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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일본은 한국과 전쟁하고 싶어한다고 봄.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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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보기클릭)125.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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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으로 꿇리고 싶겠지 그래서 막기위한 힘이 필요함
21.05.26 23:59

(IP보기클릭)125.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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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원한다고 해도 현재는 협정 문제라든지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은 더 이상 첨단 과학에서 큰 원동력을 갖고 있는 나라가 아니라 메리트가 떨어짐 현세는 철저히 이익적인것...저들은 돈을 줄수 있지만 지구적으로 권력을 줄수 있는 달란트가 없음
21.05.26 23:59

(IP보기클릭)106.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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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것은 유교와 비슷해서 그래 유교에는 신이 없지만 신을 대신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역사야 역사라는 것을 통해서 기록을 남겨 선행과 악행이 영원히 사람들에게 전승되는 것이지 선행과 악행은 유교적 기준을 갖고 판단 하는 것이고 예를 들어 사단칠정 같은거로 그래서 유교국가는 광적으로 기록물을 남기는 거야 국가로는 실록, 승정원일기 개인으론 난중일기 같은거 기록에서 충신과 군자, 간신 역적 모리배로 나뉘어 끝없이 인용되면서 역사기록으로 영생하는 거야 그것이 진정한 입신양명 이거든 그래서 한국인은 절대선과 절대악을 믿는 거고 일본인은 승자선 패자악이라 믿는 거고
21.05.27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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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천부인권은 홍익인간과도 맞닿지
21.05.27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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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칼의역사..이걸로 모든게 설명됨..
21.05.26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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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읽으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정신적 부분에 서구화가 많이 되었구나 싶음. 기독교적 정의관을 좀 더 선호하니까.
21.05.27 00:17

(IP보기클릭)106.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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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우리가 찐이고, 중국은 도교의 나라. 한국인의 삶에 유교가 알마나 들어왔냐면 “못 배운 놈”, “알만한 사람이 왜구래” 라며 모든 인간을 지식인(선비)로 가정하고 있다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며 한국인의 천당이자 발할라 는 역사적 기록이라고 단정하고 있거든
21.05.27 01:03

(IP보기클릭)118.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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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칼의역사..이걸로 모든게 설명됨..
21.05.26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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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천이의썩열휴장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지지리도 못하는 전쟁 자체에 적성이 없는 사람들이라는게 우스운 일이지... 사실 근원을 따져봐도 전쟁과는 무관한 섬지방의 토착민들과 전쟁을 피해서 피난온 피난민의 조합이니... | 21.05.27 05:32 | | |

(IP보기클릭)125.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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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원한다고 해도 현재는 협정 문제라든지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은 더 이상 첨단 과학에서 큰 원동력을 갖고 있는 나라가 아니라 메리트가 떨어짐 현세는 철저히 이익적인것...저들은 돈을 줄수 있지만 지구적으로 권력을 줄수 있는 달란트가 없음
21.05.26 23:59

(IP보기클릭)125.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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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으로 꿇리고 싶겠지 그래서 막기위한 힘이 필요함
21.05.26 23:59

(IP보기클릭)175.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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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읽으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정신적 부분에 서구화가 많이 되었구나 싶음. 기독교적 정의관을 좀 더 선호하니까.
21.05.27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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펱로스
민주주의 같은 걸로 느껴짐. 왜냐면 대체할 정의관이 .... | 21.05.27 00:22 | | |

(IP보기클릭)223.62.***.***

기저핵
사실....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게 기독교의 "천부인권사상"에서 온거라서...아예 분리시킬 수는 없음. 절대왕정시절에 왕권신수설도 기독교에서 왔지만... | 21.05.27 00:3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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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AFRSXPL
하지만 천부인권은 홍익인간과도 맞닿지 | 21.05.27 00:40 | | |

(IP보기클릭)123.248.***.***

펱로스
조선시대만 봐도 중국 유교랑 많은 점이 다르고 나중에 역적 희생된 사림들도 200년이나 지나도 신원하고 이런걸 보면 힘보다 중요한 정의 같은걸 가지고 있음 | 21.05.27 00:47 | | |

(IP보기클릭)106.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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펱로스
아니야 그것은 유교와 비슷해서 그래 유교에는 신이 없지만 신을 대신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역사야 역사라는 것을 통해서 기록을 남겨 선행과 악행이 영원히 사람들에게 전승되는 것이지 선행과 악행은 유교적 기준을 갖고 판단 하는 것이고 예를 들어 사단칠정 같은거로 그래서 유교국가는 광적으로 기록물을 남기는 거야 국가로는 실록, 승정원일기 개인으론 난중일기 같은거 기록에서 충신과 군자, 간신 역적 모리배로 나뉘어 끝없이 인용되면서 역사기록으로 영생하는 거야 그것이 진정한 입신양명 이거든 그래서 한국인은 절대선과 절대악을 믿는 거고 일본인은 승자선 패자악이라 믿는 거고 | 21.05.27 00:51 | | |

(IP보기클릭)123.248.***.***

통성명은.무슨
웃긴건 우리가 그런 유교의 도덕관에 중국보다 더 심취했다는거지 ㅋ | 21.05.27 00:54 | | |

(IP보기클릭)106.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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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달려
유교는 우리가 찐이고, 중국은 도교의 나라. 한국인의 삶에 유교가 알마나 들어왔냐면 “못 배운 놈”, “알만한 사람이 왜구래” 라며 모든 인간을 지식인(선비)로 가정하고 있다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며 한국인의 천당이자 발할라 는 역사적 기록이라고 단정하고 있거든 | 21.05.27 01:03 | | |

(IP보기클릭)123.248.***.***

통성명은.무슨
하긴 중국은 그럴수 밖에 없은게 권력이란게 유교가 감당이 안될정도로 비대해 져서 권력 자체가 도덕이 되어 버린 국가라 어쩔수 없지 명나라만 봐도 일단 영락제가 사대부들 다 작살내고 권력을 잡았으니까 청나라 황제들도 문자의 옥같은걸로 또 한바탕 조지고 그런 인간들이 현군으로 손에 꼽히는걸 보면 확실히 우리랑 다르지 | 21.05.27 01:06 | | |

(IP보기클릭)106.102.***.***

아재달려
중국애들의 무책임함 뻔뻔함 쾌락제일 주의 이런건 도교 영향이 큰거 같고 일본 애들은 다신교적 신도와 불교가 괴이하게 만나서 승자선이란 파렴치 가치관이 아니면 염세적으로 자 살이나 하는 괴상한 성향을 만든듯 | 21.05.27 01:09 | | |

(IP보기클릭)106.102.***.***

아재달려
그말이 맞는거 같다 권력이 도덕이 되어버린 나라 | 21.05.27 01:10 | | |

(IP보기클릭)183.100.***.***

NSAFRSXPL
이론상, 기독교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으며 이 점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는 것이었지. 니체부터 아인 랜드까지, 영웅주의를 내세웠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라는 거야. | 21.05.27 03:42 | | |

(IP보기클릭)118.37.***.***

용자 아아아아
그래서 기독교가 초기레 많이 퍼진거라는 이야기더있음. 타 신화의 절대신이나 최고신이 구약의 야훼이상으로 아주 나쁜쪽으로도 인간같고, 인간은 자기를 섬겨야할 하등생물따위로 여겼던 신화들 대부분이 몰락해버렸잖아. | 21.05.27 11:19 | | |

(IP보기클릭)45.58.***.***

통성명은.무슨
수긍이 팍팍 되네. | 21.05.27 14:12 | | |

(IP보기클릭)123.248.***.***

저것들 전략이 한국 토착왜국들 이용하고 미국 정치인들에 로비해서 남북 전쟁 일으키는거임..
21.05.27 00:29

(IP보기클릭)58.123.***.***

중국한테 처맞기 전에 일본 정치인들은 혐한, 혐중 같이 밀었다. 근데 중국한테 희토류로 처맞고나서는 혐중은 자제하고 혐한만 밀더라... 일본 불매운동과 반도체 소부장 육성으로 어지간히 처맞은거 같은데... 하는 짓 보니 덜 처맞았나보구만... 저 색희들은 한국이 중국만큼만 강해져도 입 닥칠 색희들임.
21.05.27 00:30

(IP보기클릭)106.102.***.***

박가박가박가
일본은 이기면 도덕성 을 성취한다눈 가치관이라 한국이 일본 보다 위로 올라 가면 당연히 입을 닥침 그래서 2차대전 패전 서류에 사인 하니까 미군에게 바로 환영 인파가 수십만이 나옴. 드래곤 볼에서 피콜로, 베지터, 트랭크스 등 흉악한 적들이 손오공에게 지고 나서 같은 편이 되는 가치관. 강자에게 무릎을 꿇고 강자에게 실력을 인정 받으면 바로 정의편이 되는 비열한 가치관 | 21.05.27 01:15 | | |

(IP보기클릭)106.102.***.***

박가박가박가
내가 그런 역겹고 음습한 가치관에 질려서 더이상 일본 만화를 못봄. 한때는 만화가게에 있는 일본 만화를 다 봤고. 산 것만 해도 천 권이 넘었을 거야. 근데 어느 순간 부터는 역겨워서 못보겠어. | 21.05.27 01:18 | | |

(IP보기클릭)106.102.***.***

통성명은.무슨
뭐 어차피 만화는 취향차이이니까 뇌절만 안하면 되지 뭐 | 21.05.27 07:19 | | |

(IP보기클릭)183.101.***.***

뭐지? 대한제국 선포를 일본황궁에서 시켜주고 싶은건가..?
21.05.27 00:33

(IP보기클릭)59.7.***.***

좋지.
21.05.27 00:39

(IP보기클릭)223.62.***.***

진짜 여담이긴한데, 히틀러가 그래서 무신론자vs유신론자(특히 기독교계신자)가 "니네 사람이야!"라고 떠넘기는 존재라고 하더라. 무신론자측에선 "교회가 나치당이랑 히틀러좋아하고, 유대인 학살한 아리안 제일주의는 기독교에서 왔으니까 너네 사람임!"이라고하고 반대로 기독교측에선 "기독교 신자라는 놈이 자기에게 저항하는 교인당원들 장검의 밤때 숙청하고 목사&신부죽이고 교회&성당 깨부셨냐? 하느님은 그런거 제일 싫어하거든?"이런식으로 반박하고 하대.
21.05.27 00:41

(IP보기클릭)183.100.***.***

NSAFRSXPL
파시즘의 기반인 영웅 숭배가 반기독교 흐름에서 기원한 건 분명하지만, 나치 졸개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 역시 분명하거든. 무신론 진영의 투사 리처드 도킨스는 "중요한 것은 무신론이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하게끔 체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냐인데 그런 증거는 없다(하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발에 채인다)" 고 하더라. | 21.05.27 04:23 | | |

(IP보기클릭)118.37.***.***

용자 아아아아
웃긴건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은 국가무신론을 주장하면서 종교를 때려잡았지. 그래서 히틀러는 유난히 무신론자vs기독교신자간에 너네사람이라고 서로 비난함. 리처드 도킨스는...걘 과학만 전문가지 막상 기독교에대해서 무지한 면도 꽤 있음. 그래서 유신론적 과학자들 상대할땐 진땀빼는편. | 21.05.27 11:18 | | |

(IP보기클릭)122.42.***.***

용자 아아아아
국가무신론을 주장하며 교회나 성당을 때려부수는 중공이 뻔히 있는걸. 도킨스도 너무 나이브해. | 21.05.27 11:25 | | |

(IP보기클릭)183.100.***.***

NSAFRSXPL
이 부분은 허수아비 찌르기 같은데.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논지의 핵심은 "종교란 인간이 지금보다 훨씬 잔혹하던 시기에 만들어졌으므로, 종교가 아니었다면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잔혹함을 영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는 것인데 이건 비껴 가고 있잖아. 여담으로, 스탈린은 반종교 선전을 아주 많이 하긴 했지만, 의외로 체제비판을 하지 않는 한 러시아 정교를 직접 탄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고향 조지아에는 스탈린 이콘(聖画)까지 있을 정도야. | 21.05.27 12:31 | | |

(IP보기클릭)183.100.***.***

기저핵
국가무신론을 주장하는 중공 반대편에는 가톨릭의 노골적인 비호를 받았던 나치와 프랑코가 있는데, '전락'에서는 "포로 수용소도 교황 성하의 축성을 받았다"고 비꼬고 있다. 물론 세속 권력의 구두를 햝는 건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지. 하지만 권력 남용 역시 무신론의 가르침이 아니잖아. 그 부분이지. | 21.05.27 12:43 | | |

(IP보기클릭)118.37.***.***

용자 아아아아
나치가 가톨릭의 비호를 받았다? 오히려 반대아냐? 나치가 자기 이미지를 위해서 교황까진 안건드린거다. 이게 더 맞는걸텐데... 프랑코는 뭐 사실이었지만. | 21.05.27 12:59 | | |

(IP보기클릭)118.37.***.***

용자 아아아아
그건 전투적 무신론자들의 끼워맞추기같은데, 종교가 없었다면 잔혹함이 없었을거다? 뭐 십자군 전쟁같은걸보면 그럴 수도 있는데, 오히려 무신론자중에서도 교회 부수고 교인들 연쇄살인하는 놈들이 있는거보면 오히려 종교가없어도 얼마든지 사람은 잔혹래질 수잇음. | 21.05.27 13:01 | | |

(IP보기클릭)183.100.***.***

NSAFRSXPL
딱히. 길게 말할 것 없이, 나치 패망 이후 나치 고위 인사들이 남미로 도주하는 걸 직접 도운 것만으로 말 다 했지. 그래서 북극이나 달 뒤편 같은 곳에 나치 비밀기지가 있다는 음모론이 돌았던 거 아냐. | 21.05.27 13:03 | | |

(IP보기클릭)183.100.***.***

NSAFRSXPL
"종교가 *없어도* 사람이 잔혹해진다"와 "종교가 *없어서* 사람이 잔혹해진다"는 다른 뜻인데 흔히들 혼동하더라. 미국에서는 기독교도들이 낙태 시술 의사를 쏘아 죽이고 다니는데 이건 종교가 *있어서* 사람이 잔혹해진 사례로 들 수 있다. | 21.05.27 13:07 | | |

(IP보기클릭)118.37.***.***

용자 아아아아
난 전투적 무신론자 지인 만낫을때...하는 짓이 완전 무신론전도하는 형태였거든. 그런데 무신론은 종교가 아니래.... 하는 짓보면 딱 전투적 종교인처럼 굴때가 잇거든. | 21.05.27 13:08 | | |

(IP보기클릭)183.100.***.***

NSAFRSXPL
그건 개인의 결함이고, 무신론 자체가 체계적으로 그런 태도를 권장하지는 않지. 하지만 종교 교리는 이교도를 전향시키거나 죽이는 등의 방법으로 조용히 만들 것을 권장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 21.05.27 13:10 | | |

(IP보기클릭)118.37.***.***

용자 아아아아
난 내가 종교인인것도 한몫하지만, 전투적 무신론을 더더욱 싫어하는 이유가 내로남불이라서 그래. 자기들은 종교폐단 비판한다면서 정작 지들이 다 하거든. 온건한 무신론자들은 그냥 자기가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게 다인데 전투적혹은 강경파가 붙은 무신론자는 솔직히 신촌■ 신도처럼 느껴짐. "무신론이 곧 정답이다!"이런 교조주의도 있는거같더라. | 21.05.27 13:16 | | |

(IP보기클릭)183.100.***.***

NSAFRSXPL
그런 사람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을 갖고 있는 거지. 자본가니 빨갱이니 걔독이니 똥꼬충이니 하는 특정 집단이 세상의 모든 악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말살되기만 한다면 지상락원이 찾아오고 모두가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될 거라는 신앙. | 21.05.27 13:22 | | |

(IP보기클릭)118.37.***.***

용자 아아아아
아, 맞아. 내가 그런 사람을 볼때마다 느낀게 그거야. 종교는 아니지만 뭔가 절대적으로 신앙을가지고있다는 느낌이었어. 무신론+불가지론+반신론자들 조사해보니까 85%는 평범했는데 15%는 유독 선민사상, 교조주의가 보통 일반사람들(종교인, 비종교인 포함한 랜덤)보다 월등하게 높았다는 연구결과도 있었대지; | 21.05.27 13:24 | | |

(IP보기클릭)45.58.***.***

NSAFRSXPL
이건 조금 종교적 환원주의 같다. 현상을 종교와 비종교의 대립으로만 보고 있다는 생각 안 들어? | 21.05.27 14:20 | | |

(IP보기클릭)122.42.***.***

용자 아아아아
신무신론은 전투적 체계를 가지고 있어. 극단주의적 합리주의를 유일한 세계관으로 주장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같이 세계관의 일종이지. 각 개인이 그걸 세련되게, 혹은 무례하게 표출하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무신론 체계 자체도 그러한 기반이 돼. 결국은 각 개인은 세계관의 충돌 속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를 성찰해야겠지. | 21.05.27 14:53 | | |

(IP보기클릭)117.111.***.***

기저핵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논지의 핵심은 "종교란 인간이 지금보다 훨씬 잔혹하던 시기에 만들어졌으므로, 종교가 아니었다면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잔혹함을 영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는 것인데, 이 사람도 이 부분은 비껴 가고 있네. 종교적 잔혹함의 예시로 들 수 있는 것들은 적기에 여백이 부족할 정도고, 예시들 모두가 해당 종교의 교리만으로는 비판이 불가능하다. | 21.05.27 16:11 | | |

(IP보기클릭)122.42.***.***

용자 아아아아
비켜가기보다는 포괄적으로 표현했어. 일단 내 윗 글의 주장은 신무신론은 형이상학적 세계를 거부하는 종교적 세계관의 일종이다라는 것이야. 그러니 "종교가 잔혹함을 영속시키므로 종교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스스로 종교적 세계관이자 잔혹함을 행사하는 신무신론에게 불가능해. 영국 문화학자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신무신론자들이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과 이슬람 급진주의자의 간격을 모호하게 해서 국가가 더 많은 폭력을 행사하게끔 유도했다고 비판한 바 있지. 그러한 전투적 무신론자들의 언어는 가혹하리만큼 공격적이기도 해. 그것은 명백한 잔혹성이야. 둘째로 또한 그 주장은 전제가 잘못됐어. "종교가 없었다면 잔혹함이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전제 자체가 틀렸거든. 인간 모두에게 모든 종류의 자원(물질부터 수명, 관계성, 에너지에 이르는 모든 것)이 무한하지 않은 이상, 잔혹함은 배제될 수 없어. 인간이 죽어야 할 존재인 이상, 인간 기저의 죽음불안을 억압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가학성(G.Gorer)은 종교의 유무로 발생한 게 아니야. 오히려 가학성이 선행하고, 후에 종교가 그것을 다루기 위해 발전한 것이지. 최초의 문명 도시는 쌀이 있기도 전부터 사원이 있었어. 그건 죽음의 공포를 대처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했기 때문이야. 그런 점에서 보자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신이 없다고 하지만, 오히려 끔찍한 사건에 대비하기 위해 유대-기독교 체계는 인간이 물질적, 도덕적, 영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상황을 다뤄내기 위해 노력했지. 단순히 노숙자에게 밥을 주는 것에서부터 토크빌이 말했듯 정의를 위한 신 앞의 평등이라는 개념에서 발원하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같은 제도적 개념들, 북유럽의 국가사회복지 같은 개념들(스위스는 헌법전문에 전능하신 신의 이름을 위해서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을 얘기하고, 마지막으로 국민의 힘과 약자의 복치를 일치시켰지.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신은 곧 약자의 형상을 원형으로 제시하거든.)이 그래. 물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종교가 잔혹함을 영속시키는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과도할 뿐 아니라 불합리해. 약이 모든 증상을 없앨 수 없다고 끊어 버리는 게 비합리적인 것처럼 말이야. 그런 점에서 만약 종교가 필요 없는 "역사의 종말"적 세상이 온다면, 그 세계를 살아갈 존재는 지금의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일거야. | 21.05.27 16:42 | | |

