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로그 및 서술 보강을 위해 수정한 부분이 있어 그냥 다시 올립니다
물론 지적은 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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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휑하게 뚫린 차도를 힘차게 달린다.
짐의 무게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속도를 늘린답시고 차마 짐을 놓고 뛰어갈 수도 없다. 이들이야말로 다음에 나타날 적을 상대할 중요한 무기가 될지 모르니까.
'그냥 그 바이크 타고 갈 걸 그랬나?'
그런 후회를 하면서도 어쨌든 발을 멈추지는 않는다.
지금 향하고 있는 것은 멀리서도 보일 만큼 거대한 몬스터가 비춰졌던 자리. 결코 비주얼만으로 카드의 성능을 판단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확인된 몬스터가 어지간한 레어 카드였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버티면서 저런 카드를 써보였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재버워키라고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참가자 자체가 얼마 남지 않았을 지금 시점에서는 더더욱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일단 가서 확인해보기라도 하는 수밖에 없다.
"저기도…?"
여지껏 조용하다 싶더니 동시에 두 군데서 듀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의 발이 멈춘다. 몇 초간 망설임의 침묵이 이어진 끝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유진 쪽이었다.
"방금 그건 내가 확인할게."
"뭐?"
"둘이서 한쪽으로 몰리면 하나는 놓치잖아. 그러다 시간이나 더 걸려."
유노는 망설인다.
유진 대신에 자신이 싸우는 역할을 맡기로 했을 텐데 벌써부터 이렇게 흩어지는 전개가 될 줄이야.
기본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재버워키의 확보. 유진의 말처럼 시간을 들이지 않는 편이 좋다.
마침 유노도 거대한 몬스터가 튀어나온 현장을 확인하려던 참이었기에 유진도 그 쪽을 양보해주고 있다.
"어떡할 거야? 빨리!"
"그럼, 될 수 있으면 싸우지 마. 돌아와서 보고하고 같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자."
"…알았어. 노력해볼게."
유진은 그 애매한 답을 끝으로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F·G·D: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12 / ATK 5000 / DEF 5000]
[고성대 사우라비스: 드래곤족 / 빛 / 레벨 7 / ATK 2600 / DEF 2800]
[용희신 사피라: 드래곤족 / 빛 / 레벨 6 / ATK 2500 / DEF 2400]
"'F·G·D(파이브 갓 드래곤)'으로 다이렉트 어택!"
드디어 다섯 머리의 용이 공격해올 차례.
각자의 주둥이에서 내뿜는 빛과 어둠, 열기와 냉기가 한데 뒤섞인 어지러운 불길이 굉음과 흙먼지를 일으키며 적진을 덮쳐왔다.
[재버워키: LP 400]
이로써 그 LP는 이미 바람 앞의 등불이 된 상태.
그러나 0으로까지 몰아넣지는 못했기에 상대의 표정은 아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칫, 그럼 엔드 페이즈에 '사피라'의 효과, 그 중에 세번째를 선택해서 발동. 묘지의 빛 속성을 회수."
'이펙트 뵐러'. 이걸로 '알베르'든 '알버스'든 몬스터를 꺼내서 또 새로운 몬스터를 전개하려는 수작을 막아버릴 수 있다.
룰 효과로 인한 특수 소환을 시전한다 한들 '사우라비스'의 ②의 효과로 틀어막아주면 되고, 패로 돌아간 '사우라비스'는 ①의 효과로 또 써먹어줄 수가 있다.
비록 '증식의 G'의 효과를 통과시켜버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안심하고 턴을 넘겨줄 수 있는 필드가 갖춰진 것이다. 필사적으로 버텨서 카드를 모아온 보람이 있었다.
상대가 뭐하는 녀석인지는 이미 파악이 끝났으니, 클리어가 코앞에 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었다.
이기면 소원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했던가.
그렇다면 숙청이다.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흉흉한 어둠과는 영영 작별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 같은 인물이 들어온 것을 허용한 과오를 후회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비로소 자신이 진정한 악을 무찌르는 순간이 결코 머지 않았다.
이 현실이 아닌 곳에서 벌어진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해도 좋다. 혼자만의 무용담이야말로 스스로에게는 평생의 긍지가 되어줄 테니까.
그런 자신은 밝은 미래를 맞이할 자격이 주어질 것이다.
그런 희열인지 긴장인지 모를 북받치는 감정을 마음에 품고서 남자는 턴을 넘긴다.
"내 턴이지?"
[재버워키: 패 4장]
딱히 위기감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재버워키가 새로 패를 챙겨든다.
"그렇게 신나?"
그리고는 대뜸 던지는 물음에 남자는 잔뜩 부라린 시선으로 대신 답한다.
저 독기 서린 증오의 표정이란.
처음 맞이했을 때부터 타협이라고는 모르던 저 인간을 맞아들이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었음을 떠올린다.
고독한 싸움을 거치면서도 결코 악에 굴하지 않았다… 고, 본인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리라.
의심암귀에 시달린 끝에 거리에서 애꿎은 사람을 폭행해버린 전과자. 그런 본인 역시 스스로가 혐오해 마지 않는 악일 텐데.
아마도 그마저도 눈앞의 악을 무찌른다는 선행에 이르기 위한 시행착오라며 무마하겠지.
그는 알고 있을까. 그 성취감을 이루게 해주는 것은 디젠을 통해 몸에 흐르는 어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들 필시 독으로 독을 제압한다는 마인드로 자신을 속이고 있을 것이다.
가면이 두꺼워지면 질 수록 빛을 보기 힘들어질 만큼 눈이 어두워지겠지.
충분히 흥미로운 결과물이다.
"근데 미안해서 어째? 아무래도 주인공은 네가 아닌가 본데."
"시끄러워! 할 거 없으면 턴이나 넘겨!"
"진정해. 아직 카드도 안 꺼냈잖아. 네가 기껏 벌어다줬는데 뭘 뽑았는지는 봐야 되지 않을까?"
바퀴벌레가 끌어다 준 카드는 이미 결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카드들을 찬찬히 확인하는 하츠카의 얼굴에는 이미 아쉬움이 서려있다.
슬슬 막을 내릴 채비를 해야 되니까.
"먼저 지속 마법 '실낙인'. 이걸로 융합 소환을 방해할 수단은 사라졌어."
"……!"
시작부터 그가 마련해놓은 대책 대부분이 무력화되었다.
그의 눈앞에 드리우던 빛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만 같다.
"그럼 진짜 주인공을 모셔야겠지? 마법 카드 '낙인의 연'. 묘지에서 '알버스의 낙윤'을 특수 소환."
효과로 인한 특수 소환이므로 '사우라비스'의 효과가 끼어들 타이밍이 갖춰지지 못했다.
결국 낡은 검은 망토를 두른 소년이 다시 재버워키의 필드로 귀환해버린다.
[알버스의 낙윤: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4 / ATK 1800 / DEF 0]
재버워키는 아직 패에 남은 다른 카드를 살핀다. 위저드의 선물이었던 카드 하나가 끼어있다.
역시 이건 아직 쓸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알버스'의 효과. 패를 1장 버리고, 필드에 있는 몬스터들을 소재로 융합 소환을 실행한다. 나머지 소재는 당신 필드에서 챙겨야 되지만."
그는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는다.
필드에 전개해둔 몬스터는 하나같이 드래곤족. 그 상태에서 '알버스'의 소환을 허용한 것은 제 스스로 밥상을 차려준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알버스'와 나머지 세 마리의 드래곤을 소재로 융합 소환!"
'알버스'의 온몸이 빛을 내뿜음과 동시에 남자의 필드를 자리잡던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빛을 향해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빛은 곧 남자의 필드를 버티던 몬스터들과 비슷한 체급으로 키워지면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재를 불꽃으로 되살리는 낙인의 결정체, 그 이름은, '심연룡 알버 레나투스'!"
곧 불꽃을 거두고 드러낸 모습은, 새빨간 비늘과 뿔이 달린 검은 몸체의 거룡 한 마리.
[심연룡 알버 레나투스: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8 / ATK 2500 / DEF 2500]
"'심연룡'은 소재로 삼은 몬스터 수만큼 몬스터에 공격할 수 있어. 아, 참. 이제 몬스터가 없지?"
"………."
그렇게 새롭게 나타난 적을 앞두고 한 순간에 아군을 모두 잃어버린 남자의 얼굴에는 이미 보기좋게 어둠이 드리워 있다.
고독한 싸움을 계속해왔다고 믿은 그는, 진정한 고독을 맞이한 시점에서 더이상 할 수 있는 것 따윈 없었다.
"그럼, 피날레! '심연룡'으로 다이렉트 어택!"
주둥이를 벌린 '심연룡'의 비늘에 불꽃처럼 밝은 문양이 떠오른다. 이어서 가슴과 배가 위치한 부분의 앞으로 네 개의 원을 겹친 문양이 나타났다.
이를 신호삼아 주둥이에서 품어나간 불꽃을, 용은 상대를 향해 무자비하게 내뿜었다.
고고한 시련을 거쳐 탄생해나가는 영웅을 재로 만들어버리는 이 순간. 권선징악이라는 약속된 전개를 배신하는 결말.
그것은 아쉬운 한편, 매우 즐거운 일이다.
벌칙, 그리고 기타 뒷정리 절차를 마치고서 재버워키는 한숨 내쉰다.
순조롭게 연승을 이루고 있던 재버워키의 반응은 그러했다.
'왜 이러지? 충분히 재미있었을 텐데.'
이번 상대는 결코 즐기는 자도 아니고, 마음이 어둠에 사로잡힌 자도 아니다. 적어도 당사자의 생각으로는.
