소환한다. 꺼내는 건 '환상수기 오라이온'."
[환상수기 오라이온: 기계족 / 바람 / 레벨 3 / ATK 600 / DEF 1000]
"계속해서 '하이드로블루'의 ②의 효과. 내 필드의 링크 몬스터인 '코스모화이트'를 지정하고, 그 링크 마커 수인 4장만큼 덱에서 확인, 그 다음 패를 1장 추가한다."
"그 전에 체인. 상대 필드에 링크 몬스터가 있으니까, 묘지에서 '마스카레이드'를 또다시 부활."
[혁작룡 마스카레이드: 악마족 / 어둠 / 레벨 8 / ATK 2500 / DEF 2000]
[서문유진: 패 3장]
어떤 촉이라도 왔는지 재버워키가 이 틈에 융합 몬스터를 필드에 마련해놓는다.
"그럼 속공 마법 '사이킥 싸이크론'. 함정 카드를 선언하고, 네가 세트한 카드를 1장 파괴한다."
그럼에도 때는 이미 늦었기에, 발동 기회를 마련하지 못한 '낙인의 심판'이 회오리에 휩쓸리며 사라진다.
"아아~, 역시 소용 없었나."
"선언한 카드를 파괴했으니까 1장 드로우. 그럼 '하이드로블루', '오라이온'을 소재로, 링크 3 '트로이메어 유니콘'을 링크 소환. 묘지로 간 '오라이온'의 ②의 효과로 '환상수기 토큰' 하나도 특수 소환."
[트로이메어 유니콘: 악마족 / 어둠 / LINK-3 / ATK 2200 / 링크 마커 ←→↓]
[환상수기 토큰: 기계족 / 바람 / 레벨 3 / ATK 0 / DEF 0]
[ET레인저 코스모화이트: ATK 3000 → 2500]
"패를 1장 버리고 '유니콘'의 효과. 세트한 '쿠에리테스'를 덱으로 되돌린다."
이것으로 하나는 처치 완료. 남은 것은 자신이 꺼내놓은 '쿠모구스', 그리고 효과도 쓸 수 없는 수비 표시의 '마스카레이드' 뿐.
'재버워키에게 남은 몬스터는 둘. 패에 남은 카드도, 세트 카드도 없어. 하지만….'
리퍼 역시 듀얼 상황을 꾸준히 살피는 중이었다.
승산은 슬슬 유진에게 기울고 있는 듯 보였지만 아직 확신하기는 이르다. 만에 하나 LP를 지켜내고 턴을 받은 재버워키가 무엇을 해올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되도록이면 이번 턴에 끝내는 것이 이롭겠지만, 그럼에도 아직 변수가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비춰진 카드들을 통해서도 언뜻 예상이 가는 파훼법이 보이기는 했지만, 서문유진이 과연 그걸 해낼 만한 실력이 될 것인가.
가면 너머의 시선은 여전히 반신반의를 품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냐.'
정말로 머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이다.
"묘지의 카드 7장을 제외하고, '백설'을 묘지에서 특수 소환!"
[페어리테일-백설: 마법사족 / 빛 / 레벨 4 / ATK 1850 / DEF 1500]
"다시 '백설'의 효과를 사용. 이번에는 '마스카레이드'를 뒷면 표시로! 그 다음 '유니콘'과 '환상수기 토큰'을 소재로, 링크 4 '양륙군함 암브로엘'을 링크 소환. '암브로엘'은 묘지의 링크 몬스터 하나 당 공격력을 200씩 상승한다."
[양륙군함 암브로엘: 기계족 / 화염 / LINK-4 / ATK 2600 → 4600 / 링크 마커 ←→↓↘]
그 다음 또 뭐가 있느냐, 하고 리퍼가 속으로 묻기도 전, 유진이 내린 결단은 '공격'이었다.
"배틀! '암브로엘'로, '쿠모구스'를 공격!"
고래를 닮은 전함의 포격이 엄청난 폭음, 포연과 함께 거대한 거미 괴물의 모습을 지워버린다.
[재버워키: LP 3150 → 950]
"'코스모화이트'로 '마스카레이드'를 공격!"
그 다음으로 공격에 나서는 '코스모화이트'가 손바닥을 위로 뻗는다. 그 위로 빛으로 이뤄진 봉이 모습을 드러내자, 곧바로 이를 붙잡고는 지명받은 적에게 창처럼 투척한다.
명중당한 '마스카레이드' 역시 그렇게 필드에서 격퇴당했다.