(IP보기클릭)183.100.***.***

기저핵
1. 형이상학적 세계란 것이 양판소의 이세계가 그러하듯 어떤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도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사실이라는 근거란 '경전'이라 불리는 출처불명의 고대 문서들 외에는 전혀 없으며, 그걸 사실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근거 역시 없다. "나는 사실이라는 확신이 없지만 사실이 아니라 해도 *유용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어야 한다" 는 의견이라면, 이는 몹시 부정직한 것이며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2. "이슬람과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간격을 모호하게 해서 국가가 더 많은 폭력을 행사하게 했다". '테러와의 전쟁' 시기 이야기네. 이 부분은 기독교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텐데. 모두가 아주 잘 알다시피, 정통파 기독교 교리 자체는 이교도를 용납하지 않으며, 관용이란 정통파 기독교도들에게 끊임없이 탄압받아 왔던 인본주의자들이 내세우던 가치였다. 당장 테러와의 전쟁을 이끈 조지 부시도 기독교도였고. "무슬림을 탄압하기 위해 기독교도와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필요에 따른 동맹을 맺었다" 고 하면 대충 맞겠다. 3. 허수아비를 찌르지 말라니까. 의도인지 착오인지는 모르겠는데, 너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었다면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잔혹함을 영속시킨다" 와 "종교가 아니더라도 잔혹함은 영속한다" 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로, 성소수자에 대한 탄압은 지상에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열성 기독교도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사라졌으리라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4. 지적 성향과 종교적 성향은 반비례한다는 건 이미 밝혀져 있지. 하지만 이 세계에 사는 사람 대부분은 평균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걸 어떻게 할 수는 없거든. 이건 환경적 한계고, 패배주의자들이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즐거워하겠지. | 21.05.27 20:1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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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나는 너의 "종교가 아니었다면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잔혹함을 종교가 영속시킨다."라는 주장에 대해 "도리어 인간의 잔혹함을 종교가 억제 및 교화하는 것이며, 너의 주장은 종교의 억제 및 교화 실패 사례를 과대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 것. 그리고 네가 단락을 지은 부분에 대해서 간략하게 내 생각을 서술할게. 1.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 말하자면 이야기가 복잡해지지만, '경전'만이 형이상학적 사유를 보장하지는 않음. 또한 나는 형이상학에 대해 "유용하니까 이것은 진실이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 적이 없어. 이것은 네가 허수하비를 떄리는 것이야. 게다가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한 이야기는 장황할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유신론 철학자의 반례를 말하고 넘어가겠어. 앤터니 플루는 신무신론의 시초격 인물로, 옥스퍼드 대학 소크라테스 클럽(무신론, 유신론 토론모임)에서 <무신론 추정>을 통해 전투적 무신론을 시작했지. 그는 CS 루이스와 톨킨 같은 저명한 인사들과 논쟁해서 승리하기도 하는 등 무신론의 거두격 인물이었지만, 인생 말미에 유신론적 사유로 전환했어. 그는 스스로 종교적 사건이 없었다고 밝혔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도 않았지. 그는 그저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성과 증거가 이끄는 대로 유신론적 철학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지. 이런 반례를 볼 때 "경전이라는 출처불명의 고대 문서 밖에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거라고 봐. 또한 이 경전에 대한 출처 문제도 여전히 매우 많은 사람들의 생애를 바친 연구가 선행되어 있으니 그것 또한 참고하면 좋겠어. 2. 여기선 두 가지를 짚어야 하겠군. 첫째. 너는 내 주장의 논점을 이탈시켜 반박하고 있어. 나는 신무신론이 하나의 종교적 세계관으로서 폭력을 증가시켰다고 말함으로써, 네가 말한대로 신무신론도 "종교가 없어질 폭력을 영속화한다."라는 주장을 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이지, 그리고 당연히 기독교도 똑같이 적용될 문제지. 둘째. "모두가 잘 알다시피"라고 말하지만, 정통파 기독교 교리 자체가 이교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건 네 생각에 불과해. 애초에 교리라는 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고 절대불변한 것이 아닐 뿐더러 다양한 조직이 다른 교리를 갖추고 있지. 극단적 평화주의를 제창하여 목사도 존재하지 않는 개신교 종파부터, 라틴어로만 미사를 집전하는 가톨릭 분파에 이르기까지 교리란 천태만상이야.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교리가 발생하는 시점에서 비로소 관용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다뤄진 것이지. 인본주의의 중흥기에 인본주의자와 기독교인들은 분리되지도 않았어. 종교개혁 당시의 개혁적 유신론자들은 곧 인본주의자들이었어. 그들은 집단 살해를 당하고 전쟁을 겪으면서, 결국 관용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개발하여 교리에 반영해나갔지. 이런 점에서 유신론자이면서도 인본주의자일 수 있지. 두 사상은 상보적 관계지, 상호 적대적 관계가 아니야. 3. 나는 허수아비를 찌른 게 아니라, "종교가 아니었다면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잔혹함을 영속시킨다."는 주장 자체가 틀렸다는 이야기를 일관적으로 하고 있어. "종교가 아니더라도 잔혹함이 영속될 것이다"는 그 근거지. 만일 종교, 특히 기독교가 없다고 해서 동성애에 대한 탄압이 없어질까? 이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희망 사항일 뿐. 공리가 아니야. 인간은 본성상 희생양을 찾는 존재로서, 사회가 생존 압력에 처하게 되면 종교가 없다 해도 자기와 다른 존재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야. 반면 애초에 '소수자'의 권리를 대중이 자각하게 한 것이 바로 종교였어. | 21.05.28 13:2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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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4. 마지막으로 지적 수준과 종교적 성향이 반비례한다는 것을 얘기하는데. 이 얘기를 왜 하는 건지? 고지능자 중에 종교인이 적다는 것이 곧 종교가 참인가 혹은 유의미한가에 대한 직접적 근거가 될 수는 없지. 서로 다른 문제니까. 도리어 고지능자는 그 고지능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검토하여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선택한 것이 아닌가? 또한 네 마지막 문구는 마치 인류가 부딪친 환경적 한계를 돌파하여 모든 사람이 고지능자가 된다면 종교가 박멸될 것이라는 뉘앙스로 보이는데,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현재 고지능자가 종교를 선택하는 이유로서 종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있을 거야. 또한 오히려 그런 상황이 와서 종교 구성자들이 대부분 고지능자라면, 고지능자들이 종교를 거부할 일들이 줄어들게 될 테니 도리어 종교를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도 있지. | 21.05.28 13:3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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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핵
1. 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교는 이러저러해서 유용하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데, 이건 "종교는 진실이다" 와 전혀 상관이 없는 부분이잖아. 하지만 만약 아스텍 전설이 사실이라서, 사람 심장을 뽑아내 돌탑 위에서 흔들어대야 태양이 계속 뜰 수 있었다면 신앙이 '유용'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었겠어? 그러니 종교의 유용성에 대해 얘기하는 건 실제로는 아무 의미가 없지.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자연 세계 뿐이고, 따라서 초자연적 세계의 '괴력난신' 에 대한 연구는 좋게 생각해서 미신적 자위행위고, 나쁘게 생각하면 망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엔릴, 제우스와 오딘은 우스갯거리로 쓰지만 야훼에게는 함부로 그렇게 못 하는 것은, '이성과 증거' 가 그리 가리키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이 그러하기 때문에 따르는 것에 불과해. 그러니, 나는 네가 언급한 "매우 많은 사람들의 생애를 바친 연구" 라는 것들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 및 '스타 워즈' 팬픽 모음집 정도의 가치만 인정할 수 있다. 물론 인상적인 작품이고 아주 재미있긴 하곘지만, 문자 그대로 믿고 따르는 건 바보짓이라는 거지. 2. 기독교 계통 사회개혁가들이 아주 많이 있었고, 이 사람들이 종교 신앙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했다는 네 지적은 아주 정확해.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정통파들에게 이단으로 몰려 탄압을 받아 왔다. 교황 비오 9세는 "인간이 하등 생물에게 책임이 있다고 믿는 것은 이설에 불과하다" 는 이유로 '동물 학대 방지단체'와 그 어떤 관계도 맺기를 거부했지만, 지금은 교황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가톨릭의 이름으로 그런 주장을 하지 않지. 이런 종류의 진보는 종교와 상관 없이 일어났다는 거야. 따라서, 종교와 인본주의가 언제나 적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네 주장은 일리가 있으나, 그렇다 해서 상보적 관계라고 할 수도 없는 듯 하다. 3. 종교인이란 (엔릴의 가르침이든, 오딘의 가르침이든, 야훼의 가르침이든) 고대에 단 한 번 계시되었던 어떤 불변하는 진리를 지키는 수호자를 자처하기 때문에, 일체의 도덕적, 과학적 진보와 일단 척을 지고 시작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야훼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가 여자와 교접하듯 남자와 교접하는 자는 가증하니 돌로 죽여라" 라고 한다. 물론, 같은 책에서는 "혼방한 옷을 입지 말아라", "어린 동물을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 "월경을 하는 여성은 부정하니 격리하라" 라고 되어 있기도 하지. 하지만,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 똑같은 무게로 제시된 거룩한 말씀들 중 어떤 것은 기꺼이 고르고 어떤 것은 무시한단 말야. 편리한 부분만 발췌해서 가져다 쓸 수 있다면, 사실은 별로 거룩한 게 아니잖아? 판단은 사람이 하는 거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룩한 말씀만큼 변명거리로 쓰기 편리한 것도 없지. 그래서 아직도 종교란 게 유지되는 것이겠지. "만약 신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렇게까지 하찮은 벌레들은 아닌 셈이다. 우리들이라면, 개미집의 개미들을 하나하나 지켜보면서 부지런한 놈에게는 상을 주고 게으른 놈은 모닥불에 던져버릴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 21.05.28 14:0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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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핵
4. 3번에서 말했듯, 종교란 지적/도덕적/과학적 진보와 척을 지고 시작하는 것이기에, 선천적으로 지적 호기심을 타고 난 사람들과는 절대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는 거지. 이건 인류의 대부분은 평균 수준의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과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어쩔 수가 없다. | 21.05.28 14:0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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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우리 얘기가 길고 진지해지고 있어서 즐겁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기란 쉽지 않지. 설득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니, 나는 내 입장에서 내가 생각하는 바가 이렇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칠 수 밖에 없음을 양해해주길 바라. 나는 네 의견을 무시하거나 경멸할 의도가 없다는 걸 먼저 얘기해야겠군. 왜냐하면 나는 인생의 2/3 이상을 무신론적 추론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네 입장이 익숙해. 따라서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은 내가 한 때 갖고 있었던 생각이라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밖에 없겠네. 그런 점에서 하나씩 얘기를 해보자. 1. 네 말대로 종교가 유용한 것과 종교가 참인과는 상관이 없지. 다만 내가 왜 종교의 유용성을 이야기했는지는 본문에서 충분히 말했으니 생략하겠어. 실제로 종교는 유용했기에 사회를 통합하고 더 많은 고통을 억제했지. 종교는 프로파간다이자 이데올로기의 생산지이며 사회적 도덕의 기반 배후지(하버마스)로 기능했어. 하지만 그게 곧 종교가 '참'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야. 반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 거나 '미신적 자해행위' '망상'과 같은 주장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 또한 오류지. 이 부분을 심도 있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선 유신론적 세계관의 참과 거짓을 논하기 위한 다양한 논증들이 있다는 점을 알아봐줬으면 좋겠군. 우선 내가 반례로서 제시한 철학자(플루)는 소위 '괴력난신'과 같은 초월적 경험 외에 이성적 사유로서 유신론적 철학 체계를 받아 들였어. 그리고 이성적으로는 초월적 세계를 절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일단의 신무신론자들은 불가지론자에게도 비판을 받고 있지(굴드) 이 부분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 "이성과 증거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편견에 기초한 주장이야. 또한 우주가 물리적인 차원의 우주만 존재한다는 형이하학적 세계관은 '이성의 유일한 해답'으로 공증되거나 받아들여진 적이 없어. 당장 현대 물리학만 하더라도 말이지, 다중차원이나 홀로그래픽 우주론을 이야기하는 등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물리적으로 인식이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세계를 제시하지 않던가? 신의 유무를 떠나 그들의 주장은 형이상학적이야. 이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지. 대체 누가 어떤 권위로 "초월성"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지? 그러한 주장이야말로 초월적 진리가 아닌가? 차라리 불가지론을 선택하는 것이 더 이성적일거야. | 21.05.29 11:0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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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또한 제우스와 오딘에 비해 야훼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은 이성과 증거 때문이 아니라 관습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관습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지. 이를테면 제우스나 오딘이 보여주는 "신"의 원형과 예수가 보여주는 "신"의 원형이 극도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하겠군. 제우스나 오딘은 강한 자로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자신의 권위를 이룩했지. 사람들은 "강자는 그래도 된다"라는 것을 그러한 존재들에게 배웠어. 반면 예수는 약자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서 역사에서 처음으로 "희생양"의 개념을 제시했지. 십자가형이란 이른바 억울한 왕따와 이지메야. 그걸 다 해놓고 보니까 "어, 죄가 없는 사람이었네? 그러면 그간 우리가 저지른 폭력은 사실 범죄인가?"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지. "힘을 가진 자가 틀릴 수 있으며, 힘이 곧 권위와 정의가 아니다. 오히려 신이 약자로서 죽었고,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곧 자신을 대하는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 핵심인 거야. 그러한 "약자에 대한 동일시"가 곧 기독교의 핵심이 되었고. 니체와 같은 영웅주의자들이 비판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지. 이 관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게 아니라, 강화 유지 되며 지속 발달이 되어 온 거야. 그리고 그것이 인류 문명에 대하여 존중 받을 만한 기여가 된 것이야. 이성주의/계몽주의가 세계대전으로 끝났다는 건 유신론적 세계관 아닌 입장에서도 동의하는 바이고. 이것은 내가 쓴 본글에도 적용이 되는데, 독일과 일본의 정신관에 기여하는 두 종교의 역할을 보면 어느 쪽이 존중 받아야 하는가는 분명해지지. 설마 약탈과 승리를 강조하는 바이킹식 오딘의 영웅론이 지배하는 국가가 사죄와 용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테고 말이야. 그리고 승자정의를 주장하는 일본의 이지메가 심각한 것도 분명하지. 또한 이러한 개념은 유럽을 중심으로 기독교에 대한 지적 관심을 되새기고 있어. 자세한 것은 프랑스 한림원의 르네 지라르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관심사를 살펴보면 좋을거야. 관습은 그냥 생겨난 게 아니라,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에 생겨났지. | 21.05.29 11:0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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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2. 이것 또한 다소간에 편견에 기초한 주장인 것 같네. 개혁자들이 "언제나 이단으로" 몰린 바는 없어. 이를테면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내의 개혁은 가톨릭 주류 세력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지. 원래 변화라는 것은 종교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 투쟁을 불러 일으키는 법이니, 종교에 대해서만 그 판단을 적용하는 것은 편견이야. 또한 네가 주장한 교황 비오 9세의 이야기에는 논리적 모순이 있어. 교황의 주장이 변화하는 데에는 교황청 내부의 종교적 사유의 변화가 있었겠지. 그것이 종교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해. 또한 인본주의는 인간을 중심에 두는 사상을 뜻하지. 그것을 신무신론이 호도하여 마치 종교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주장했지만 사실은 달라. 종교는 인간을 위한다는 점에서 도리어 인본주의적인 것이지. 종교가 인간을 격하하는 것이라면, 기계론적 우주관은 인간을 격상시키나? 그건 아니거든. | 21.05.29 11: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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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4. 1. "고대에 단 한 번 계시된 불변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일체의 도덕적, 과학적 진보와 척을 지고 시작한다." 라는 건 미안하지만 편견에 기초한 흑색선전이야. 모든 종교인들을 의도적으로 문자주의적 원리주의자로 놓는 허수아비의 오류를 범하고 있어. 그리고 그 편견의 결과로 4번과 같은 터무니 없는 주장,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은 종교와 친하게 지낼수 없다"를 내어 놓는데, 이것은 편견으로 근거를 삼아 편견을 주장하는 비합리적인 주장이야. 자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불변하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일체의 도덕적, 과학적 진보와 척을 지고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불변하는 진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이야. 성경 얘기를 했으니 신학 얘기를 하겠어. 신학은 '불변하는 진리'를 가리켜 교의라고 하며, 그것은 인간이 다 인식할 수 없다고 규정하지.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라"고 요약했어. 그렇다면 그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나? 그 실천 방법에 대해 인간이 세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금씩 알아 나가는 것을 가리켜 "점진적 계시"라고 표현해. 예를 들자. 고대 사회에는 노예제에 대해 다들 도덕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지. 하지만 점점 진보해 나간 사람들은 노예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어. 이를테면 로마에서의 근거는 신앞에의 만민평등이었지. 도망친 노예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 들여라(디도서)라는 가르침이 성경에 있었으나 사람들은 "노예 해방"은 생각을 못했지. 하지만 점진적으로 "노예 해방"으로 옮겨 간 거야. 이런 것을 볼 때 진보에 무조건 반대한다고 보는 건 편견이야. 과학에 척을 진다라. 그것도 편견이지. 이를테면 바티칸 교황청은 유전자 치료제 연구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어. 신무신론 진형은 종교vs과학이라는 형태로 프레임을 잡고 싶어하지만, 이건 그런 단순한 층위의 이야기가 아니야. 교황청은 "더 효과적인 자 살 및 낙태 기계의 과학적 진보"에는 반대하겠지만 "암을 치료하는 줄기세포 치료제"에는 바티칸도 찬성한다니까? 또한 성경을 거론했으니 우선 기독교는 불변의 계시가 단 한 번 주어졌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얘기해야곘군. 네가 얘기한 성경의 주요 메시지는 구약 성경이지. 그 구약 성경의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 기독교로 분화되면서 신약 성경이라는 중요한 변화를 겪었어. 그때 제사나 음식에 관련한 많은 법들이 폐지되었고, 구약은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는 방향으로 변화한거야. 그 해석방법이 신학이지. 신자들이 마음 가는데로 취사선택을 하는게 아니라, 종교가 계승 발전시켜 온 규칙에 따라 해석하는 거야. 그리고 그러한 해석이 바로 점진적 계시로 말미암은 발전인 거야. 이게 잘못되거나 근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는 우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서 볼 수 있어.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네가 '종교가 과학, 도덕, 이성적 진보에 척을 진다'라고 말하는 건 잘못된 얘기야. 그건 다소 무책임한 전투적 프레임이지. 그렇기에 "그 근거로 지능이 높은 사람은 종교와 친해질 수 없다."는 주장도 흑색선전이야. 게다가 도킨스는 기독교인들을 인터뷰하면서 알리스터 맥그라스(옥스퍼드 킹스칼리지 학장, 분자생물학/역사신학 박사)와의 인터뷰를 의도적으로 누락한 바 있지. 맥그라스는 "도킨스는 자신이 묘사하고픈 기독교인의 모습에 자신이 맞지 않기 때문에 뺀 것"이라고 주장했어. 나도 그 말이 맞다고 봐. 도킨스는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들에게도 그냥 생물학 얘기나 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해 | 21.05.29 12:1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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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핵