그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립되어가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고서 막기 위해 과감히 뛰어든 자이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그 아이와 비슷하다. 오히려 독한 걸로 따지자면 이 자야말로 더했을 텐데, 어째서 아쉬움이 남을까.
이제 슬슬 참가자 수가 많지 않을 텐데 이런 상태로 괜찮은 것일까.
'어쩌면…, 지금 내가 원하는 즐거움이란…'
"카나이 누나!"
화들짝, 하츠카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본다.
몇 발짝 앞에서 뜀박질을 멈춘 유진이가 가쁜 숨을 몰아쉰 채 주저앉기 일보직전이었다.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스포츠백은 시험 기간 직전의 책가방이 차라리 가벼운 것이구나 싶을 정도로 어깨에 고통을 안긴다. 이런 걸 맨 채 달려야 하는 상황을 자발적으로 자처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유진이었다.
"유, 유진이니…? 살아있었어?"
유진이 다시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다.
생각보다는 빠른 재회에 당황한 듯, 감격할 준비를 받아들인 듯도 보였다.
"트릭스한테서 이겼구나? 그치?"
"네. 뭐, 어떻게든…."
숨을 고르며 겨우 나오는 유진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하츠카는 바로 달려들면서 또다시 와락 끌어안는다.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 상태로 땀 서린 옷자락을 또 적실 기세로 흐느낀다. 간신히 눈물이 말라굳은 뺨 위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무서웠어. 앞으로 혼자 뭘 어쩔지, 나 혼자 어떻게 싸워야될지도 모르겠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함부로 돌아다니지나 말걸. 차라리 그냥 아지트로 돌아가 있을걸. 나, 나 진짜 어떡해……."
오열과 함께 이어지는 하소연. 알아듣기 힘들어질 정도로 목소리가 뭉개졌음에도 그것만으로 그녀의 고생이 절절히 전해져오는 것만 같다.
유진마저도 따라서 울컥해질 것만 같았으나 이내 정색하며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서 몇 분 후, 숨이 넘어갈 듯 훌쩍이면서야 그녀는 제대로 된 말소리를 꺼낼 수가 있었다.
"응, 미안해.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네."
"아뇨, 꼴사납다니…."
간신히 감정을 추스려야 했던 자신은, 저렇게 속시원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조금이지만 부럽게 느껴진다.
"진짜, 진짜 고마웠어. 네가 알려준 게 없었으면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을지도 모르겠어."
"다행이네요."
"응. 다행이네. 다시 말하지만, 너라도 만나서 다행이야. 여기서 나가면 다음에 꼭 연락할게. 어떻게 감사해야될지 모르겠지만, 만나면 밥이라도 사주던지 할게. 그러니까…"
유진은 유노가 한 부탁을 잊지 않았다.
이대로 곧장 돌아가서 합류하면 함께 할 인원이 생긴다. 인원이 더 늘어난다고 사람 하나를 찾는 난이도가 얼마나 쉬워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고독에 비하면 훨씬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혼자서 마음을 졸이는 것보다는 안심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주어지겠지.
그러나, 그러기 전에 유진은 해결해야 할 의문이 있었다.
"다행…, 인 거 맞죠?"
"뭐?"
"내가 이렇게 돌아와서 찾아낸 게 정말 다행인 거 맞냐구요."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하츠카가 아직 충혈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본다.
"트릭스 다음에 바로 찾아온 사람이 있었는데. 아니, 남을 카드로 만들어서 보관하고 다니는 놈이 사람 새끼일리가 없지만,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 놈이 글쎄, 재버워키 하나 찾겠다고 예전에 남은 기억을 단서 삼아서 후보들을 건드리고 다녔대요. 그러다 저까지 찾아온 거고."
"…그치만 이긴 거지?"
"이긴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살았어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저한테 이것저것 알려줬었거든요."
그 다음은 어리둥절해하는 반응이 따라온다.
"싸움 걸어놓고? 그래서? 설마, 그런 놈 말을 믿기라도 하는 거야?"
"솔직히 나도 믿기 싫었는데. 디젠에 '냄새'라는 게 있다는 걸 먼저 만난 상대들 덕분에 알았어요. 위저드가 말하는 기척도 그 냄새를 말하는 걸 테고."
이미 유진은 이곳까지 오면서 익숙한 기척을 느낀 참이었다.
여전히 주머니 속에 꿍쳐놓은 디젠과 비슷한 기운이 아까까지만 해도 주변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유노 역시 이 근처에 있었다면 감지했을지도 모를 노릇.
하지만 지금은 그 냄새가 감쪽같이 감춰진 상태였기에 확답은 이르다.
대신에 유진은 토큰을 꺼낸다.
이미 디젠으로서의 역할이 끝난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물건임에도, 쓰였다는 흔적, 즉 냄새가 잔재해 있다. 빈 와인병에 그 향이 희미하게 남아있듯이.
그런 물건을 위저드가 남겨주고 간 것이다. 마치 미궁의 출구까지 있는 곳을 알려줄 실타래처럼.
"그 위저드가 남겨놓은 냄새가 여기서도 느껴지거든요."
"……의심하는 거 맞구나."
"적어도 위저드라는 놈과 접촉은 했었다는 뜻이겠죠. 그 놈은 저한테 그랬던 것처럼 재버워키 찾겠다고 당신을 찾아갔을 거고, 당신은 그 놈을 이겨서 에너지를 회수해갔다는 뜻이겠고. 그걸 당신은 방금 전까지 모른 척 하고 있었고."
"……."
유노가 리퍼의 팔찌와는 별도로 다른 디젠을 소지하던 것을 유진은 확인했다. 덕분에 그녀 말고도 다른 디젠을 사용함으로서 정체를 숨기는 자가 있다는 가능성을 의심해볼 수가 있었다. 하나가 있으면 둘이 없으리라는 보장 따윈 없으니까.
그러나 디젠의 능력을 행사하는 원동력은 정신, 즉 영혼의 에너지이기에, 타인이 가진 디젠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순간 그 타인의 기척까지 베어든다는 것도 인지했다. 어쩌면 이전 소유자의 성격 같은 요소도 영향을 줄지 모르는 일.
또한 액체를 옮겨담은 병에 얼룩이 남듯이, 이미 능력을 잃은 껍데기라 해도 디젠으로서의 흔적은 희미하게 남는다. 재버워키 씩이나 하는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가 가지던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위저드가 토큰과 함께 남긴 가르침이었다.
지금 당장 정체를 숨길 수는 있어도 이미 벌어진 일, 그리고 숨기는 동안에 벌이는 일을 숨기는 것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다만 유진이 이 곳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저 어렴풋이 확인한 솔리드 비전이 익숙했을 뿐.
자신이 확인한 그녀의 덱에 있던 카드들. 그 카드들을 거쳐서 꺼낼 만한 몬스터의 흔적을 그는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재회의 순간을 기대하며 막연히 뛰어왔다. 그녀가 무사하기를 빌면서.
그리고 토큰이 안겨준 기척은 그 기대를 배신해버렸다.
"억지 같아요? 그럼 아니라고 증명해봐요."
유진도 모처럼의 재회를 이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상처를 주고 끝날지도 모른다. 이 상황은 네이토라는 사람이 자신과 토우키를 의심하고 덤벼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그 전에 정말로 증명해줬으면 좋겠다, 고 유진은 마음 한 편으로 생각한다.
비록 재버워키를 찾는 여정은 더욱 길어지겠지만, 잠시나마 동료가 되보았던 사람을 이런 식으로 내모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었다.
아닌 것이 맞다면 의심해서 미안했다고 진심을 다해 사과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유진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역시, 그 때 떨어지는 게 아니었나 봐. 기껏 만났더니 의심이나 사고."
돌아온 것은 우선 하츠카의 한탄이었다.
오열하기 바빴던 방금 전과는 달리 침착해진 표정 그대로 자조적인 말을 내뱉는다.
"벌이구나, 이건. 너 보자마자 험한 소리부터 내뱉고, 그런 주제에 소중한 부원이 떠났는데 너한테 뒤를 맡기고 도망이나 치고."
"………."
"맞아, 다 내 잘못이었네. 미안해. 이래놓고 무슨 낯으로 감격의 재회를 하겠다고."
그리고는 눈앞이 아찔해지기라도 한 듯 미간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참회의 목소리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하, 정말이지. 끝까지 뒷통수나 치는구나, 그 자식."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진 말투에 유진이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낸다.
"그 말은?"
"그래, 만났어. 위저드라는 애."
언제 침울해 있었냐는 듯, 하츠카의 목소리는 다시 활기를 되찾으며 낭랑한 분위기로 돌아간다. 이제 막 울던 사람이 그러는 것은 슬픔을 떨쳐내려고 발악하려는 것으로조차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쐐기를 박듯이 직접 위저드의 책갈피를 꺼내들었다.
"적어도 3주 정도까지는 각오했었는데, 고작 3일도 안 되서 이렇게까지 진도를 빼버렸잖아.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겠지? 내가 참가자들을 과소평가한 것도 있겠지만."
이제 보니 하츠카의 디젠과 접점이 보이는 생김새였다. 왜 이걸 이제야 눈치챘을까 싶을 정도다.
"어쨌든 축하해. 시련을 헤치고 여기까지 도달한 걸. 남의 뒷받침이 있었다고는 해도, 넌 그걸 해낼 만한 힘과 용기를 다시 한 번 증명한 거야."
"……………."
"그래도 이만한 성장에 거들어 준 셈이니까, 그 놈한테 고마워 해도 되는 거겠지?"
"…카나이 하츠카, 아니, '재버워키'."
답이 드러나자, 유진은 비로소 의혹으로 무거워져있던 고뇌를 거둔다.
그리고는 떠오르는 것을 주절거렸다.
