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서 탁한 불빛이 반짝인다. 포화되는 붉은 빛의 물결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 한채 소피아는 나가떨어졌다. 그를 지키던 불타던 괴물도 그 힘을 전혀 줄이지 못 하고 소멸해 소피아의 여린 몸은 자신의 몬스터가 겪은 것과 동질한 격통에 빠졌다. 점성의 뜨거운 액체가 살점을 녹이고 근육에 파고들듯이 타오르자, 소피아가 뒤늦게 쇳소리를 냈다.
"끄윽. ( LP : 2000 → 0 ) "
어떻게 지우지 못 할 격통이 그녀의 몸에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찌르는 듯한 통증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다.
"듀얼은 저의 승리."
바닥에 쓰러진 소피아를 향해 듀나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소피아에게 일부러 들려주듯,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링커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나요?"
"링커를 쓰지 않았다고?"
소피아가 핏기가 섞인 말을 토해냈다.
"랭크 업 매직은 몬스터 본연의 모습을 찾게 해줄뿐. 링커와는 전혀 다르답니다."
'나는 그걸 링커라고 느낀건가?'
보통 몬스터와는 다른 압도적인 위력. 세상을 멸망시킬 것만 같았던 포성과 빛은 듀나의 말에 의해 일개 몬스터로 일축되었다. 그녀에게 담담히 대답하는 듀나가 점점 거대해지는 것 같다.
"알까보냐……."
"링커를 썼다면 당신이 죽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날 일부러 살려뒀다는 거냐?"
"그렇지요. 당신이 아파하려면 우선 살아있어야 하니까요."
"내 아픈 모습이 보고싶어서 살려뒀다. 변태같은 놈이다."
"으음. 그렇게 보인걸까요?"
듀나가 한 쪽 다리를 올려 소피아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짓밟았다.
"아악!"
"당신은 이렇게 아파할 수 있네요. 듀얼하는 동안에는 아무런 고통도 못 느끼는 로봇인가 했어요."
"크윽."
"보통 사람보다야 아픈 걸 더 잘 참지만, 그래도 사람은 사람이었네요. 이렇게 작은 가슴에도 그만큼 고통을 쟁여놓을 수 있다니."
"이 상황에서 내 인간성을 칭찬하는건가? 너는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것 같다."
"머리에 총을 맞은 적은 없어요."
듀나가 다시 발을 들어 소피아의 다리를 짓눌렀다. 신발로 담뱃불을 끄는 것처럼 지긋이 정강이를 누르자, 소피아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진다.
"시간 끌 필요없을텐데. 죽여라."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요?"
"네놈뿐이지."
"저는 당신을 죽이지 않을거라 말 했는데~. 아파서 저에게 부탁하는 건가봐요?"
소피아의 표정을 즐기며 말을 질질 끄는 듀나. 그 사이에도 다리가 끊어질 것만 같다.
"물론. 당신과 계속 노는 것도 즐겁겠지만. 저는 다른 일도 해야해요."
"그윽. 그렇담 어서 꺼져라."
"네. 이쯤에서 작별 인사하죠."
듀나가 소피아의 다리 위에 내려놓은 발을 치웠다. 온몸에서 힘이 쫙 빠져서 움직이지도 못 하고 축 처진 소피아의 이마를 쥐어뜯듯 잡아 올리고서 듀나는 입을 열었다.
"서둘러서 허겁지겁 죽이는 건 품위없는 일."
그 말을 한 직후 그녀는 소피아의 머리를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피가 주륵 흘러나오는 머리를 뒤로 하고, 듀나는 다시 소피아의 다리로 가까이 가, 그녀의 두 다리를 들어올렸다.
"목숨 대신 두 다리를 받아갈게요."
그녀는 다리가 달린 방향으로 90도 정도 굽힌 뒤 사람의 관절이 구부러지는 방향과는 반대로 꺾었다.
……
Selected Ones - 12
Haze 4
……
결과는 처참했다. 소피아의 위치를 추적해 쫓아간 요원들은 끔찍하게 비틀린 그녀의 다리를 보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미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가 숨을 쉰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를 구하러 달려온 남자들은 전에 없이 당혹감을 느끼며 그녀를 실어 날랐다.
소피아가 누구와 싸웠는가. 그리고 패배해 어떻게 되었는가. 그 모든 것이 니아에게 보고되었다.
"……."
코스믹 코퍼레이션의 젊은 회장. 니아.L.토프. 달빛처럼 창백한 머리카락과 피부의 소녀는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를 듣고 머리를 싸맸다. 그녀의 앞에 출력된 커다란 화면에는 소피아의 듀얼 웨펀에 기록된 듀얼 영상이 기록되어있다. 그것을 벌써 몇 번이나 확인해봤다.
"적은 초월체……."
초아가 혜르 밑에서 일하던 듀얼리스트들을 거두어들인 이후, 엑시즈 차원의 침입자와 싸웠다는 말을 몇 번 들었다. 그들의 싸움은 코스믹 코퍼레이션이 개발한 장치에 의해 기록되었고, 대강의 전력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기나긴 판단 끝에 내린 결론은 슈브 라킬드 소피아, 지금은 중환자실에 끌려간 그녀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잘못 판단했어."
그녀의 예상이 빗나간 원인은 소피아가 만난 적이 엑시즈 차원의 잡졸이 아니라, 최고 전력인 초월체라는 사실이다.