더이상 길을 가로막는 적이 없는 가운데 마지막 공격만이 남아 있던 순간,
"내 융합 몬스터가 전투로 파괴됐을 경우, 묘지에서 '알베르'의 ③의 효과를 발동. 먼저 '암브로엘'을 지정하고, 자신을 특수 소환. 그리고 대상으로 지정한 효과를 무효로."
[데스피아의 도화 알베르: 천사족 / 어둠 / 레벨 4 / ATK 1800 / DEF 0]
[양륙군함 암브로엘: ATK 4600 → 2600]
기어이 벽이 하나 더 마련되어 버린다.
"…'백설'로 '알베르'를 공격."
마지막으로 공격에 나서는 '백설'이 들고 있던 독사과를 던지자, 비로소 마지막 벽으로서 나타난 '알베르'가 머리에 얻어맞고 퇴장했다.
허무함마저 느껴지는 삼류 코미디 같은 광경이었다.
"뭐야, 이걸로 끝이야?"
"……."
실망이 담긴 반응에 무력감이 찾아온 듯 고개를 떨구던 유진은, 한숨을 쉴 여유를 찾은 듯 뜸을 들이고서야 다음 진행을 이어갔다.
"카드를 1장 세트. 엔드 페이즈에 묘지에서 '지오옐로', '하이드로블루'의 효과로 각각 링크 몬스터를 하나씩 되살릴 수 있어."
[사로스=에레스 쿠르누기아스: 악마족 / 빛 / LINK-5 / ATK 3000 / 링크 마커 ↑↗→↓↘]
[ET레인저 지오옐로: 사이킥족 / 땅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양륙군함 암브로엘: ATK 2600 → 4200]
[ET레인저 코스모화이트: ATK 2500 → 3000]
묘지 소생 견제, 그리고 파괴 방어. 상대 턴을 대비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한 방에 끝장을 내는 데에 실패한 유진의 필드에는, 여전히 나름대로 알찬 전력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분명 다시 턴이 돌아간다면 이들을 내세우기만 해도 끝이 나버리겠지.
그럼에도 다시는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각오까지 했던 턴이 기어이 돌아오자, 그 스릴을 만끽하면서 재버워키는 새로운 패를 맞아들였다.
"그럼 내 턴."
[재버워키: 패 1장]
[서문유진: 패 1장]
그것을 본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간다.
"으음, 이런 때가 되서야 나와주네."
유진은 여전히 밝다고는 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또 뭐냐'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내가 말하기는 좀 그런데, 만능이란 건 없다고 생각하거든."
대답은 없다. 그래도 쌩뚱맞게 무슨 소리인지를 묻고 싶겠지.
그런 시선이었기에 재버워키는 꺼내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한다.
"아니, 그걸 원해서 찾아온 놈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야. 나라고 실체는 커녕 존재조차 입증이 안 되는 걸 컨트롤하지는 못 하니까. 가령 운명 같은 추상적인 거."
"……."
"그러고도 피할 수 없는 거라면 나름대로 즐겨보자 했는데, 역시 그럴 보람은 있단 말이지. 너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깜짝 선물을 공개하듯이, 재버워키는 기어이 패에 들린 카드를 직접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운명이 이끄는 최후의 퍼레이드라 이거지. 마법 카드 '낙인융합'."
"…………."
아, 저것은 올 게 왔다는 듯한 표정이다. 재버워키는 그렇게 유진의 반응을 알아볼 수 있었다.
"덱에서 '알버스의 낙윤', '순백의 성녀 에클레시아'를 묘지로 보내고, 3장째 '알비온'을 융합 소환."
[낙인룡 알비온: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8 / ATK 2500 / DEF 2000]
"'알비온'의 효과. 패나 필드 / 묘지에서 소재를 제외하고 융합 소환이 가능해. 이것도 체인 없겠지?"
역시 대답은 없다.
아무리 '명신'이라도 묘지에서 되살리는 것과 관련없는 특수 소환 효과는 막지 못할 테니까.
"좋아. 그럼 묘지에서 '알버스', 그리고 링크 몬스터인 '베르테 아나콘다'를 제외하고 융합 소환. 그것은 빙주라는 힘을 이어받은 최후의 검. 레벨 8 '빙검룡 미라제이드'!"
[빙검룡 미라제이드: 환룡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2500]
먼저 나온 '알비온'의 인도에 따르듯이, 얼음 갑옷으로 무장한 검은 몸체의 용이 중앙으로 현계한다.
"정말, 안 나오면 섭할 뻔했다니까. 인내를 갖고 버텨줘서 고마워."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것이야말로 '낙인' 시리즈의 기본이자 최대 전력이나 다름없는 카드임을.