나도 마찬가지야. 네 말대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어렵고, 설득은 더 어렵거든. 인터넷에서 이렇게 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 역시 어렵고. 그러니 나 역시 내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서로의 입장이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하는 기회를 가지고 싶다. 1. 종교는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않으며, 신앙이란 사실과 상관 없는 것인데도 특별히 존중받아야 하는가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내 모친을 따라 주일학교에 드나들던 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의문이었어. 내가 주일학교 교사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나요" 라고 물어 봤는데 제대로 된 대답이 안 나오더라고. 그 형아 말대로 신이 "스스로 있을 수 있는" 거라면 이 우주 역시 그렇지 말란 법이 없잖아? 나는 그 때 이미 종교인이라는 사람들도 초월성에 대해 비종교인보다 딱히 더 많이 알고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적어도 나 자신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이상 이 사람들의 근거 없는 주장에 온전히 동의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게 되었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신앙의 도약' 이란 건 투신자1살로밖에 안 보인단 말야. "대체 누가 어떤 권위로 "초월성"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냐" 고 했는데,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을 넘어선 세계를 보여 주었고 앞으로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지만, 아직 (소위 '인격신' 같은) 초월성이라 할 만한 것은 못 봤다는 거지. 그리고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저 초월성을 청동기 시대 원시부족들은 알고 있었다고 멋대로 믿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겸허가 아니라 그 반대편-오만이고. 그리고 나는 오만한 사람들에게 과도한 존중을 보이면 나쁜 버릇이 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2. '제우스와 오딘에 비해 야훼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은 이성과 증거 때문이 아니라 관습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관습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해. 관습이란 건 사회적 필요에 따라 동의를 받아 만들어지는 거니까. 나치(그리고 그들의 선조 및 자칭-후계자들) 무리가 북유럽 신화를 애호했으며, 그래서 슈츠슈타펠 문장이 룬 문자에서 따와 만들어졌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지. 그들에게 있어서는 강하고 가혹한 가부장 아래에서 칼날을 갈고 닦으며 최후의 전쟁에 대비한다는 신화가 좋은 변명거리였을 테니까. 따라서, 그 자식들에게 학을 떼는 일군의 현대 철학자들이 관습에 따라 오딘 대신 예수를 선택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거야. 그게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말한 이유들 때문에) 그게 그들의 눈에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이라는 거지. 그러니,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듯이 종교 역시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는 게 내 의견이야. 사실이 어떤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입맛에 충분히 맞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변명거리가 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수천년 뒤에 한 무리의 고고학자들이 잊혀졌던 '스타 워즈' 설정집을 발굴해 낸 결과 루크 스카이워커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신학자들이 스스로의 일생을 바쳐 제다이의 가르침을 정당화하는 아주 감동적인 신학 이론들을 아주 많이 만들어 낼지도 모를 일이지. 아니면, 이단심문관들이 시스 마녀들이나 포스의 영이 실존하심을 감히 의심하는 불신자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불태울 수도 있을 거고. 뭐, (화물 숭배가 그러했듯이) 적당한 변명거리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하겠지. 내가 여태껏 신학 이론에 관심을 안 보인 것도 그런 이유야. 신학자란 변호사가 그러하듯 어떤 결론을 정해 놓고 거기 맞춰 변론을 하는 것이니까. | 21.05.30 13:2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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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학 이론으로는 그런 정당화가 가능하겠지만, 실제 역사에서 종교란 조직된 종교 권력에 의해 반지성주의에 대한 변명으로서 즐겨 쓰여 왔거든. 중세 가톨릭과 현대 이슬람에서는 경전에 적혀 있지 않은 이유로 자신들의 경전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아주 불경한 행동으로 여겼다. 지식이란 권력이며, 지배자 입장에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통제하기 쉽다는 이유였지.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섰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고.(물론 이 둘은 독실한 신자들이었지만, 그 시대에는 선택권 같은 것이 없었다) 오늘날에는 '젊은 지구 창조설' 이라 불리는 생각. 지구는 개의 가축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창조되었다는 생각은 과학이 아니라 고대 문서의 등장인물들 나이를 역산해 나온 결과물로서, 오늘날에는 웃음거리지만 근대 이전까지는 이를 감히 의심하는 신성모독자는 공직에서 추방당하는 등 아주 엄격하게 처벌받았다. 물론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저 암흑시대에 비해서는 한층 나아간 자세를 보이고 있지. 하지만 오늘날에도 가톨릭은 성폭행에 의한 것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낙태에 반대하는 것을 보면, 종교 단체는 언제나 동시대 사회에 뒤쳐진 채 목줄에 매여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아. (종교단체가 의료활동에 투자하는 건 신유 이전에 위치닥터부터 이어지는 오랜 전통이니까 나름 온고지신이라 할 수 있겠지만.) 비오 9세 재임 당시에는 동물이란 신이 만든 일종의 매우 정교한 기계장치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라는 주장이 아주 새로운 것이었거든. 그러니 '동물 학대' 운운하는 새롭고 진보된 의견에 대해 "우리는 하등생물에게 책임이 없다"고 묵살하는 것이 당시 보수파 입장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는 거지. 이건 종교가 아니라 당시 사회 통념(중 가장 보수적인 것)을 따른 것이고, 오늘날 교황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가톨릭의 이름으로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은 종교적 사유 이전에 동물을 대하는 과학/도덕 이론이 바뀌었으며 이것이 사회 통념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는 거지. | 21.05.30 13:2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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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핵
4. 그리고, 지능이 높은 사람이 종교와 별로 안 친하다는 건 흑색선전이 아니라 사실관계의 영역이야. "한 가지 주제에 관해 발표된 연구논문들을 모두 조사해 어떤 결론을 내린 논문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는 메타 분석이라는 기법이 있다. 종교와 IQ라는 주제로 메타 분석을 한 연구는 내가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다. 2002년 <멘사 매거진>에 폴 벨이 발표한 것이다. 벨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1927년 이래로 신앙과 지능 또는 교육 수준의 관계를 다룬 연구 논문 43편 중 4편을 제외한 모든 논문이 그들 사이에 역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지능이나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적이거나 어떤 '신앙' 을 지닐 가능성이 적다." 물론 도킨스는 이런 사실에서 기독교인이란 (자기 말마따나) "평균 이하의 지능과 특별히 강한 죄책감"을 지닌 이들이라는 결론을 뽑아내고 싶어하니까 "자신이 묘사하고픈 기독교인의 모습에 맞지 않는 사람" 을 인터뷰집에서 뺀 거겠지. 내 입장은 도킨스가 "정말 생색내는 태도다! 나와 당신은 아주 지적이고 교육을 잘 받아서 종교가 필요 없지만 보통 사람들, 대중, 오웰의 프롤, 헉슬리의 델타와 엡실론은 종교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 아닌가)" 라고 힐난했던 입장에 가깝지만 말야. 비슷하게, 러셀은 "나는 종교가 진리라고 생각해서 믿는 사람은 존중할 수 있지만, 종교가 유용하다고 생각해서 믿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엄중히 질책하고만 싶다" 라고도 했었지. 어떤 사람들은 이런 걸 아주 비겁한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야. 하지만, 모두가 용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나는 종교에 대한 욕구란 다르게 말하면 세상에 가득 찬 불안과 불확실에 맞서 값싸게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 손에 넣을 치맛자락과 입에 넣을 공갈젖꼭지를 갈망하는 욕구; 피지배에 대한 욕구라고 생각하거든. (오딘이나 예수가 산타클로스와 루크 스카이워커를 비롯한 기타 상상 속 친구들과 명백히 차별화되는 건 바로 이 부분이지.) 그렇다면 종교에 대한 욕구란 것도 소위 세속적인 욕구들-술이나 도박, 매춘 따위에 대한 욕구-만큼이나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거야. 그렇다면 금주 운동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처럼 반종교 운동 역시 성공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거겠지. 여기 대고 "철학적 자1살자"니 "비겁하고 더러운 자"니 "자존심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운 사람들" 따위 악담을 해 대는 무신론 철학자들은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에 (내가 술을 거의 입에 안 대듯이) 그런 욕구를 덜 가지고 태어난 모양이고. 개인적으로는 미신 의존자를 알코올 의존자보다 더 좋게 쳐줘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고 여기며 이런 생각이 한동안 안 바뀌리라는 건 틀림없지만, 여기서 얘기하고 있자니 어쩌면 내가 약물중독자로 매도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책임감 있는 음주문화를 지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도킨스마저도 스스로 "미치광이의 헛소리가 거의 분명하다"고 인정한 비주류 가설을 적당히 소개하는 것 정도밖에 못 하더라고. "나는 모르고 알아내기도 아주 힘들 것이다" 라는 말을 제 입으로 내놓기 싫어서 완곡하게 표현한 거겠지. | 21.05.30 13:3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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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사족: 찾아 보니, 나도 종교의 '순기능' 에 대해서는 이런 얘기를 했었네.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8/read/33667339 | 21.05.30 13:4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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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이야기가 갈 수록 심도가 있어지니 좋네. 인터넷에서 종교적인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건 상당한 리스크를 짊어지는 작업이지. 대개 지적인 성찰보다는 무례한 공격으로 얼룩지게 되고 며칠에 걸쳐 스트레스를 주는 골칫덩이로 남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네 말대로 모든 사람들은 예의를 갖춰 말하기가 어렵지. 일상의 스트레스든 단순히 작문 기술이 부족하든 간에, 이런 접촉 자체는 희귀해. 나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대화는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네가 말한 성장 과정을 보자면 청소년기에 모친과 함께 교회에 나가는 일에 너에게는 꽤나 큰 스트레스가 되었던 모양이네. 나는 성인이 된 후 유신론자가 되었기 때문에 너와는 상황이 달라. 그러니 내가 너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 (나의 경우에는 내가 먼저 유신론자가 된 후 어머니가 유신론자가 되셨지.) 하지만 한 가지는 비슷하겠군. 나는 종종 채플이 있는 고등학교 학교 매점에서 열성 신도 친구에게 "이순신은 지옥에서 불타는지"를 공개적으로 묻고는 했었으니 말이야. 누구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지. 그런 교인들을 조롱하는 건 재밌는 놀이였어. 최소한 내가 20대 초반에 유신론자로 전향하고 나서부터는 쑥스러운 과거가 되었지만 말이야. (물론 저 질문은 지금은 다른 답변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공통의 주제를 접촉점으로 놓고 생각을 비교해보자면 생각보다 그럴싸한 이득을 얻을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봐. 인생은 기니 청소년기의 불편했던 경험들로 더 풍성한 삶을 살지 누가 알겠어? 최소한 우리의 대화를 통해 층위가 다른 생각들을 그러모아 더 복합적인 지성을 갖출 기회를 얻을 수 있겠지. 그런 점에서 다시 대화를 시작해보자. 비록 나는 박사도 석사도 아니라 아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 해 보겠지만, 모자란 건 양해를 바라. 나는 네가 제시한 논점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자 해. 그것은 각각 다음과 같아. (1) 초월성이란 존재하는가? (2) 종교는 유용하기에 믿어지는가? (3) 종교는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가? (4) 종교는 사회 진보에 후행적으로 반응하는가? (5) 종교와 지능 사이에는 유의미한 연관관계가 있는가? (1) 초월성의 존재 유무에 대해 나는 두 가지 관점을 너에게 제시하고자 해. 첫째는 내 생각에 네 주장은 편견에 기초하고 있으니, 처음으로 돌아가 공정하게 초월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탐구해보라는 것. 둘째는 초월적 경험은 인간의 한계로 인해 외부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경험해기로 시도해 봐야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야. 먼저 보다 공정하게 초월성을 탐구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 얘기해보자. 너는 어린 시절부터 "종교는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않으며, 신앙은 사실과 상관 없는데도 불구하고 존중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어. 청소년기부터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네가 또래 친구들보다 확실히 지능이 높은 부류에 속해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리고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교사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던 사례를 제시하면서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초월성에 대한 지식이 비종교인들의 지식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다는 확신에 도달했다고 말했어.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신앙의 도약이란 지적 자/살"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지. 내 생각은 이래. 조금 무례할 수도 있지만 상상해보겠어. 누군가는 저 대답만으로 만족할 테지만(제 1원인론), 너는 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정말 그런가? 다른 대답은 없는가?"라는 생각을 했을테고, 그러한 주제의 글들을 찾아보았을테지. | 21.05.31 16:1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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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내 생각은 이래. 조금 무례할 수도 있지만 상상해보겠어. 누군가는 저 대답만으로 만족할 테지만(제 1원인론), 너는 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정말 그런가? 다른 대답은 없는가?"라는 생각을 했을테고, 그러한 주제의 글들을 찾아보았을테지. 특히 "물질이 처음부터 존재했다"라는 주장은 러셀이 "더 크게 상상해보라"며 "내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도발적으로 주장한 주장이로군. 아마 나로서는 네가 인용한 러셀이나 도킨스에 대해서 아마 이 시점부터 찾아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네가 부모님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되었겠지. 네 글을 보며 드는 추측이지만 성경이나 그와 관련된 연구를 읽거나 유신론적 철학을 링에 올려 무신론 논증과 공평하게 다루기보다는 네게 필요했던 자원을 신무신론 철학에서 일방적으로 공급 받았다는 인상을 받았거든. 그런 점에서 현대는 이전과는 다른 세계지. 자녀는 다양한 사상의 스펙트럼을 이용해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었어. 그래서 정신과 의사인 M 스캇팩은 현대에서는 종교를 강압적으로 가르치려는 세대를 지나야 비로소 그 다음 세대(손자세대)가 종교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리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현대 영국 성공회의 젊은 층 재중흥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다시 말해, 종교에 대한 인식은 부모와 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형성될 수 있다는 거야. 누군가는 종교가 필요하지만 누군가는 종교가 필요 없다는 주장(신무신론)이 필요한거지. 참과 진리를 떠나 신무신론이 유용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것은 네가 얘기하는 "책임감 없는 음주"와 같다. 또 "너는 신학자들이 변호사와 같이 답을 결정해 두고 주장한다"고 하지만 그건 틀린 얘기야. 오히려 과학자들도 반증이 되기 전까지는 정상 과학을 변호하는 입장을 가져야 하지.(토마스 쿤) 신학 내부에서도 패러다임의 전환은 있어 왔으며, 전에도 말했듯 칼빈 같은 신학자는 자기 주장의 20%가 틀렸을 거라고 말한 바가 있다. 실제로 무신론 철학자가 유신론 철학으로 전환하거나(J.N 핀들리), 신학자가 예수의 가르침을 무의미한 것으로 부인하기도 해.(불트만) 이런 경우는 아주 많지. 나도 불가지론을 거쳐 유신론자가 되었어. 그런데 도킨스와 같은 인물은 자신의 편견과 혐오를 전파하기 위해 다양한 진실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지. 이러한 사상적 전환의 존재를 숨기고 대신 종교를 무지한 것으로 프레이밍하는 데에 앞장섰다. 이것은 과학도 철학도 아니고 혐오 선동에 불과해. (5)번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이지만, 심지어 도킨스는 통계 자료를 편집해서 "종교와 지능의 관계"를 "종교와 과학자의 관계"로 의도적으로 축소 왜곡했다. 과학자들은 "인격적 신"과의 대화를 확신할 수 없지만 초월적 영으로서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상당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 이건 5번에서 얘기하지. 앞서 얘기한 것처럼 맥그라스의 인터뷰를 편집한 것 뿐 아니라. 도킨스는 자기 책에서 플루를 인용해 아인슈타인이 무신론자라고 말했다고 주장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인격적 신"의 존재를 거부했을 뿐, 물리적 우주의 법칙을 실재를 존재케하는 초월적이고 무한한 영의 개념은 받아들였지. 이런 경우는 상당히 많아. 이것 또한 유신론적 견해지. | 21.05.31 16:1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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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또한 아인슈타인 뿐 아니라 제임스 맥스웰(전자기학), 슈뢰딩거, 막스 플랑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고전물리학자들 뿐 아니라 프랜시스 콜린스(게놈 프로젝트 책임자), 로저 펜로즈(2020. 노벨물리학 수상자) 존 배로(케임브릿지 수리과학 교수. 영국 왕립학회), 폴 데이비스(애리조나 대학 비욘드 연구소장, 물리학자, 영국 왕립학회) 등 지금도 살아 있는 무수히 많은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이 이러한 유신론적 사상에 기초하여 우주의 "법칙성"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무시했어. 심지어 폴 데이비스는 템플턴상 수상에서 "가장 무신론적인 과학자조차도 최소한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법칙 같은 질서가 자연 속에 존재한다는 걸 믿음의 행위로 받아들인다"고 했지. 우주의 법칙성을 설명하기 위해 만물을 보존하는 신의 초월적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는 입장이야. 도킨스는 이러한 형태의 주장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종교를 혐오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신적 필요를 보상 받고 있는 모습이지만, 그것이 과연 건강한 행동인가? 오히려 참과 진리를 떠나 그것이 그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네 입장에서 경멸해야 하는 행동이 아닌가? 다시 말해 신무신론은 도킨스의 "공갈젖꼭지"가 아닌가? 이런 태도에 대해 불가지론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생물학자) 같은 교수는 도킨스를 비판하면서 "동료의 절반이 어마어마하게 어리석거나 아니면 다윈의 과학이 전통적 종교와 혹은 무신론과 양립할 수 있다."고 말한 바가 있어. 지금 나는 유신론자로서 너와 얘기하고 있지만 나는 유신론 사상의 패러다임 중에서 온건한 축에 속한 사람인 걸 너도 느끼리라고 생각해. 내가 볼 때 너 또한 온건한 사람인 것 같은데 도킨스 말고 다른 형태의 무신론이나 유신론을 탐구해 보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걸. 어떤 기독교인은 그렇지 않겠지만 세련된 기독교도 무신론을 "박멸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구. 그건 신이 마지막에 할 일이지 인간이 할 일이 아니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데살로니가후서 3:2) 하지만 도킨스와 신무신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같은 시민인 기독교인들을 "저능아" 취급 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그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그들의 '개인적이고도 문화적인 필요성' 때문일 거야.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세련되지 못한 종교의 전투적 체계지. 또한 러셀의 물질론은 빅뱅조차 발견되기 전의 이야기이기도 해. 지금으로서는 물질 이전에는 빅뱅이 있었다는게 정설이고, 또 그 빅뱅 이전에 대해서는 온갖 형이상학적 상상들이 쏟아지고 있지. 그러한 과정에서 형이상학적 도구는 과학적 발전에 실질적으로 쓰이고 있다. 즉 오히려 과학은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형이상학을 필요로 한다. 우선 이것만 보아도 초월이 실재하는가에 대해 "과학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이 없다고 결정지었다"라는 건 틀린 얘기야. 위의 과학자들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전문가들로서 종교를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통해 상보적 도움을 받는다는 주장하는 것이 그것을 보여줘. 막스 플랑크는 과학자로서 직접 "과학과 종교는 상보적인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어. 다시 강조하지만 과학은 물리적 형이하학의 세계를 주 탐구의 대상으로 삼을 뿐 그것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확정지을 권한은 없다. 보거나 인식하지 못한다고 존재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며, 신무신론자들의 월권적 주장이야. | 21.05.31 16:1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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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그 대신 유신론 철학자들은 청동기 사람들이나 화물 신앙과 달리 우주의 법칙성에 대해 현대 지식의 최전선에서 탐구해. 화물 신앙이나 청동기를 거론하는 것은 약간 비열하지. 왜냐하면 CS 루이스가 말했듯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 7살짜리를 세워 두고 때리는 것"처럼 불공평한 일이니까.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냥 증거가 없다"라고 하거나 "도덕에 그냥 반대가 된다"고 하면 안 되고, 현대에 이르러 뛰어난 지적 작업물을 만들어낸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알빈 플란팅가, 맥그라스 등의 수준 높은 사람들의 작업물을 비판해야 해. 아니면 영원히 7살짜리 허수아비를 때리는 일이 되지. 에컨대 리처드 스윈번(옥스포드 명예 철학교수)는 여러 과학자들의 우주론적 주장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는데 "우주가 원인 없이 존재할 가능성은 낮지만, 신이 원인 없이 존재할 가능성은 그보다 높다. 따라서 우주의 존재에서 신의 존재를 추론하는 논증은 괜찮은 귀납 논증이다."라는 간단하고 명료한 입장을 제시해. 이러한 주장을 네가 받아들일 것인지는 내 손 밖의 문제이지. 이건 밑에서 다룰거야. 다만 나는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네가 보유하고 있는 이론은 네 필요에 의한 지적 편견에서 기초했다고 추측한다. 그래서 나는 네가 초월성을 탐구하는 데 있어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아마 성장기 전체를 돌아보는 과정과 양쪽 모두의 책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겠지. 둘째로, 너는 초월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의 도약"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것을 동시에 지적 자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너는 신무신론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신앙의 도약"을 했으며, 이것은 비일관적인 모순을 기반에 둔다. 쓰다보니 길어져서 아래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래. 첫째. 인간은 인식론적인 한계 속에서 지식을 얻기 위해 도약하는 존재다. 둘째. 신무신론은 초월성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초월성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초월성으로 도약했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다. 셋째. 유신론은 초월성이 있고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 넷째. 초월성을 감각하기 위해서는 초월의 층위에 걸맞는 경험방법론을 사용해야 한다. 첫째로 너와 나는 모두 "기적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 모든 자료를 검토할 수 없어. 또한 아무리 많은 자료를 검토하였든지 간에 결국에는 "기적이 없다"고 혹은 "있다"고 어느 시점에서 도약하여 믿어야 하는 처지에 처해 있지. CS 루이스는 동물원에 가는 길 버스 안에서 햇볕을 받으며 유신론적 증거를 생각하다가 예수를 믿기로 '도약'했어. 파스칼은 증거를 찾으며 방황하다가 불이 떨어진 것 같은 격렬한 종교적 체험을 경험한 후, 믿기로 도약했지. 나는 그냥 성경을 보다가 "때가 된 거 같다"는 생각과 함께 도약했고. 너는 그와 반대로 어느날 어떤 증거를 보다가 "이것은 틀렸다"로 도약한 것일테야.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도약과는 달리 또한 너와 나는 어떠한 외부 환경의 변화가 없다면 방금 따른 컵의 물이 콜라로 변하지 않았다는 우주 법칙 일반에 대하여도 "믿기로 도약"하고 있지. 이것은 이성보다 앞서는 믿음이야. 생각해봐. 어쩌면 우주 법칙은 매일매일 편집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에 따라 우리는 어제와 과거의 기억이 변화하고 재구축되는 세계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 21.05.31 16: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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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너와 나는 슬프게도 통 안의 뇌일지도 모르고, 라이엇이 롤 챔프의 '설정을 다시 짜넣는다'고 해서 게임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어떤 존재가 그의 불가해한 의도에 따라 우리의 설정을 자주 갈아 치울지도 몰라. 하지만 너와 나는 현실을 의심하지 않지. 아침마다 그걸 걱정한다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걸. 그것은 우리 안에 초월적인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우주의 법칙은 공리다."라는 근거 없는 믿음 말이야.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도약했다. 이것을 가리켜 전제라고 해. 사유와 논리 이전에 진리로 믿어지는 것이 선행하지. 