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언제부터 의식이란 것이 있었을까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녀는 번화한 거리의 쇼윈도에 놓여 밤이지만 밝기 그지없는 풍경을 잘 알고 있었고,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화려한 드레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죠. 자리에 앉아 눈길을 끄는 것은 그녀의 하루 일과의 전체였고, 누가 자신의 주인이 될지 설레어 하는 것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었어요.
따분하고 지루한 하루는 어제가 오늘 같고, 그제가 내일 같아서, 오늘 본 사람이 어제 본 사람인지, 그제 본 사람이 오늘 본 사람인지 도무지 기억해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딱 한 사람만은 잊을 수 없었습니다. 붉은 빛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소녀였어요. 물결치는 푸른 눈동자, 붉은 실처럼 미소 띤 입술, 하얀 비단결 같은 목소리.
소녀는 그녀를 들어 올렸고, 마치 그녀를 꾀어내듯 말했죠. “이 아이가 좋아.”라고요. 그녀는 인형이란 존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어쨌든 기뻤답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이었다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요.
소녀의 품에 탄 인형의 눈에 전혀 다른 세상이 비쳤죠. 허공에 나풀거리는 소녀의 리본, 잿빛으로 물든 채 지는 달, 규칙적으로 놓여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끼릭거리는 휠체어 소리. 모든 것이 인형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그 중 무엇보다 인형을 들뜨게 한 것은 자신이 소녀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이었죠. 소녀의 저택은 하얀 은방울꽃이 흐드러진 곳에 피어있었죠.
온통 프릴로 꾸며진 귀여운 소녀의 방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단 한 숨 자는 것이었습니다. 뭐, 인형은 잠들 수 없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그녀를 옆에 누이고는 ‘잘 자’ 한마디와 곧 새근새근 잠들게 되었죠. 어차피 움직일 수도 없었던 그녀이고, 뜬 눈으로 밤을 보내는 것이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었으니, 인형은 불안함이나 조바심 따위는 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까, 하는 설렘만 있었죠.
하루 종일 쇼윈도에 앉아있던 인형의 일상은, 이제는 하루 종일 소녀의 품에 앉아있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소녀는 인형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 그건 인형도 마찬가지였어요. 소녀는 심지어 어머니께 밥을 먹을 때만큼은 놓아두고 먹으라는 꾸중을 들으면서까지 인형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사용인에게 부탁해서 자신의 드레스와 꼭 닮은 옷을 지어 인형에게 입히기까지 했죠.
그러던 어느 날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소녀에게는 세 자매가 있었답니다. 그녀들의 성격은 제각각이었고, 그녀들의 성격이 제각각 다른 만큼 그녀들이 다루는 악기도 제각각의 소리를 내었죠. 은방울 꽃 핀 언덕의 연주는 비록 서툴렀지만, 몸이 불편한 여동생을 위한다는 마음이 듬뿍 묻어난 연주였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박수치며 활짝 웃었죠. 자매들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불공평했어요.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녀들이, 움직일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형에게서 소녀를 빼앗아 간다는 것이. 인형은 질투가 났습니다. 뭐, 그래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요.
어느 날 비바람 몰아치는 날엔 그런 일이 있었죠. 소녀가 열병에 걸려 쓰러졌습니다. 언제나 해맑게 웃던 소녀도 아픈 채로는 웃을 수 없었지요. 품에 안긴 인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소녀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어도 인형은 소녀를 달랠 수 없었어요.
소녀의 아버지가 달려 나갔습니다. 인형은 앉아있기만 했어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죽어라고 달렸습니다. 소녀를 사랑하는 인형은 가만히 앉아있는 동안에요. 약을 가진 아버지가 돌아오고, 비바람이 개이고, 소녀의 열병도 나아서, 소녀는 웃음을 되찾았지만, 그 웃음은 인형의 것이 아니었어요.
불공평했어요. 인형에게는 소녀가 제일 소중한데, 소녀에게는 인형은 제일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요. 그런 일이 하나 둘 쌓여가고, 인형에겐 하나 둘 불만이 쌓였죠. 언젠간 소녀에게서 버림받는 날이 오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도 있었지요.
그래서 그 날 밤, 어두운 방의 프릴들이 인형에게 속삭였죠. 소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느냐고. 침대보가 중얼거렸어요. 네 앞을 막아선 것이 있다면, 당연히 너는 두 번째가 되는 거라고. 베갯잇도 말해줬죠. 그럼 그 앞을 막아선 것을 밀어 떨어트리면 네가 첫 번째가 되는 거라고.
인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답니다. 소녀는 그것도 모른 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죠. 인형은 땅바닥에 내려섰어요. 조금 불안한 걸음걸이였지만 붉은 융단이 인형의 기운을 북돋워줬죠. 여기서 쓰러지면 소녀는 네 것으로 만들 수 없어 라며요.