끝내 '낙인융합'을 막지 못한 결과, 저 카드가 이 무대에 마지막으로 올라오는 배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 이어서 '미라제이드'의 효과. 엑스트라 덱에서 '회신룡 배스터드'를 묘지로 보내고, 네 '암브로엘'을 제외할게."
바닥으로부터 전해져오는 한기에 커다란 전함이 순간 동결한다. 작은 빙산이나 다름없어진 그것은 이내 산산이 부서지며 석영처럼 번쩍이는 부스러기로 전락했다.
'지오옐로'가 필드에 남아있는 이상 몬스터를 파괴하는 데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한 방 한 방이 최후의 일격이 되는 지금에 와서는 의미 없는 일.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동료들이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 싶었거든. 잘했지?"
"…………."
하지만 이런 도발에까지 아무런 대답도 없는 것은 아무래도 시시하다.
역시 이런 순간까지 말동무가 되어줄 여력 따위는 없다는 것일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서, 재버워키는 예정된 폐막 수순에 들어가기로 한다.
"그럼 피날레! 먼저 '알비온'으로 '백설'을 공격!"
무대의 마지막. 그 첫번째 순서를 장식하기 위해 붉은 용이 눈을 불사른다.
용이 주둥이를 벌리며 몸뚱아리만큼이나 새빨간 불꽃을 품자, 이를 앞둔 '백설'은 공포에 꼬리가 우뚝 설만큼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제서야 유진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방금 공격이라고 했지?"
무력해보이기만 했던 그 모습에 다시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함정 카드 '매직 실린더'! 이걸로 '알비온'의 공격을 상대한테 되돌린다."
카드명을 들은 재버워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제서야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무거운 태도를 보이게 한 것은 절망이 아닌, 단순한 긴장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운명이니 뭐니 떠들고 있는 동안에도 그저 그 카드가 통하기만을 기다렸으리라.
"………푸훗."
잠시 후 그 입에서 웃음기가 새어나오더니, 곧 숨이 넘어갈 기세로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핫! 그거네, 그런 게 있었지, 참."
"뭐가 웃긴데?"
한 순간 유진에게 불안이 닥쳐온다. 마지막 일격이 반사당하는 순간 보이는 반응이 웃음이라니.
역시 안일한 대처였던 것일까.
그러나 너무 웃어댄 나머지 눈가에 샌 눈물을 닦으며 재버워키는 대답했다.
"아니, 걱정 마. 체인 없으니까."
"그럼…"
"응. 피날레야. 진짜로."
공격을 받아야 했던 '백설'을 사이에 두고서 두 개의 원통이 나타난다.
'알비온'이 내뿜은 불꽃은 그 중 하나를 통과하고, 그대로 막힌 길을 꺾어나오듯이 반댓편에 있는 통의 입구 부분으로 다시 빠져나온다.
재버워키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서 되돌아오는 불길을 받아들였다.
[재버워키: LP 950 → 0]
"…………."
첫번째를 장식해야 할 공격은, 기대와는 달리 최후의 일격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진짜 피날레를 장식할 기회를 놓친 '빙검룡'은 주인에게 불세례를 내린 '낙인룡'과 함께 신기루처럼 필드에서 퇴장한다.
어떻게든 주인의 무사를 뒤로 한 유진의 몬스터들 역시 따라서 사라졌다.
'…끝이라고? 이게? 진짜로?'
순간 들어선 의문에 유진 스스로가 놀란다. 왜 뭔가가 더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매직 실린더'의 효과가 통하는 것 외에 유진에게 다른 승산은 없었다.
그 카드가 통하길 간절히 빌면서 들을 가치도 없는 재버워키의 말을 흘려들었다. '공격'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러나 정작 성공하고 나니 오히려 당황을 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지켜보던 리퍼, 그리고 유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편, 공격을 맞은 재버워키의 LP 게이지가 이미 0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버텨섰다.
아직도 무언가 남았다는 듯이.
"아아, 꼴사납게. 그렇게 큰소리 쳐놓고 세트 카드도 생각을 못했네."
그 상태에서 그녀가 보이는 반응은 자조. 고통을 버티고 난 안도감인지, 지루함으로부터의 해방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표정은 한 결 편해보인다.
"뭐 어쨌든 듀얼은 끝났으니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지. 아니, 솔직히 너무 짧았어."
어찌 됐든 재버워키 스스로 끝났음을 인정했다. 말 그대로 최후의 퍼레이드가 되었기에 약속은 지켜진 셈이다.
끝났다는 것 자체에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듯 재버워키는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시련을 넘어서 승자가 됐잖아? 즐거운 듀얼 아니었어?"