이건 인생의 모든 영역에도 마찬가지인데,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가? 저 사람이 나의 부모인가? 나는 살 가치가 있는가? 나는 행복해야 하는가? 나는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같은 무수한 질문에서 우리는 도약해야 한다. 과학적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영역이야. 이것은 인생의 서사이고, 이 서사는 다층의 층위로 구성된 실재이기 때문이지. 따라 우리는 모든 질문에서 어느 시점에서 증거 수집 중지를 선택하고 도약을 감행해야 한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해"라는 생각으로 도약해야 하는거지. 그것은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충분한 증거를 모집할 수 없는 인신론적 한계 속에서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모른다"라고 해야 정직한거야. 그래서 너가 "자기를 속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이지. 즉 너는 그 시점에서 "불가지론자"인 것이지 "무신론자"는 아니어야 맞아. 무신론이란 "신과 초월적 세계가 없다"는 주장인데, 그게 없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그것이야말로 초월적 명제야. 즉 네가 말한대로 "모든 종교는 거짓이며 인간 필요에 의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라는 주장은 "초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네 믿음의 도약으로 말미암은 주장이야. 그렇지 않으면 굴드처럼 불가지론에서 "나는 모른다. 종교와 과학은 작동하는 권위의 체계가 다르다. 각자의 영역이 있다."라고 해야 앞뒤 모순이 없는 주장이 되는 것이지. 둘째. "종교는 모두 거짓말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인간에 의해 취사선택될 것이다."라는 신무신론의 주장은 초월적 지식이 없이는 주장되어질 수 없는 명제야.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안다"는 주장 자체가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이지. 즉, 내적으로 모순이 있어. 차라리 다른 종류의 종교적 세계관처럼 "인격신이 아니라 초월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 이런 종류의 뉴에이지적 종교관보다 신무신론은 내부 모순이 심한거야. 신무신론은 초월적 경험을 부인하지. 그런데 초월적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종교를 본다면 네 말대로 "사실이 어떠하든지 사람들은 유용한 것을 창조했다"고 상상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 자전거를 설명하는 것과 자전거를 실제로 타는 게 다른 것처럼(폴라니. 암묵지) 인간 지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런 경우에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들이 유용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는 것 전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지. 그러니 그런 주장에 대해 학을 떼는 것도 당연해. "아름답고 착한 일을 하게 한다고 해서 그러한 종류의 거짓말을 왜 수용해야 하지?" 그래서 기독교 신학을 가리켜 스카이워커를 추앙하기 위해 학자들이 애를 쓰는 수준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한 것이겠지. | 21.05.31 16: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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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나는 신무신론도 이른바 "이성적 아름다움에 호소하여 우월감을 느끼도록 돕는 거짓말의 체계"라고 주장해. 그것은 "모든 사람이 종교라는 망상을 포기하고, 과학과 이성의 합리주의에 몰두한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행복해질 것이다. 특히 우리 같이 지적으로 우월한 이들은 비록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이 놀라운 대업에 몰두하는 자들이다."라는 감수성에 호소하고 있어. 다시 말해, 신무신론은 초월성을 끌어들이는 내적 모순과 함께 방어기제 주지화(ntellectualization)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도약한 대상이야. 셋째. 유신론은 그에 비해 일관성이 있어. 유신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말해. 그 신은 특수상대성 이론 안에 있는 사차원 연속체 바깥에 있지. 즉 물질적 우주 밖에 있다는 것이야. 동시에 우리가 현실 우주에서 자아, 생명, 물질의 존재, 마음과 법칙의 존재, 종교적 행위 등을 통해 초월적 신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지. 인간이 종교를 창조한 게 아니라, 우주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개념이 일관적으로 제시돼. 이를테면 옥스퍼드 석좌교수 브라이언 레프토는 <시간과 영원>에서 다음의 개념을 제시하지. "신이 시간을 초월해 있다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을 단일 행위로 동시에 하게 됩니다. 그는 한 가지 일을 하고 다음에 또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행위가 서로 다른 시간에 여러 가지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우주를 개방적 우주인지 폐쇄적 우주인지를 고려하기도 이전에,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인과율적 관계. 즉 원인과 결과가 시간 밖의 사건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입장이지. 따라서 본질적 차원에서 원인이란 시공간적 연속체 안에서만은 근본적으로 검토가 불가능한 대상이라고 말하는거야. 유신론은 이러한 입장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어. 다시 말해, 우주의 기반이 되는 신적 존재는 인간의 어떠한 망상이나 사고와는 별개로 독립적인 진실이자 실재이다라는 거야. 그리고 이 신이 인간에게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은 조금 더 다른 부분이지. 이것은 유신론적 철학이 아니라 신학이나 종교 철학의 영역에 속할거야. 하지만 전투적 무신론은 그 모든 풍성한 사유를 무의미하게 쓸어 내버리는 걸. 그래서 내가 이렇게 시간을 내어 전투적 무신론에 반대하는거야. 신이 실재하고 그가 인간과 특정한 방법으로 관계 맺기를 원한다는 것이 아브라함계 전통 종교의 핵심이지. 신이 우주 밖에 실존한다면 루크 스카이워커를 누가 발굴하든 그가 신성한 존재로 영속할 수는 없을거야. 초월성을 전제로 한다면 이런 주장이 가능하지. 다시 말해 유신론은 누가 신을 창조했는가? 신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말해.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는 언제나 존재했다. 우리는 무(無)가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이야. 무(無)란 실재하지 않아. 호킹이 말하는 요동하는 양자 거품조차도 무가 아니지. 반면 물질만 있었다면 여전히 물질만 있을 것이야. 하지만 이 우주에는 놀랍게도 생명이 존재할 뿐 아니라 개념과 의식이 존재하고, 그 생명과 개념과 의식이 존속할 수 있는 합리적인 우주적 법칙이 존재하지. | 21.05.31 16:1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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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우주에 합리성이 존재하는 것인가? 원숭이 논증은 무한대의 시간이 주어지면 원숭이가 글을 쓸 수 있으리라고 가정하지. 그 결과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위해 우주의 시간선을 무한대에 걸쳐 늘어 놓는 경우도 생기지. 빅뱅 이전에도 빅뱅이 있고 또 그 전에도 빅뱅이 있고 하는 방식으로 무한대의 가능성이 조합되어 무한대의 경우의 수의 결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합리적인 우주 법칙이 실재하는 세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 그러나 시간이 무한한 것과 능력이 무한한 것은 다른 문제지. 이러한 형이상학적 상상을 기반으로 우주의 합리성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이 신무신론의 입장이라면 무한한 시간에서 어쩌다 출현한 합리성과 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둔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위에서 한 간단한 논증이 편한 것 같아. "신이 원인 없이 존재할 가능성은 우주가 원인 없이 존재할 가능성보다 높다." 왜냐하면 저토록 무한한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넷째. 초월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초월적 경험에 걸맞는 형태의 경험방법론이 필요하다. 사실상 유신론적 논증이라는 것은 자연신학이라 불리우는 철학적 방법론의 일부일 뿐이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초월성을 직접 경험해보기 위해 새로운 탐구를 시도해보라고 권하고 싶은데.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뉴욕에서 인텔리들을 대상으로 신에 관하여 잘 말하는 티머시 켈러의 글들이 너에게는 탐구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겠어. (팀 켈러의 살아 있는 신) (2) 종교는 유용하기에 믿어지는가?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에" 종교를 받아들이는가? 종교인들의 지적 동의는 종교가 제시하는 아름다움에 홀렸기 때문에 일어난 정신적인 착란 혹은 세뇌인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다면" 무엇이든지 믿을 만한 변명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위에서 이미 언급했기 때문에 짧게 짚고 넘어가자면, (1) 인간이 만든 종교: 사람은 실제로 그러한 종류의 종교적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화물선조차도 숭배한다. 지능이 높은 사람은 그러한 종류의 종교를 거절하는 것이 정당하다. (2) 신이 만든 종교: 그러나 만일 신이 실재하고 그가 물리적 세계 안의 자아를 갖춘 인간과 교제를 나누기 원한다면, 초월성을 인식할 수 없는 인간은 신적 세계를 신에게 의지하여 탐색하게 될 것이다. 이 탐색에서 인간 지능은 한계를 경험한다. 두 종교는 명백히 다르지. 게다가 한 가지 사실이 더 달라. "사람들이 보시기에 좋은 것"과 "신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다를 수 있지. 우주적인 차원에서 창조자인 신의 마음이 피조물인 우주에 반영 되어 있고, 그것이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우주의 물리적 기초가 된다고 가정해본다면, "인간만 보기에 좋은 것"은 우주와 그 이면의 신의 섭리에 의해 거부되겠지. | 21.05.31 16:2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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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는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가? 해당 역사관은 신무신론에 의해 과도하게 유포된 프레임이야. 네가 말하는 "실제 역사"는 네가 파악한 "역사관"에 불과해. 우선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가르침을 전파했다. 제자들도 쉬운 말로 성경을 기록했지. 그 이후 권력자들은 그 정신을 왜곡하여 번역 금지의 규칙을 만들었지만 그게 과연 해당 종교의 기본 가르침에 합당한 것인가?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권력의 자기 실패에 책임을 돌려야 한다. 또한 구텐베르크 금속 활자는 무엇을 위해 개발되었지? 성경을 찍어내기 위해 개발되었지. 종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식을 보유, 전파,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양에서는 로마 멸망 이후 여러 왕국이 난립하는 동안 수도원이 지식을 보유하고 지켰지. 이걸 부인하는 건 공정하지 못한 태도야. 갈릴레이나 코페르니쿠스에 대해서도, 너의 부당한 편견이 보이는군. 코페르니쿠스는 아예 사제였고 갈릴레이도 독실했어. 그리고 그들을 돕는 사람들도 당시 교인들이었지. 당시 사건은 복합적이었으며, 종교 뿐 아니라 정치적인 사태로 인한 소요들도 일어났어. 복합적인 문제에 있어 좋은 것의 공로는 세속 사회에, 부정적인 것은 종교에 돌리는 것은 불공평해.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79년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과 과학이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던 정신 자세를 개탄한다."고 공개적으로 반성했지. 이러한 입장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지성주의야. 오히려 계속해서 잘못된 정보로 그릇된 주장을 하는 것이야말로 반지성 주의가 아닐까? 그리고 앞에도 얘기했듯, 인간의 종교적 열망을 지적, 정서적으로 교화하는 기관으로서의 종교기관이 없다면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더 나쁜 것에 집착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 그런 점에서 반지성주의는 인간에게 내재된 것이고, 오히려 제대로 된 종교 조직은 반지성주의를 완화하는 기능을 하는 법이야. 약의 비유를 드는 것도 그와 같은 것이지. 실패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건강한 종교 기관은 건전한 문화의 배후지로 작용해. 본글에도 썼듯이 독일 교회가 반지성주의를 조장하였나? 한국 교회는 최근에 비판을 많이 받고 있지만 일제시대 야학과 한글 교육의 장이었어. 또한 네 말대로 선교적 교류를 할 때에도 교회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지. 또한 종교적 사상가들의 사상적 담론은 종교 내부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와도 연관이 있지. 동물을 대하는 과학/도덕 이론의 변화에 종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게 아니야. 종교는 문화의 배후지로 작용하고, 동물들을 잘 돌봐야 한다는 것은 생태신학의 주요한 주제지. 이러한 주장은 마치 종교를 사회에서 추방시켜 완전히 사적인 세계로 묶어두고, 종교인들이 사회 담론의 변화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 편견에 기초한 주장이야. 위에서 내가 다양한 과학자들을 언급했는데, 유신론적 철학자가 그보다 적지는 않겠지. 물론 나도 현 한국 기독교를 100% 긍정하지는 않아. 그건 내가 비판 받을 소지가 더 크겠군. | 21.05.31 16:2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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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교는 사회 진보에 후행적으로 반응하는가? 진보와 보수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입장이 있을지언정, 진보나 보수 모두 변화와 개혁을 얘기하는 건 같아. 가톨릭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회 안에서 자신의 입장을 얘기할 권리가 있지. 또 어떤 가톨릭이나 성공회 같은 곳은 굉장히 진보적이기도 해. 이것은 주요 교단마다 입장이 천차만별이라고 봐야지 하나로 뭉쳐 보기에는 어렵겠지. 또 이러한 교단의 선택이 사회와 다르다는 것을 목줄이 잡혀 끌려간다고 표현하는 것은 종교적 사유를 동시대 사회적 담론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보는 편견의 표출이야. 가톨릭은 낙태를 금지하는 데에 자신만의 이유가 있어. 그걸 보수적이라고 보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 목적은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지. 물론 대체적으로 종교 집단이 급진적이지 않다는 건 사실이야.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겠지. (5) 종교와 지능 사이에는 유의미한 연관관계가 있는가? 폴 벨의 연구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없네. 검색해도 특별한 출처를 찾기가 어려운걸. 하지만 도킨스가 이용하는 조사에 대해서는 비판해야겠군. 1916년과 1997년에 과학자들을 상대로 표본 조사를 했지. 주제는 "인간과 능동적으로 소통하는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1916년에 제임스 류바가 질문했을 때 대상자의 40%가 믿는다고 했고, 40%는 믿지 않는다고 했으며 20%는 확답하지 못했지. 1997년에는 에드워드 라슨과 래리 위덤이 다시 같은 똑같은 질문을 했지만 비슷한 결과를 받았지. 네이처에 16년과 97년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했어. 그런데 1998년에 미국 한림원에 이 질문을 했더니 7%만이 "인간과 능동적으로 소통하는 신"을 믿는다고 대답한거야. 도킨스는 이것을 가져다가 주장의 근거로 사용했지. 여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 비판점이 있어. (1) 이러한 질문은 전통적 신자를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서, 앞서 얘기한 것처럼 초월적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과학자들의 인식을 잡아내지는 못하는 거야. 다시 말해 여기서 기도로 응답하는 인격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는 못해도 유신론적 사고관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는 애기지. (2) 이러한 증거를 통해 과학적 마인드와 무신론적 입장을 동치시키는 것은 추가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정밀한 논증 없이 그냥 자기 입장을 호도하기 위한 주장에 불과해. 위에서 여러 과학자와 철학자의 예시를 들었으니 나머지는 생략할게. (3) 과학자들만이 진리의 담보자가 아니야. 과학자들에게 예술을 묻거나 도덕을 묻는 경우도 어딘가 독특할테지만, 신을 관하여 묻고 그것을 중요한 근거로 삼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 이것은 종교와 과학이 충돌한다는 프레임으로 독자를 유도하기 위한 선전술에 불과해. 결론을 내리자면, 종교는 쉽게 샌드백이 되어 왔지. 과학적 세계관은 강력하고 유익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모든 체계를 모두 다 무의미하고 무쓸모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과도해. 그 둘은 서로 다층적인 실재 속에서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며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왔지. 그리고 이 둘은 충돌, 대화, 통합, 독립의 네 가지 상호관계를 가질 수 있어. 충돌의 프레임만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상실하게 되고, 그 결과 목욕물과 함께 어린 아이를 내버릴 수 있지. 나는 그러한 것에 반대하고, 네가 그러한 전제를 가지게 된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부탁한 거야. | 21.05.31 16:3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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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핵
0. 이 글을 쓰고 수정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으며,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동안 저 남쪽에서 종교 떡밥이 도는 것도 봤는데, 역시나 근거 없는 욕설과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더라고. 나는 근거 없는 공격이란 내용이 내 취향에 얼마나 가깝든 간에 결국 소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런 접촉이 희귀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의 대화는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사실 내 모친도 그렇게까지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 편은 아니라서, 맞벌이를 하게 되니 금방 그만두더라. 단지 어린 시절 거기서 했던 어느 경험이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었다는 것 정도야. 하지만 하나는 깊이 공감하는데, 학창 시절 어설픈 무신론자로서 어설픈 신앙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재미있는 놀이였다는 거. 내가 파고든 건 좀 더 '기술적인' 부분이었지만. 앞서 말한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의 특별히 야만적인 구절들을 꺼내 와서 "이런 무지하고 야만적인 청동기 시대 고대인들을 롤 모델로 삼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를 따져 묻거나(여기에 대한 변론은 앞서 네가 언급했으니 넘어가고) 공인 복음서 2종에 나온 예수의 족보가 서로 다른 것(나중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근동 지역에서 족보란 가문 구성원의 정확한 이름과 숫자를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혈통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었으므로 필요에 따라서 원하는 부분만 편집 및 왜곡해서 내놓는 것이 관습이었고 또 이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열왕기하' 와 '역대상' 에 나온 다윗의 용사들 이름이 완전히 다른 것(이건 목사도 제대로 된 변명을 하지 못했다) 삼위일체설이나 4복음서 같은 기독교 핵심 교리들이란 창조주의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에서 피조물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지저분하고 피비린내나는 과정을 거쳐 결정된 것들이었다는 등의 부분이었지. | 21.06.01 23:1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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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합리성과 이성, 과학적 사실이란 건 우연히 만들어졌으니 신앙과 다를 바 없다고 했는데, 달라. 과학이란 모든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잡히는 세계의 실체 사이의 현상들을 조사하고 귀납적 추리를 곁들인 목록으로서, 실체를 어떻게 다루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잖아. 빅뱅이 몇 번 일어났든, 우리가 통 속의 뇌든 아니든, 우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저 벽을 향해 걸어가면 정말 부딪힌다는 거지.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리 몸과 저 벽은 원자와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와 원자 사이에는 수많은 공간이 있으니, 우리는 이론상 걸어서 저 벽을 통과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게 정말 이루어질 가능성은 너무나도 낮아서 인류에게 관측된 적이 없단 말야. 그러니 우리는 "저 벽을 향해 걸어가면 부딪힌다" 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거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과학의 가장 좋은 점은 (당신의 이름을 넣으시오)가 믿든 안 믿든 사실이라는 것이다" 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야. 그러니 합리성이라는 기준이 없어진다면, "내가 그리 믿으면 참이고 믿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는 거지. 종교가 이에 해당한다. 종교들이란 근거 없이 자신만이 유일한 진리라 주장하는 상호 배타적인 신앙 체계 한 무더기잖아. 너는 '인간이 만든 종교' 와 '신이 만든 종교'를 구분하려 하는데, 어느 종교든 자기 종교야말로 신이 만든 것이라 주장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할 기준 같은 건 신앙 외에는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초월적 경험'이라는 것 역시, 얼마나 감동적이든 어디까지나 개인적 체험에 불과한 것이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쉽사리 동의해 줄 수 없다. (여러 고대 종교에서는 특별히 축성된 약초를 통해 '초월적 경험' 을 얻으려고 시도하곤 했는데, 과학이 향정신성 약물의 작용기제를 밝혀내자 이러한 종교인들은 '약쟁이'로 전락하게 되었지.) 만일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등등 전 세계의 종교인들을 그러모아 '지구의 유일한 진리에 대해 합의를 못 보면 못 나가는 방' 에 가둬 둔다면, 저 종교인들 모두가 손쉽게 동의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란 하나의 과학적 사실. "생물체에게 충분한 물리적 충격을 가한다면 생명 작용을 멈추도록 할 수 있다" 라는 과학적 사실일 거란 말야. 그러니 러셀의 표현대로 "가장 강력한 독가스를 가진 이들이 승리할 것이고 이들이 바로 영생하는 자일 것이다." 앞서 말한 동로마 제국에서도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네스토리우스를 비롯한 수십여 명의 '교부'들이 서로를 죽여 없애려고 노력한 끝에 살아남은 이의 견해가 주류 기독교 교리로 자리잡게 되었으니 이 말은 결코 허풍이 아냐. 그러니 오늘날 기독교 철학자들이 온유하게 지내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고삐 탓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저기 저,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를 믿는 탈레반들은 세속 권력의 제약에 얽매이거나 눈치를 보지 않아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으며, 탈레반보다는 훨씬 온건하지만 종교권력이 세속권력을 잠식한 탈레반 이웃 나라들에서는 여성이 남성 동승자 없이 차에 타는 일이 도덕적으로 옳은지가 진지한 논란거리로서 취급받기도 했지. 이런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 너도 동의할 테니 더 말하지는 않겠다. | 21.06.01 23:1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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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는 유신론적 철학에 대해서 길게 얘기하고 있는데, 도킨스는 유신론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나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므로, 벌거숭이 임금님의 옷차림새와 장신구들에 대해 상세히 고찰하는 책들은 진지하게 따져 볼 가치가 없다" 고 일축해 버렸었지. 나도 유신론 철학자들을 별로 안 좋아하긴 하지만, 도킨스와 다른 이유 때문이야.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유신론 철학자들은 야스퍼스와 키에르케고르 같은 네가 말한 것과는 결이 좀 다른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이런 인색한 평에 동의하게 되더라. "그는 초월적인 것을 구현할 힘도 없고, 경험의 깊이를 헤아릴 능력도 없는 채 이 세계가 그러한 실패로 말미암아 뒤흔들린 것을 의식만 하는 형편에 놓여 있다...그는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고백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으며 그 무슨 만족스러운 원리를 이끌어낼 만한 아무런 구실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제시하지 못한 채-그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단숨에, 초월적인 것을, 경험의 존재와 삶의 초인간적 의미를 동시에 단정한다...