"그래, 역시 처음부터 속인 거였어. 나도, 토우키 형도. 남들 속이고,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고, 그런 게임을 나한테 억지로 시키고, 아린이까지 납치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날 그런 놈 상대하라고 미끼로 던져놨잖아."
하나하나가 분노를 사기 마땅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것을 겪고도 용케 이성을 부지해온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마침내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라고 유진은 생각하고 싶었다.
"너같은 놈 용서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알아?!"
"그 분노가 힘을 키워준다면 그만한 결과도 없겠지. 어때? 이걸로 이기고 지는 의미는 충분히 알았어?"
질문은 비아냥거리듯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방금 전까지 울고불고 하느라 아직도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은, 차라리 도색한 실리콘 가면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 덕분에."
조금이라도 이 자의 예정대로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노에 온몸을 맡겨서는 안 된다. 침착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니 잠시 분을 삭히고 한시라도 답이 급했던 개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좋은 말로 대답해. 아린이 어떻게 했어?"
"그거부터구나. 용케 안 까먹고 있었네. 아니면, 그거 덕분에 버텨온 거겠지?"
"대답해!"
"그냥 놔줬어."
뜻밖에도 대답은 순순히 돌아왔지만, 귀를 의심하는 내용에 유진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그 때 대답 안했던가? 별 탈 없이 잘 있다고. 자기 방에서 아직도 푹 자고 있을걸?"
재미라고는 없는 말장난일 것이다. 이것 역시 어떤 고약한 비유가 틀림없다. 그러한 의혹에 유진은 또다시 되묻는다.
"아, 아니, 지금 나랑 장난 해? 나더러 데리러 가라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그럼. 그렇게 자는데 네가 학교 안 늦게 데리러 가야지."
비유 같은 게 아닌, 그 말대로의 의미라면 유노가 추론한 대로가 된다.
그리고 위저드가 추론한 대로, 그에게는 이곳을 찾아오지 않아도 됐다는 선택이 분명히 있었다.
그 메시지를 시덥잖은 장난이라 무시해버리고, 다음 날의 평범한 일상을 이어갈 준비를 해도 됐다는 뜻이다.
단지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을 뿐.
"아니면 뭔데? 진짜로 걔가 큰일났으면 했어?"
"…………."
시덥잖은 말장난에 당했다.
성아린을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뛰어든 자신을 바보로 만들었다. 당황이 뒤섞인 유진의 분노는 그러한 것처럼 보였다.
유진 스스로도 그 지적에 잠시 할 말을 잃는다.
"그랬구나. 진짜로 여기 데려왔으면 네가 아린이를 구하는 이야기가 완성됐을지 모르는데. 내가 눈치없이 굴었네."
"아린이가 집에 있는 거 확실해?"
"누가 채간 게 아니라면 아직 집에 있겠지. 내가 보장할게. 그 애는 무사해. 별다른 해도 입지 않았어. 네가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일은 말야."
이것 역시 말장난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근거라고는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의 폭탄 발언은 악질적인 농담으로밖에 와닿지 않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믿을지 말지는 자유야. 뭣하면 직접 가서 확인하지 그래?"
"직접 가서?"
"물론. 방법은 하나 뿐이지만."
재버워키가 팔에 채워진 D-패드를 내보인다. 아지트에 있을 때부터 봤었던, 딱히 별다른 커스텀도 거치지 않은 평범한 기종이다.
유진은 다를 것 없이 평범한 자신의 D-패드를 잠시 힐끗 보고는 말한다.
"사실이면, 왜 그렇게까지 한 건데?"
"지금의 널 직접 확인하고 싶으니까."
단순명료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소리였다.
"그게… 다야?"
"그래, 넌 어쨌든 지금까지 이기고 살아남았잖아. 미지근한 환경 속에서 제자리 걸음만 하던 네가 어떻게든 성장했다는 증거야. 그 성장을 직접 체감해보고 싶거든."
또다시 실감한다. 정말 별 것 아닌 이유로 사람을 이 지경까지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처구니가 없다.
"애초에, 허락한 사람 말고 다른 외부인을 들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기준은 어디까지나 내 주관으로 엄선했어. 참가할 만한 명분을 만들어내는 것도 얼마나 큰일이었는데.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어느 정도는 꿰고 있어야 하니 말야. 뭐, 그것도 그거대로 즐거운 일이었지만."
자기 스스로 염탐을 저질러 왔다고 밝힌다니, 참으로 기분 나쁜 발언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메시지를 보낸건 네가 알아서 여기까지 오게 만들기 위한 구실이었다, 이 말이지. D-패드 잠깐 빌린 시점에서 걔 역할은 이미 끝난 거라고."
"…다행이다."
유진을 주저앉게 만든 것은 극도의 허탈감.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묘한 안심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봐버린 시점에서 결코 순수하게 안심할 수만은 없다.
"아직이야. 이번엔 너 자신을 구할 차례잖아."
설령 아린이 무사하다고 해도, 이곳이 서로의 목숨을 농락하는 수라도나 다름없다는 것은 여전하다. 그런 곳을 만든 녀석을 용서할 수 있을리 없다.
빠져나가야 한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참상을 즐겁답시고 만들어내는 이 원흉을 제재해야만 한다.
재버워키는 어느 샌가 걸치고 있던 못 보던 외투를 벗어들고는 망토처럼 어깨 위에 걸쳤다. 목에 걸고 있는 것은 유진의 것과 똑같이 생긴 펜던트.
그것이 빛남과 동시에, 이마 사이에는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형광 문신이라도 되는 듯이 빛나기 시작한다.
"그럼 다시 한 번 자기 소개해야겠지? 이름은 '재버워키'. 어드밴스드 배틀 시티의 개최자를 찾아낸 특권으로서 승부를 허락할게. 너한테는 여기서 마지막 게임이 될 텐데, 각오는 됐어?"
'마지막 게임'이란 표현이 틀린 말은 결코 아니었다. 진다면 유진은 여기서 벌칙을 받든 뭐든 해서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될 것이고, 이긴다면 무사히 빠져나가서 이런 곳에서 게임을 치룰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 재버워키가 약속을 지켜준다는 가정 하에.
"그래, 바라던 바다. 둘 중 하나는 여기서 끝나는 거야."
"아주 만족스러워."
그녀가 대답과 함께 내비치는 것은 미소.
가면이 아닌, 진심으로 즐거움에 들뜬 듯한 표정이었다.
익숙한 상황에 유진이 억눌러야 할 두려움은 더욱 깊어져간다.
방금 전까지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고민해왔던 자신이, 정말로 여기서 이겨낼 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은 트릭스에게 먼저 덤볐던 토우키와 비슷한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방금 전에 그녀가 상대했던 인물도 비슷했을 것이다.
유진은 다시 제 뺨을 툭 친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전에 덱 좀 확인할게."
"얼마든지. 그렇게 많이 챙겨왔는데 시켜줘야지."
참으로 고마운 친절이 아닐 수 없다.
최후의 결전을 두고서 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가면서 간결하게 카드를 확인한 끝에 점검을 마치고 덱을 D-패드에 새팅한다.
'이 덱으로, 진짜 가도 되는 거겠지?'
이전 듀얼에 사용한 덱을 계속 썼다가는 위험하리라는 판단에, 덱 자체는 유노와 함께 카드 교환을 거치며 교체해놓은 참이다.
기껏 얻어놓은 유용한 카드들을 아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새롭게 짜둔 덱이 제 기능을 할지는 아직 실전을 거치지는 않았기에 장담할 수도 없다.
센 카드를 왕창 넣는다고 꼭 이긴다는 법은 없는 것이고, 그런 센 카드를 눈 앞의 상대가 얼마나 갖고 있을지도 알 수 없으니까.
카나이 하츠카로서 보여준 덱을 저 자가 그대로 써줄지는 더더욱 장담할 수 없었다.
아예 없다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는, 연전에서 같은 덱을 써보인 트릭스와의 듀얼을 어렴풋이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듀얼 모드를 개시한 D-패드가 여느 때처럼 솔리드 비전으로 이루어진 카드 슬롯을 만들어내며 듀얼 디스크를 완성시켰다.
카드가 검이라면 듀얼 디스크는 방패. 어느 때가 되었든 이들은 듀얼리스트의 소중한 무기다. 이 무기가 부디 제 힘을 발휘해주기를.
[재버워키: LP 8000, 패 5장]
[서문유진: LP 8000, 패 5장]
유진의 긴장이 한 층 더해진다. 시작부터 선공을 재버워키에게 빼앗긴 것이다.
"하루만에 이렇게 연속 진행이라니 빠듯한데. 뭐부터 보여줘야 될까."
여태까지 내뱉은 말과 앞뒤도 안 맞는, 마음에도 없어보이는 넋두리를 내뱉으며 재버워키는 카드를 고른다.
"좋아. 먼저 소개할 건 '인도하는 성녀 쿠엠'."
[인도하는 성녀 쿠엠: 마법사족 / 빛 / 레벨 4 / ATK 1500 / DEF 1500]
"소환된 '쿠엠'의 ①의 효과로, 덱에서 '알버스의 낙윤'을 묘지로. 체인은?"
유진은 패를 잠시 힐끗한다.
"통과."
"고마워. 그럼 묘지에 '알버스'가 있으니까, 패에 있는 '혁의 성녀 카르테시아'의 ①의 효과로 특수 소환."
[혁의 성녀 카르테시아: 마법사족 / 빛 / 레벨 4 / ATK 1500 / DEF 1500]
"'카르테시아'의 ②의 효과. 패나 필드의 몬스터를 소재 삼아 레벨 8 이상의 융합 몬스터를 불러낼 수 있어. 체인은?"
"…통과."
"으흠. 그럼 필드의 '카르테시아', 그리고 패에 있는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를 융합."
