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치 아픈 문제를 떠안고 있으면서도 평상심을 유지하던 쵸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려냈다. 인내심에 한계를 드려낸 언짢아하는 반응에 센라와 코우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향했다. 화가 단단히 난 듯 센라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몹시 사나웠다.
"얼마나 더 날 곤란하게 만들 셈이야? 오니가 한 번 내뱉은 말은 지켜야지."
그렇게 내뱉는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시리도록 냉랭했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의 박력에 센라는 고집을 꺾고 머쓱하게 사과했다.
"어.. 미안. 오니가 한 입에 두 말하면 안 되는 거였지."
"알고 있다면, 어서 백귀야행의 선두에나 서라고."
쌀쌀맞게 말하면서 가리킨 쪽엔 각양각색의 요괴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있었다. 요괴들은 한참 전에 백귀야행을 이루고 있었지만, 선두를 맡을 센라를 기다리느라 행군이 지체되고 있었다. 센라는 '알았어!' 한 마디 남기고 성큼 거리며 백귀야행에게 걸어갔다. 눈치를 살피던 코우도 보폭이 큰 선배를 쫒으며 뛰어간다.
두 요괴가 떠나가고, 남겨진 코우는 조용히 백귀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오니의 등장에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선두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했다.
*
겁먹은 요괴들을 진정 시키느라 코우는 부단히 노력했다. 선배가 무해하다는 것을 -사실과 다르더라도- 이해시키기 위해 좋은 말로 포장해 보기도 하고 선배를 설득해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도록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간신히 달아나는 것만 막았을 뿐, 안심하지 못하고 동요하는 것 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이래서야 백귀야행은 마을을 돌아보기도 전에 해산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배의 간절한 부탁에 자신답지 않게 유해 보이도록 행동했건만, 요괴들의 신통치 않은 반응에 센라는 답답한 듯 짜증이 일었다. 뭐하려 이렇게 까지 해가며 달래야 하나. 귀찮아진 그는 차라리 겁박을 줘서라도 따르게 하고 싶어졌다. 굳어진 그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불길함을 느낀 코우가 말리는 어조로 센라에게 말했다.
"선배, 성급해 하실 거 없어요! 이분들은 그저 안 좋은 소문 때문에 무서워하고 있으니까, 선배가 소문과 다르다는 것만 알면 더는 무서워하지 않을 거라고요."
"고작 소문 가지고 저러는 거야 나도 마음에 들지 않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오니가 무서운 게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런데 왜 내가 쭉정이 같이 어벙하게 굴어야 하냐고. ㅆㅂ, 다 때려 치고 계집애나 ㅁㅁ으려갈란다!"
"그렇게 왜 약속을 섣불리 해가지고."
"니미럴... 그래! 니 말이 맞다. 무턱대고 약속한 내가 등신이지. 투덜거리고 있어봤자, 뭔 소용이야? 이래나 저래나 내가 저 놈들 따르게 해야 할 거 아니냐."
섣부른 약속을 해버린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할 틈도 없이 센라는 몸을 돌려 백귀야행을 이끌기 위해 길게 꼬리를 물고 있는 요괴들을 향해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여기에 주목-!!"
행렬의 끝자락 까지 퍼져가는 외침에 전원의 이목이 센라에게 집중되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어 조용한 가운데, 센라는 경계하는 시선을 받아가며 흠, 목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하룻밤만 백귀야행의 선두를 맡게 된 시소우 센라다. 보는 것과 같이 오니다! 그래, 무서운 오니니까, 니들이 겁을 먹든 오줌을 지리든 ↗도 상관 안 한다. 그 대신.."
열띤 목소리로 연설을 이어가던 센라가 도중 입을 다물고 행렬을 이루고 있는 요괴들을 눈으로 쭉 훑었다. 누구하나 건성으로 듣지 않고, 모두가 집중해서 듣고 있는 모습이었다. 만족해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센라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있다고 백귀야행 그만두고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네들 두목에게 부탁 받아 하는 일이고, 여기 내 후배도 네놈들이 겁먹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으니까 말이야."