인형은, 인형에게서 소녀의 웃음을 빼앗아 간 자매들을 질투했어요. 하지만 인형은 눈앞에 잠든 자매를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죠. 다만 질투했어요. 저주했고, 질투했지요. 자매들이 미쳐버린 섬망譫妄의 꿈을 꿀 수 있도록 말예요.
인형은, 인형에게서 소녀의 웃음을 되찾아 갈 그녀의 부모들이 무서웠어요. 그래서 인형은 부모들을 눈앞에 둔 채 더더욱 질투하고 더더욱 저주했지요. 부모들이 고통스러운 맹독의 꿈을 꿀 수 있도록 말예요.
그랬더니, 짜잔! 날이 밝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이 가세요? 부모들은 고통 속에 뒤틀려 죽은 채 발견되었고, 자매들은 제각기 미쳐버린 채 발작을 일으키게 되었죠. 소녀는 이런 불행이 왜 자신을 덮쳤는지 알 수 없었고, 인형은 간혹 인간들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던 신이라는 작자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죠.
이제 소녀는 인형만을 위해 웃었을까요? 당신도 그렇게 되지 않았으리란 건 짐작할 수 있었을 겁니다. 소녀의 눈동자는 죽어버렸고, 자연스레 인형에게서 관심이 멀어지게 되었죠. 소녀는 마치 쇼윈도에 앉아있던 그 날의 그 인형처럼, 그저 휠체어에 앉아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어요.
사용인들은 하나 둘씩 그만두기 시작했죠. 당연하죠. 돈 줄 사람도 없는데. 아무리 소녀가 불쌍하다지만, 그런 동정심이 자신들을 먹여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비로소 마지막 사용인이 소녀에게 미안하단 말을 남긴 채 저택을 떴을 때, 소녀의 친척들의 손에 미쳐버린 자매들이 어디론가 사라졌을 때, 인형은 소녀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망가진 인형은 필요 없어.”
소녀는 인형을 바라봤습니다. 오랜만에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죠. 그리고는 미쳐버린 듯이 깔깔깔 웃어댔습니다. 인형은 소녀의 품에서 내려왔고, 소녀는 자신의 드레스와 꼭 닮은 옷을 입은 인형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깔깔깔깔, 깔깔깔깔…….
인형은 소녀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새어나오는 저택을 등 뒤로 한 채, 그 날의 잿빛의 달을 올려다보며, 은방울 꽃 사이를 헤집고 걸으며 중얼거렸습니다.
“아아, 우울해.”
…
…
…예?
그 뒤로 소녀는 어떻게 되었느냐구요?
음, 뭐어, 정신을 차린 소녀는 언니들이 미친 듯이 그리워졌죠. 죽어버린 부모를 찾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저 그리워 할 뿐, 언니들을 찾아 갈 방법따윈 알 수 없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배를 곯아가면서, 아끼던 인형을 품에 안는 것처럼, 자매들의 악기들을 품에 안았답니다. 띵똥땡똥 소리도 내보고, 뿌우뿌우 바람을 불어보기도 하고. 소녀는 홀로 잠드는 밤이 너무 무서웠고, 깨어났을 때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 두려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창 밖으로 보이는 은방울꽃이, 그 언덕에서 있었던 연주회만이 너무나 그리웠고, 소녀는 하루 종일 은방울꽃의 언덕만을 바라봤답니다.
그리고는 떠올렸어요. 자신의 언니들이 알려줬던 은방울꽃의 꽃말을.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뭐어, 감수성 깊은 소녀가 아니고서야 알 리가 없죠. 은방울꽃의 꽃말은 ‘되찾은 행복’이랍니다.
죽기 직전의 인간은 영적인 능력이 강해진다고 하는 거, 알고 있나요? 소녀는 이제 굶어죽기 직전이었답니다. 그리고 소녀는 죽기 직전, 악기에 대고 딱 하나 소원을 빌었어요. 뭐, 대충 즐거웠던 그 시절을 되돌려 달라. 그런 거였죠. 놀랍게도 소녀의 소원은 이루어졌고, 악기들은 그 서투른 연주를 다시 시작했지요. 소녀는 기뻐서 눈물을 흘리고, 까르르 웃었죠. 간혹 소녀의 상태를 확인만 하러 올 뿐인 고용인의 눈에는, 휠체어에 앉아 악기를 품고 허공을 바라보며 웃어대는 미친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요.
하루가 멀다하고 괴담이 쌓여가는 프리즘리버 가문의 저택은 이제 누구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프리즘리버 가문의 저택은 세상 모두에게서 잊혀졌답니다.
完.
동방프로젝트 갤러리 동토대 제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