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이 상황에서 바키드립을 칠 줄이야. 사나에는 결코 얕볼 수 없는 여자였다. 나도 바키를 즐겨 읽어서 알지만, 사나에의 바키드립은 절대 수박 겉핥기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건 바키를 아주 잘 알아야만 나올 수 있는 수준. 즉, 원작자도 인정할 바키마스터인 것이다!
태클을 걸면서도 감탄하는 눈빛을 읽은 것인지, 사나에는 아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건 그렇고, 굉장히 비슷했어. 진짜 바키 보는 줄.」
「헤헤. 이래 뵈도 팬이거든요. 가능하다면 바키에 나오는 기술도 직접 써보고 싶어요. 특히, 호왕 말이에요.」
「그..그래. 그런데 아무리 가능하다고 해도 함부로 쓰지는 마.」
「저도 그 정도는 분별할 줄 알아요. 그래서 나쁜 짓 하는 요괴에게 쓸 생각이에요.」
「.... 그렇구나.」
누군지 몰라도 호왕의 첫 희생자는 사나에가 나쁜 짓 한다고 판단한 요괴가 될 것 같았다. 그 이름 모를 요괴에게 미리 애도를 해본다.
시선을 돌리자, 탄막놀이의 승자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공중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패자인 모미지가 축 쳐진 채 이리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그런 모미지와 눈을 마주친 나는 위로의 삼아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 모미지는 아쉬운 듯 쓴웃음으로 화답했다. 애초에 승산이 존재하지 않았던 싸움.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저 져버렸어요.」
「그래. 아쉽게 되었네.」
「네. 분해요. 하지만 그보다 절망할 정도의 실력차에 좌절해 버릴 것만 같아요.」
그렇겠지. 누구라도 레이무와 탄막전을 하고 난다면 그렇게 느낄 것이다. 범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천재를 넘을 수 없는 것처럼 타고난 강함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존재한다.
나는 자괴감에 빠진 모미지에게 어깨라도 토닥여 주려고 다가가려 할 때였다. 심드렁한 표정을 한 레이무가 나와 모미지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대로 어물정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알고 있다. 스팰카드 룰 상 패자는 승자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거겠지?」
「그래. 내가 승자니까, 패자인 너한테 명령하겠어. 아니, 부탁할 게.」
스펠카드로 이루어지는 대결은 패자가 승자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여기서 승자가 내거는 요구는 승패가 결정된 후여도 상관이 없으며 패자에겐 그 요구를 거부할 권한이 없다. 단, 절대 무리한 요구여선 안 된다는 것이 철칙.
그런데, 레이무가 부탁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 어쩌면 무리한 요구일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모미지는 나와 같은 짐작을 한 것인지, 꾹 다문 입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요구가 나올지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작게 헛기침을 토해낸 레이무가 요구. 부탁의 내용을 입에 담았다.
「절대로 아저씨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
아-. 그래서 부탁이라고 한 건가. 좀 더 무거운 얘기가 나올 줄 알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조금 김이 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참 다행인 말이었다. 졸였던 마음이 거짓말같이 풀어진다.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모미지를 바라보았다.
모미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그 부탁을 받아 들였다.
「알겠다. 나도 더 이상 소우지 씨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한번 만 더 아저씨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내 귀에 들려온다면 그땐 용서치 않겠어.」
험악하게 노려보는 레이무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전해져왔다. 나에게 향해진 것도 아닌데도 온 몸의 털이 삐쭉 설 정도였다. 그 엄청난 살기를 정통으로 받고 있는 모미지는 그 기세에 눌러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눈빛만큼은 지지 않으려는 듯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하던 사건은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무탈하게 해결되는 듯 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속으로 ‘다행이다.’하고 연신 중얼거렸다. 이제 서로 적으로 대립했던 레이무와 모미지가 시간을 들여가며 화해하는 일만 남은 건가. 그렇게 형편 좋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의 드립에 도취되어 있던 사나에가 이쪽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왜? 하고 묻자, 사나에는 뭔가 음흉하게 까지 느껴지는 능글맞은 미소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의도대로 잘 풀린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의도대로라니, 무엇이? 나는 사나에가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곰곰이 되씹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후후후.」
사나에는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한층 더 능글맞게 웃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말했다.