검은 베일을 두른 백발의 성녀 '카르테시아'가 사슬이 매달린 시커먼 창살같은 레이피어를 쳐든다.
그 주변으로 무수한 시커먼 그림자들이 뱀처럼 꾸물거리며 모여들더니 성녀의 몸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서서히 크기를 키워나간 그림자는 더이상 사람의 실루엣이 아니었다. 긴 목과 꼬리, 기어다니는 네발을 가진 짐승의 형상에 가까워보인다.
"성녀여, 뒤틀린 영혼을 이끌어 최상의 볼거리를 무대로! 융합 소환, 레벨 8 '혁언룡 그랑기뇰'!"
이윽고 짐승의 목 아래 쪽에 '카르테시아'의 베일이었던 것이 양쪽으로 펼쳐진다. 원래의 배 이상은 되는 면적으로 늘어난 뒤 후 알록달록한 색상이 깃들면서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변화해나간다.
사이 사이에 촘촘하게 수놓인 붉은 무늬는 '카르테시아'의 것처럼 시뻘건 눈동자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이미 베일이라기 보다는 한 쌍의 날개나 다름없었다.
불길하고도 요란한 조명 아래, 그림자로 된 육체는 어느덧 뚜렷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용처럼 생긴 그 마수는 마치 오래 된 금속 파츠를 엮어서 만든 대형 꼭두각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새빨간 발톱이 달린 앞발로 바닥을 딛으며 새빨간 눈을 부릅 뜨고 포효하는 그 모습은 의심할 여지없는 용이 맞았다.
그렇게 완전한 변태를 이룬 듯 보였던 성녀는, 어느 샌가 변화하기 전에서 베일만 빠져 있는 모습으로 용의 옆에 서 있었다. 자신이야말로 이 용을 이끄는 주인이라는 듯이.
[혁언룡 그랑기뇰: 마법사족 / 빛 / 레벨 8 / ATK 2500 / DEF 2500]
[재버워키: 패 2장]
"융합 소환한 '그랑기뇰'의 ①의 효과. 여기에 엑스트라 덱의 카드가 빠져나갔으니 '쿠엠'의 ②의 효과를 체인. 그리고 융합 소재가 된 '드라마트루기아'의 ②의 효과를 체인! 너도 체인할래?"
"……통과."
"아쉽네. 체인 블록을 처리해야지. 먼저 '드라마트루기아'를 특수 소환. 그리고 '쿠엠'의 효과를 처리해서 묘지의 '알버스'를 특수 소환."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1500]
[알버스의 낙윤: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4 / ATK 1800 / DEF 0]
아직 턴을 받지 못한 유진의 필드에 다른 몬스터가 있을리 없으니 '알버스'의 효과가 발동될 일은 없다.
역시, 그 때 봐뒀던 하츠카의 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못 보던 카드가 섞여있기는 해도 예상 범위 내다.
유진이 그렇게 생각하려던 순간이었다.
"이어서 '그랑기뇰'의 효과를 처리. 덱에서 레벨 6 이상의 빛이나 어둠 속성 몬스터를 묘지로 보낸다. '비스테드 살로니르'를 묘지로."
"뭐!?"
귀에 들어온 카드명에 유진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비스테드'. 그것은 리퍼와의 듀얼 중 도펠코프가 선보였던 흉악한 전력들이 아닌가.
유노에게 전해듣기로 도펠코프가 사용한 '비스테드'는 위저드가 전해준 선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 위저드가 재버워키의 손에 스러졌으니, 자신이 그러했듯 그가 가진 것들을 입수했다고 한다면.
그 시점에서 재버워키의 덱도 한층 더 강화된 것이다.
덱을 보강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다. 그러니 어떤 카드를 상대하게 되던 충분히 각오해야 마땅했다.
"그럼 '살로니르'의 ②의 효과도 써줘야겠지. 덱에서 '더 비스테드 루벨리온'를 묘지로 보낼게. 이건?"
"…통과."
하지만 아직이다. 기습을 걸어야 할 타이밍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직 '루벨리온'의 특수 소환을 위해 코스트로 필요한 몬스터가 필드에 갖춰지지는 않았으니 경계할 때는 아닐 것이라고 보았다.
"흐흠. 정말 그래도 괜찮으려나?"
어쩌면, 자신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는 저쪽도 진작에 예측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유진이 노리는 것을 최대한 아껴두고 있으리라.
"그래도 아직이야. 이어서 레벨 8의 '그랑기뇰'에, 레벨 4의 '쿠엠'을 튜닝. 성녀여, 낙인의 인도로 강자의 혼을 일깨워라. 싱크로 소환! 레벨 12 '혁성의 요기사(데스피아안 루루와릴리스)'!"
'쿠엠'이 한 줄기 빛으로 변하며 '그랑기뇰'의 몸을 감싸 빛의 통로를 생성한다. 그로부터 마수들을 한데 뒤섞기라도 한 듯 붉은 발톱이 곳곳에 뻗어나온 시커먼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데스피아안 루루와릴리스: 마법사족 / 빛 / 레벨 12 / ATK 2500 / DEF 2500]
그 사이에서 발을 딛으며 나타나는 것은, 백은의 검과 자기 키만한 대검으로 무장한 여기사.
제법 고풍스러워보이는 갑주의 모습과는 달리 여기사의 어깨에는 '그랑기뇰'처럼 새빨간 발톱이 달린 커다란 앞발이 망토나 날개처럼 뻗어나와 있다.
은발 아래 아무런 표정조차 짓지 않는 창백한 얼굴은 도무지 생자의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눈동자만은 어떤 확고한 의지라도 드러내듯 붉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분명 '데스피아' 이름을 달고 있는 카드가 맞을 텐데. 융합 몬스터가 주력일 테마에 싱크로 몬스터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유진에게 다소 당황스럽다.
그러나 저런 것을 꺼낸다면 분명 중요한 그 카드를 쓰지 못할 것이라는 의문이 남았다.
"어때, 놀랍니? 네가 알고 있던 '데스피아'하고 조금 달라서?"
"……."
"클리셰는 약이든 독이든 될 수 있거든. 마음 단단히 먹은 너한테 뻔한 대접은 실례가 되지 않겠어?"
역시 안일한 각오로 임해서는 안 된다.
저쪽이 결전을 위해 나름의 준비를 거쳤다면, 자신은 그보다 더한 준비로 맞이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대처가 늦었음을 직감한 유진은 당황이나 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그럼 기다리던 하이라이트로 가야겠지? 몬스터를 융합 소환한 턴에 마법 카드 '융합 재현'을 발동. 덱에서 '융합' 마법 카드를 묘지로 보내면 그 효과를 적용할 수 있지."
"…'하루 우라라'로 체인!"
무슨 카드를 구현해 올지는 불보듯 뻔하다.
그녀의 덱을 확인한 유진에게도 그 정도의 정보는 있었다. '낙인' 덱에서 애용되는 융합 소환 카드인 '낙인융합'은 덱에서 카드를 묘지로 보냄으로서 융합 소재를 마련할 수 있는 카드.
하지만 그 카드나, 지금 쓰려 했던 저 카드나 덱의 카드를 묘지로 보내야 하니 '하루 우라라'의 효과가 천적이 될 수밖에 없다.
발동 턴에 융합 소환밖에 할 수 없다는 리스크를 저런 식으로 건너뛰려했다는 점에서 역시 방심하기가 힘들다.
"아~, 아쉽네. 어쩐지 너무 순조롭다 싶었어. 덕분에 이걸 쓸 수가 있지만."
"칫!"
"'삼전의 재'. 첫번째 효과로 2장 드로우."
[재버워키: 패 2장]
그러나 그것마저 보기좋게 역이용당하며 어드밴티지를 내주는 꼴이 되었다. 새로 패를 확보한 하츠카의 얼굴이 히죽거린다.
"카드 1장 세트. 그리고 엔드 페이즈. 융합 몬스터가 묘지로 갔으니까 묘지에서 '카르테시아'의 ③의 효과를 사용. 패로 회수할게."
"그럼 내 턴."
[서문유진: 패 5장]
[재버워키: 패 2장]
"스탠바이 페이즈지? 먼저 실례 좀 할게. 혹시 체인 있어?"
"…없어."
"그럼 속공 마법 '혁의 낙인'. 이걸로 묘지에서 '데스피아'로 취급되는 '쿠엠'을 패로 회수. 그리고 필드의 '드라마트루기아'와 패에 있는 '쿠엠'을 제외하고 이 카드를 융합 소환하지. '혁작룡 마스카레이드'!"
[혁작룡 마스카레이드: 악마족 / 어둠 / 레벨 8 / ATK 2500 / DEF 2000]
"물론 융합 소재가 된 '드라마트루기아'는 이번에도 필드로 귀환."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1500]
재버워키가 깔아놓은 장애물들을 확인한다.
먼저 '드라마트루기아'는 엑스트라 덱에서 몬스터를 전개하는 순간 유진의 효과 몬스터 1장의 효과를 틀어막아버릴 것이고, '루루와릴리스'는 엑스트라 덱의 카드가 빠져나가는 순간 아군 전체를 강화하고 카드 1장의 효과를 무효로 해버린다.
엑스트라 덱의 카드가 빠져나간다는 조건은, 단순히 엑스트라 덱의 몬스터를 필드로 불러내는 경우 역시 포함된다. 시작부터 자신의 링크 소환을 견제해오고 있는 것이다.
대항하기 위해 효과를 발동하려 해도 '마스카레이드'의 지속 효과로 LP가 계속해서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많이도 준비하셨네."
"그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성대하게 갈 수록 좋잖아?"
"그러셔."
