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존재하지 않는 암흑 속. 발이 지면에 닿지 않는 공간 속에서 코우는 오롯이 홀로 그곳에 있었다.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 몸은 물속을 유영하듯 떠다닐 뿐. 코우 자신의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수 없었다. 여기는 어디인지, 또 자신은 왜 이곳에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의식 또한 또렷하지 않고 몽롱했다. 다만,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슈텐의 분신과 싸워 가까스로 이겼다는 것 정도.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아마도 정신을 잃었던 거겠지.
그리고 지금 이 영문 모를 공간에 떠다니고 있다는 게 코우 자신이 아는 전부였다. 그런가. 힘을 다한 끝에 죽고만 것인가. 문득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다 허탈하게 느껴졌다. 기껏 선배의 희생으로 건진 목숨인데, 이 무슨 바보 같은 죽음이란 말인가.
하지만,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이 허무의 공간은 사후 세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그때 정신을 잃은 것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발상 자체가 비약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대체 무엇일까?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에 혼란스러워질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마! 요새 잘 지내고 있냐?"
그리운 목소리였다. 단 일분일초도 잊은 적이 없는 선배의 목소리. 코우는 사무친 반가움에 '선배'하고 큰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에서 목소리가 올라오기는커녕 입조차도 열리지 않았다. 무어라 인사라도 나누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지 자신이 너무나 답답했다. 반갑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이어서 말했다.
"잘 지내고 있어야 하는데, 별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네."
안부를 묻는 소리에 코우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도 불구하고 안면 근육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코우는 마음속으로 목소리에게 물었다.
─ 선배인가요!?
"아니, 난 네가 기억하는 선배라는 존재의 찌꺼기야."
눈앞에서 하얀 빛이 모여들더니, 어느새 센라의 모습을 이루었다. 틀림없는 선배의 모습에 코우는 더없이 들떴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찌꺼기러나.
"말 그대로의 의미다. 네 기억이 만들어낸 가짜라는 거지. 그리고 여긴 네 기억의 심층. 쉽게 말해 마음속이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눈앞의 선배가 자신이 만들어낸 가짜라는 것 정도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코우에겐 가짜가 말해주는 진실은 듣고 싶지 않은 잔혹한 현실. 꿈속에서 조차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이 코우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비록, 가짜이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선배의 목소리와 모습을 재현한 존재가 반갑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 그래도 이렇게 선배를 다시 보게 되어서 기쁘네요.
"당연히 그렇겠지. 난 네 바람으로 나타난 거니까. 자질구레한 얘기는 각설하고 본론만 말한다."
가짜 센라가 얼굴에 머금었던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왜 슈텐에게 수행을 받기로 한 거냐? 아무리 강대한 요괴라 해도 잘 지도하고 이끌어 주는 것은 다른 문제야. 아까 수행도 완전 대충이잖아. 귀찮아하는 티가 역력하더만."
─ 그런... 저도 모르겠어요. 선배가 경외하던 요괴니까, 가르침을 핑계로 가까이 하고 싶었던 걸 지도요.
"그래. 슈텐은 틀림없는 최강이자 불기분방이지. 그러나 네 상대로는 그 코하루라는 여자가 훨씬 잘 어울린다고 보는데? 걔를 놔두고 하필이면 제멋대로인 슈텐에게 가다니, 너도 참 여자 보는 눈이 없군."
가짜 센라가 쯧쯧, 혀를 차며 코우의 선택을 탓하며 꾸지람을 주었다. 코우는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못하고 조용히 마음의 소리를 침묵 시켰다.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답게 가짜 센라의 지적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오니 백귀야행에 합류하던 날부터 신세를 졌던 여자. 코하루는 코우에게 있어 센라 다음가는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요괴였다. 때로는 자신의 나약함을 채찍질 하고, 위험할 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주는 고마운 여자. 그녀라면 자신을 잘 지도하며 적절한 수행을 시켜 줄지도 모른다. 굳이 그녀가 아니더라도 도움을 구하면 거절하지 않고 도와줄 오니는 많았다.
그런데, 그 많은 오니들을 놔두고 슈텐을 선택한 것은 센라를 핑계로 한 고집이었다. 합리적이지 못한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는 힘을 다해 정신을 잃고 자신의 심층에서 센라와 재회한 걸로 이어졌다. 슈텐의 분신들과의 싸움은 객관적으로 판단해 봐도 결코, 좋은 수행이라 보기 힘들었다. 한 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목숨이 걸린 사투. 만약, 분신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렇게 된다고 해도 슈텐은 관망할 뿐, 죽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구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자에게 지도를 구하고 스승으로 둔다는 것 자체가 바보 소리로도 모지랄 어리석음의 소치였다.
