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나타는 다리에 쥐가 났음에 불구하고 레이센을 약 올려주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방을 나갔다. 그렇지만 아무리봐도 좀 어정쩡한 걸음이었다. 방문이 닫히자, 그제서야 에이린은 싸늘한 시선을 살짝 풀며 레이센을 일으켜세웠다.
"이제 일어나도 돼."
"네!"
레이센은 벌떡 일어났다. 피가 쏠려 머리가 띵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레이센은 부동의 차렷 자세를 유지한 채로 똑바로 서있었다. 에이린이 물었다.
"힘드니?"
"아뇨.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레이센은 그 말을 목구멍 뒤로 넘기며 마음 속으로 곱씹었다.
"뭐, 달리 별 할말은 없고……."
별 할 말이 없으니 머리 박으라고 시킨거 였군요, 스승님. 레이센은 다시 마음 속으로만 곱씹었다. 에이린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나타를 감시하는 거 잊지 말아줬으면 해. 시간날 때마다 몰래 감시하는 것도 괜찮고."
"……그게 목적이었군요?"
"그래."
에이린은 '그게'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한편 레이센은 그 답변으로부터 에이린이 아나타에게 집안일을 시킨 이유를 간단히 짐작해냈다. 바로 아나타를 감시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나 재활운동 같은 것은 아나타를 납득시키기 위한 명분이었다. 근데 그렇다면 에이린은 아나타를 의심하고 있다는 소리가 되버린다.
레이센은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에이린이 아나타를 의심한다는 것. 물론 아나타가 무언가 수상쩍긴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라 에이린이 아나타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갖는 것은 이해도, 납득도 할 수 없었다. 레이센이 생각하기에 에이린이 의심할만한 존재는 손에 꼽을 만할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그 존재들은 그만큼 강대하다. 예를 들어, 환상향의 관리자 야쿠모 유카리. 그 기분 나쁜 요괴 정도를 떠올린 레이센은 인상을 찌푸렸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전쟁은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잔혹하다. 한 때, 야쿠모 유카리가 환상향의 강력한 요괴들을 이끌고 달의 도시를 침략한 적이 있다. 1차 월면전쟁. 달의 두뇌라고 불리는 그녀의 스승, 야고코로 에이린이 달의 공전주기를 조작한다는 그 누구도 생각못한 작전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역시 전쟁이었으며,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잔혹했다. 수많은 요괴들이 죽어나가고, 레이센의 친구들이 죽어나갔다.
야쿠모 유카리, 그녀만 아니었다면 전쟁이 벌어지지도, 달토끼들이 죽어나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기분 나쁜 건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잔혹한 전쟁 속에서 야쿠모 유카리, 그녀는 혼자 웃고 있었다. 그런 존재에 비하면 수상쩍긴 하지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청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나타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경쓸 필요도 없다.
에이린은 레이센이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경계의 저주."
레이센은 에이린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경악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나타는 경계의 저주에 걸려 있어. 분명 야쿠모 유카리, 그녀의 짓이겠지. 지금이야 눈이 잘 안보이는 정도겠지만 결국엔……."
에이린은 레이센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뒷말을 흐렸다. 오랫동안 머리를 박고 있던 덕분에 새빨겠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경계의 저주'에 대해선 레이센도 알고 있었다. 경계의 저주라는 것은 그 사람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경계의 저주의 첫 증상은 항상 눈에서부터 나타났다.
눈으로 대상을 본다는 것은, 대상과 배경을 경계 짓는다는 것. 하지만 그 경계가 사라진다면? 대상과 배경의 구분이 사라져, 대상을 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대상과 배경을 경계 지을 수 없게 되니까.
그것을 시작으로 경계의 저주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경계가 하나씩 사라져가게 된다.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가지는 한계라는 경계 역시 사라질 수 있다. 또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가 사라져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 경계의 저주에 걸린 레이센의 친구들은 그걸 감당하지 못하고 모두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자기 자신이라는 경계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버린 자들은 결국 서서히 잊혀져 간다. 레이센은 친구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생겼는 지, 목소리는 어땠는 지, 성격은 어땠는 지, 심지어 이름조차도 떠올리기 힘들었다. 레이센은 잊으려고 했던 기억이 부상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는 주저하며 말했다.
"제가 생각하는 그 저주가 맞나요……?"
"그래. 수많은 달토끼들과 월인들을 없애버린 그 저주야."
"……."
야쿠모 유카리는 1차 월면전쟁에서 그 저주를 뿌린 이후로는 한 번도 그 저주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저주는 야쿠모 유카리에게도 양날의 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리지만 그 전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어째서 그 요괴가 아나타에게……."
레이센의 머릿 속에선 아나타의 모습과 희미해진 친구들의 모습이 서서히 겹쳐져 갔다. 레이센은 그걸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에이린은 레이센이 암울해하는 것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때? 궁금하지?"
에이린은 이때까지와는 다른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레이센의 머릿 속에선 전쟁의 상처와 아나타의 어리숙한 모습이 서로 엇갈렸다. 에이린은 아직도 어두운 레이센의 얼굴을 보며 이어서 말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마. 그냥 그녀의 장난일 수도 있다고."
"……예."
레이센은 그렇게 대답하며 과거로부터 도피했다. 전쟁을 잊기 위해. 슬픔과 아픔을 잊기 위해. 그래. 아나타는 그냥 바보같은 인간일 뿐이야.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야. 과거로부터 멀어져 갈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 레이센은 매듭을 짓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나타는 그냥 바보일테고요."
우당탕! 쨍그랑! 와장창!
레이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 레이센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에이린에게 말했다.
"그렇죠, 스승님?"
레이센은 그 소리가 어쩐지 반갑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이린에게는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레이센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소를 짓고 있던 에이린은 한슴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통을 앓는 사람처럼 이마를 부여잡았다. 에이린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네. 레이센."
레이센은 여전히 미소를 띄우고 있다가 곧 에이린의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 마디는 분명 동의의 말투였지만, 두 번째 마디는 동의의 말투가 아니었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무언가를 시키려는 듯한…… 시키려는?
"머리 박아."
레이센은 머리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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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복붙이지만
일단 복귀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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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써놓은거 뒤늦게 올리는 중인건 안비밀 | 17.09.06 21:2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