"즐겁기는 뭐가."
"아, 역시 너도 그렇지? 그럼그럼, 끝이 안 좋으면…."
"그딴 거 아냐."
확정된 승리가 찾아왔음에도, 유진이 도저히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적대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차려준 밥상에 입맛을 다실 수 있을리 없으니까.
"그냥 네가 이길 기회를 걷어찬 거잖아. 뭐 하자는 건데? 끝까지 사람 가지고 놀려고 했어?"
"그렇게 보여?"
"그런 거 맞잖아!"
"음, 그런가? 그럼 미안."
"…뭐?"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 짧은 한 마디에 유진이 느끼는 것은 당혹.
"방금 뭐라고?"
"미안했어."
"…이제 와서 무슨?"
"기대에 못 미친 거 말야. 시시한 무대를 선보였잖아."
그 뒤에 찾아오는 느낌은 분노였다.
"시시해? 이딴 짓을 해놓고?"
"방금 그렇게 느꼈으면서."
방금 전에 잠깐 느꼈던 감상을 꿰뚫어본 것에 의표를 찔린다.
"솔직히, 나도 이번 게임은 기대 이하였거든. 나름 엄선한 게스트들이었는데 몇몇 참가자 때문에 이렇게 빨리 깨진 거잖아. 스케일을 아무리 키워봤자, 하던 대로 가면 한계가 있는 건가 봐."
"그래서 뭐?"
"결국은 내 마음가짐이 어정쩡했던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끝나도 할말 없는 거고. 응, 반성해야지."
반성은 무슨 반성. 유진이 그렇게 트집을 잡는다.
그리고 리퍼가 직접 변조된 육성으로 말을 걸고 넘어진다.
"반성이라고? 네녀석, 설마 이런 짓을 또 할 작정이냐?"
"글쎄."
필사적으로 쫓아올 기세인 적에게 남은 예정을 알려줄 만큼 그녀에게 여유는 없었다.
"하던 대로만 하면 재미가 없다…. 좋은 교훈 얻었다고 치자."
그런 최후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재버워키는 유진에게 잊지 않은 권유를 꺼낸다.
"약속은 지켜야지. 어쨌든 지금의 넌 승자니까, 원하는 걸 얻을 권리가 있잖아?"
"원하는 거라면…."
"아 맞다, 이미 그 애는 무사하다고 내 입으로 말했지. 그럼 다른 게 필요하려나…."
"그럼 우리한테 얼씬대지 마."
"호오."
성아린을 구해야 한다는 구실이 더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간단했다.
"네 즐거움이니 존중이니 하는 거 알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애꿎은 사람 건들지 말고 제발 좀 꺼지라고."
"어차피 사라지기야 할 건데.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애초에 네가 있으니까 안 괜찮은 거야."
재버워키는 방금 들은 말을 곱씹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준비해놓은 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구나. 역시 내 잘못이 커."
유진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런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해봤자 제대로 들어먹을 생각 따위 없다는 것을. 적어도 죽으라고 한다고 죽어줄 녀석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즉, 이대로 무사히 보내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셈이기에, 유진은 여전히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 게임으로 확신했어. 너한테 가능성이 있다는걸."
"무슨 가능성?"
"언젠가 알게 될 거야.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만 해도 상관없어."
유진은 이런 찜찜한 불안만을 남기는 말들이 싫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상대는 그런 말투를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폐막의 시간이 다가왔네. 그럼 이걸로 듀얼에서 패배한, ──카나이 하츠카는 벌칙을 돌려받을 차례겠지."
의미심장한 표현에 유진과 리퍼는 귀를 의심한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이긴 쪽이 얻는 만큼 진 쪽은 잃을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불길한 낌새를 알아차린 리퍼가 뒤이어 질문한다.
"설마 네 놈, 그 몸뚱아리는!?"
"이상한 오해 말아줄래? 하츠카 쨩은 어엿한 참가자거든. 싸울 의지가 있었다기 보다는, 살아만 남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 그런 조건이었지만."
"싸우지도 않는데 이런 곳을 온다고?"
"기구한 팔자였지. 매일같이 이상한 악몽에 시달리고, 매일같이 수상한 것들이 기웃거리지는 않나 눈치나 보는 신세가 되버리니까. 잠도 못 잘 지경이었대. 그래서 뭐든지 할테니 제발 이 끔찍한 상황에서 구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어."