「설마, 네가 상식 밖의 행동을 한 건 전부, 이걸 위한 빅픽쳐였다는 거야?」
「이그젝틀리! 정답이에요. 냥식이 오빠.」
「이봐, 누구보고 냥식이라는 거야?」
정답이라면서 의기양양해 있는 사나에를 보며 나는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정말, 의도한 게 맞는 걸까? 저 초록 무녀가 거기까지 생각이 깊어 보이지는 않는데.
「너 의외로 일이 잘 풀리니까, 전부 자기 공인 것처럼 숟가락 얹으려는 건 아니겠지?」
「안 믿으시는 거예요?」
「그도 그럴게 너 아무 생각 없어 보였으니까.」
「절 그렇게 생각 없는 애로 보셨다니. 너무해욧!」
사나에는 삐친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워 가볍게 코웃음 쳤고, 사나에에게서 불만 가득한 시선이 날라 왔다.
「이정도로 신용 받지 못 할 줄이야. 저와 오빠의 유대가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 다는 거군요..」
기운 없는 목소리로 툴툴거린 사나에는 원망이 서린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 눈이 부담스러운 나는 졌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믿어주면 되잖아.」
「... 엎드려 절 받기지만, 뭐 알아주신다면 됐어요.」
사나에는 마지못해 한 말에 불만족스러워 했지만 이내 기운찬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그때, 문득 시선이 느껴져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로 못마땅해 하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레이무와 눈을 마주쳤고, 나는 그런 레이무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이무가 추궁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사이가 엄청 좋아 보이네? 아저씨, 사나에와 어느 틈에 그렇게 가까워 진거야?」
「그게 말이야..... 사나에가 바깥세계 출신이잖아. 그래서 종종 바깥세계에 대한 화제로 대화를 나누거나 하거든. 그러다 보니 친숙해진 걸지도.」
「흐음... 나도 바깥세계 출신인데.」
「그랬지! 그래서 너와도 가깝게 지내는 거잖아.」
변명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얘기하자, 레이무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올렸다. 잠깐 그렇게 골똘해 있던 레이무가 생각을 정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말대로야. 나는 바깥세계에 대한 미련을 완전 버렸지만, 아저씨와 사나에는 그렇지 않으니까... 빨리 친해지는 것도 이해가 돼. 그래도...」
도중에 말을 자린 레이무의 얼굴에 무언가 석연치 않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눈을 날카롭게 한 레이무가 퉁명스런 투로 이렇게 내뱉었다.
「납득하기 힘들어. 나는 아저씨와 친하게 지내는데 4년이나 걸렸는데. 사나에는 여기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친해지다니. 머리로는 이해해도..... 뭔가 손해 본 기분이야.」
레이무는 억울하다는 듯한 눈으로 사나에를 노려봤다. 감정이 담긴 눈빛에 사나에는 불편한 듯 시선을 피했다. 레이무의 입장에서는 사나에는 그야말로 차려 놓은 음식에 숟가락만 얹은 이른바 무임승차나 다름없을 것이다.
같은 무녀인데도 하쿠레이 무녀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인해 나같은 요괴를 허물없이 대하기까지 들인 노력을 생각해 볼 때, 억울해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나에에게 감정을 드려내는 건 절대 좋은 태도가 아니었다.
레이무도 그걸 아는지 한숨을 크게 내뱉더니 시선을 다시 내게로 돌리면서 자조했다.
「겨우 이런 걸로 질투를 하고. 한심해...」
그렇게 자신을 책하던 레이무는 별안간 기척을 감지한 듯 시선을 내 뒤쪽,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져 있는 수풀에 두고는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있는 거 아니까, 얼른 나와.」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틀어 뒤쪽을 쳐다봤다. 보이는 것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수풀 뿐. 그러나 레이무의 말에 호응하듯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누군가가 모습을 드려냈다.
「아야야. 완전히 간파 당하고 말았네요.」
기자양반이 왜 거기서 나와?
수풀에서 나온 것은 샤메이마루 아야. 언제부터 숨어서 보고 있었던 것인지,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