경계할 수밖에 없는 필드다. '루루와릴리스'의 굳은 표정이 '네가 뭘 할 수 있냐'며 유진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오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답해주면 되는 것이다. 깔끔하게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그런 거 필요없거든. 마법 카드 '방해받은 파괴수의 잠'! 이걸로 필드의 몬스터를 전부 파괴!"
"어머나."
[서문유진: LP 8000 → 7400]
유진의 LP를 희생해가며 발동된 카드에 의해 순식간에 대지가 거세게 진동한다.
땅이 갈라지고, 낙하하는 기물과 낙석의 충격이 재버워키의 몬스터들을 덮쳐오며 필드를 전멸시켰다.
그럼에도 지진은 한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마치 초월적인 무언가가 깨어나려는 조짐을 알리듯이.
"그 다음 덱에서 종류가 다른 '파괴수' 몬스터를 2장씩 고르고, 각자의 필드에 한 마리씩 특수 소환한다. 상대 필드에 '가메시엘, 그리고 내 필드에는 '쿠모구스'!"
[해귀파괴수 가메시엘: 물족 / 물 / 레벨 8 / ATK 2200 / DEF 3000]
[점사파괴수 쿠모구스: 곤충족 / 땅 / 레벨 7 / ATK 2400 / DEF 2500]
땅을 울리며 어느 새 필드에 나타난 것은 두 마리의 거대 괴수. 거미와 거북이에서 따온 듯한 괴수 두 마리가 모형정원이나 다름없는 도시 위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스크린 너머에서나 보여야 할 법한 풍경이 어머어마한 질량과 함께 현실에 나타나 있다. 그 크기만으로도 도시에 남은 참가자들의 이목을 이끌기에는 충분해보인다.
그렇게 손수 차려놓은 필드가 헤집어졌음에도, 재버워키는 오히려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
"도시에서 한 바탕 날뛰는 괴수라. 탁월한 선택이야. 너도 본성에 맡기고 날뛸 준비가 됐구나?"
"아직이야. 덱에서 몬스터가 특수 소환됐으니까, 패에 있는 이 카드도 특수 소환한다. '기교호-우카노미타마노이나리'!"
[기교호-우카노미타마노이나리: 기계족 / 땅 / 레벨 7 / ATK 2250 / DEF 2250]
[서문유진: 패 3장]
괴수의 뒤를 따라 나온 것은 벼이삭처럼 길게 뻗은 관절로 이루어진 기계 몸뚱이의 여우.
"특수 소환된 '기교호'의 ②의 효과. 상대 필드의 몬스터 1장과 속성이 같고, 공격력과 수비력이 같은 몬스터를 특수 소환한다. '가메시엘'과 같은 물 속성의 '기교진-타카쿠라미츠하노오카미'를 특수 소환!"
[기교진-타카쿠라미츠하노오카미: 기계족 / 물 / 레벨 10 / ATK 2950 / DEF 2950]
"상대가 몬스터의 효과로 몬스터를 특수 소환했을 경우, 묘지에서 '그랑기뇰'을 제외하고 ②의 효과를 사용. 엑스트라 덱에서 '데스피아' 몬스터 하나를 특수 소환하지."
"이런!"
"성녀의 잔해로부터 우화한 어둠의 기사, 그 이름은 '데스피아안 쿠에리테스'!"
[데스피아안 쿠에리티스: 악마족 / 빛 / 레벨 8 / ATK 2500 / DEF 2500]
유진은 입술을 깨문다. 비슷한 급의 융합 몬스터가 아닌 전력을 모조리 약체화시켜버릴 수 있는 몬스터. 그 능력을 배틀 페이즈에 들어가기 직전이라면 언제든 써먹을 수가 있다.
레벨 8 이상의 융합 몬스터를 투입하지 않은 유진으로서는 제법 골치아픈 상대인 셈이다.
하지만 신중을 기한다면 대처하지 못할리가 없다. 그런 믿음으로 유진은 카드의 효과를 사용해나간다.
"'기교호'가 있는 동안, 상대는 몬스터를 소환할 때마다 300 데미지를 받아."
"저런."
[재버워키: LP 8000 → 7700]
이 정도로 '쿠에리테스'의 효과를 써먹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니 간을 더 보기로 한다.
"그럼 마법 카드 '트레이드 인'. 패에서 레벨 8의 '괴분파괴수 가다라'를 묘지로 보내고 2장 드로우. 그 다음 레벨 7의 '쿠모구스'와 '기교호'로 오버레이, 랭크 7 '환상수기 드래고사크'를 엑시즈 소환! 그리고 '드래고사크'의 오버레이 유닛을 1개 써서, 내 필드에 '환상수기 토큰' 둘을 특수 소환한다."
[환상수기 드래고사크: 기계족 / 바람 / 랭크 7 / ATK 2600 / DEF 2200 / ORU-2 → 1]
[환상수기 토큰: 기계족 / 바람 / 레벨 3 / ATK 0 / DEF 0]
[환상수기 토큰: 기계족 / 바람 / 레벨 3 / ATK 0 / DEF 0]
"환상수기 토큰 둘을 링크 마커에 세트, 링크 2 'ET레인저 에어로그린'을 링크 소환!"
[ET레인저 에어로그린: 사이킥족 / 바람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에어로그린'의 ①의 효과로 덱에서 바람 속성이 아닌 레벨 4 이하 몬스터를 특수 소환한다. '기교와-이와타테노타니구쿠'."
[기교와-이와타테노타니구쿠: 기계족 / 땅 / 레벨 4 / ATK 1450 / DEF 1450]
"'기교와'의 효과로 덱에서 공격력과 수비력이 같은 기계족 몬스터 1장을 맨 위에 세팅. 그리고 '에어로그린'의 ②의 효과를 써서 '쿠에리테스'를 엑스트라 덱으로 되돌린다."
"하는 수 없지. '쿠에리테스'의 ①의 효과를 체인. 레벨 8 이상의 융합 몬스터가 아닌 몬스터의 공격력을 0으로 만든다."
[해귀파괴수 가메시엘: ATK 2200 → 0]
[환상수기 드래고사크: ATK 2600 → 0]
[ET레인저 에어로그린: ATK 1800 → 0]
[기교진-타카쿠라미츠하노오카미: ATK 2950 → 0]
[기교와-이와타테노타니구쿠: ATK 1250 → 0]
'쿠에리테스'의 저주에 의해 전투력을 잃어가면서도, '에어로그린'은 무사히 양손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켜낸다. 갑충을 연상시키는 '쿠에리테스'의 모습이 그 회오리에 쓸려나가며 사라졌다.
"그래, 지금 쓰는 수밖에 없겠지. 근데 아직 불러낼 몬스터가 더 남았거든?"
"오호."
필드의 몬스터를 깡그리 약체화시키는 능력은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 하지만 자신의 몬스터까지 휘말릴 수 있다는 리스크가 따른다면, 더구나 상대에게 몬스터를 새로 꺼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제 목을 조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지금부터 보여줄 차례야! 나는 '에어로그린', '드래고사크', '기교와'를 링크 마커에 세트. 링크 4 'ET레인저 코스모화이트'를 링크 소환!"
[ET레인저 코스모화이트: 사이킥족 / LINK-4 / 빛 / ATK 2500 / 링크 마커 ↑←↓→]
힘을 잃어버린 몬스터들을 링크 마커로 치환하며, 그 통로로부터 유진과 계약을 맺은 빛의 이방인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백색의 갑주에 4색의 선이 가로지르는 듯한 독특한 외양의 전사. 등장과 동시에 내면의 어둠을 파헤쳐내듯 두 사람의 디젠이 빛을 발한다.
그 첫 만남을 재버워키는 눈에 담았다.
"저거였구나. 네 새 동료가."
불러낸 것은 좋지만, '코스모화이트'가 동료를 불러내기 위해 ①의 효과를 쓰려면 그 턴에 링크 소환으로만 엑스트라 몬스터를 불러낼 수 있다는 제약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 힘을 쓰지 않더라도 또 하나의 동료를 부를 수단이 갖춰졌으니까.
"상대 필드에 '파괴수'가 있으니까, 패에서 '노염파괴수 도고란'을 공격 표시로 특수 소환! 그리고 엑스트라 몬스터 존에 몬스터가 있으니까 패에 있는 '기교제'도 특수 소환한다!"
[노염파괴수 도고란: 공룡족 / 화염 / 레벨 8 / ATK 3000 / DEF 1200]
[기교제-아메노카쿠노미카즈치: 기계족 / 화염 / 레벨 9 / ATK 2750 / DEF 2750]
[서문유진: 패 1장]
금세 필드에서 모습을 감춘 괴수를 아쉬워할 새도 없이, 이번에는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괴수의 정석인 거대한 공룡이 나타난다. 바위덩어리처럼 견고해보이는 피막과 비늘 너머로는 용암처럼 붉게 달아오른 비늘이 삐져나와 있다.
곁에는 '도고란' 급에는 못 미쳐도 제법 커다란 기계 몸뚱아리의 사슴이 한 마리.
"이번엔 화염 속성의 '도고란', '기교제'를 링크 마커에 세트. 링크 2 'ET레인저 파이로레드'를 '코스모화이트'의 링크 앞에 링크 소환! '파이로레드'의 ①의 효과로, 화염 속성이 아닌 레벨 4 이하의 몬스터를 불러낸다. '페어리테일-카구야'!"
[ET레인저 파이로레드: 사이킥족 / 화염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페어리테일-카구야: 마법사족 / 빛 / 레벨 4 / ATK 1850 / DEF 1000]
화염의 'ET레인저'와 함께 두루마리가 말려있는 긴 꼬리가 돋보이는 기모노 차림의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난다. 쥘부채로 입가를 가리는 단아한 몸가짐은 기품을 나타내는 듯 보였다.