재버워키가 잠시 경건하게 기도하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능청스럽게 설명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찾던 위대하신 분이라면 몰라도, 나한테는 기도가 닿았거든. 불쌍하니까 내가 그 뜻을 도와주기로 한 거야. 뭐, 여기서 승리를 쟁취하다 보면 원하는 걸 이룰 수도 있으니까."
"육체를 빼앗아서 말이냐?"
"빼앗다니? 하츠카의 의식은 제대로 이 몸 안에 깃들어 있는걸. 얘 입장에서 보면, 눈을 뜨면 원하는 바가 이뤄질지도 모른다는 셈이잖아."
분명 토우키가 전했던 사정과 같다. 하츠카라는 사람도 그와 함께 두려움에 떨며 지내다가, 함께 같은 방법을 취하기를 택했을 것이다.
그 말로가 지금의 상황인 것이다.
유진은 순간 떠올린 것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재버워키의 몸뚱아리로서 이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위저드의 추론은, 자칫하면 사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니까.
"어, 어쨌든 진 건 너잖아? 왜…"
"그럼. 꼴사납게 졌지. 여기 있는 카나이 하츠카가."
말이 끊긴 유진은 그대로 이를 갈았다. 이건 책임 전가를 위해 마련된 제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어둠의 게임에 혈안이 된 자, 그 원흉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자들이 뒤섞인 이 무대에서, 모든 참가자가 먼저 패배해서 사라지지 않는 이상 주최자의 육체로서 이용된 그녀에게 구원은 없었다.
카나이 하츠카라는 존재 자체를 재버워키로서 적대했던 그는, 이런 사정을 듣는 것만으로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재버워키는 대놓고 말을 꺼내는 것일지 모른다. 이래도 자신한테 관심을 끄겠냐는 듯이.
"그걸 네가 멋대로 정하는 게 어디있어?"
"뭐든지 하겠다, 그래서 뭐든지 했을 뿐이야. 그래도 되도록이면 얘(하츠카)가 원하는 대로 존중은 했거든? 같이 온 애하고 숨어다니면서 싸우는 걸 피했으니까. 그 다음에도 되도록이면 그 애가 할 법한 행동대로 취해봤어. 그러니까, 그 끝에 패배했다는 건 하츠카로서 패배했다는 셈이겠지."
"저, 저게……"
"어쨌든 얘한테도 잘 된 일 아니겠어? 더이상 끔찍한 일상에 고통받을 이유는 없어졌잖아. 아주 잠깐의 고통이면 해방이야. 이기지 못했는데도 이룰 수 있다니, 이 정도면 특권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기가 막힌 나머지 유진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결국 듣다 못한 리퍼가 뒤이어 반박에 가담했다.
"그 고통을 주는 건 네놈일 텐데? 이게 네놈이 말하는 소통이냐?"
"아까 말했잖아. 나라는 존재가 없어도 인생이란 고통의 연속이야. 그걸 희노애락으로 무마시킬 뿐이지. 나는 즐기는 편이 좋다는 제안을 해올 뿐이고. 그 과정이 소통이 아니면 뭐겠어?"
"한 마디 한 마디가 궤변이군. 네 즐거움을 위한 구실이겠지."
"음…, 너한테도 전해지려면 아직 멀었나. 뭐, 인생이란 걸 누려본지 얼마 안 됐을 테니까 어쩔 수 없겠지."
자신의 소통을 거치고 받아들인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배제한다. 그런 의미에서 리퍼라는 존재는 재버워키에게 방해꾼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재버워키는 그 존재에 대한 흥미를 지울 수는 없었다. 이 자의 본질은 자신과 같은 어둠. 아까 스스로가 말했듯, 과연 다른 견해를 갖게 된 어둠이 끝내는 어떤 결론에 다다를지 역시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하츠카든 유진이든, 다른 누가 됐든, 모든 인생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끝으로 귀결되는 거야. 근데 원하는 끝을 정하고 싶다면 적어도 이기는 쪽이 돼야겠지? 그 과정을 위해서라면 이겨서 많은 걸 얻어두는 편이 좋잖아."
게임의 주최자로서도, 재버워키는 이들을 적대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이 게임에서 승리를 거듭한 끝에 생존해 주었으니까.
저마다의 구실을 찾아서라도 자신이 준비해준 게임을 충분히 '즐겨준' 자들에게, 오히려 주최자로서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럼 부족한 무대를 즐겨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마지막 퍼포먼스를 감상하면서 그 뜻을 꼭 잊지 않도록 합시다. 자, 하츠카 쨩, '회개하여라'."
주문처럼 외운 그 짧은 한 마디 직후, 유진의 디젠이 빛나는 것과 동시에 재버워키의 몸에 은은한 황금빛이 물들기 시작한다.