논리적인 차원에서 이런 추론을 성립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것을 비약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거칠게 말하면 "나도 너도 똑같이 어둠 속에서 벌거벗고 해메는 처지인데 듣도보도 못한 패션쇼 얘기가 왜 나오는 것이냐. 이건 비약이고 자기기만"이라는 거지. 이러한 태도는 인상적인 고전 영화 '제7의 봉인' 에서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기사가 의인화된 죽음과 체스를 두는 장면으로 유명한 그 영화. 시놉시스는 대충 다음과 같다; 십자군 전쟁에서 지친 몸과 마음으로 돌아온 기사. 하지만 돌아온 고향은 흑사병이 돌아 황폐화되어 있었고, 기사는 이 수난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줄 신을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그를 찾아온 건 죽음 뿐이었다. 기사는 체스 내기를 제안해 죽음을 잠깐 미루고서 얻은 유예기간동안 여정을 떠난다. 고해성사를 해 보고 광대, 고행자 무리. 심지어 악마를 찾아보겠다고 마녀로 몰려 죽게 된 여자애까지도 만나 봤지만 "달 아래의 공허"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는 죽음에게 답을 말해달라고 간청하지만 이마저도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노력이었다. 기사는 죽음에게 잡혀가기 직전 무릎을 꿇고 신에게 자비를 애걸하고, (그 옆에서 같이 잡혀가게 될) 세속주의자를 대표하는 종자는 기사를 비난한다. "당신은 당신에게 있다는 어둠. 우리 모두가 갖고 있을지 모르는 이 어둠 속에서 신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허튼 짓일랑 그만두고서, 마지막으로 눈알을 굴리고 발가락을 움직이며 삶의 마지막을 즐기십시오." 영화의 마지막은 '신이 보인다'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광대가 기사 일행이 죽음에게 춤추듯 끌려가는 모습(또는 환각?)을 보는 것으로 끝난다. | 21.06.01 23:1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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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감독은 어떤 결론을 강요하지 않고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기사가 마지막에 보인 행동이 아주 비겁하게 느껴졌고 종자의 말은 영웅적인 울림으로 와닿았다. 누가 봐도 어둠 저 편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맞거든. 어쩌면 정말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지. 키에르케고르 말마따나 정말 '절망'밖에 안 보인다고. 하지만 여기 어둠이 있으니까 저기 어딘가에는 빛이 있어야만 한다는 건 단지 희망사항이라는 거지. 그리고 절망 끝에 희망사항을 근거 없이 믿기로 하고서 뛰어내리는 게 바로 '신앙의 도약'이고. 물론 나도 나중에 적당한 기회가 찾아온다면 '철학적 자1살'이란 걸 하고 싶어져서 그걸 결행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겠지만 아직 내게 있어서는 철학적 자1살이란 육체의 자1살보다도 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어둠 너머에 초월적 존재가 있을 수도 있겠지.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이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막연하게 말하듯이. 하지만 합리적인 우주적 법칙이란 것이 우리가 원하는, 청동기 문서에 나와 있듯 기적을 일으키고 기도에 응답하는 인격신의 모습인가. 우리가 그것을 따르고 숭배해야 마땅한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지. 아브라함계 종교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들은 초월적 존재라면 마땅히 우리들과 취향 및 편견을 공유할 거라는 근거 없는 착각을 하곤 하거든. 우리와 같은 행성을 공유하는 야생 동식물들마저도 인간의 취향 및 편견을 아득히 넘어선 행동(다윈은 애벌레를 마비시킨 다음 거기에 알을 낳아서 애벌레를 산 채로 파먹게 만드는 육식 벌의 습성을 들었다)을 하곤 하는데, 이 창백한 푸른 점을 비롯한 모든 것을 만든 존재는 스스로의 모습을 본따 우리를 만들었으므로 우리와 능동적으로 소통하며 우리를 사랑할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순수한 희망사항. 자위적 가정이고 아무런 절대적 증거 없이 이게 사실이라 주장한다면 뻔뻔한 속임수지. 따라서, 내가 선호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모래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손에 잡히는 것들을 그러모아 모래성을 쌓는 쪽이며 이것이야말로 정직한 태도라 여기는 거야. | 21.06.01 23:1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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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3. '유신론적 사고관'을 갖고 있다 해도 '능동적으로 소통하는 인격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교인'(=전통적 신자)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잣대로는 '종교인'이라고 불러줄 수도 없는 사람들이야. 도킨스도 생물학자라면 당연히 자연선택의 질서를 믿겠지만, 이건 청동기 시대 고대 문서에 쓰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논문들에 쓰여 있고 거기 인용된 수없이 많은 증거들이 서로를 보완하며 짜맞추어져 있어서 믿는 것이거든. 위에서 말했듯 이건 귀납 추리로서, 겉보기에 튼튼해 보이지만 "선캄브리아대의 토끼 화석" 같은 설명할 수 없는 예외가 나타난다면 단숨에 작살날 거야. 하지만 그런 일은 *아직* 관측되지 않았지. 그리고 자연 선택의 법칙을 믿기 위해 그걸 보존하는 신의 초월적 존재를 전제할 필요가 있지 않다는 건 도킨스가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고 있고. 물리학자들처럼 "신은 우주의 법칙이다" 라고 한다면 "신은 에너지다" 라고 할 수도 있을 거고, 그렇다면 스마트폰 보조배터리에서도 신을 발견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충전된 배터리를 믿는다고 해서 능동적으로 소통하는 인격신; 예수, 오딘, 비행 스파게티 괴물을 믿는 게 되는 것은 아니지. 따라서 저 조사 표본 과학자들 중 우리 기준으로 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7%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부분의 어조는 특정 목적을 위해 꾸며진 건 분명하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닌 듯 하다. | 21.06.01 23:1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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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그러니 과학에 인격신을 억지로 우겨넣으려는 시도를 하는 템플턴 재단을 주류 과학계에서는 '굶어죽기 싫을 때 양심을 팔아 돈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곳' 정도로 차갑게 받아들이는 거고. '긍정심리학'의 저자는 책의 맨 마지막에서 자신이 템플턴의 돈을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데, 변명문의 어조 및 배치 장소를 봐도 대충 알 만 하더라. 이 얘기를 제일 먼저 했다면, 혹은 하지 않고 숨겼다면 읽지도 않고 덮어버렸을 학자들이 아주 많았다는 거겠지. 스티븐 제이 굴드처럼 일부 온유한 과학자들은 '겹치지 않는 교도권' 같은 개념으로 종교인들을 용인해 주고 있지만, 템플턴 재단 같은 온유를 내다 버린 종교인들은 끊임없이 이 휴전선을 넘어 도발행위를 시도하고 있다. 저 자들은 종교권력이 옛날처럼 강했다면 이단심문관을 앞세우고서 제 마음에 안 드는 책과 그 책을 쓴 사람들을 잡아모아 마음껏 불태웠겠지. 그러나 이러한 도발행위들은 종교인들에게 비판을 받은 적이 없다. 신심자들은 죽은 뒤 천국에 가서 불신자가 불타는 것을 내려다보며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는 (근거 없는) 약속은 아브라함계 종교의 핵심 교리이고, 세속 권력이 득세하는 오늘날의 가장 세련된 종교인들마저도 이런 생각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는 못하고, 네가 언급한 것처럼 "신이 알아서 할 테니 난 모른다"로 흘려넘기고 있잖아. 그래서 나는 굴드가 얘기했던 '겹치지 않는 교도권'. 과학과 종교는 사이좋게 양립할 수 있다는 개념은 히틀러를 상대로 유화책을 제시했던 네빌 체임벌린에 비할 바는 절대 아니지만 어쨌든 나이브한 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발전이 인격신을 끊임없이 틈새로 몰아넣고 있듯이, 인격신 추종자들도 과학계의 틈새로 끊임없이 침입하려 하거든. 손을 잡고 웃는 기념사진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와 상관없이, 눈 앞의 증거를 "따라서" 믿는 사람과 증거에 "반해서" 믿는 사람; 의심하는 도마와 다른 사도들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서로를 찌르도록 되어 있다는 게 내 생각이야. 겹치지 않는 교도권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그 경계란 어디까지나 휴전선으로서 철조망과 기관총, 지뢰밭. 감시소초. 간첩 및 특수부대원이 있는 곳이라는 거지. | 21.06.01 23:1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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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4. 신무신론이 "이성적 아름다움에 호소하여 우월감을 느끼도록 돕는" 사고체계라는 표현에는 동의하는 바야. 리버럴이나 파시즘, 아나코-생디칼리즘이 그렇듯 사실에 대한 노골적인 정치적 해석(해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긴 하지만) 및 행동을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니까. 그들 중 일부 파벌은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게이' 나 '레즈비언' 으로 정체화했듯이 무신론자는 스스로를 명석자(Brights)라 불러 마땅하다는 주장(도킨스는 여기 동의했다) 까지 하기도 했었지. 거기까지 오면 나도 찬동 못 하겠는데, 지적인 사람일수록 종교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거든. 지능이란 건 운동신경이 그렇듯 타고난 운영체제 자체의 차이라, 표준 지능을 가진 사람이 훈련을 거치면 표준보다 더 박식한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절대로 고지능자(혹은 경계선 지능자)와 비슷하게 말하고 생각하도록 변할 수는 없거든. 차별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얘기야. "우리가 식이요법을 지키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면 몸에 근육이 붙고 표준보다는 달리기를 잘 하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메시와 맞먹을 수는 없다" 와 정확히 같은 말이니까. 그러니 나는 저번에 말했듯, "오만한 사람들에게 과도한 존중을 보이면 나쁜 버릇이 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신 없는 선지자란 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이들도 신을 앞세우는 선지자보다 별로 낫지 않다는 건 니체의 후계를 자처한 권력자들이 증명했으니 말야. 이렇게 다른 의견이지만, "종교가 박멸된다고 해서 지상락원이 찾아오고 모두가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될 리는 없다" 는 데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듯 하네. 종교적 욕망이라는 것도 그 근본은 세속의 욕망의 일종이며, 따라서 같은 과인 주류/도박/매춘이 그러하듯이 막연한 존경과 숭배가 아니라 감독과 통제가 필요하다는 게 내 입장이야. 인류 역사 초기에는 직업 전사가 지배층으로서 특권을 누렸고, 이들의 호전성은 '상무 정신'으로서 찬양받아야 한다는 것이 주류 의견이었지. 하지만 문명화된 오늘날에는 거의 모두가 직업 전사는 민간 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지. 직업 종교인 역시 직업 전사만큼이나 요긴하고 위험한 자들이므로, 문민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의견이야.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작년 8월 15일에도 정치세력과 결탁한 직업 종교인이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강력하며, 사회에 아주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었다. 사족: C.S. 루이스는 "예수는 미치광이, 사기꾼, 혹은 신"이라는 삼단논법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다른 것도 가능하지. "오해를 받았다". 이 주제를 가지고 비튼 코미디 영화 "몬티 파이선과 브라이언의 삶" 은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유럽 각지에서 항의와 소송, 상영금지에 시달렸는데, 검열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도 내가 종교를 안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야. | 21.06.01 23: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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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0. 며칠에 걸쳐 이러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걱정하더군 "그거 괜찮겠느냐. 다툼이 심하지 않느냐"며 말이야. "고생이 많다"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하지만 하버마스의 말대로 우리 일상을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신무신론이든 종교주의든)에서 벗어나 민주시민으로서 합리적인 소통 과정을 거쳐야만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대화는 희귀하면서도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해. 이런게 자주 다양한 곳에서 가능한 것이 가장 세련된 사회겠지. 그리고 본글에도 썼듯이 독일 기독교는 그것을 해냈고 말이야. 8.15 때는 좀 안타까웠지만 말야. 예비군에서 만났던 어떤 친구도 떠오르네. 그 친구도 무신론자였지만 나와 대화하면서 굉장히 즐거워 했던 기억이 난다. 로마 이야기를 했더니 로마 황제의 이력을 모두 읊으며 내 주장을 보충해주기까지 하더군. 물론 예비군 훈련장에서야 뭐든 재미가 없겠냐만은. 그런 '대화'야 말로 시민의 삶과 공동선을 풍요롭게 하는 공론장의 정신이겠지. 요즈음에는 토의나 토론의 기본 원칙을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야. 다른 곳에서 이런 카운터 파트너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으니, 이것은 내 '입장'에서는 '신의 인도'같이 느껴지는군. 너에게는 다른 해석이 있겠지만 말이야. 0.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공의회의 정치적 과정을 거쳐 도출된 것은 사실이야. 또 오래된 문서로서 성경은 인간에 의해 편집된 것 또한 사실이지. 하지만 이 부분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초월한' 교의를 인간이 교리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점진적 계시를 통해 진실이 조금씩 더 드러나고 있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도 있으니 더 적지는 않을게. 그리고 신약은 예수님이 살아 있었때 직접 본 사람들이 적은 것이니 그것에 대한 해석은 순수한 정치적 문제만은 아니야. 게다가 "신의 계시를 인간이 쓴 것"이라는 점에서 성경에 대한 입장은 교파마다 모두 다르지. "신의 계시"에 방점을 찍거나 혹은 "인간이 쓴"에 방점을 찍기도 해. 하지만 CS 루이스는 이에 대해 "어차피 같은 집"에 들어가 있다고 말하지.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해. | 21.06.02 21:2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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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1. 나는 합리성과 이성, 과학적 사실이 우연히 만들어졌으니 신앙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 적이 없어. 내 주장은 합리적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연보다는 초월적 신존재에 근거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야. 또한 그렇기에 유신론자들은 유신론 사상에 근거하여 과학과 합리적 이성, 철학에 기여해 왔다고 주장했어. 또한 나는 나의 모든 주장에서 "실재는 우리가 믿는 대로 결정된다"는 식의 반실재론을 주장한 적이 없어. 너도 잘 알겠지만 철학의 역사를 볼 때, 그러한 주장은 종교(이 경우에는 기독교)보다는 오히려 "합리적 이성의 절대적 우월성에 기반하여 의심할 여지없는 지식의 기반을 닦으려던 계몽주의". 즉 경험적 증거 없이 이성적 합리주의만으로 지식을 세우려던 정초주의가 붕괴한 후, 허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한 일단의 구성주의자의 무리로부터 출몰했지. 네가 언급한 까뮈의 허무주의적 실존주의는 기독교로부터 파생한게 아니라 계몽주의 실패의 데스 스트랜딩이었던 거야. (너가 이 게임을 해봤는지는 모르지만 난 이 게임에서 제시한 '좌초된' 해변의 이미지가 너무나 이 광경을 잘 묘사하는 것 같아서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어.) 그들은 모든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객관성/합리성"을 무력화하려고 했어. 네가 말한 대로 "내가, 혹은 우리가 그렇게 믿으면 참이다. 우리가 실재를 만든다"라는 급진적인 사회적 구성주의를 주장한거야. 반면 기독교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그러니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프레이밍은 낡은 편견에 근거한 비판이야. 반면 내가 일관되게 주장한대로 기독교는 계속해서 "실재"가 인간 인식의 외부에 있는 것임을 주장했지. "창조된 세계"는 인간 인식 밖에 있고, 인간 인식은 이성과 경험을 통해 그것을 받아들이되 유한하게 받아들인다는 입장은 늘 동일했어. 그리고 인간은 그 창조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돌보는 데에 신으로부터 기원하는 "이성과 합리성과 경험과 지혜"를 두루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쳤지. 그래서 나는 내 주장에서 우리의 물리적 한계가 인식의 한계를 만드는 "인식론적 절망"을 언급했어. 예컨대 언젠가 우주가 팽창해서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 날이 오겠지. 그러면 인간은 태양계 밖의 별에 대해 알 방법이 없어져. 이것은 합리성의 폐기가 아니라 합리의 한계가 실재 그 자체로부터 온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지. 그래서 나는 실재에 의해 우리 인식은 한계에 처해 있는 것이니, 가장 간단한 것 조차도 지식을 얻기 위해 도약해야 하는 존재라는 주장을 했지. 돌맹이가 고체라는 것조차 인간은 이성을 이용해 믿어야만 하고, 수학적 공리가 게임 설정처럼 개변되지 않을 것임을 귀납적으로는 추론할 수 없으니 믿어야 하지. 그러니 인식의 작용에서 믿음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상보적인 관계이지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었어. 그러니 이제 그러한 부분의 프레이밍은 그만해 주었으면 하는걸. 합리성은 우주가 합리적인 만큼이나 인간 이성의 다양한 작용과 행위, 그리고 사회적 층위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마땅한 부분이고, 종교(이 경우에는 기독교. 왜냐하면 종교는 너무 다양해서 그렇지 않은 종교도 있으니까)는 신무신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교리적으로 늘 이성(로고스)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러한 전통에서 출현한 지적 결과물들을 제시했지. 그걸 쓸어 내버리는 것은 목욕물과 아이를 함께 버리는 일이야. | 21.06.02 21:3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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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노파심으로 다시 강조하지만, 이러한 전통적 가르침은 '약'과 '배후지'야. 국가가 공교육을 한다고 하지만서도 백신 사태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이 필요한 지식을 보유하지 못한 책임을 질 수 없는 것처럼, 최근의 다양한 실패 또한 전통적 교리가 아니라 조직의 실행 기능의 부족과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 합당할거야. 나는 그것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야. 도리어 나는 초월적 실재의 근거로서 우주론적 논리를 제시했지. 나는 네가 지금 '마음과 지성'으로 정보를 배열하고 조직화하는 현상 자체가 '형이상학적으로 늘어뜨려진 시간 단위 속에서 무한에 가까운 우연으로 변화한 물질'로부터 발원한 것이 아니라. 시간 단위 바깥의 '모든 것보다 큰' 존재. 즉 만물과 정신을 모두 소유한 초월적 근원체이자 제1원리이며 실재인 것. 즉 "초월적 영"이라 표현되는 "신"으로부터 발원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했어. 이것은 우리가 여태까지 발견한 바에 따라 우주가 자기조직화에 따른 창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끌어 낸 유비 추론이야. 개미와 벌과 인간과 자연이 창발적 자기조직화를 이루어 내는 것을 봐.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은 한 개체보다 더 큰 층위에서 아래층위의 성질을 보유한 체 더 복잡한 층위의 존재로 자기조직화하지. 개미는 군체를, 사람은 사회를. 이처럼 "창발성"으로 가득 찬 우주에서 우주자체에 창발성이 적용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우주 그 자체의 창발성은 우주가 자신이 다루지 못할 더 큰 층위(시공간 너머)의 초월적 무언가의 존재를 암시할 수 있지 않겠어? 그렇다면 우주보다도 큰 창발적 존재는 당연히 우주가 포함하고 있는 마음과 정신을 합할 뿐 아니라 우주보다도 더 복잡한 개념을 다루기 위해 시공간적 연속체 바깥에서 시간보다도 먼저 존재해야만 하겠지. 그것이 바로 종교에서 논하는 "초월적 영"의 개념이야. 이건 우주론적 논증이지. 자연계시적 신학의 일부고. 다시 말해 유신론 철학과 일부 종교가 제시하는 논리적 근거 중 하나야. 게다가 이것은 극도로 늘어뜨려진 시간 속 우연으로 인해 물질에서 자아와 지성이 생겨났다는 형이하학적 우주론에 비해 더 적은 전제를 필요로 하지. 오컴의 면도날에 더 합당해. 심지어 방금 기술한 형이하학적 우주론은 유신론적 우주론의 하위 작용으로도 설명이 가능해. 헤겔식으로 "우주는 신의 자아 실현의 과정이다"라고 말하든지 아니면 기독교적으로 "신의 존재적 발산으로서의 천지창조"를 말하든지 간에 말이야. 빅뱅은 커녕 창발성과 복잡계의 이론조차 명확하지 않았던 시절 러셀이 주장한 "물질이 처음부터 존재했다는 주장"이 과연 그의 말대로 오늘날에도 "대단한 상상력"일까? 나는 이러한 우주론적 신논증이 압도적으로 우월하고 장엄하여 지적으로 더 도전적일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더욱 합당하다고 봐. 그렇다면 우주가 그 영으로부터 출현했다고 말하는건 오히려 정당하다고 생각해. 그렇기에 너는 "종교가 근거가 없는 주장을 한다."고 하기 전에 내가 제시한 우주론적 논증에 대해 비판을 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주장 그 자체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더 이상 토론이 아니게 될 거야. | 21.06.02 21:3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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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또 여태까지 봐서 알겠지만 나는 네가 "기독교에 투신하라"고 주장하지 않았어. 나는 "초월성을 거부하면서 초월적 진리를 주장하는 전투적 무신론보다는 인식론적 한계를 주장하는 불가지론이, 그리고 그것보다도 일관적으로 초월성을 주장하는 비종교적 유신론"이 차라리 더 이성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야. 나는 기독교를 믿는 것이 지적 자/살이라는 것을 반대하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무신론자들 스스로 초월적 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유신론을 부인하는 것이 지적 자/살이라고 말하는 것이야. 보지 못하고 알 수 없다면 "모른다"고 해야지. 그 외의 모든 이야기는 문화적이거나 여타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진 지적으로 비정직한 행위야. 그런 점에서 종교가 문제가 있다면 "개선해라"고 해야지. "없애자" 거나 "거짓이다"라는 건 비약에 근거한 강압적 폭력이야. 만약에 여기서 기독교에 대해 얘기하려면 몇 단계를 더 거쳐야 돼. "비종교적 유신론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면 그 다음에 탐색의 대상은 "신이 우주와 상호작용을 하는가"의 문제를 다뤄야 하겠지. 그러나 나는 의도적으로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어. 내 주장은 일관적이고 요점은 간단해. 전투적 무신론은 내적 모순으로 인해 유신론보다 비합리적이야. 따라서 합리성에 대한 어떤 열렬한 사랑의 호소조차도 유신론이 더 나아. 2. "증거와 합리성"을 얘기하는 도킨스가 "입장이 다르므로 진지하게 따져 볼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태도가 설마 합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반면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분자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역사 신학에서도 박사 학위를 받았어. 그는 매킨타이어를 인용하면서 기독교가 다른 전통과 '지적으로 대화'하면서 사회적 공론장에서 '지적, 도덕적으로 기여 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도 그와 같은 입장이야. 그런 일은 실제로 있었지. 미국 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기독교인들은 지적으로 합류했어. 맥그라스는 그런 목적에서 두 과목 모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거야. 그의 저서를 보면 그는 다방면의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들을 최선을 다해 탐구하고, 그것을 전유하여 기독교적 지성을 빚어내어 다른 전통과 대화하려고 시도하고 있어. 그가 쓴 <과학신학>은 나한텐 도움이 많이 된 책이야. 원본은 못보고 요약 번역본으로 봤지만 말이야. 종교주의와 계몽주의의 붕괴 이후 현대 사회는 다원화 되어 있고 매킨타이어의 지적대로 각 전통에 따라 대화해야 하는 상황에 있지. 그런 점에서 하버마스가 민주주의의 기초로 시민들의 책임 있는 대화를 강조한 것은 중요했어. 하지만 도킨스는 "진지하게 따져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해. 이런 태도는 비판 받아 마땅해. 너가 유신론 철학자를 안 좋아한다는 이유에 대해서 도킨스와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건 다행이네. 3번에서 다시 다루게 되겠지만, 사실 지금 도킨스가 취하고 있는 태도야말로 가장 냉혹한 이단심판관이 행하던 태도겠지. 그러나 그러한 약자 멸시가 잘못되었다고 역사상 처음에 말한 것은 기독교였어.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은 희생 제의에 대한 반박이었지. 이전에 얘기했던 대로, 십자가는 우리가 무죄한 자를 죽였다는 사건. 그리고 그것이 범죄이니 이제는 희생양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큰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정신이 발현했어. 그래서 거기서부터 권력 분립과 법 앞의 평등과 같은 서구 정신의 기초가 쌓여졌지. | 21.06.02 21:3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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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그것은 "아브라함계 계통 종교의 특징"이 아니야. 