그것은 바로 며칠 전에 성아린과의 듀얼에서 보았던 카드.
유진은 다시금 되새긴다. 재버워키의 말대로 성아린이 무사히 현실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는 해도, 구해야하는 것은 그녀가 아닌 자기 자신이라 해도.
쓰러뜨려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긴다. 그것만으로 전력을 다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대로 물 속성 몬스터를 꺼내서 '하이드로블루'까지 꺼냈더라면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링크 몬스터를 꺼낼 만한 링크 마커가 이어져 있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여기까지인 것이다.
"'코스모화이트'의 공격력은 필드의 다른 'ET레인저' 하나 당 500씩 상승. 계속해서 '파이로레드'의 공격력은 링크 앞에 있는 몬스터 1장의 공격력만큼 상승."
[ET레인저 코스모화이트: ATK 2500 → 3000]
[ET레인저 파이로레드: ATK 1800 → 4800]
"위험하네. 그럼 묘지에 있는 '혁작룡'의 효과를 사용해서 자신을 부활."
[혁작룡 마스카레이드: 악마족 / 어둠 / 레벨 8 / ATK 2500 / DEF 2000]
"아직 메인 페이즈 안 끝났어. '카구야'의 효과. 자신과 대상으로 지정한 상대의 앞면 표시 몬스터 1장을 패로 되돌린다. 대상은 '마스카레이드'!"
"같은 이름의 카드를 묘지로 보내면 무효가 가능했지? 그럼 엑스트라 덱에서 2장째 '마스카레이드'를 묘지로 보내고 '카구야'의 효과를 무효로 할게."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여분의 전력을 아꼈다가는 당장 버틸 벽조차 허물어져버리니까.
이것으로 여분의 '마스카레이드'가 필드에 나올 걱정을 덜 수는 있었다.
"상관없어. 배틀! '코스모화이트'로 '마스카레이드'를 공격! "
선봉으로 나서는 '코스모화이트'가 손바닥을 쥐자 양옆으로 빛이 뿜어져나온다. 이를 투창으로 삼아 던져서 벽 역할을 하던 '마스카레이드'의 몸체를 꿰뚫고 폭파시켰다.
"이어서 '파이로레드'로 '가메시엘'을 공격!"
차봉으로 '파이로레드'가 힘차게 공중에 도약. 점프로 발생한 추진력을 실어 주먹에 일어난 불꽃을 눈앞의 거북이 괴물의 중앙부를 향해 돌진한다.
일직선으로 나아가 질긴 비늘을 뚫고서 몸속에 파고 들어간 '파이로레드'는, 곧 암벽과도 같은 등딱지를 뚫고 다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뻥 뚫린 중앙부 주변에는 그을린 자국과 아직 꺼지지 않은 불꽃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 그렇게 패배한 '가메시엘'의 몸체가 천천히 붕괴한다.
공격력이라고는 다 빠져나간 덩치만 클 뿐인 껍데기였기에 충격은 고스란히 주인인 하츠카에게로 전해진다.
[재버워키: LP 7700 → 2900]
자기 몬스터 가슴에다 구멍을 뚫어버린 것은 마음이 썩 편치 않기는 해도 어쩔 수 없다.
이걸로 적은 한 순간이나마 무방비 상태가 되었으니까. 그러니 자신의 카드가 깔아준 길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카구야'로 다이렉트 어택!"
마지막으로 공격을 지시받은 '카구야'가 들고 있던 부채를 거두고 꼬리에 말려있던 두루마리를 빼낸다. 동시에 말려있던 두루마리가 풀리며 제 의지대로 움직이듯 길게 뻗어나간다.
그 종이띠의 행진은 적인 재버워키의 온몸을 칭칭 둘러매며 압박해왔다.
[재버워키: LP 2900 → 1050]
그대로 계속 동여맸다면 질식해버리겠지만 아직 상대의 LP는 남아있다. 이대로는 끝낼 수가 없다는 듯이 '카구야'의 두루마리가 다시 말려들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래도 8분의 7 가까이나 되는 LP를 단숨에 깎아내렸기에 끝이 보인다는 희망이 서서히 찾아왔다.
"브라보!"
그런 고양감이 들 무렵에 반댓편의 박수소리가 맞이한다. 다름아닌 재버워키 본인이 찬사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온몸이 짓눌리고 숨이 막히는 고통이 잠깐이나마 찾아왔을 텐데도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오오, 브라보! 역시 성장했어. 여기로 초대한 게 허사가 아니었구나."
"닥쳐."
"아니, 굳이 대답할 것 없어. 충분히 전해졌으니까. 친구를 구한다는 명분이 없어도 지금의 넌 충분히 전력을 다할 수 있어."
박수를 거두면서도 재버워키의 미소는 거둬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뚜렷해질 뿐이다.
"그게 누구 때문인데?"
여전히 여유가 넘친다. LP를 아예 0으로 만들어버리지 않는 이상 저 미소를 뭉개버릴 수는 없으리라.
"메인 페이즈 2. 묘지에서 '기교와'를 제외하고 ③의 효과를 사용. 묘지에서 공격력과 수비력이 같은 기계족 몬스터 하나를 수비 표시로 되살린다. '기교호'를 특수 소환."
[기교호-우카노미타마노이나리: 기계족 / 땅 / 레벨 7 / ATK 2250 / DEF 2250]
"'코스모화이트', '파이로레드', '기교호', '카구야'를 소재로, 링크 4 '소명의 신궁-아폴로우사'를 엑스트라 몬스터 존에 링크 소환."
[소명의 신궁-아폴로우사: 천사족 / 바람 / LINK-4 / ATK ? → 3200 / 링크 마커 ↑↙↓↘]
링크 2 몬스터를 2장 분량의 소재로서 대체할 수 있음에도, '아폴로우사'의 효과를 만전으로 발휘시키기 위해 아낌없이 몬스터들을 소재로 활용한다.
걱정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엔드 페이즈에 묘지에 있는 '에어로그린'의 효과, 여기에 '파이로레드'의 효과를 발동해서 처리한다. 먼저 '파이로레드'의 효과로 화염 속성이 아닌 링크 몬스터를 묘지에서 부활. 그 다음 '에어로그린'의 효과로 바람 속성이 아닌 쪽을 되살린다."
[ET레인저 파이로레드: 사이킥족 / 화염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ET레인저 코스모화이트: 사이킥족 / LINK-4 / 빛 / ATK 2500 → 3000 / 링크 마커 ↑←↓→]
"그럼 나도 묘지에 있는 '루루와릴리스'의 ②의 효과를 사용. 덱에서 공격력과 수비력이 같은 빛 속성 마법사족 몬스터를 특수 소환할 수 있어."
"안 돼! '아폴로우사'의 공격력을 800 내리고 무효야."
[소명의 신궁-아폴로우사: ATK 3200 → 2400]
"매정해라. 자기 것만 챙기고. 어쨌든 내 턴이네."
[재버워키: 패 3장]
[서문유진: 패 1장]
"상대 필드에만 특수 소환된 몬스터가 존재하니까 '역경의 패'를 발동. 2장을 드로우."
[재버워키: 패 4장]
"그리고 '어둠의 유혹'. 2장 드로우하고, 패에서 어둠 속성인 '트라이브리게이드 메르쿠리에'를 제외. 여기에 제외된 '메르쿠리에'의 ②의 효과. 덱에서 '알버스의 낙윤'과 관련된 카드를 패로 추가한다."
"'아폴로우사'로 무효!"
[소명의 신궁-아폴로우사: ATK 2400 → 1600]
재버워키가 순식간에 패를 불리는 데에 성공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닥쳐올 위기의 가능성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반격해 올 상대의 수를 고려해본다.
재버워키의 패에는 '카르테시아'가 있을 터.
비록 룰 효과로 인한 특수 소환이라서 '아폴로우사'의 효과로는 막을 수 없었지만, 융합 소환을 실행하는 효과라면 다르다.
패에 뭐가 남았든 결국 재버워키가 상황을 뒤집을 만한 수단이라고는 융합 소환 정도밖에 없을 테니, 그것을 막아버리면 숨통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융합 소환을 막으면 되겠다 싶겠지?"
그 생각을 재버워키는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맞아. 다른 소환법이 껴있다고는 해도, 지금 내 덱의 주요 수단은 여전히 융합 소환이야. 어떤 방식으로든 융합 소환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있단 말씀."
"그래서 뭐?"
"진짜 즐거움은 이제부터란 말이지."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되는 것임을 사람들에게서 배워왔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어떤 길로 이어지든 즐겁게 가도록 하자. 그것이 재버워키 스스로의 깨달음이었다.
즐거움이란 단순한 각오를 뛰어넘는 수용의 자세. 필연의 결과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그만한 마음가짐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모두가 깨달아주는 그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이것이 그런 의도로 주어진 선물이라면, 써주는 것을 망설일 필요 따위도 없다.
되도록이면 조금 더 재미있어질 법한 상황에 쓰이기를 원했지만, 지금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터.
"패를 1장 버리고 이 카드를 발동한다. 보여줄게.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는 궁극의 힘! 속공 마법 '초융합'!"
유진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카드였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당황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융합 몬스터를, 분명 지금 갖춰놓은 아군들만으로도 어떻게든 대처가 가능할 것이라 믿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 효과를 듣기 전까지는.
"이 카드는 필드에서만 소재를 요구하거든. 그리고 지금 불러낼 몬스터의 소재 조건은 종족과 속성이 같은 다른 몬스터 두 마리.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
패에서 소재를 마련할 수 없다면 그냥 '융합'보다도 효율이 나쁘다.