온화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따스한 빛이었다. 동시에 표면으로부터 잿가루 같은 부스러기가 떨어져나오기 시작한다.
벌칙이라기엔 기이하다 못해 신비한 현상이라는 감상을 갖기도 잠시, 둘은 이내 그 빛의 실체를 깨달았다.
주변의 부스러기가 많아질 수록 하츠카에게 떠오르는 황금빛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었다. 어느샌가 무릎 아랫부분이 없어지자, 그 자리로부터 그 뚜렷한 빛이 새어나온다.
지금 그녀의 몸이 빛의 열기에 연소되며 조금씩 흩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앗, 뜨거워. 꽤 아프네. 그 녀석, 이러고도 비명 한 번 안 질렀단 말이지."
아프다는 말은 사실인지 하츠카의 입술이 팍 찡그려진다. 그러면서도 활기찬 작별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럼 여기까지! 출구는 입구 쪽으로 돌아서 가면 돼. 여러분, 바이바이!"
그 다음. 말을 끝낸 하츠카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 …………!!"
웃음기가 사라진 것만으로 그 얼굴에는 당황의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몇 초도 되지 않아 그 다음으로 보이는 반응은, 비명.
갑자기 닥쳐오는 고통과 공포에 얼굴이 구겨진다. 목청이 찢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의 비명이 두 사람의 귀를 찔러왔다.
뜨거워, 아파, 살려줘.
울음소리에 뒤섞인 정신없는 절규는 그 세 가지 뜻으로 간추릴 수가 있었다.
그 광경이 유진에게는 눈에 익었다. 이런 식으로 몸이 불타며 사라져가는 상대의 모습을 두고 정신없이 도망쳤던 것이 또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이제는 뭐가 뭔지도 알 수 없는 상황까지는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오히려 다가가는 쪽을 택했다.
"괘, 괜찮아요? 잠깐만, 이걸 어떻게…"
무심코 뛰어들어가서 손을 잡으려던 유진은 상상 이상의 온기, 아니, 열기에 놀라 주춤한다.
가까이 갈 수록 뜨겁게 느껴지는 빛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점점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몸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이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해야 멎게 할 수 있을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는 것도 아닌데도, 미련하게 어떻게든 해봐야겠다고 다가갔다.
그럼에도 새하얘진 머리는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기에 그 광경을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미 늦었어."
그 사실에 쐐기를 박듯이 뒤에서 불길한 변조음이 들려온다.
"단지 어둠을 받아들이기만 한 자한테 어둠이 주는 벌칙을 이겨낼 힘 따윈 없어."
"아니, 그래도…."
"졌으면 네가 이렇게 됐겠지."
아, 이것마저도 그 때와 같다. 유진은 그 사실을 또다시 떠올렸다.
누구의 것이라고 뚜렷하게 인식할 수조차 없었던 재버워키의 목소리도 이런 말을 꺼냈다.
"아무리 연전연승을 해왔어도, 단 한 번의 패배로 찾아오는 결말이 저거다. 무슨 의도로 시작했든 상관없어. 지금까지 버텨왔으면 잘 알 텐데."
"………."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되묻는다면 저 해골바가지는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님에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있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각오했음에도 나아지지를 않는다.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어느 샌가 그녀에게는 잡을 손조차도 남지 않았다.
여전히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하츠카에게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떨리는 입으로 내뱉는 짧고 어설픈 사과 뿐이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사과를 들어줄 기색은 없다. 그저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오열도 가슴 부분까지 연소되어 없어지고서야 비로소 잠잠해질 수가 있었다. 곧 다 놓아버린 듯 멍한 표정을 짓던 얼굴마저도, 이내 사라져 흩날린다.
더이상 태워 없앨 것이 남지 않은 탓인지 뜨겁디 뜨겁던 황금빛도 이내 서서히 흩어지며 사라졌다.
"…………."
자신을 만난 시점부터, 아니, 토우키를 찾았다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이 재버워키의 연기에 불과했겠지만, 그 장본인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카나이 하츠카라는 인물은 미스터리에 흥미를 가져버린 무고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 인물을 최후로 몰아넣었다. 그런 선택을 강요한 재버워키아말로 제일 큰 원흉이지만, 서문유진 자신 역시 차마 책임이 없다고 넘길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이렇게 흔들리는 멘탈을, 과연 '즐기자'라고 스스로 설득하는 일 없이 버티게 할 수 있을까.
다시 스스로에게 되물어봤자 지금의 자신이 대답을 낼 수 있을리는 없다.