니아의 손이 떨렸다. 니아 본인도 이미 초월체와 싸워본 적이 있다.
"포피리아……."
자신을 압도하던 괴물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린다. 아직도 그 일을 떠올리면 온몸에 닭살이 돋는다.
"그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였어."
엑시즈 차원에서 온 침입자가 정말 잡졸밖에 없을까? 여차하면 이쪽의 핵심 인물과 마찰이 일어날 것을 고려해서 강한 전력을 보내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더군다나 초월체라는 존재는 급이 다르다. 2년 전, 이 세상에 초월체라고는 포피리아밖에 없던 그 시절에도 그 한 명을 쓰러트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심지어 우리쪽 인원으로는 손도 못 쓰다가……. 운 좋게 해결됬지."
포피리아를 쓰러트렸던 것은 가온이다. 초월체와 싸울 수 있도록 듀얼 웨펀을 개발하고, 듀얼리스트를 성장시켰음에도 역부족이었다.
'그로부터 고작 2년. 길게 쳐줘도 3년밖에 안 되는 시간이야.'
니아에게 듀얼 웨펀과 관련된 기술들을 선뜻 개발하고서 거래하던 이와는 지금 연락이 안 닿는다. 그 개발자의 이름은 세라 밀리언스. 2년 전, 포피리아와 싸웠던 그 때 그녀의 친구가 포피리아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포피리아에게 스쿨의 위치를 알려주고 거기로 가게끔 했던 건 나야.'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포피리아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스쿨로 돌리도록 니아는 정보를 팔아 넘겼다. 그 결과로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지만 그 대가는 컸다.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지……."
듀얼 웨펀을 혼자서 강화, 개량하던 세라는 사라졌다. 코스믹 코퍼레이션의 개발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발전시킨 것이 지금의 듀얼 웨펀. 하지만 그마저도 링커를 쓰지도 않은 초월체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 했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
그녀의 생각 속에서 승리한다는 말은 이미 사라졌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적은 포피리아가 아니라 엑시즈 차원이다. 그들이 니아를 살려둘 이유는 없으며, 도망칠 곳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구슬픈 말에도 누구 하나 대답해주지 못 한다. 밤바람에 묻혀, 그녀의 목소리도 사라져갔다.
……
스쿨에 존재하는 커다란 중앙 도서관 그리고 교실만한 자그마한 인문학 도서관의 사서 역할을 하는 묘령의 여인이 연구실 내부를 걸었다. 비록 지금은 연구에 몸을 담고 있지 않고 책을 정리하지만, 그녀의 출신은 공학계열 연구 시설. 그녀 또한 이 연구실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하는 일들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옆에는 새하얀 가운을 입은 초췌한 인상의 여성이 있다. 녹색 머리카락을 정리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한 테이블이 꽉 찰 정도로 종이들을 널부러놓고 기계를 만지고 있다.
"세라는 그때 이후로 변한 것 같아."
"내가?"
"응. 변했다고 해야할까. 어렸을 적의 세라로 돌아온 것 같아."
도서관 사서인 사노. 허리 아래로 내려오도록 머리를 길게 기른 이 여인은 하얀 가운을 입은 공학자, 세라 밀리언스를 돕기 위해 조수 역할을 자처했다. 학창 시절에 연구실에서 그녀가 세라를 보조하던 이후로는 처음이다.
"2년 전 그때 이후로……."
"아아."
포피리아가 스쿨에 쳐들어 왔던 때, 사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 다음날, 세라가 그녀에게 가서 말했다. 그 둘의 친구인 네이트라가 죽었다고. 네이트라는 사노, 세라와 같이 연구실에서 일한 적은 없다. 다만 고향 친구로 어릴 적에 같이 놀았던 사이다. 한동안 만나지 못 했던 친구의 죽음을, 한동안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친구에게 들은 이후로 사노는 세라를 돌보는 일이 많아졌다.
세라는 천재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능력이 좋은 공학자다. 하지만 게으름을 부리는 일이 많아, 어른이 된 이후로는 빈둥거리기만 하며 다른 이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적어졌다. 그것은 사노와도 마찬가지. 똑같이 스쿨에서 일하고 있지만 둘이 만난 적은 별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네이트라가 죽은 날 이후로, 세라가 먼저 방에서 나와 사노에게 실험을 도와달라고 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거기다가……. 링커였지? 한창 연구하던 그건."
"응."
"링커 그리고 듀얼 웨펀. 그 이후로 세라가 열중하는 건 무기를 만드는 일이였어."
"사노. 이미 말했잖아. 위험에 대비해야 하는 거라고."
"그렇지만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서 그 두 가지에 열중한다는 건……. 세라는 곧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
세라의 손이 멈췄다. 의자를 뒤로 빼고 몸을 반쯤 돌리자, 사노가 그녀를 바라보며 멈춰서있다.
"그래."
세라는 사노의 말을 긍정했다.
"가까운 시일 내로, 일이 터질거야."
"역시 그렇구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세라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문가에서 들려오는 바스락대는 소리 떄문이었다. 사노가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세라가 일어서서 문가로 나아갔다.
"잠깐 나갔다 올게."
문가에서 바스락대는 것이 자신에게 온 손님이라는 듯, 세라는 연구실을 나섰다.
……
기믹 퍼핏이 헤이즈 비스트를 죽였어!
나쁜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