가짜 센라는 쓴 소리 하는 것도 질렀는지, 화제를 바꿔 다른 것을 물었다.
"그.. 뭐냐. 너 내가 준 힘은 잘 쓰고 있냐?"
─ 부끄럽지만, 아직 절반도 끌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건 당연한 거고. 내가 지금 수준이 될 때 까지 얼마나 수많은 노력과 고행이 있었을 것 같냐? 매일매일이 사투의 연속이었어. 그런 치열한 싸움 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아남았으니 그만한 힘을 얻은 거지. 그런데 그런 힘을 고작 물러 받은 걸로 마음대로 휘두르겠다?"
한숨 소리. 가짜 센라는 '나 참'하고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치사한 일이지. 그러니까, 너 이왕 슈텐에게 지도 받게 된 거 한 번 죽을 고생 해보라고.
혹시나 내 힘을 온전히 쓸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
─ 그럴 참이에요.
"그래. 알았으니, 나 이제 가 보련다. 너도 깨어날 때 다 됐으니까."
─ 선배. 저 아직..
시간이 되었다는 듯 희미해져가는 선배의 인영을 붙잡아 두고 싶은 코우는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으나,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주변은 다시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떠봐, 인마!
그 슈텐의 목소리에 심층으로 가라앉았던 코우의 의식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현실 세계로 복귀 시켰다.
*
슈텐은 바위 위에서 코우가 스스로 깨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답답해진 그녀는 발을 굴려 바위를 지면 아래로 돌려보내고 자신이 직접 깨우기로 한 것이었다.
처음엔 발로 툭툭 차보기도 하고, 얼굴을 가까이 하여 귓가에 '후-'하고 입김을 불어 넣어 보기도 했다. 그래도 좀처럼 깨지 않자,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등 못된 장난질을 치다 그것도 질려서 이젠 그만 일어나 보라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해진 것인지, 코우는 몸을 뒤척이면서 간신히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린 코우에게 슈텐이 가장 먼저 건넨 말은 비아냥이었다.
"이제 일어났네. 너 새끼, 오니면서 왜 이래 허약해 빠졌어? 분신한테 옆구리 한 대 맞았다고 기절한 거야? 새끼가 완전 약골이네."
어이 없어하며 헛웃음을 뱉어낸 슈텐은 비틀 거리며 일어선 코우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며 자기 나름의 위로를 해주었다. 물론, 그런 행동이 타인의 시각으로는 절대 위로일 수는 없겠지만.
이제 슈텐의 추행이 익숙해진 코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애써 태연한척 하는 코우의 모습에 슈텐은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기절한 거 치곤 멀쩡하네."
흙먼지를 다 털고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코우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왜 뻗은 거야? 솔직히 엄살 부린 거로는 보이지 않던데?"
"힘을 다 소진했을 뿐입니다."
"그거 가지고 힘을 소진해? 이거 완전 조루 새끼아냐. 근데, 힘 다 썼다고 뻗냐? 니가 오늘 내일 하는 할배냐? 겉은 새파란 게 속은 완전 썩었구먼. 너 사실 대로 말해봐. 안 서지?"
코우가 하도 약골이어서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슈텐이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말을 거르지도 않고 막 던졌다. 이 새끼, 분명 발기부전일거야. 코우의 상태를 제멋대로 단정한 슈텐은 손을 뻗어 코우의 사타구니를 스윽- 하고 기습적으로 훑어 올렸다. 갑작스런 추행에 코우는 극도로 경계하며 거리를 벌렸다.
자신에게 쏘아지는 불만 많은 눈빛에 슈텐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안 서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벌써부터 불능이라니. 쯧쯧."
불쌍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코우가 바로 부정했다.
"저 불능 아닙니다."
"말로는 뭘 못 해? 불능 아니라면 한 번 세워 봐!"
그러자, 슈텐이 대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코우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한들 어쩌라는 건지. 그러나 슈텐의 눈빛은 진지했다. 단순한 농이 아니라 진심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슈텐의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이후, 슈텐이 코우를 보며 불능새끼라고 질릴 때까지 놀려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