유진이 망연자실에 빠져있기도 잠시, 이내 딛고 있던 땅이 울리는 것을 느낀다.
분명 듀얼은 끝났으니 더 적용될 솔리드 비전도 없을 텐데. 아직도 남은 참가자가 듀얼을 펼치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주변을 살펴보면서 이상한 것을 깨닫는다. 어떤 듀얼이 펼쳐지든 남 일이라는 듯이 멀쩡했던 주변 건물들이, 하나둘씩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여태까지 뿌옇기는 해도 어둡지는 않았던 하늘마저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뭐야?"
"게임이 끝났으니 이곳도 필요없어졌다는 거겠지."
"그럼…."
"우리도 빠져나가야 돼."
마왕을 해치우자 무너지기 시작하는 성. 그런 전개를 유진이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곳을 직접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듣자 유진의 머릿속이 또다시 새하얗게 질린다.
더구나 이곳은 성은 커녕 실내조차도 아니지 않은가.
"아니, 어떻게!? 어디로?"
"출구는 입구 쪽으로 돌아서 가면 된다고 했지?"
"그랬지."
"그럼 처음 있던 자리로 가면 된다는 거겠지. 어느 자리에서 시작했는지 기억하나?"
아직 당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에서도 유진은 어떻게든 기억을 거슬러본다. 다행히도 잊지 않고 떠올릴 수가 있었다.
배틀 시티의 개막이 선포된 것으로도 유명한 랜드마크. 듀얼의 길을 동경한다면 쉽게 잊혀질리 없으니까.
"시계탑 광장."
"별로 멀진 않군. 일단 타."
그나마 다행이랄지 마침 리퍼에게는 노획해 온 것으로 밖에 추정되지 않는 바이크가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상황과 현재의 인상착의로 인해 인식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잠시라도 여자애의 몸에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에 유진은 한순간 멈칫했다.
"뭐 해?"
"아니, 넌 어쩌고?"
"이걸 타고 가면 금방이야. 걱정할 것 없어."
역시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걸 의식할 여유 따윈 없다는 의미겠지.
유진은 급한 대로 헬멧을 받아들고 좌석 뒤로 올라탄다. 그리고 로브 너머에 있는 허리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유진은 또다시 망설임에 직면하면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안 떨어지게 꽉 잡아."
"………!!"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퍼는 재촉하듯 직접 유진의 손을 붙잡더니 자신의 허리에 갖다댄다.
당돌한 접촉에 유진의 상체가 앞으로 떠밀리면서 저절로 뒤에서 끌어안은 형태가 되어버렸다.
그것을 신호 삼아 바로 바이크에 시동이 걸리고 흔들리는 건물 사이를 달리기 시작한다. 이제 유진은 등에서 다시 떨어진다는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벌써 늦은 저녁에 가까운 하늘 아래였지만, 더욱 눈에 띄게 흔들리던 건물이 이제는 하나둘씩 주저앉기 시작한 것이 헬멧 너머로도 보인다.
견고하게만 보였던 시멘트와 골조의 집합체는, 더이상 형체를 유지하지 못한 채 산산조각나거나 쓰러지면서 구름과도 같은 연기를 일으켰다.
거기다 땅이 갈라지고 파편이 이리저리 흩날리기까지 하니, 운전에 지장이 생기는 것을 너머 당장의 생사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유진은 유노의 몸을 꽉 붙잡고 있다는 설레임을 도저히 유지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빠졌다.
"이, 이거 진짜 빠져나갈 수는 있어?"
"시도는 해 봐야지."
대화가 끝나자 마자, 가뜩이나 시야 분간이 힘들어지려는 도로 앞에 가로등 하나가 무너져 쓰러진다. 그 충격과 소리에 유진은 바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사이 옆으로 휙 쏠리는 감각이 느껴지고, 거세진 엔진 소리와 마찰에 의한 충격이 심장을 자극했다. 다시 안정적인 엔진 소리와 바람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돌아서 피한 것이겠지.
이런 위험천만한 질주가 정말로 해결책이 될지 회의를 품다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으로 돌아오면서 그냥 답답한 로브에 감싸진 어깨에 계속 기대 있기로 한다.
시끄러운 소음과 요란한 시야,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몸을 뒤흔드는 진동이 오감을 괴롭혀 온다. 여전히 불편함의 연속일 뿐.
유진은 차라리 4D 극장에 끌려온 채 보고 싶지도 않았던 재난 영화를 억지로 보는 상황이라 납득하고 싶어졌다.
어차피 모두가 죽고 세계가 멸망하는 결말을 원한다면, 굳이 등장인물의 서사를 구구절절 묘사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이야기에서 재미를 느낄 가치가 있을까.