언뜻 그 조건이 마련되지는 않은 듯 보이지만, '코스모화이트'에게는 화염, 물, 바람, 땅 4가지로 취급되는 효과가 있었다. 즉, 필드에는 사이킥족 / 화염 속성이 되는 몬스터가 딱 2마리 갖춰져 있는 셈이다.
"설마, 내 필드에서…!"
"그래. 네 동료들 말야. 진정한 의미로 하나가 되는 거지."
가슴이 철렁인다. 좋든 싫든 힘을 합치기로 했던 동료를 이리도 쉽게 빼앗긴다는 상황이, 자신이 그런 상황을 자초했다는 충격이, 그리고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다는 불안이 동요를 안겼다.
'걱정 마라. 우린 돌아온다. 네가 끝나지 않는 이상.'
그런 유진의 머릿속에 그 목소리가 전해져온다.
여전히 아버지의 것을 의태하고 있을 뿐인 음성이 자신을 위로하려 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말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님을 알기에, 유진은 이내 마음을 고친다.
이것보다 더한 시련을 겪었을 텐데, 앞으로 어떤 더한 것이 기다릴지 모르는데, 이 정도로 마음이 꺾여서는 곤란하다.
그저 뭐가 기다리고 있던 각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네 필드의 '코스모화이트'와 '파이로레드'를 융합!"
난데없이 하늘에 먹구름이 낀다. 그 사이로 번개와 폭풍을 동반하는 거스를 수 없는 힘의 소용돌이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 힘에 든든한 아군으로 버텨줘야 했을 'ET레인저'의 멤버 둘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동시에 빨려들어간다.
"레벨 6 '공명의 날개 가루라'를 융합 소환!"
[공명의 날개 가루라: 비행야수족 / 어둠 / 레벨 6 / ATK 1500 / DEF 2400]
[재버워키: 패 2장]
거창한 연출 끝에 먹구름을 떨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날개 사이로 두 머리가 달린 괴조였다.
두 머리에서 내뱉는 울음소리가 귀를 찌를 기세로 강렬하게 자극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굴할 필요는 없다. 아직 자신의 몬스터는 남았으니까.
"특수 소환했으니까 '기교호'로 300 데미지!"
[재버워키: LP 1050 → 750]
이렇게 LP가 차츰차츰 깎여만 준다면 승리도 어려울 것은 없다. 그렇게 유진은 희망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세지도 않네. 궁극의 힘이 뭐?"
유진은 그렇게 자신을 달래듯 코웃음쳐보인다.
잘만 하면 게임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몰랐던 아군들을 빼앗아가면서까지 불러낸 게 고작 저것이냐고 불평하고 싶어질 정도다.
"역시 이걸론 부족한가. 실망시켜서 미안."
"아니, 필요없다니까."
물론 이 정도로 아직 필드에 남은 '아폴로우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재버워키가 모를리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는 여전히 패가 남아 있다.
"사양 말고. 방금 묘지에 버린 '비극의 데스피아안'을 제외하고 ②의 효과를 발동. 묘지에서 '낙인' 마법 카드를 세트한다. '혁의 낙인'이 좋겠네."
"'아폴로우사'로 무효!"
[소명의 신궁-아폴로우사: ATK 1600 → 800]
몬스터는 하나 더 남아있었다.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서 그 몬스터의 능력을 활용해 또다른 몬스터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막아낸다.
"괜찮아. 2장째 '혁의 낙인'이 있거든."
"칫…!"
"묘지에서 '알버스'를 회수하고 융합 소환을 실행할게. 패에 있는 '알버스, 그리고 '카르테시아'를 제외하고 레벨 8 '낙인룡 알비온'을 융합 소환!"
[낙인룡 알비온: 드래곤족 / 어둠 / 레벨 8 / ATK 2500 / DEF 2000]
[재버워키: 패 0장, LP 750 → 450]
"그리고 융합 소환한 '알비온'의 효과…"
"그것도 무효!"
[소명의 신궁-아폴로우사: ATK 800 → 0]
저것들 중 하나라도 더 허용했다면 그대로 게임이 끝나버릴 지 모르는 상황. 이를 막아내기 위해 '아폴로우사'는 제 힘을 모조리 깎아가면서 분주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틀어막았다.
"음, 그래야겠지. 배틀이야. '알비온'으로 '기교호'를 공격!"
먼저 자칫하면 LP를 전부 깎아먹어버릴 뻔했던 기계 여우를 '알비온'의 불길이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미 힘을 소진한 공격력 0짜리 과녘 뿐.
"이어서 '가루라'로 '아폴로우사'를 공격!"
화살로 대항할 힘조차 남지 않은 사냥꾼을 향해 '가루라'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든다. 일견 단순히 돌진할 뿐인 날짐승의 온몸에 보랏빛 불꽃이 번지기 시작한다.
그 상태에서 나란히 날아오는 두 부리가 일제히 '아폴로우사'를 쪼아 격퇴시켰다. 그 충격은 주인인 유진에게로 전해진 나머지 예상보다도 많은 고통과 함께 몸을 뒤로 떠밀었다.
[서문유진: LP 7400 → 4400]
"'가루라'가 주는 전투 데미지는 두 배. 어때, 견딜만 해?"
"이 까짓 거."
직접 공격이나 다름없는 충격에 표정을 가득 찡그리면서도 견딜 수 있다고 스스로 암시한다. 아직 LP는 재버워키보다 10배는 많이 남았으니까. 걱정해야될 녀석은 따로 있는 셈이 아닌가.
"그럼 메인 페이즈 2. 레벨 6 이상의 드래곤족 몬스터인 '알비온'을 묘지로 보내고, 묘지에서 '더 비스테드 루벨리온'을 특수 소환."
[더 비스테드 루벨리온: 드래곤족 / 빛 / 레벨 8 / ATK 2500 / DEF 3000]
"'루벨리온'의 효과로 덱에 있는 '낙인' 지속 마법을 내 필드에 놓을게. '실낙인'을 선택. 그리고 엔드 페이즈. 묘지로 간 '알비온'의 ②의 효과. 너도 체인할 거 있지?'
"'파이로레드'의 효과! 묘지에서 '에어로그린'을 특수 소환!"
[ET레인저 에어로그린: 사이킥족 / 바람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그럼 나는 '낙인추방'을 세트. 이걸로 턴 엔드야."
끝나지 않았기에 떠난 동료들은 다시 돌아올 기회가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다.
재버워키의 전력이 이 정도라면 우습게 꺾어버리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전력을 다해버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승산을 붙잡으면 된다. 여태까지의 선택과 악운이 그것을 가능케 해왔지 않은가.
무력감에 위축된 나머지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조차 찾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유진은 목숨을 건 승부의 가치를, 그 상황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의 소중함을 결코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적들은 아마도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얻어낸 뜻을 전했겠지. 분명 그들과 같은 길에 서게 된 자신으로서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가르침일 것이다.
다만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길에 섰다 한들 같은 뜻까지 품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아린이를 건드리지 않았더라도 다른 수많은 목숨이 농락당하는 꼴을 본 유진은 이 자를 용서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억지로 목숨을 걸게 만든 비열함, 자신이 선택할 수조차 없는 엄벌을 눈앞에서 보게 한 괴로움.
그런 온갖 기만을 '유희'라고 정의하는 것은 듀얼에 대한 모독이다.
그런 고통을 맛보게 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 한다.
요컨대 맞았으면 맞은 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돌려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렬한 한 대를 칠 수 있는 패가 뽑히길 바랄 뿐.
그런 유진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솔리드 비전에 딸려오는 효과음과는 다른,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다.
부르릉 하는 매우 익숙한 소리. 그것이 바이크 엔진 소리임을 유진은 바로 알아챘다.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바이크 한 대가 이 쪽으로 찾아오고 있었다.
유진은 숨이 멎을 만큼 흠칫한다. 다시 떠오르려 드는 기억을 억눌러내면서도, 그걸 제법 능숙하게 타고 있는 인물을 확인하면서 당황과 긴장을 거둘 수가 없었다.
해골 가면과 로브를 뒤집어 쓴 의문의 인물. 그것이 '리퍼'의 모습으로 나선 아이바 유노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한 발 늦었나."
유진 곁에서 바이크를 세운 리퍼가 해골 가면을 통해 뒤틀린 목소리를 꺼낸다.
타고 있던 바이크는 검은 코트에 걸맞는 검은 배색이기는 했지만, 조형을 자세히 보니 이전에 지나친 것과는 다른 기종이다. 그 새 어떻게 키까지 갖춰져 있는 바이크를 또 찾아냈을까.
그 와중에 수트케이스를 짐칸에 착실히 고정시켜놓은 것에서 왠지 모를 알뜰함이 느껴진다.
'아니, 그 새 해치웠어!? 그것보다 저건 또 언제? 면허증 없는 거 아니었냐고?'
지금 이 광경만으로도 따질 거리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유진은 선뜻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저렇게 정체를 숨기고 온 시점에서 함부로 아는 척해서야 좋을 것이 없음을 은연 중에 깨달은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부탁을 어기고 이렇게 먼저 상대해버린 시점에서, 눈앞의 해골가면이 여전히 동맹으로 있어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그만한 크기의 몬스터들을 연달아 꺼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없겠지만, 분명 다른 상대를 쫓아갔을 그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올 생각을 했을까.
단순히 놓치고 돌아온 것이라면 이해는 빨라지겠지만, 만약 진짜로 그 몬스터의 주인과 상대해서 이기고 돌아온 것이라면.
그는 이 듀얼도 자신보다 더 쉽게 타파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유진이 생각에 빠진 사이 리퍼는 반댓편의 인물에게 질문을 꺼낸다.
"네가 재버워키겠지?"
"아니, 이러면 여태까지 정체를 숨긴 의미가 없는데. 뭐, 바깥에서 듀얼하던 내 책임이겠지."