이에 대해 프랑스 한림원 소속의 르네 지라르는 "모든 종교는 내부 폭력을 억제하기 위해 희생양 제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위대하고, 기독교는 그것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예외다."라고 말한 바가 있지. 지라르의 철학이 관심을 끌면서 기독교의 복귀라는 주제도 유럽에서 몇 년 전에 유행했었지. 이것은 오직 기독교의 특징이야. 나는 이것을 "역사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초월적 영의 개입"으로 찬동해.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면, 키에르케고르의 도약은 일견 비약처럼 보일지라도, 그가 서 있는 역사적, 사상적 흐름의 지점에서 다양한 관점의 증거들을 검토해보고 경험을 시도해본 결과 도달한 지점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야. 알베르 카뮈는 끔찍한 세계를 서술했지. 네 말대로 어둠 속에서 벌거벗고 해메는 처지가 된 인간을 체험했어. 키에르케고르도 그랬지. 그들이 겪은 현상은 단독적으로 뚝 떨어져 존재한 사건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과 정신상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현상이야. 그런 흐름이 있기 위해서는 게몽주의의 붕괴 후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있어야 했지.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은 니체에 대한 도전이었어. 나는 군대에서 그 책을 보다가 구토할 뻔 했던 기억이 나네. 짜라투스트라가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줄타기를 하던 광대는 떨어져 죽게 되었지. 짜라투스트라는 죽어가는 광대에게 말하기를 "내 명예를 걸고 악마는 없다."고 말했지. 당시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너무나 끔찍한 폭력이라고 생각했어. 그것은 고작 한 인간의 명예를 걸고 장담하기에는 너무나 큰 주제가 아닌가? 그래서 니체는 그를 초인이라고 불렀겠지. 망각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가자는 영원 회귀를 근거로 삼아, 사람들의 윤리를 뛰어 넘으며 힘을 추구하는 인간. 극복자.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윤리를 뛰어넘어 폭력적으로 말할 수 있는 존재. 계몽주의는 기계장치의 신을 만들고, 기계장치의 신은 이신론을 외쳤으며. 이신론은 마침내 신의 죽음 선언으로 이어졌지. 니체는 거기에 대해 이제 인간은 신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고. 대신 저러한 극복자로 인해 십자가로 인해 폭력적 희생 제의가 끝장나 텅 빈 하늘에 다시 디오니소스를 불러 들이자고 제안했어. (우상의 황혼, 아포리즘 125) 그는 십자가가 폭로하고 거부했던 희생제의라는 발명품을 다시 제시했지. 그의 영원회귀의 주장대로 '십자가를 망각'하고 다시 폭력적인 힘의 논리를 추앙하여 "노예 도덕"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했지. 희생양을 만들어 내부의 모순을 폭력적으로 해소하자는 주장이었던 거야. 헤겔도 마찬가지였다. 헤겔은 우주를 "신이 태어나는 과정"이라고 묘사했으며, 영웅으로부터 신의 정신이 발현한다고 말했지. 너가 잘 말했듯이 독일은 룬문자와 북유럽 신화를 애호하며 자신들의 모순을 대신 감당해줄 희생 제의, 유대인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희생 제의를 벌였지.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은 바로 이 니체와 헤겔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된 거야. 그는 실존적인 인간이 겪고 있는 이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신이 이미 성육신한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고 살림으로써 "계시"를 주었다고 생각했지. 상호간의 폭력 대신 이미 무죄한 자가 대신 받은 폭력을 생각하는 것이 부조리 속에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건은 그에게 역사적인 증거였어. 그래서 그는 인간 발달의 네 단계(심미-윤리-종교)에서 마지막 단계인 종교를 종교A와 종교 B로 나눴지. | 21.06.02 21:3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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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종교 A는 영원성에 몰두하거나 실존성에 몰두하는 상태를 말하는 거야. 둘 사이에 긴장감이 존재하고 결국 다른 한 쪽을 폐기하게 되지. 니체는 실존에 몰두해서 영원을 폐기했지. 도킨스와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도 그렇지. 그들은 주지화를 위해 영원을 폐기하지. 반면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몰두하여 인생을 포기하지. 둘 다 '인간의 종교'라는 것이야. 반면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 발전의 최고 단계인 종교 B는 이미 신이 역사 속에서 일으킨 사건을 통해 실존이 영원을 향하여 열리는 것이지. 부조리한 실존 속을 살아가지만, 영원성이 실존을 조율하면서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로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종교 B야. 어떻게 그런게 가능한가? 너는 "아무런 구실이나 고백 외에는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라는 카뮈의 말을 인용해. 하지만 카뮈는 그래서 모른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삶의 마지막을 기독교에 관련해 공부했지. (물론 끝까지 회심하지는 못했지. 더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반면 키에르케고르는 발견한거지. 기독교의 성육신이 인간의 절망을 폭로하는 신의 개입이었다는 것을. 이 사건은 오직 두 가지로 반응할 수 있어. "믿거나, 믿지 않는 것." 키에르케고르는 신이 이미 역사 속에 개입하여 인간의 폭력과 절망을 폭로하고 대체제를 주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어서 폭력을 폭로하고, 되살려 구원을 선언 하였다는 것이 그에게는 증거가 되었다는 거야. 그런데 그게 대체 어떻게 증거가 되는가. 우선 너는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누가 봐도 어둠 저 편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는게 맞다"고 했지. 똑같이 어둠 속에서 벌거벗은 처지에 패션쇼를 얘기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내가 위에서 별의 비유를 든 것을 기억해줬으면 해. 멀어서 아직도 빛이 도달하지 못한 별을 관측할 수 있는가는 인간에게 달린 게 아니라 팽창하는 우주 공간이라는 물리적 실재에 달려 있는 문제야. 그런데 내가 위에서 우주론적 논증을 하면서 창발적 우주의 존재가 우주보다 상위적 층위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고차원적인 것(초월적 영)을 암시한다고 말했던 걸 기억할거야. 만일 그 실재가 실재하고 또 그 실재가 우리와 접촉한다면 우리는 별이라는 실재가 관찰에 필요한 조건과 요소를 결정하는 것처럼, (미각으로는 별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그 초월적 영이 접촉에 필요한 모든 조건과 요소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해. 한 사람에게는 드러날 수도 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실재가 결정할 수 밖에는 없어. 키에르케고르는 그런 점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솔직히 얘기했다고 봐. 그는 공예배와 종교 행사에 참석하기를 거절했지. "너무나 신성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그는 경험한 사건을 설명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모든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안겨 줌으로서 '이성의 여백'으로서의 신 실존을 인생으로 주장했지. 대신 그는 현상을 묘사할 수 밖에 없었어. 나는 지금 개인적 체험을 쉽사리 동의해달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것이 반드시 있다고 강변하려는 것도 아니야. 다만 나는 여기서 두 가지를 제시하는 바야. | 21.06.02 21:4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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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성육신이라는 사건은 믿거나 믿지 않거나의 오직 두 가지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며, 키에르케고르는 그것을 도약의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였다. 둘째로 초월성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실재하는 자신의 원리대로만 자신을 나타낼 것이다. (사회학에 물리학 관측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볼 수 없다고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3. 우선 "신이 기도에 응답한다."라는 개념은 청동기 문서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걸 짚어야겠네. 이전에도 말했듯이 스윈번과 같은 지적 최전선에 서 있는 석좌 교수들이 신의 시공간 밖에서의 행위에 대해 얘기한 바가 있지. 철학적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곧 실재를 증명하는 바는 아니지만, 불가능을 반박할 수는 있어. 칼빈 같은 신학자들은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할지에 대해서 신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했지. 성경도 그렇게 쓰여 있지. 다만 그래도 기도하라고 쓰여 있어. 이 경우에 기도란 필요를 요청하는 것을 넘어 신존재의 망각을 억제하기 위한 도구이자 신의 실재와 접촉하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봐. 위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별을 미각으로 알 수 없는 것처럼, 실재는 실재를 경험할 방법을 결정짓지. 신이 기도라는 방식을 주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은 이러한 논리 하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오히려 이건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마음의 근원이 물리적 우주 바깥에 있다면, 마음을 가진 우리가 초월적 세계와 접촉하기 위해 마음을 사용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지? 도리어 신이 물질 우주보다도 더 높은 층위에 존재한다면 왜 그보다 낮은 층위인 우주에 존재하는 마음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가정해야만 할 필요도 없지. 우리가 느끼는 사랑, 비애, 기쁨, 고통, 괴로움, 한탄, 좌절감, 애통, 그 외에 다양한 모든 종류의 복합적이고 고도화된 감정이 신에게는 왜 없는게 디폴트로 여겨져야 할 필요도 없지. 우주의 합리성이 신에게서 기원한다면, 감정 또한 유비적으로 추론할 수 있겠지. 따라서 우리가 겪고 살아가는 우주에 이런 감정이 있다면 더 높은 층위의 신에게는 더욱 더 거대하고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한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리고 기도에 대해 얘기할 때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아직 관측되지 않았다."라고 말하지만, 글쎄. (1) 가톨릭의 성자 관련 검증은 꽤나 엄격하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있어야만 받아들여지지. 이런 일들은 있었어. 다만 네가 증거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 (2) 우주의 합리성은 곧 기적이다. 라는 부분도 있다는게 내 주장이야. 4. 또한 "신은 우주의 법칙이다." "신은 에너지다." "신은 모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종교지. 범신론이니 범재신론이니 토테미즘이니 종교는 다양해. 우리가 지금 이 주제를 놓고 얘기하는 동안 기독교에 대해 주로 포인트가 잡혔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이 논쟁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신무신론의 주장이 심각하게 무례하기 때문이야. 이 무례함은 계몽주의가 다시 한 번 기독교인을 희생양 삼으려는 행동이고, 기독교가 사라지면 다음에는 또 다른 희생양을 찾는 연쇄가 이어질 거야. 종교권력이 옛날처럼 강해진다면 이단 심판을 다시 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어지간해서 인간은 변하지 않을테니까. 우리 문명은 상호 견제가 필요하다는 걸 배웠지. 그리고 내 주장은 신무신론도 내적 모순이 존재하는 종교적 세계관이라는 것과, 우리는 모두 자제해야 한다는 거야. | 21.06.02 21:4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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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과학과 종교가 배치된다고 주장하고 그것 외의 모든 생각을 거부하는 것은 네 가지 패러다임 중 하나에 불과해. 그것도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단순하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 혹시 그 주장이 현실을 단순화하고 복합적으로 사고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쉽게 지지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는지. 특히나 내가 여러 차례 층위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층위란 것은 인간을 둘러싼 실재가 다층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잖아. 일례로 WHO는 사람의 건강을 사회적, 정신적, 신체적, 영적의 네 가지로 분류했어. 사회적 관계의 안녕, 내적 정신 세계의 안녕, 신체적인 안녕과 함께 그가 따르는 영적인 세계의 안녕이지. 내가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니체가 다시 불러들인 폭력적인 디오니소스 주의의 종교적 사상이 나치의 기틀을 돌렸고, 그 일을 청산했던 기독교는 전후 독일의 사과의 배후가 되었지. 이건 과학이 할 일이 아니야. 층위가 다른 일이야. 과학과 기술은 현상을 통제 및 재현하는 층위이고 종교나 철학, 사상은 어떤 것을 다뤄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층위에서 작동해. 따라서 오히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대적해야만 한다"는 근거 없는 당위를 주장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 아니라 근본주의적 과학주의(철학)이야. 이런 입장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용서와 사랑, 정의의 배후가 되는 문화의 배후지가 심각하게 훼손이 될 거야. 더 늦기전에 양측이 물러서서 합리적이고 복합적인 세계관을 발견하기 위해 전통 안에서 대화가 이뤄져야 해. 최근의 세계는 종교를 통해서도 극도로 양극화 되고 있으니, 다음에는 이 문제가 정말 크게 대두될거야. CS루이스는 인간 폐지에서 근대가 마술을 추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어. 오히려 근대 기술 발전 16-17세기에 마술이 부흥했거든. 이것은 현실을 인간에 욕망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기술과 마술이 함께 작동했기 때문이야. 현실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수습해야 할 종교가 약해졌을 때 도리어 더 심각한 주술적 반지성이 횡행하게 되었던 것이지. 설마 종교가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살 수 있다고 믿느니, 차라리 수돗물에 안정제와 각성제를 타는 미래가 더 합리적일거라고 봐. 너도 그건 동의하는 것 같네. 물론 설사 그렇다 해도 니체식 초인들로 가득 찬 세상은 더 합리적으로 약자를 말살하는 세계가 되겠지. 과학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말할 수단이 없어. 그리고 과학 발전이 인격신을 틈새로 몰아 넣는다는 주장도 사실 달라. 내 지금까지의 논지에 따르면, 인격신의 존재는 철학적 과학적 세계관과 대척점에 서 있지 않아. 도리어 인격신의 존재를 믿는 학자들은 합리적 우주에 대한 든든한 기반을 바탕으로 자신의 학문 활동을 해 나갈 수 있어. 하지만 너는 이 주제에 대해 효과적으로 비판하지 못했어. 그저 그런 과학자나 철학자가 있지만 적다는 수준으로만 말할 뿐이었지. 그리고 도마를 얘기하는 것이 내게는 의미심장하게 들리는군. 도마는 결국 부활을 본 후에 순교했거든. 그냥 편하게 도망가서 살아도 되었을텐데 말야. 그의 죽음 자체가 의심자가 예수 부활을 겪었다는 가장 강력한 증명이 아닌가? 도리어 정초주의적 합리주의가 붕괴한 현대 세계에서는 매킨타이어의 주장대로 전통들끼리의 전유적 대화(서로의 가치관을 자신의 전통 안에서 재해석하여 서로를 이해하며 현명하게 토의하는)가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해. | 21.06.02 21:4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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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하지만 전투적 무신론은 마치 이과가 문과를 조롱하는 것 같은 뉘앙스야. 내가 여태까지 여러 번 얘기했듯이, 전투적 무신론도 증거에 "반해" 있는 상황이야. 이건 위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예시를 들어 말한 것처럼, 인간이라는 복합적 존재 안에서 더 높은 단계를 생각해야 할 문제지. 어느 한쪽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템플턴 재단은 종교 분야에서 인간을 위해 기여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조직이야. 인격신의 존재가 과학 발전에 해가 된다는 그릇된 주장을 반박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봐. 그리고 그런 사람만 상을 받는 것은 아니야.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처럼 아파르트 헤이트에 맞서 싸운 등, 아직도 세계에 만연한 인종차별이나 범죄와 싸우는 종교인들도 그 상을 받아. 5. 자, 그리고 죽은 후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되겠군. 사실 이게 제일 걸림돌이겠지. 음, 우선 이렇게 보자. 너는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겠지. 왜냐하면 사적 제재보다는 국가의 제재가 합리적일테니까. 마찬가지로 신이 실재하고, 마음과 실재조차도 그에게서 말미 암은 것이며, 신이 우주보다도 합리적이고 우주보다도 더 위대한 감정을 소유하고 있다면. 심판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거야. 그게 정당한거야. 그 주장을 포기하는 것은 신 존재를 격하시키는 일이 되는 것이지. 발칸 반도에서 소위 정치적 "심판"이라며 대학살을 경험했던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는 그래서 이 "심판"을 신에게 돌리는 것만이 합당하다고 말해. 그는 "복수하지 않는 신"을 믿는 것 자체가 폭력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해. 신이 정의를 세우지 않는다면 누가 최후의 정의를 담보하는가? 아 정말로 나는 확신하거니와 신심자들은 복수의 기쁨을 얻을 거야. 불합리하게 살해당하고, 사악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고, 잔인하고 억울한 일을 겪었어도 아무도 그들을 위해 싸워주지 않았던, 입 벌려 말할 힘도, 말할 지능도 없었던 모든 버림 받은 자들은 신의 심판을 보며 기뻐할거야. 죄와 벌의 소냐와 같은 사람들과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럴거야. 그리고 솔직히 말해 너나 나 같은 사람들은 기뻐하는 사람 보다는 혼이 날까 두려워하는 쪽에 서는 게 맞지 않겠어? 너는 분명 이 주장에 대하여 "쓸모 있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사실과 상관 없이 믿는 얘기를 해봤자 소용 없다"고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신이 실재한다면, 그 신은 우주보다 전지전능하고, 우주보다도 크고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테지. 그 신은 오직 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수준에서 정당한 뜻을 이루게 될 거야. 6. 종교적 욕망은 세속적 욕망의 일종이지만 진정한 종교적 욕망은 그 기원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위에서 얘기했어. 그리고 마찬가지로 문명화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종교가 그 역할을 했다는 것도 위에 적었지. 그리고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오해를 받았다는 건 전제가 너무 많이 필요해. 무엇보다 위에서 쓴 대로 다른 사도는 물론 도마까지도 굳이 타지에서 순교할 필요가 없지. 그냥 물고기 잡고 살면 배 주인, 중산층으로 살 텐데 말야. 종교와 지능의 관계에 대해서는 인과관계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능이 높을 수록 제도화된 종교 대신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질 가능성"이 높을 수는 있겠지. 대신 한 번 확신하면 진지하게 추구하겠지. 이어령씨 일화처럼 말이야. 그리고 네 말대로 진정한 종교를 분별해서 진짜 탁월한 종교와 종교인을 알아보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봐. | 21.06.02 21:5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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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면서, 성도들이 민주주의, 정의, 윤리, 그리고 과학적 사유를 훈련하는 일에 힘을 쏟게끔 도와주는 종교인이 말이야. 그런 점에서 둘은 한 사회의 각 층위를 담당하는 일을 함께 해야 하지, 누가 누구를 박멸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다음번 답변을 써야 하면 원노트에는 안 쓸게. 이게 댓글창에 편집이 영 읽기 불편하게 나오네... | 21.06.02 21:5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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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람들이 걱정한다고? 나는 아주 드물게 즐거운데. 우울증 환우 처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천국에 가게 된다면 첫 백 년 동안은 이것만 하고 싶을" 정도야. 그런데도 네 주위 사람들의 인식이 그런 건, 이런 주제로 얘기하는 건 거북한 일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고 이 편견을 입증하는 사례는 찾아보고 싶다면 원하는 만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여기 예외가 이렇게 있네. 아주 드물게 즐거워. 정말이야. 복음서를 비롯해 신약에는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은데 (당장 떠오르는 건, 어디서는 평안을 주러 왔다면서 또 다른 곳에서는 검을 주러 왔다고 하는 부분.) 이건 유대교에서 기독교를 공격하고 싶을 때마다 아주 유용하게 휘둘러 대고 있지. 많은 신학자들이 지금도 노력하고 있겠지만 해결이 안 되고 있어. 이 문제를 보기 좋게 해결해서 이교도들의 입을 닥치게 만드는 신학자는 성자로 시성될 수도 있을 걸. 이렇게 된 이유는, 신약의 기반이 된 문서들은 난잡한 도시전설들이기 때문이야. 초기 기독교에서는 교회 공동체라면 누구든지 복음서를 쓸 수 있었는데, 알다시피 이 교회 공동체라는 걸 세우는 데 무슨 조건이나 기준 같은 건 전혀 없었고, 로마 제국의 탄압을 피해 숨어 지내는 비밀스러운 사람들이었기에 대충 소문만 알고 지내다가 신약에 몇 편 실려 있는 그런 밀서나 종종 주고받는 사이였거든. 따라서 예수에 대해 구전되는 전설들을 바탕으로 제멋대로 만든, 완성도가 제멋대로인 수십 종의 복음서가 시중에 난무하게 되었지. 동로마 제국에서도 이런 문제를 모를 리 없어서 교통정리를 했지만 비져나온 부분을 완전히 다듬지는 못했고. '몬티 파이선과 브라이언의 삶' 에서도 언급되듯, 예수가 살던 시대의 유대 땅에서는 로마의 지배 및 황제 숭배 강요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고, 종교적 열정 아래 세례 요한을 비롯해 선지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아주 많았으며, '열심당'이라 불리는 강경 민족주의 독립운동권 파벌까지 있을 정도였어. 예수의 12제자 중 시몬은 열심당원이었으며, 예수 양 옆에 같이 매달렸다는 노상강도 두 명 역시 실제로는 그냥 강도가 아니라 열심당원이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정규군이 무장반군 세력을 강도단으로 취급하는 사례는 아주 많고, 예수가 사상범 취급을 받았다면 다른 사상범과 같이 매달리는 게 자연스럽기도 하고.) 그러니 도시전설이 꽃피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는 거지. 정사에서는 "유대 지역에서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배계층과 척을 지는 사람에 빌라도 총독에게 잡혀 십자가에 매달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그를 따르는 자들이 아주 많았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당대의 수많은 자칭 선지자들 중에서 가히 으뜸가는 사람이었다는 거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그런 배경이 있으니까 신의 아들이라느니, 맹물을 포도주로 바꾸며 빵과 물고기 몇 개로 수천을 먹였다느니, 말로 악마를 쫓아내거나 무화과나무를 말려 죽인다느니,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스스로도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서 승천했다느니 하는 온갖 뜬소문과 허풍들이 그를 자연스럽게 따라다녔을 거야. 여기 대해서는 "누가 그러는데 그랬다더라"는 증언과 전설들밖에 없으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확인하기 힘들겠지만. 그러니 "오해를 받았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선택지라는 거지. | 21.06.03 17:2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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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도킨스가 종교 철학을 대하는 '불경한' 자세가 찬반과 별개로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했던 건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지. 우리 모두가 의무교육과정에서 접해본 바 있는 것이거든;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불교를 대했던 바로 그 자세. 유학자들은 삼법인이니 사성제니 하는 불교 교리에 정말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학자들은 역사를 거울로 삼아 볼 때 이전 고려에서 승려들이 대지주로서 백성을 착취하고 사치스러운 종교 행사로서 나라를 좀먹었다는 걸 보았으며, 따라서 불교를 사회의 변두리로 몰아내어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지. 이 15세기 전투적 무신론자들 역시 자신들의 괴력난신 없는 세계관에서 (도교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리'와 '기'라는 개념을 가지고 자연의 질서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들어 보면 신학자들의 이론만큼이나 그럴싸하거든. 조선이 그렇게 굴욕적으로 무릎꿇지 않았더라면 더 세련되게 발전할 수 있었을 거고, 오늘날까지 이걸 믿었을 사람들도 많았을 거야. 