배려 따위는 없이 창작자의 자기 만족을 위한, 부조리만이 가득할 뿐인 각본이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곳의 비극의 주인공, 어쩌면, 한낱 엑스트라로 전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현실에서 그런 이야기를 쓰려는 작자가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든 막아야 하겠지. 그것이 이 등의 주인, 태스크 포스 같은 자들의 행동 이념이리라.
유진 자신도 그런 행동이 과연 가능할까. 제 앞가림마저 급급한 입장으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적어도, 이대로 다시 눈을 감는다면 끔찍한 광경을 보게될 일은 없다. 그러나 하츠카라는 인물 역시 그런 선택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머리에 문득 떠오른다.
"……."
그렇다고 눈을 뜨고 있자니 헬멧 너머로 보이는 시야는, 어둠과 흙먼지로 구분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분명 같은 시야를 접하고 있을 텐데, 이런 곳을 리퍼는 용케 달리고 있구나 하고 유진은 내심 감탄한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 샌가 바이크가 멈췄다.
"다 왔다."
"…어, 고마워."
유진은 어색한 감사를 보내며 그제서야 바이크를 내렸다.
하지만 내딛은 땅 역시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기에 도무지 안심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중심이 되는 분수대 위 시계탑이 용케 쓰러지지 않은 채 버티고 선 덕분에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리퍼가 내놓은 해석이 맞다면, 적어도 자신의 귀환은 어렵지 않고 무사히 이뤄질 수는 있다.
하지만 유진은 은인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걱정의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진짜 갈 수 있겠어?"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아까와 비슷한 대답이라 진짜인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한 시가 급한 상황에서도, 여유라도 부리겠다는 것인지 리퍼는 한 마디를 더 꺼내들었다.
"이런 데서 건진 목숨이다. 함부로 내던질 생각은 않는 게 좋겠지."
"알았으니까 너나 걱정해, 빨리 가!"
"……알았다."
서둘러 흔들리는 도로를 위태롭게 달려나가는 바이크의 뒷모습을 향해, 유진은 마지막 말을 던진다.
"고마웠어, 조심히 가!"
이제 다시 혼자로 돌아왔으니 서둘러 제 위치를 찾는다.
더욱 어두워져가는 하늘 아래에서 분명 이 근처가 맞으리라 생각하며 뛰어다니는 사이, 유진은 저절로 아직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풍경을 눈에 담게 되었다.
'여기가 '배틀 시티'가 시작된 곳….'
금이 간 벽과 타일. 깨진 유리창. 쓰러진 가로수와 파라솔. 사방은 이미 써먹지도 못할 폐건물들 뿐.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다. 비유가 아니라, 재버워키가 배틀 시티를 따라하기 위해 마련한 세계가 이렇게 끝나는 것이다.
공들여 만들었다고 표현한 것도 같은데, 그런 결과물을 제 손으로 무너뜨린다는 것이 아쉽지는 않은 것일까. 아니면 이미 끝난 운명이니 미련 따위는 갖지 않기로 한 것일까.
더 눈에 띄게 무너져가는 건물은 그런 여운에 빠져있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갑자기 떨어진 간판에 소스라치게 놀란 유진은 더욱 발을 서둘렀다.
'입구 쪽으로 나가라며! 왔으니까 빨리 보내 줘! 제발!'
그렇게 뛰어다니며 간절히 빌던 순간, 유진의 의식이 갑작스럽게 날아가버린다.
시계탑마저 무너지고 길조차도 형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거리 사이에서, 그 육체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네 끝의 시작입니다
길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 전개가 끝을 보입니다
그래도 올해 안으로 한 챕터가 끝날 듯하니 다행이긴 하군요
첫 편 올린 게 언제더라
(IP보기클릭)14.48.***.***
아직 보팔 소드는 꽂히지 않았군요 아마도요
(IP보기클릭)118.235.***.***
매직실린더로 엔딩 그야말로 자업자득 자승자박 그 자체인데 아니 거기서 대리계정을?
(IP보기클릭)61.77.***.***
(IP보기클릭)58.143.***.***
일단 이 에피는 끝났으니 끝인 걸로 | 23.11.25 15:28 | |
(IP보기클릭)14.48.***.***
아직 보팔 소드는 꽂히지 않았군요 아마도요
(IP보기클릭)118.235.***.***
매직실린더로 엔딩 그야말로 자업자득 자승자박 그 자체인데 아니 거기서 대리계정을?
(IP보기클릭)58.143.***.***
| 23.11.25 17:5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