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을 바깥세계로 보내버린지 한달하고도 반.
정력을 말썽만 일으키는 주인의 수발을 드는데 쏟아 붓지 않아도 된 란은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남는 시간을 활용해 종종 자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인물을 찾아가는 일이 많아졌고, 그 중에서도 주인과도 연관이 깊은 하쿠레이 무녀는 거의 매일 만나다 시피 찾아간다.
이날 역시 그랬다. 란은 평소처럼 레이무와 담화를 나누며 평화를 만끽하려 아침부터 하쿠레이 신사를 찾았으나, 그런 그녀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구면이지만, 자신과 아무런 접점이 없어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인 소녀, 우사미 스미레코. 교복을 입은 현직 여고생인 그녀는 꿈을 통해 환상향을 왕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하쿠레이 신사를 찾은 것은 큰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레이무와는 이변을 통해 알게 된 사이로 란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란이 마음의 평화라면 스미레코는 흥미 본위에 가깝다는 정도.
마당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둘의 모습에 란은 끼어들기를 잠시 망설였다가 레이무에게 발견당하고 나서야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오늘은 선객이 와 있을 줄이야."
"어차피 중요한 얘기를 하려 온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레이무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객, 스미레코쪽을 쳐다봤다. 단순히 담소나 나누려 왔으니 딱히 기밀이 누설 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리에 관계자외가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란은 스미레코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했다.
"전에 몇 번 봤었지? 나는 환상향의 관리를 맡고 있는 야쿠모 란이라고 한다."
"저는.. 우사미 스미레코라고 해요."
생각해보니 통성명을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몇 번인가 얼굴을 마주치긴 했지만, 그땐 주인인 유카리의 시중을 들고 있었기에 이런식으로 직접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유카리라는 굴레에서 해방된 지금은 아무런 제약이 없다. 란은 그 사실을 곱씹으며 감개해했다. 자유.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스미레코의 시선이 사뭇 뜨거웠다. 묻는 눈으로 바라보자, 예상될 만한 질문이 날아왔다.
"저기. 그 꼬리 말이에요. 진짠가요!?"
"그렇다."
"역시, 구미호!"
뭔가 자신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란은 조금 쑥스러운 한편, 자신이 제대로 구미호라고 인식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오랜 세월동안 유카리를 뒷바라지 하느라 잊고 있었던 구미호로서의 자긍심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요즘은 완전히 가정부 아니면 덤 취급이지만, 나는 사실 천하를 호령하던 구미호 아니던가.
선망의 시선에 도취된 란은 높아진 콧대로 가슴을 쭈욱 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어진 스미레코의 말에 란은 얼빠진 얼굴로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될까요?"
"뭐?"
"그 푹신푹신해 보이는 꼬리. 한 번만 만져보면.."
선망의 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단순한 호기심의 눈이었을 줄이야. 아무리 푹신해 보여도 그렇지. 구미호로써의 자존심이 있다. 당연히 란은 단호하게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발 한 번만요. 부탁 할게요."
"음..."
애원에 약한 란은 스미레코의 간절한 부탁에 단호해 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쉽게 허락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딱 잘라 거절하지도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도 잠시, 구미호치고는 순진해 빠진 그녀답게 란은 결국, 애원하는 시선에 굴복해버렸다.
"조금만이다."
"감사합니다!"
"에효.."
허락이 떨어지자, 스미레코가 날뛸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무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니 그 할망구한테 휘둘리지."
레이무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구미호의 치명적인 결함. 그것은 대요괴답지 않은 약한 마음이었다. 보는 대로 란은 애원하면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여렸다. 주인답게 식신의 그런 면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유카리는 오래전부터 란의 약한 마음을 이용해 마구잡이로 부려왔었고 그 정도가 심해 이중인격자로 만들어 놓을 정도였다.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나날이 여위어 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레이무는 그런 란이 안쓰러워서 못 봐줄 지경이었다. 그리고 란을 그런 눈으로 봐온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 덕에 유카리의 힘을 봉인해 쫒아낼 수 있었던 거지만.
지금은 유카리로 인한 스트레스를 덜 받는지, 훨씬 좋아 보인다. 탈모가 온 꼬리의 상태도 많이 좋아졌고. 무엇보다 늘 죽을상이었던 얼굴이 밝아졌다. 레이무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항상 날카롭게 서있던 신경도 지금은 많이 죽어 더는 까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변모를 보아, 유카리에게 어지간히도 시달려 왔다는 거겠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짠해진 레이무는 온화한 시선으로 란의 꼬리에 파묻힌 스미레코를 바라봤다.
아홉 개의 질량과 푹신푹신에 빠진 스미레코의 얼굴은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한 번만 만진다고 했는데, 어느새 정신 없이 만져대는 그녀도 그녀지만, 조금만 허락한다고 해놓고 제지하지 않고 있는 란도 란이었다. 그런 둘의 모습이 레이무에게는 어쩐히 훈훈하게 다가왔다.
자신도 그런 훈훈한 광경에 한 몫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레이무는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으면 했다.
란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드디어 스미레코의 행위를 제지했다. 약 5분 만에 금지한 것이었다. 무려 5분 동안 신나게 푹신푹신을 만끽한 스미레코는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란의 말에 따랐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교복은 란의 꼬리에서 빠진 털투성이였다.