재버워키는 또다시 마음에도 없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쨌든 잘 왔어, 동포. 근데 지금은 좀 참아줄래? 먼저 끼어든 사람이 임자거든."
그제서야 해골 마스크의 시선이 또다시 유진 쪽을 쳐다본다.
어딘가 찔리는 듯한 기분으로 유진은 잠시 그 침묵을 맞이했다.
"친구를 구하러 왔다고 했었지."
"……."
"아무나 재버워키를 찾아서 이기기만 하면 게임은 클리어된다. 친구를 다시 만나기로 한 너라면 그 때까지 가만히 버티는 편이 나았을 텐데. 누가 그런 충고 한 적 없었나?"
"……………."
"선수를 뺏어가면서까지 그 자를 상대할 이유가 네놈한테 있는 거냐?"
뒤틀린 목소리가 내뱉는 질문에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유진은 한 순간 고민한다.
어차피 털어놓을 이야기는 다 털어놓았다. 자신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이들에게 둘러댈 말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한데, 내가 게임을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가 저 자식을 직접 조지기 위해서야."
"나도 그렇지."
"알아. 그치만 난 저 자식의 덱을 봐뒀어. 그 덱을 여기서도 쓰고 있다고."
"같은 덱을 써도 같은 전술까지 쓴다는 보장은 없지. 정말 그 이유만으로 되겠나?"
그러니 납득시킬 이유도 떠올리지 못한 그에게 남은 수단이라고는 억지 뿐이다.
"미안. 그래도 양보 못 해."
"왜 불필요한 싸움을 고집하지? 설마 이 승부를 즐길 작정이냐?"
"아니. 끝내고 싶어서 그래. 기왕이면 내 손으로 직접."
이건 그냥 고집에 불과하다. 본업에 임하는 리퍼를 무르게 할 논리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걸 위해 안전한 선택을 포기하겠다니. 결국은 네 기분을 위해서라고 받아들이면 되겠지?"
"…그렇겠지."
"단순한 자기만족이라. 그럼, 즐기는 거라고 간주해도 되겠나?"
"……."
자신을 적으로 돌릴 셈이냐는 그 말을 차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질문을 질문으로 되돌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누가 그런 말 안 했어?"
"무슨 말?"
"너네는 정말로 이 일을 즐기는 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거지?"
"없어."
"그래."
괜히 유노까지 걸고 넘어지는 것이니 한 편으로는 마음이 찔리지만, 최소한 그렇게 해서까지라도 자신의 결정을 무를 생각이 없음은 확고했다.
"그럼 나도 그런 거야. 만약 이 게임을 계기로 내가 변해 버리기라도 하면 그 때는 마음대로 해. 적어도 지금 물러설 생각 없으니까."
그런 유진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리퍼는 잠시 생각한다.
유노가 이걸 납득할리가 없다.
지금도 벌써 '안 돼'라고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 순간 머릿속이 시끄러워질 정도의 울림이었다.
"…다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았나? 살아서 돌아갈 생각 아니었나?"
"물론 그럴 생각이야."
이길 것을 전제로 대답해 오고 있다.
하지만 승리는 각오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실력이든, 운이든 따라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그렇게까지 자신하고서 저런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너네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으로 싸우고 있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부정하려고 뛰어들었잖아?"
"…………."
"나도 그런 억지 좀 부릴게. 어차피 미련한 것들끼리인데, 먼저 찾은 사람한테 양보 좀 해주면 안 돼?"
한 마디 한 마디가 억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 정도로 유진 본인도 말주변이 부족하다는 것 쯤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논리적인 반박이 계속 들어와도 아직 양보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나서던 사람을 유진은 차마 막지 못했음을 떠올린다. 그 결과 그는 무저갱 속으로 떨어졌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자신이 대신 나선다'는 선택이 가능했을 텐데. 그걸 미뤄버린 시점에서 자신이 그의 등을 떠밀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몰랐다.
그 다음 무저갱으로 향하는 낭떠러지에 몰린 것은, 다름아닌 바로 자신. 이미 남은 한 발짝마저 앞을 향해 들어올려진 상황이다.
그 발에 딛을 바닥이 있을지는 순전히 운에 달렸을 것이다. 누가 봐도 추락을 앞두고 있는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포기하고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것이 차라리 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기엔 유진에게 미련이 너무나도 많았다. 없었더라면 진작에 추락해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도 않았을 터.
자신에게 있는 것을 포기하라는 협박을 들어주기가 싫다. 그것을 재버워키도 꿰뚫어봤을 테니 이곳으로 끌어들였으리라.
그리고, 눈꼴시려운 상대를 계속 두고만 보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어찌 됐든 응한 것은 유진 자신의 선택이었기에, 이상하게도 후회가 밀려오지는 않는다.
그저 살아남아서 다음을 보고 싶다. 그런 과분한 욕망을 이룰 힘이 주어지기를 원할 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긴장을 놓지는 말아야 할 터.
"…어차피 듀얼은 함부로 끝내지 못하니까. 네 결정이다. 미끼일 가능성을 알고서도 싸우길 택한 건 너 자신이야. 책임지고 받아들여."
"그래, 고마워."
리퍼의 대답은 독단이었다. 이번에도 유노의 목소리를 묵살해버린 것이다.
어떤 원망의 발언이라도 감수한 결정이었지만, 목소리는 그저 잠시 멈췄을 뿐이다.
"네놈한테도 묻겠다."
"대화 페이즈라면 본인이 직접 붙을 때 해도 상관없을 텐데…."
문득 말을 끊은 재버워키는, 유진의 눈치를 슬쩍 보고서야 말을 바꾸었다.
"말씀하세요, 갤러리 씨."
"왜 이런 게임을 벌이지?"
"그야 재미있으니까."
또 간단한 대답이다.
여태까지 보인 행색만으로도 충분히 예상은 가능했지만, 저런 단순해빠진 동기로 사람 목숨이 놀아난다고 생각하면 유진의 속은 한 층 더끓어오를 것만 같다.
"왜 네 재미를 남한테 강요하려 들지?"
"강요라. 색다른 소통이라고 하면 안 될까?"
"헛소리 집어치워."
"헛소리라니? 적어도 문답무용으로 배제해버리는 네 쪽보다는 소통의 여지랄 게 있다고 보는데? 썩어버렸다고 뿌리째 뽑아내는 너보다, 차라리 어떤 식의 즐거움이든 존중하고 새싹부터 키워나가는 내 쪽이 인도적이지 않을까?"
"승자가 패자를 갖고 노는 시스템이? 네놈이 만든 건 그런 게 아니었나?"
"무슨 말씀을. 그런 건 내가 시작하기 전부터 세상에 이미 암암리에 지켜져 온 거야.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목숨을 건다는 리스크를 두고서라도 누릴 가치가 있는 쾌감 아니겠어?"
재버워키는 주머니에서 자신이 수확한 디젠 몇 개를 꺼내보인다.
"이 게임은, 그 법칙을 극히 한정적으로 재현해놓은 축소판에 불과해. 그래도 무언가를 얻는다는 보상은 확실히 존재하지. 그러니까 이 게임을 받아들여가는 걸테고. 너라도 예외가 아니지 않나?"
"무슨 뜻이지?"
"하나씩 어둠을 배제해나가고 있다, 그 성취감을 얻고 있잖아?"
"이미 들은 얘기다. 그런 걸 네가 생각하는 즐거움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내가 뭐랬어? 어떤 즐거움이든 존중해주겠다니까? 그걸 얻어갈 수 있다면 나 역시도 보람이 있지."
"헛소리 집어치우랬을 텐데."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정의를 관철한답시고 발을 들이는 케이스는 너희 태스크 포스 말고도 꽤 있거든. 그런 인간군상도 제법 여러 종류로 나뉘고 말야."
유진은 또다시 시선이 교차하는 것을 느낀다.
"하물며, 독으로 독을 다스리겠다니. 무지일까 자기기만일까. 그런 고행이 즐긴다는 마음가짐없이 가능한 거려나? 고생이 많아."
이번에는 해골가면을 향해 다시금 미소를 보냈다.
"이미 들은 소리다."
"그럼. 멈추려면 진작 멈췄겠지. 해야될 일을 내버려두면 불안해서 잠도 못 이룰 텐데. 안 그래?"
대놓고 보내는 조롱에 대답은 없다.
"그래서 한 편으론 기대도 되거든. 어둠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어둠에게 어떤 결말이 기다릴지."
그 미소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해골 가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 너머의 얼굴 역시 정색하고 있으리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가 있었다.
"일단 보는 눈이 있어서 더 자세히 알려주기는 곤란하겠네. 저 애의 재미를 위해서라도 이 이상의 질문은 좀 삼가주지 않을래?"
"………."
"그래. 양보해주는 배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 비아냥을 대꾸할 여지 따위 없다.
그걸 본인도 알았는지 본인이 할 얘기를 계속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힐끔거리던 재버워키의 시선이 온전히 유진에게로 향한다.
"아, 미안미안. 네 턴이었지."
"……그래."
[서문유진: 패 2장]
[재버워키: 패 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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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이 다소 길어진 감이 있어서 일부 파트를 앞으로 땡겨왔습니다. 뒷편은 빠른 시간 내에 올릴 예정
읽던 부분을 또 보여드리는 꼴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뭔가 더 나아진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하다못해 후라게 기다리는 정도의 재미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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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 듀얼로그를 아예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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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제작진들이 괜히 일회용 카드를 남발하는 게 아니겠지 싶습니다 물론 그런 건 되도록 자제하고 싶습니다만 이미 오리카를 여럿 만들어낸 입장으로서 할말이 없다는 게... | 23.11.24 23: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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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온
그래서 전 듀얼로그를 아예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 | 23.11.24 23:5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