그러니까 우주의 형이상학적 질서를 표현하려는 노력에 있어 신이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선택사항이라는 거지. '서로 상반되는 두 기운이 있는데 그것의 조화로서 이루어진다' '이 세상은 거북이 등 위에 있고 그 거북이는 코끼리 등 위에 있다' 같은 반례들이 있으니까. 너는 이 우주의 정교함이 신을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건 시계공 논증의 변주잖아. "내가 보기에 이것은 너무 정교하고 위대하다. 따라서 그보다 더 위대한, 초월적 신이 이것을 만들었다고 믿기로 했다. 이것은 참으로 내게 만족감을 준다." 한편, 다윈은 "애벌레를 마비시켜 놓고 거기다 알을 낳아서 산 채로 파먹게 만드는, 저렇게 끔찍한 습성을 가진 벌을 정말로 우리 기독교의 신이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 나 역시도 그 쪽이야. 해 아래에서 벌어지는 악행들을 보고 있자면, 이 세계를 만들고 계획한 신이 있다면 그건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러브크래프트의 신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거든. 물론 인간을 노예로 부리기 위해 창조했다는 수메르 신 같은 존재를 상정한다면 이런, 악의 문제를 단칼에 끊어낼 수 있겠지. 그러나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생각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처럼 현대인들이 보시기에 안 좋으니까 안 되지. 야훼는 바글거리는 인간의 악을 참아줄 수 없어서 대홍수를 일으켰다지만, 원조격인 엔릴은 그냥 바글거리는 인간이 눈에 거슬려서 대홍수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후자도 전자만큼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야. 하지만 그 쪽은 사실이 아니라고 여겨져서가 아니라 사실이라 믿기 싫으니까 거부되었고 결국 인기가 너무 없어져서 사장되었지. | 21.06.03 17:2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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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특정 신을 전제하는 형이상학적 우주론이란 지구상 종교의 수만큼 존재할 수 있으며, 원한다면 누구나 얼마든지 더 찍어내서 늘릴 수도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것들은 내가 저번에 말한 것처럼 "어느 종교든 자기 종교야말로 신이 만든 것이라 주장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할 기준 같은 건 신앙 외에는 없다" 서로 다른 종교들을 으깨고 반죽해서 한 덩어리로 뭉쳐놓으면 안 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건 어느 종교인도 좋아하지 않았지. 개신교도 음악가 조지 윈스턴은 내한공연 인터뷰 중 자신의 음악을 '뉴에이지'라고 부른 기자에게, 당장 정정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인터뷰를 중단하겠다고 대답했다.(앰비언트, '환경음악'Ambient music이라는 더 정확하고 아무도 안 싫어하는 표현이 있으니 이왕이면 그걸 쓰도록 하자) 그러니까 내가 주장한 건 "실재는 우리가 믿는 대로 결정된다"는 게 아니라, "어떤 신이 실재하는 진리고 어떤 신이 가증한 우상인지는 우리가 믿는 대로, 믿고 싶은 대로 결정하는 것이다"는 거야. (내가 오해하기 쉽게 썼나?) 이러한 상황을 조롱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이 바로 그 유명한 '비행 스파게티 괴물'인데, 과연 현대인의 취향에 맞는 교리를 가지고 있으며 러셀의 찻주전자만큼이나 반증 불가능하지만 자신을 믿든 안 믿든 신경 안 쓴다고 한다. 이 신에 대해서 기성 종교인들이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많이 했다는 얘기는 들어 봤지만, 진지한 반론은 내가 아는 한 들어보지 못했다. 요약하면, 1) 형이하학적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로서 형이상학적 체계가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앞서 말했듯 괴력난신을 안 믿는다는 유학자들마저도 이걸 믿을 필요를 느꼈으니까)해야겠지만, 나는 거기에(유학자들이 보여 주었듯)신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기론이나 자연 선택처럼 신과 별로 관계 없는 이론도 보기에는 참 예쁠 수 있다. 2) 우주가 합리적 신존재에 근거한다는 우주론적 논증이란 결국 생물학계에서 퇴출되었던 시계공 논증의 물리학적 변주. 이게 사실이라 해도, 자신이 믿는 특정 종교를 집어 전제하는 건 어디까지나 자기위안을 위한 가정. 비행 스파게티 괴물과 러셀의 찻주전자를 포함한 인류 만신전의 모든 신들이 서로 자신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이 경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할 기준 같은 건 신앙 외에는 없다. 우리가 내세에서 예수를 만나 천국에 가게 될 가능성과, 몰렉을 만나게 되었는데 놈이 인간 아기를 산제물로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버릴 가능성이 다르다고 믿을 근거는 신앙의 도약 외에 없다는 것이다. | 21.06.03 17:2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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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학 발전이 인격신을 틈새로 몰아 넣고 있다는 건 역사적 사실의 영역이야. 예로 옛날 사람들은 천재지변이 신의 뜻이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또한 '레위기'에서는 제사장이 옷에 핀 곰팡이를 문둥병의 일종이라고 신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몸소 불태우는데, 역시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또한 위에서 썼던 것처럼, 한때 생물학계에서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시계공 논증도 자연 선택 이론의 등장으로 퇴출되어서 거시/미시물리학으로 쫓겨가게 되고 말았고. 물리학자들의 노력이 미래에 빛을 보아, 자연 선택에 비견될 만한 획기적인 이론이 등장해 오늘날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만든다면 우주론적 논증은 또 다시 더 구석진 곳으로 밀려나겠지만 그 전까지는 존경을 받게 되겠지. 이 역시 틈새에 의존하는 이론이라는 거야.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이웃 도시들은 신의 분노를 사 멸망한 것으로 아주 유명한데, 훗날 고고학자들이 요르단 강 동쪽에서 소돔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를 발굴해 조사한 결과, 그 지역에 번성한 청동기 문명이 있었는데 운석이 폭발함으로서 멸망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었거든. 그러니 비역쟁이들에게 내리는 신의 거룩한 분노였던 것이 일개 자연재해로 격하되고 만 거지. 물론 신이 죄악에 분노해서 소돔에 메테오를 떨궈 심판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만성절 축일에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 때는 도심의 대성당과 거기서 기도하던 신자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평소 신자들에게 비난받던 변두리의 홍등가만 혼자 멀쩡했었잖아. 물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것도 꾸역꾸역 삼켜보겠다고 '신정론' 이라는 변호문을 만들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걸 보고 이 따위 비겁한 변명을 믿느니 차라리 엔릴이나 크툴루를 믿고 말지, 하는 감상이 들더라. 수메르 신화에서는 미숙아는 신이 술에 취해 멋대로 내린 뜻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져 있다고 하는데, 수메르 사람들이 이렇게 믿기로 한 것은 청동기 시대 기술로는 미숙아를 살려낼 능력이 없으므로 그렇게 믿는 것이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현대 기술은 미숙아를 살려낼 수 있단 말이지. 그러니 저들 기준에서 미숙아를 살려내는 건 신의 뜻을 어기는 일이 되는 셈이야. 과학과 신앙이 충돌하는 부분이란 대체로 현대인의 상식과 고대인의 상식이 충돌하는 부분이라는 거지. | 21.06.03 17:2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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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렇게 청동기 시대에는 무지의 장막 뒤 신의 영역이었던 것을 과학이 점차 밝혀나간 끝에 오늘날에 신이란 이렇게 인간 인지능력의 틈새. 형이상학 세계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게 된 거지. 그리고 우리는 이 흐름을 이 쯤에서 멈추고 평화 조약을 체결해 저 세상에서라도 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느냐, 아니면 계속 진군해 신을 완전히 몰아내느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거야. 전투적 무신론자들은 이 역사적 흐름에서 신을 완전히 몰아내는 투쟁을 이끄는 것이 진보라 믿는 사람들이고, 이는 당시 기준에서 가장 보수적인 자세를 깔고 검열을 일삼는 종교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긴 했어. 러셀 본인도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뉴욕 대학 교수 심사에서 퇴출당했으니 원한이 생길 만 하고. "우리는 황금시대로 가는 문턱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이 문을 지키고 있는 드래곤부터 잡아 죽여야 하는데 그 드래곤dragon이 바로 종교religion인 것이다." 뭐, 그것도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이끌었던 '금주 동맹' -이게 유행하던 시기에는 하류층들이 저질 술에 중독되어, 가산을 탕진하고 건강을 망치는 일이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만큼이나 거창하고 훌륭한 이상이겠지만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게 저번에도 말했던 내 입장이야. 당장 국가무신론의 예로 들었던 중국에서도 멀쩡한 종교인 대신 -대만 게임 '환원 -Devotion-'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같은- 악질 사교도 및 협잡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고. 근대가 마술을 추방했다고 주장하는 건 헛소리라는 부분도 동의하는 바야. 인간 인지능력의 틈새에는 미신적 사고가 뿌리깊게 박혀 있으며, 이는 생활수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아지지 않아 왔거든. 당장 내가 제시한 '스타 워즈'에서도 우주 마법을 부리는 우주 전사-승려 집단 사이의 종교전쟁("I find your lack of faith, disturbing.")을 다루고 있잖아. 그래서 우주시대 사람들이 그걸 예언서로서 숭배할지도 모른다고 반농담으로 제시했던 것이지. | 21.06.03 17:2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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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도란 특정 개인을 위해서 우주의 법칙을 비틀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인데, 이런 건 필연적으로 수없이 상충되는 경우가 많지. 곰에게 잡힌 사람은 난관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사람을 잡은 곰은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이걸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 예수든 몰렉이든 비행 스파게티 괴물이든 누가 되었든 그런 걸 일일히 다 듣고 일일히 다 들어줄 것 같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자기 위안으로서는 큰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도 짜라투스트라가 자기 때문에 죽게 된 광대에게 "내 명예를 걸고 악마는 없다."고 말하는 부분을 기억해. 너는 끔찍한 폭력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나는 이게 끔찍한 정직함이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보고 듣고 아는 한 악마는 없으니,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함으로서 거짓 위안을 주지 못하겠다. 다만 너를 나무 둥치에 잘 매장해 주고 들짐승들이 뜯어먹지 못하게는 해 줄 수 있다. 나는 너를 위해 내 명예를 걸고 할 수 있는 일들은 기꺼이 해 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하겠다." 저 이야기를 사회나 국가에 적용한다고 생각하면 소름끼치는 일이 분명하다만, 니체가 의도한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 니체는 자기 계승자들과 달리 국가주의자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말한 초인이니 투쟁이니 영원회귀니 하는 것들은 개인 사이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었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시종일관 개인과 개인이 만나서 나누는 대화 및 독백으로 되어 있고, 조직, 국가관이나 사회상에 대한 언급은 없어. 뭐, 딱 하나 나오기는 하지. 짜라투스트라가 도시 앞에 도착하자마자 어느 남자가 그를 맞아 도시에 대한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데, 짜라투스트라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지나쳐 가야 한다"며 남자와 도시를 그냥 지나쳐 가 버린다. 스승은 군중을 멸시하고 지나쳐 갔지만, 제자라고 해서 스승의 뜻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지. '기독교의 대안이랍시고 수틀리면 약자의 간청을 거부하는 무자비함과 디오니소스풍 반지성주의를 유행시킴으로서 재액의 씨앗을 뿌렸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사실이긴 해.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를 간략하게 복습할 기회가 온 건 참 좋네. 고등학교 시절 읽었을 때는 "증거 없이 믿음으로 도약한다니 이건 투신자1살 아닌가" 하는 느낌밖에 안 들었는데, 나이를 먹은 지금 다시 정독해 보면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르지. '이방인'에 나오는 신부와 '페스트'에 나오는 신부를 비교해 봐도, 인식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아주 약간은 누그러진 듯한 인상이 보이더라고. 의심하는 도마는 증거에 따라 믿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언급한 부분이야. 이 의심자는 뭐가 되었든 손을 넣어서 직접 확인하려 했지만, 한 번 확인한 다음에는 순교까지 할 정도로 굳게 믿었다고 하지. 예수와 다른 사도들은 이런 태도를 좋지 않게 여겼지만, 실상은 이것이야말로 정직한 태도라는 뜻에서 한 말이야. 하지만 아직은 손을 넣어 볼만한 상처자국이 안 보인다는 말이지-아직은. | 21.06.03 17:2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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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가 오해를 받았다는 건 전제가 많이 필요하지만, 다른 가설들; 미치광이, 사기꾼,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 역시 전제가 많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지. 여기서 오컴의 면도날이나 흄의 기적 검증법을 적용한다면 신의 아들 쪽이 제일 먼저 잘려나가게 될 거고. 앞에서 적어 놓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내 가설을 요약해 보면 "예수는 인상적인 실존 인물으로서 어두운 로마 강점기의 수많은 자칭 선지자들 중에서 가히 으뜸가는 사람이었는데 로마제국에 빌붙은 지배층과 척을 졌고, 지배층의 반발을 대중들이 묵인 내지 동조한 결과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것을 목도한 대중들은 스스로에게 죄의식(죄의식을 강조하는 기독교 교리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리라)을 가지고 "내가 그리스도다" 라 외치며 그 뒤를 따르게 되었고, 그에 대한 도시전설이 꽤나 투명하지 못한 과정을 거쳐 정리되어 종교를 이루었다"는 건데, 적어놓고 보니 최근 대중들이 조국 전 장관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도 않네. 내 입장은 조직화된 종교란 필요악 내지 차악에 가깝다는 쪽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기독교 교리란 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유해한 것은 또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유럽에서는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이 서로 처절하게 싸웠던 역사가 있어서 극단적 종교/세속주의자들이 자라나기 쉽지만, 아시아에서는 종교권력이 언제나 세속권력에 복속되어 있었지. 도교의 주문 '급급여율령'은 '율령과 같이 신속처리 바람'이라는 의미로서, 전한 공문서 양식이었다. 귀신도 공문서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지. 그러니 여기에서는 자칭 종교인이라는 사람들마저 (소위 '기복신앙'이라 불리는) 세속의 삶에 치중하는 자세가 주류를 이루고, 심지어 신의 권위에 앞서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같은 소리를 하는 인간 지도자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경우까지 나오는 거 아냐. '선지자'를 자칭하는 짐 존스나 아인 랜드, 조셉 스미스 같은 서양의 컬트 교주와 달리, 동양의 경우에는 전광훈이나 이만희, 아사하라 쇼코처럼 '현인신'을 자칭하는 것도 그 쪽이 잘 팔리기 때문일 거고. 그러니 서양인과 동양인이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확실한 온도차가 관측되며 그게 또 당연한 일이지. 그러니, 여기 동양에서는 우리가 여태 언급했던 서양 학자들과는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며 이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을 거야. 사족: 고지능자가 종교를 안 좋아한다는 부분에 있어서 *경험자*로서 내 의견은 대충 이래. "선천적으로 지적 호기심을 갖고 태어나 독자적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권위를 받아들이기 전에 스스로 가치판단을 해서 옳다고 생각하면 충실히 따르고 그르다고 생각하면 충실히 거부한다. 그러므로, 뭐가 되었든 스스로 낸 결론을 따르고 남들이 '신성모독'이니 '인민의 아편'이니 하며 근거 없이 지껄여대는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 21.06.03 17:3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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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0. 다 걱정하는 건 아냐. 내 친구는 내 글을 되게 좋아하면서 이런 글을 쓰는 걸 장려해 주더군. 자기에게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야. 글이 길어지니 아예 정리해서 출판해보면 어떻겠냐고 할 정도로 말이야. 나는 처음에 편안하게 대답하려다가, 결국 이런 주제가 내게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고, 또 이렇게 ‘예의 바른 대화’의 기회 아주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간을 들이다보니 답변이 늦었네. 상당히 길어졌지만 도움이 되길 바라.(4만2천자 정도야) 특히 내게는 네 첫 문단이 인상적이야. “내가 천국에 가게 된다면 첫 백 년 동안은 이것만 하고 싶을 정도다.”라는 말은 내가 전투적 무신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에게는 처음 듣는 얘기였어. 그것은 네가 이성적이고 열린 사회에 대한 폭 넓은 시민적 교양이 있다는 것과 함께 우리 대화에 진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군. 내가 이 대화의 시작점을 삼은 것은 전통적으로는 “자연신학”, 현대적으로는 “과학신학”이라고 불리는 우주와 신의 유비적 관계를 근거로 철학이나 과학적 사고관을 응용하여 이야기하는 것인데, 네가 겪고 느끼는 대로 이러한 입장은 정통 종교계의 보수적 입장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으로 취급하지. (그렇지 않다면 너와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대화를 더 많이 경험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나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해. 성경도 그것을 지지하거든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로마서 1:19) 그런 점에서 너의 반응은 내게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 21.06.07 12:1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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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제 성경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군. “복음서에는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라는 이야기부터 일단 해볼까. 나는 이 주제를 이야기하기를 즐거워해. 왜냐하면 이주제는 “진리”를 인식하는 부분에 있어 “역설”의 존재가 필요함을 보여주기 때문이야. 알다시피 이 역설이란 두 종류의 모순이 결합하여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드러내는 현상이야. “바보 의사” “슈뢰딩거의 고양이” “순결한 창녀(쏘냐)”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 당신은 푸줏간에 달린 커다란 살점이다.”(김춘수, 나의 하나님. 십자가의 달린 전능자를 비유함)까지. 현대인들은 너무나 쉽게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반면, 정보를 ‘복잡화하여 다루는’ 수준의 사고를 하기가 어렵지.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낯설게 바라보기, 해석적으로 전유하기, 중층적으로 생각하기 등의 다양한 기법을 일상에서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글을 쓸 여유가 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서로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축복이야. 네 의문을 보고 나도 생각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있지. 그런 점에서 이 주제를 얘기하게 된 게 즐겁군. 바로 ‘중층사고’야. 이 중층사고는 내가 현대 사회의 해독제로서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야. 너도 내가 단순히 신학적 이론에 따르면 이러저러한 정당화가 가능하다라는 답을 쓰겠거니 하는 대답을 기대했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네가 “백 년간 이런 대화를 해도 좋다”고 하니, 나는 이 대화에서 최선을 다해 기반을 쌓으면서 앞으로 가볼게. 중층사고(中層思考)란 정신과 의사 겸 철학자인 M 스캇팩이 자신의 책에서 제시한 것인데, “인간의 정신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순들을 보다 높은 관점에서 복합적으로 통합하여 바르게 사고하는 능력”을 의미해. 철학적으로는 변증법적 사고, 정신분석학적으로는 “통찰 속 ‘아하!’ 경험”을 의미하지. 너도 잘 알겠지만, 정반합이란 밝혀진 층위를 대표하는 정(테제)과 아직 받아들여지지 못한 층위를 대표하는 반(안티테제)의 갈등과 투쟁 끝에 더 많은 층위를 다루는 합(신테제)으로 “초월”하는 것이야. 또한 내가 이제까지 일관적으로 제시했듯이 ‘초월’이란 하위 층위의 능력을 보유한 체 더 나은 관점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 것을 말해. 민주주의가 신분주의를 초월한 것처럼 말이야. 내가 이 부연설명을 한 이유는 여기서 ‘갈등과 투쟁’이라는 개념을 짚어야만 했기 때문이야. 이 테제와 안티테제의 갈등이 인간 정신 내면에서는 억압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지. 인간이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층위의 것이 한 인간에게 테제라면, 그가 제대로 해석해낼 수 없는 층위의 것들은 안티테제지. 인간 정신은 그 위험한 생각을 무의식 하에 억압해 두는 것으로 자아를 보존해. 그래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통찰의 ‘아하!’경험은 인간이 무의식하에서 억압하던 ‘생각’들이 축적된 학습과 경험을 통한 재해석을 통해 자아에 다시 받아들여지면서, 정신의 구조가 재조직화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거야. 우리는 누구나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를 갈아 끼우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중이라는 것이지. 정신이 재조직화 된 이후에는 비로소 억압했던 것들을 자아가 사고로써 다룰 수 있게 되지. 그러한 정신은 한 단계 성장한 정신이 된 거야. 새 바퀴는 더 잘 달리겠지. 그 사람은 이전 더 높은 층위로 초월했고, 더 복잡한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지. 그리고 옛날에 내가 왜 그걸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 | 21.06.07 12:1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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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그래서 사람들은 비합리적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해. 인간 보편의 정신 구조가 그런 걸 어떻게 하겠어. 모든 안티테제가 억압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을 테니까. 스캇팩은 이런 예시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있는데, 그 부모는 자식이 좋아하는 걸 어떠한 거절 없이 주기만 하는 부모야. “남에게 주는 게 사랑”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너도 예상하다시피 이런 생각은 문제가 있지. 당연히 자녀는 욕구를 조절하지 못해 엇나가게 되었어. 그 부모는 자신의 정신 안에서 “무관심과 처벌도 사랑일 수 있다.”는 안티테제적 관점을 억압한 까닭에 자녀 교육에서의 중층사고를 실패한 것이지. 멀리 돌아왔군. 여기서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정신 구조가 이처럼 억압을 통하여 모순을 억제해야만 하는 구조라면, “신에 대한 생각을 억압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성경의 모순을 올바르게 지적할 수 없는 근원적 한계에 빠져 있다는 거야. 이 부분에 대해서 아래에 간략하게 언급하겠지만. (쓰다보니 장대해졌군.) 그런 점에서 너는 성경에 관련한 반대되는 주장들을 공정하게 다루지 못했어.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러한 근원적 한계는 중층사고로서 ‘돌파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높은 층위에서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시키고, 더 복잡한 것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이야.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대화는 억압된 것. 신을 재해석하는 과정이지. 나는 지금 네가 느끼는 즐거움은 순수한 지적 작업의 즐거움 뿐 아니라, 네 안에 억압되어 있던 신을 향한 지적, 감정적 추동이 재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네 지능이 네 지능을 구성하는 정신의 구조와 조직이 더 능률적이 되기를 원하여 네가 가진 안티테제를 ‘해소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봐. 