그것 마저도 좋은 스미레코는 여전히 풀어진 얼굴로 옷에 묻은 털을 하나씩 털어냈다.
"헤헤헤. 란 씨의 꼬리 정말로 푹신푹신 했어요."
"으음.. 그러냐. 그거 다행이군. 관리를 한 보람이 있어."
여태 돌보지 못했던 꼬리를 최근 들어 관리하기 시작한 란에게 스미레코의 평가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너무 만져서 불쾌해지려던 기분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오히려 자신의 꼬리에 자부심이 생기려고 한다.
그런 생각으로 들뜬 기분이 드려난 란의 얼굴은 스미레코에게 있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럼, 앞으로도 란 씨의 꼬리를 만져 봐도 될까요? 얼마나 푹신푹신하게 관리하고 있는지 제가 확인해 보고 싶거든요."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만져도 좋다. 단, 뿌리부분은 손대지 마라. 거긴 좀 민감하니까."
"네. 그 부분만 조심하고 사양하지 않겠어요."
그런 둘의 대화에 레이무가 "쉬워빠진 여우같으니라고."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언질을 잡히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레이무는 경솔하게 허락하는 란이 너무도 한심스러워 보였다. 어쩌면 란은 유카리 같은 작자에게 부려 먹히는 운명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갈 정도였다.
"거기까지."
결국, 보다 못한 레이무가 둘 사이에 끼어들기로 했다.
"스미레코. 란은 저래뵈도 구미호라고. 조금은 자중하지 그래?"
스미레코에게 주의를 주고
"그리고 란, 너도 말이야. 애원 한다고 너무 쉽게 허락하는 게 아니야."
란을 쳐다보며 쓴소리를 한다.
레이무는 둘에게 적당히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퉁명스런 얼굴로 한숨처럼 주절거렸다.
"나도 만지고 싶어지잖아."
내뱉고 나니 실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레이무는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양 손을 휘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그런 격렬한 부정이 되러 강한 긍정으로 다가온다는 것도 모른 채.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던 레이무가 얼굴까지 붉히며 그러는 모습에 흥미가 동한 둘은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부끄러워하는 소녀의 얼굴을 응시한다.
옅은 미소가 서린 스미레코의 입이 열렸다.
"어라? 레이무 씨. 제가 란 씨의 꼬리로 행복해진 게 부러웠던 모양이었군요."
아니야! 하고 다시 부정. 그러나 그럴수록 스미레코의 입가가 더욱 올라갈 뿐이었다. 이어서 란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랬던 건가. 내 꼬리를 그렇게나 만지고 싶어했다니.. 눈치 채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러면서 몸을 돌려 꼬리를 레이무쪽으로 돌리는 란. 그녀는 귀여운 딸을 보는 듯한 미소로 레이무에게 권했다.
"특별히 레이무, 너만은 사양하지 않고 만져도 된다. 자, 어서."
자신의 꼬리를 만지라며 재촉하는 란에게 레이무는 처음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거부했다가 황금색의 푹신푹신한 아홉 개의 뭉텅이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를 한참. 결국, 유혹에 이기지 못해 하쿠레이 무녀로서의 체통을 집어 던져 버렸다.
그 결과
"후아아아~. 푹신푹신 기분 좋아.."
레이무도 스미레코처럼 란의 푹신푹신한 꼬리 감촉에 중독되어 행복감을 만끽하게 되었다. 아홉 개의 꼬리가 전해주는 압도적인 포근함. 마치, 햇살에 잘 말린 이불에 덥혀진 듯한 기분에 잠기운까지 몰려왔다. 자칫 방심하면 그대로 자버릴 것 같은 흉기 수준의 안락감. 레이무는 버뜩 정신을 차려 푹신푹신함의 마수로부터 간신히 벗어났다.
그러나 완전히 풀려버린 긴장감과 느슨해진 정신은 어쩔 수 없었다.
"흐아아.. 기분 좋았어."
게다가 벗어나기 까지 시간도 꽤 걸렸던 모양이었다. 스미레코가 질렀다는 눈으로 말했다.
"레이무 씨. 요즘 많이 힘들었나 보네요. 무려 10분 가까이 푹신푹신에 빠지다니.."
자신도 5분 동안 푹신푹신의 늪에 빠졌었지만, 레이무 정도까진 아니었다. 평소에는 환상향의 멋진 무녀라는 이명대로 어른스럽고 냉철한 레이무가 저렇게까지 어리광부릴 줄이야. 갭이 큰 만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란은 그런 스미레코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지. 레이무도 아직 어린 소녀라는 거다."
나이에 비해 과중한 책임감을 안고 겉으로는 향상 고고하게 행동했었던 레이무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란에겐 그것이 전혀 이상하게 비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저렇게 나이다운 어리광을 부렸으면 하는 정도였다.
란이 한 말의 진의를 이해한 스미레코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 아닌가. 압도적인 힘과 어른스런 행동 때문에 그 당연한 사실조차 간과하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이해한 스미레코의 눈엔 따스한 온기가 어려 있었다. 레이무는 란과 스미레코가 자신을 무슨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한참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