그래서 너는 나와 토론하면서도 이런 대화를 ‘즐기고’ 또 ‘형이상학적 세계를 인정하는 것을 새로 발견하고’, ‘경험자로서 권위를 받아들이기 전에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이’, ‘‘신성 모독’과 ‘인민의 아편’ 모두를 거부한다.’’고 말했지. 그런 점을 보아 분명 네 안에는 신성함을 향한 추동이 있다. 조국 전 장관을 네가 언급한 것은 네가 내가 제시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검찰은 내부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그를 폭력적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무죄하다. 따라서 우리는 조국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이다’는 의도적으로 제외했고 밑에서 다시 정리할게.) 이처럼 희생양의 제의를 폭로하고 권력을 탈신성화하며 진리의 담지자를 힘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에 둔 것은 바로 기독교의 교리였다. 러셀이 하나님을 거부한 까닭에 희생양이 된 것은 교리로 보아서는 잘못된 일이었다. 그가 틀렸다고 지적하면서도 그를 사랑할 수 있어야 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지. 이 교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다.” 또한 우리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것은 필요했던 진리였다. 여러 번 말했듯이 ‘보기에 아름답고 필요했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건 별개의 문제고 이제 남은 문제는 오직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일 뿐이야. 그리고 그것은 내면에서 억압된 부분을 해석해 나가면서 탐구해야 할 주제야. | 21.06.07 12:1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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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이제 너는 무신론 혹은 불가지론을 유지하면서도 슈바이처 박사처럼 “오, 예수는 신은 아니지만 십자가에 깔려 죽은 의인이다. 나도 그와 그 같은 사람들처럼 살겠노라”는 윤리적 확신을 가질 수도 있지. 기독교는 윤리적 층위에서 그 일을 계속 해 나갈 거야. 반면 한 단계 더 높은 층위에서 모순을 통합하여 초월적 영의 개념을 계속 제시할테지. 너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 그런 점에서 우리 대화는 “위험”한 작업이지. 내가 지금까지 주제넘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네 내면의 추동을 ‘감히 상상’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이 대화가 동시에 나에게도 동일한 위험과 추동. 즉 “신의 비존재의 가능성”을 인식시킨다는 점에서 오직 이 대화의 참여자인 나는 너에 대하여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고 봐. 보통의 경우 이러한 대화가 교인에게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는 이유는, 신앙에 내재하는 안티테제를 끌어 올리기 때문이야. 논쟁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합’이 나올 때까지 갈등은 중층사고를 불러 일으킬 거야. 그것은 고된 노동이지만, 동시에 베이컨식의 꿀벌이 되는 과정이겠지. 그리고 나는 이러한 고된 사유야말로 진정한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회 복지와 노동 시간 단축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래야 이런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야. 자, 너는 본문에서 예수가 검을 주러 왔다는 것을 아직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작업은 바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어. 어떤 부모는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어,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교육에서 실패했지. 반면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검”만 주겠지. 나가서 싸우고 이겨라. 패배하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 또한 실패할 테야. 하지만 성경은 “화평”과 “검” 모두를 준다. 이를테면 ‘검을 주러 왔다.’는 것은 맥락상 “혈육의 관계 안에서조차 예수보다 혈육을 더 사랑하는 것은 내게 합당하지 않다”는 가르침이었어. 그것은 “무조건 주는 사랑”보다 “지혜롭게 주는 사랑”이 더 높은 층위의 사랑인 것 같이, “예수를 통한 사랑”이 가장 높은 지고의 층위임을 성경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따라서 이 메시지는 “사랑하려면 최고선에서 사랑해야 한다. 그 최고선에 도달하기까지는 지난한 투쟁이 있을 것이다.”의 초청인 것이지. “억압” “무지” “교만” 그 외에 다양한 인간적 약점을 돌파하여, 진정한 최고선의 수준에서 “사랑하기” 위해서는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 검이란 바로 그것을 위한 상징이야. “검”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그러한 역설을 드러내는 긴장감이 서린 상징적 표현물이지. 하지만 사람은 늘 그럴 수는 없어. 때로는 평안 속에서 쉬었다가, 또 싸우러 나가야 하지. 따라서 성경은 두 상징을 모두 사용해서 인간 실존의 전 영역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것이 내 해설이야. | 21.06.07 12:1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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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이처럼 성경은 이처럼 모순과 충돌을 이용해 역설적 지평을 열어 주는 텍스트야. 그것은 본질적으로 신성이 인간의 인식 지평보다 “항상 위에”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 인식하거나 안다고 생각하는 신인식보다 항상 신이 더 “높은 차원”에 있기 때문이지.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신인동형론적 오류 속에서 신을 인식한다.”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 있어. 신인동형론적 오류란, 인간이 신을 인식할 때 “인간의 관점”으로 먼저 해석하고, 그 다음에 조금씩 더 높은 차원으로 해석해 나가는 과정을 일컬어. 따라서 한 인간에게 더 높은 층위의 지식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명료한 논리적 서술만으로는 전달될 수가 없어. 그래서 성경은 의도적으로 모순과 역설, 그리고 비유와 상징이 배치되게끔 쓰여진거야.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성경 첫 장에 “빛이 있으라”를 수식으로 쓰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했지. 논리적으로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설명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신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신의 존재를 드러낸 거야. 따라서 나는 너에게 내가 생각할 때 다음에 쓰는 부활의 근거가 꽤나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싶군.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라. 네가 억압하고 있던 신인식을 초월하는 형태의 반응이 있었으면 좋겠다. (1) 신약의 기반이 된 문서들은 난잡한 도시 전설이 아니라, 예수를 직접 본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다. 다른 종류의 증언들은 제작 단계에서 거절되었다. 예수의 죽음 이후 30년 후에 첫 성경의 기록들이 등장하였고 복음서도 40-60년 안쪽에 쓰여지기 시작했다. 전설이 만들어지기에는 너무나 이르다. 심지어 예수 사건 후 20년만에 써진 편지에서 그는 부활하신 신으로 여겨졌다. (빌립보서 2장) 공의회의 정리는 그 후 수 백 년이 더 지나서 발생한 책들을 정리한 것이다. (2) 또한 고대인들이 유리한 대로 도시 전설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것은 현대인들의 오만한 가설이다. 인류학 연구(얀 반시나)에서 인류는 구비 전승과 허구적 사건을 구분할 뿐 아니라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대인이라도 그것은 다르지 않았다. 성경 중 일부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보고서로서 당시 총독에게 바쳐진 것이기도 하며(누가복음, 사도행전) 그 외에도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하여” 최선을 다해 역사를 보존하려고 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는 것은 성경 곳곳에 나오는 일관된 주장이다. 또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물론 황제가 신이 아닌 걸 잘 알지. 부활이 없다는 것도 잘 안다고” 말했다. (플리니우스, 호메로스, 키케로, 아우렐리우스 등.) 그런데도 불구하고 특히 부활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던 이방인들이 많이 믿게 될 정도로 증인들의 호소력이 강했으며, 예루살렘 지역에서는 “직접 본 사람들이” 몰려 사도들에게 몰려 들었다. (3) 당연히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상범’이자 ‘자칭 선지자’를 죽이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슈퍼스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 경전에 근거하여 “저주받은 자”로서 죽여야만 했지. 바울은 암살조직을 조직해서 살해할 계획을 꾸몄으나, 차마 예수는 그렇게 죽일 수 없었다. 그를 죽이려면 선지자임을 부인하는 방법으로 죽여야만 했지. | 21.06.07 12:1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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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유대교에서 ‘나무에 매달린 자’는 ‘신에게 저주를 받은 자’(신명기 21:23)로 취급되기 때문이었다. 즉 “십자가 형을 받는 사람은 선지자가 아니다”라는 체크메이트였다. 그런데 당시 로마는 십자가형은 능지처참과 함께 반역자에게만 주는 형벌이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십자가형을 전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가 무죄하다고 한 것이야.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아니 봐라, 반역한 게 아니고 그냥 종교 활동한 것뿐인데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해야 하냐? 십자가형은 반역자만 죽이는 형벌이야. 너희들 정말 내 입장 모르겠냐? 종교 활동으로는 사형이 안 된다니까? 공무원은 법대로 해야 돼. 분명히 너희가 고발하기를 쟤가 칭왕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뜻이냐 알아봤어. 그러니까 자기가 구원자로서 왕이고 신이라고 대답하던데? 아니 애들아. 어 그래. 니들한테는 빡칠 문제인거 같기는 한데, 진짜 종교 활동으로는 사형이 안 돼. 진짜로. 좀 들어봐라 진정하고, 나이 처먹어서 왜 그렇게 목청이 좋아. 애들아. 나는 공무원이야. 내 와이프 말대로라면 예수는 로마 군인이 5리 가자고 하면 10리 가주자고 하고 왼뺨 맞으면 반대 뺨도 맞으라고 말하고 황제한테 세금도 잘 바치라는 친로마 비폭력 박애주의자인데 이 사람을 반역자로 나보고 죽이라고? 소리 좀 그만 질러 이 정신나간 미친 강아지들아, 빡치게 하지 말고. 생각이 있으면 좀 말해봐라. ㅆㅂ 저기 니네 헤롯 왕 새끼가 황제한테 내가 친로마 종교 인사를 불법 십자가형으로 죽였다고 보고서 올리면 내가 무슨 꼴이 나겠냐? 황제가 저 새끼 저거 정치도 모르는 새끼 총독 자리 줬더니 무장 세력 더 키우고 자빠졌다고 어? 간신히 정복한 지역 안정시키라고 보내 놨더니 결국 다 말아먹는다고 할 거 아니냐? 그러면 ㅆㅂ 내 가문이랑 내 뒷배 봐주는 원로원 어르신들이 기분이 참 좋으시겠다 어? 애들아. 네들은 황제가 여기 보낸 공무원들이 이 부자 동네 다 못 처먹게 헤롯 저 새끼 왕 세워서 견제하라고 박아 두신 거 니들이 제일 잘 알지 않냐? 그러니 이 ㅆㅂ! 좀 조용히 해봐. 나 지금 ↗되봐라 이거냐 강아지들아? 너희 종자새끼들은 대체 왜 이렇게 종교에 미쳐 있는 거냐? 무장 반역자들은 그렇다 쳐. 그 새끼들은 그래도 돼! 근데 너희 ㅆㅂ 엘리트 친로마파 제사장 새끼들은 내가 네들 뒤 닦아주는 게 우습냐? 아니 ㅆㅂ 성전에 들어온 돈 빼돌리는 거 적당히 눈감아주고 뒤 닦아준 너희 강아지들 똥구녕을 봐서라도 좀 도의랄게 있어야 할 거 아니냐? 아니면 ㅆㅂ 지금 내가 곧 쫓겨 날 거 같으니 나랑 기싸움 하자는 거냐? 아니라고? 진짜 쟤가 헛소리한 게 마음에 안 드니까 죽이라고? 이런 ㅆㅂ 종교쟁이 새끼들아. 그런 법이 없다니까!! 나는 그리스 철학 공부한 엘리트 공무원이야 ㅆㅂ!! 니네 ↗ 같은 나라의 왕보고 알아서 하라고 해, 나한테 지랄하지 말고. 다 꺼져! 꺼지라고 ㅆㅂ!!” 나는 이런 식으로 본단 말이지. 이런 다음 그는 공동통치자이자 황제에게 유대 왕위를 받은 헤롯에게 예수를 보냈어. 이 헤롯이라는 양반은 말야. 영화 같은 데서 좀 우스운 뭐랄까 해적선 선장 잭 스패로우 같은 느낌이지만, 굉장한 천재였어. | 21.06.07 12:1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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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성격 더럽고 형제들이랑 경쟁하면서 굉장한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그래도 대도시도 건설하고 로마 황제 이름 붙이고, 자기를 비판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진리를 듣고 고민하는 등 인간적이고도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지. 그래서 예수를 딱 보자마자 알아차렸지. 아, 총독 새끼가 나한테 똥을 던졌구나. 평소에 존나게 견제하더니 이걸로 나 날려버리려는 건가? 아니면 황제한테 가서 연대 책임이라고 야부리를 털어서 좀 리스크 관리 좀 하겠다는 건가? 하 새끼, 또 머리 굴리네. 어떻게 해야 여기서 살아 남지? 그러다가 뭔가가 번뜩인거지. “오, 이렇게 하면 나도 살고 총독 놈도 좀 도움이 되겠네? 이야. 이 건으로 총독 새끼랑 화해하면 앞으로 좀 더 쉽게 갈 수 있으려나?” 그래서 옆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죽이라고 또 난리난리를 부리는 동안, 애꿎은 광대 데리고 노는 것처럼 군인이랑 부하들과 함께 놀리고 조롱하고 괴롭힌거야. 그리고는 화룡정점으로다가 비싼 옷을 입혀서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 보냈어.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보이게 하면서 갔겠지. 그 모습을 본 빌라도는 정신이 번쩍 든거야. 성경은 이 둘이 이날 원수였지만 당일에 친구가 됐다고 해. (눅 23:12) 빌라도도 헤롯의 메시지를 정치인 답게 딱 알아차린거지. 대충 이런 메시지로 나는 봐. “이보쇼 총독 양반. 당신이 내게 똥을 던졌구만 그래. 처음에야 기적이나 볼까 하면서 기뻐했는데, 점점 머리가 식으니까 이거 위험하다는 느낌에 뒷목이 뻐근하더라고. 잘 들어보시오. 아무튼 당신이나 나나 서로의 처지 모르는 바가 아니요. 나나 당신이나 이 일대에서 황제에게 잘 보이며 세금 잘 내려고 서로 경쟁하는 투견 처지인 건 마찬가지 아니요. 아무튼 내가 지금 갈릴리에서 일으키는 대사업들은 황제의 지원을 받아야 한단 말이요. 괜히 내가 신도시의 이름을 티베리우스 황제 폐하의 이름을 붙여 만든 줄 아시오?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에 물의 신의 신전 세우는 거 뒤지게 힘들었던 거 잘 알지요? 당신도 세금 잘 보내서 자리 보존해야 말년에 고향에서 영전할 거 아니요? 당신 머리 잘 굴렸소. 내게 사형할 권리가 없다는 걸 알고 내게 이 양반을 보낸 건 거 다 알고 있소. 우리 둘 다 선수 아니요? 나도 한 때는 선지자 세례 요한이 이 예수를 메시아라 하길래 크게 기대를 했었소. 나는 비록 세례 요한을 내 딸 앞에서 한 약속 때문에 체면상 어쩔 수 없이 죽였으나 그는 정말 위대한 사람이었소. 그런데 예수는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더군. 그게 무슨 메시야요? 세례 요한은 틀렸던 거요. 자, 내가 이 자를 대제사장 가야바와 귀족들 앞에서 군인들과 함께 업신여기고 조롱하고 모욕했소. 기적일랑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걸 이 종교쟁이들과 시장잡것들에게 보여줬소. 게다가 뺨 맞아서 멍든 얼굴에 산발시키고 꾀죄죄한 꼴에 겉옷만 좋은 걸 입혀서 대중 앞에 보이면서 돌려 보냈소. 저 지독한 종교쟁이들이 잡은 날부터 지금까지 잠도 안 재우고 심문하고 때리면서 며칠째 끌고 다녔다더만, 걷는 것도 제대로 못하더구려. 그 꼴을 모든 자가 봤소. 옷이 뭘 뜻하는지 알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랍비라는 자들은 가르친 걸로 돈이든 물건이든 받는 게 지네 종교상 불법이지 않소? 이놈도 자기 제자들에게 돌아다니면서 가르치고 밥이나 얻어 먹으랬지. 돈이나 옷을 받으라고 한 적은 없소. 그래서 나는 그 자를 꾸미고 화려한 옷을 입힌 채 벗지도 못하게 하고 돌려 보냈소. 이제 사람들은 나에게 비싼 물건을 받은 이 자가 선지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거요. | 21.06.07 12:1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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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이제 사람들은 나에게 비싼 물건을 받은 이 자가 선지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거요. 벌써부터 사람들이 수근대더이다. 저놈의 제자 중에 힘 좋고 사납다는 수제자란 놈이 죽기 싫어 사람들 앞에서 지 스승을 모른다고 했다는 소문을 들었소? 이 자들은 무장 반란을 하는 놈들과는 전혀 달라. 겁쟁이요. 굳이 거창하게 십자가에 못박아서 저주받은 자 낙인까지 찍을 필요 없이, 벌써 그냥 얻어 맞고 돈까지 탐하는 가짜 스승이 되었으니 그걸로 넘어가자고 저 종교쟁이들이랑 잘 마무리해 보시오 생각해 보시오. 얼마 전 드다라는 자가 4백명을 모아 율법을 폐하고 지가 바다를 가른다니 뭐니 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모이지 않았소. 그 놈은 기적을 일으켜 로마를 멸망시킬 수 있댔으나 기마병으로 쳐죽이니 해결됐소. 하지만 이 자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면서도 로마와는 싸우자고 말하지 않고 있소. 이 자는 살려서 써먹어야 하오. 젠장, 가야바가 벌써 18년째 대제사장이오. 그 능구렁이가 왜 이 자를 죽이려는 건지 알 만하지 않소? 고작 성전 한 번 엎어서 그런 것 같소? 당신이나 혹은 내가 예수라는 선지자를 손에 쥐면 가야바 놈의 일이 어떻게 되겠소? 그러니 저렇게 미친 듯이 날뛰는 거요. 그러니 우리가 모욕을 줘서 선지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내쫓으면, 그도 진정이 될거요. 따지고 보면 그 자가 큰 실수 한거요.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켰다는 소문이 돌 때부터 예민하게 굴면서 산헤드린 공의회까지 소환해서 난리를 처대니 그게 결국 예수를 키워준 꼴이 아니요? 진짜 나사로가 부활이라도 했는지 원. 암튼 내가 당신 도와준 거 잊지 마시오. 그간 별별 잡것들이 내가 무장 반란을 몰래 뒤에서 지원해서 총독을 밀어내서 온 유대 땅을 다 처먹는다느니 아니면 황제 앞에서 흉을 봐서 이득을 본다느니 하는 소리는 다 헛소리요. 우리가 이래저래 충돌해도 무장 반란까지는 막아야 할 줄은 알고 있소. 가야바도 제 살길 찾으려면 무장반란까지 인정하면서 저자를 죽이자고 하지는 못할 거요. 대충 내 생각은 그렇소.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해 보시오. 아무튼 내 선물을 잘 쓰시오.” 다소 극화된 내 생각이지만 아마 이런 메시지를 읽지 않았을까? 총독은 이 정치적 제스처를 보자마자 헤롯한테 진짜 정말 감사함을 느꼈겠지. 어쩌다가 숙제를 떠넘겼는데 훨씬 더 좋은 그림을 만들어서 보내준 셈이니까.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았지. 내 생각에는 빌라도가 실제로 이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대충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래는 마태복음 27장을 본 부분인데. 다소 극화되긴 했지만 27장 내용을 비슷하게 담았어. | 21.06.07 12:1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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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백부장. 병사들이랑 나가서 다 모아와 봐라. 종교쟁이들이만 오지 말고 총독부나 성전 관료들이랑 축제 준비하느라 몰려 든 한량들도 데려와라. 다 뜻이 있어서 그런거니 불러오거라. 내 계획대로라면 종교쟁이들이 관료와 민간인 앞에서도 함부로 굴지는 못할 것이다. 다 왔냐. 마당이 꽉 찼군. 자 봐라.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고 끌고 왔잖냐. 자기가 왕이라고 말이다. 근데 이 사람이 말하는 왕은 진짜 유대인의 정치적 왕이 아니고 그냥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거라고 내가 말한 바가 있다. 그러니 반란 일으키자고 온 게 아니니까 반란죄로 십자가에 죽일 수가 없다. 너희 학파의 종교 이론상 말이 안된다고 대로마가 아무나 죽일 수는 없다. 애들아. 너흰 로마한테 정복당한 처지다. 내가 많이 봐주지 않았냐? 다른 속지였으면 다 죽이고도 남았다. 그리고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헤롯 대왕도 동의하신 거다. 애들아. 니들 머리에 열 뻗친 건 잘 알겠지만, 총독과 왕이 같이 말하는거다. 삭혀라. 어? (당연히 관료들은 대가리 박고 있고, 백성들은 ‘무시무시한 총독’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겠지.) 내가 니들 걱정하는 거 잘 안다. 가야바 솔직히 너는 지금 몇년째냐? 평균 연령 25세인 세상에서 20년 가까이 대제사장으로 종교정치하면서 너희들의 종교 권력이 조금이라도 빼앗길 것 같으면 아주 병적으로 행동한단 말이다. 나도 안다. 너희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이권 말이다. 내가 적당히 뒤 봐줘서 누리게 해주지 않았냐? 아무튼 나는 너희들이 걱정하는 바를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때려서 아주 모욕을 주고 쫓아내마. 이 정도만 해도 이 사람이 신이 아니란 건 충분히 알릴 수 있다. 굳이 반란죄에 따르는 십자가형으로 죽일 필요가 없다. 만약 너희들이 정 그래도 십자가형으로 예수를 죽여야만 한다면 선택해라. 전통에 따라 유월절에는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전통이 있지. 그리고 지금 감옥에 생포한 무장 반란 수괴인 바라바가 있다. 그래. 너희 제사장 무리가 극도로 혐오하는 반란군 열심당원이다. 너희 바람대로 이 자와 그 부하들은 반란으로 인해 십자가 형에 처해질 것이다. 자 그런데 네놈들이 정말로 예수를 반란주동자로 십자가로 죽이고 싶다면 둘 중에 십자가형을 받을 자를 너희가 선택해라. 진짜 무력 반란 수괴인 바라바냐 아니면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게 전부인 예수냐? 응?” 헤롯이 판을 깔아 준 다음, 빌라도는 일생일대의 수를 던진 것이지. 설마 로마 관료들이나 일반 대중들도 보고 있는 와중에 진짜 무장반란 수괴를 친로마파 제사장 무리가 옹호할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거야. 열심당원이 반란에 성공하기라도 한다면 로마에 협력한 제사장들은 전멸당해도 할 말이 없을 테니까. 성경은 여기에 빌라도는 종교적 시기심 때문에 예수를 고소한 것일 테니(마 27:18) 그 정도 문제면 이쯤에서 물러나야 된다고 강력하게 요구한거지. 이제 재판석에 편하게 앉아서 속으로 생각했겠지. ‘와이프가 걱정을 많이 하던데 잘 되면 좋겠구만. 그래. 아무리 저 놈들이 미쳤어도 로마 총독인 나와 너희의 백성들 앞에서 진짜 무장반란자를 옹호해서 살려주고 그냥 학파가 다르다고 예수를 죽이라고 요구하지는 못하겠지? 이제 때려서 쫓아 낸 다음에 거리에서 암살을 하든지 말든지는 내가 알바는 아니지. 자 그것 봐라. 얼마나 사건이 분명하냐. 잘못된 종교 주장을 한 예수는 그냥 때려서 쫓아내고 바라바는 확실히 사형을 하면 예수파는 약해질 것이고 법적인 문제도 피할 수 있…’ “바라바!” “뭐라고?” | 21.06.07 12:1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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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 아아아아
“바라바!” 가야바는 대중을 선동했지. 그리고 여기서 난데없이 바라바를 달라고 외쳤지. 대중들은 결국 대제사장과 장로의 말대로 따르게 되었어. 빌라도는 한 가지를 도저히 상상을 못한거야. 지금 ‘유월절 축제’라는 건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우리로 따지면 부여 시절에 로마 전역에서 모여드는 상황이거든? 로마 덕분에 길 정리되고 배도 있고 해서 오가는 게 동아시아보다야 훨씬 쉽긴 했지만, 그래도 “유대교 명절” 참여하겠다고 그 광대한 땅을 걸어온 진성 유대교 열심자들이었던 거야. 그들은 예수가 대단하다더니 사기꾼이었다는 말에 완전히 화가 났겠고, 또 대제사장 같이 높으신 분이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겠지. 세상에, 정복자 로마 총독 앞에 당당히 맞서는 종교지도자라니! 그 휘광에 휩싸여 거의 분위기가 폭동 직전까지 가는거야. 그러니 총독은 터지지 말아야 할 건 터지고 안 터져야 할 멘탈이 터져 버리고 말았지. 그래서 이렇게 말해. “아니 그러면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게 전부인 예수를 어떻게 하라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아니 대체 왜 이러냐? 너희는 진짜 예수가 무슨 죽을 짓을 했다고 이러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흥분한 민중이 총독부 안뜰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빌라도는 여기서 손을 씻은 후 “야, 내 탓 아니야.”라고 하게 된 거야. 쓰다보니까 이게 엄청 길어졌군. 내 요점은 이래. 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렇게 들여다보았을 때, 부활이 없었다면 가야바의 판단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함께 기독교는 끝나게 되었을거야. 이건 가야바 같은 거물이 유대교의 내적 논리를 따라 회심의 일격을 날린 상황이고, 혼란을 막기 위해 헤롯과 총독이 힘을 합쳐 예수를 모욕하는 선에서 정리하려고 발버둥 친 결과야. 네 말대로 메시아닉 운동은 흔했고, 대제사장도 그 운동을 정리하는 법을 무려 18년간 통제한 노련한 정치인이었지. “당연히” 아무도 부활을 주장하리라 예상하거나 고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이런 사건이 몇 번 있었지만 아무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유대인의 종교상 그런 가르침은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지. 그 결과 가야바는 가지고 있는 모든 정치적 자산을 동원하여 예수를 죄인으로써 죽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슈퍼스타로 죽지 않았어. 오히려 그를 사랑하던 팬에게 “가짜 선지자, 저주받은 자”로 살해당했지. 철저하게 무력화된 한 개인으로서 린치를 당하며,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벗겨지며 나무에 못박혀 살해당했지. 선지자로서의 명예, 제자들의 충성, 대중의 사랑, 군중들 앞에서 완전히 벌겨 벗겨진 후, 그리고 신체에 대한 폭력을 당한 후에, 마지막으로는 십자가에 달려 “내려와 봐라!”며 조롱하는 소리를 듣다가, 생명을 잃고 신에게까지 버림을 받는 과정을 거쳤지. 그래서 희생양의 논리가 폭로된 거야. 가야바는 이 난세를 살아가는 노회한 정치인으로써 자신이 한 행동을 잘 알고 있었다. 다소 무리하긴 했지만, 그는 흥분한 군중을 마음대로 조종해서 왕과 총독 양쪽 모두에게 자신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었으니, 이제 뒷마무리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예수는 선지자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했지만, 그의 제자들은 이제 그냥 죽이거나 쫓아내면 그만이었지. 그런데 제자들은 갑자기 부활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 21.06.07 12:1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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