곁에서 센라의 발언을 듣고 있던 코우는 그의 팔에 휘감겨 뜻하지 않게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요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낀 코우는 멋쩍어하며 시선을 내렸다. 우악스런 팔로 부끄러워하는 후배를 자신의 옆구리에 밀착 시킨 센라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뜸을 들인 후, 아무튼 하면서 이어 말했다.
"불만이 있으면 받아 줄 테니까, 얼마든지 덤벼 보라고!"
그걸로 충분히 이해 시켰다고 생각했는지, 센라는 입을 다물고 찬찬히 요괴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짧은 시간이 지나가고, 조용하던 요괴들에게서 점차 수군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파도가 되어 시끌벅적한 소음으로 변해갔다. 그가 오늘 하루 백귀야행을 선두에서 이끌어 가게 된 것은 수장인 쵸의 부탁에 의해서이다. 게다가 누가 오니에게 불만을 제기하겠는가.
그럼에도 선 듯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공포라는 감정 때문이었다. 밤거리를 거니는 백귀야행이란 본디 흥에 겨워야 하는데, 이래서야 흥이 나기는커녕 초상 지내는 행렬이 되고 만다. 쵸가 보증하고, 착실한 후배를 둔 것을 보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거스르기 힘든 본능적인 두려움이 요괴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요괴들을 뒤로한 채, 센라는 우렁찬 목소리를 앞으로 내질렀다.
"우물쭈물 그만 하고, 힘차게 가보자!"
거기에 호응하듯 '오우!'하는 함성이 들러왔지만, 어딘지 모르게 맥이 빠져 있었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큰길을 따라 마을 중심부로 향하는 센라를 따라 요괴들도 열을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젯밤과 같은 흥겨움은 없지만, 그래도 백귀야행이다. 북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 떠있는 등불들이 춤을 춘다. 앞장서서 걷던 센라는 도중에 신이 났는지, 히죽 웃었다. 그의 곁에서 코우는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인 얼굴로 뒤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행여나 세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을 중심의 우물가를 가로질려 갈 때였다. 평소와 달리 침체되어 있던 백귀야행이 점차 열기를 띠며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던 코우에게 익숙한 모습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서 기뻐요."
어젯밤 그와 만남을 기약했던 세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긴 행렬을 뚫고 와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이마에 살짝 땀이 배어나와 있었다.
"저.. 저도요!"
코우는 그녀와 재회한 기쁨을 얼굴로 드려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에게서 자못 뜨거운 시선을 느낀 세이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고,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백귀야행 중에 연애질이냐?"
"저게 염장을 지르고 앉았네!"
"죽창.. 죽창이 필요하다!"
"잘 가, 내 사랑.. 흑.."
야유를 내뱉은 요괴 중에 눈앞에서 실연을 당한 자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둘이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을 때, 돌연 선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오니에 대한 공포도 잊고 한창 흥겨워하고 있던 요괴들의 표정이 하나 둘 씩 굳어졌고, 수줍어하던 세이 마저 코우의 등 뒤를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갑작스런 요괴들의 반응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코우는 긴장된 기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보인 것은 집채만 한 크기의 거대한 검은 인영이 형형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코우는 그것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마, 자신의 표정도 다른 이들과 같으리라.
"또.. 또다!"
질색한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저 거대한 인영이 백귀야행을 가로막은 건 이번 한 번 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코우는 저 그림자에 휩싸인 인영으로부터 저항할 수없는 절대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마주친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어오는 기분 나쁜 불쾌감이 두려움과 함께 전신을 마비 시켰다. 그는 저 무섭고 불쾌한 인영을 처음 봤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낮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하지 못하지만, 저것을 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저것을 보고 있노라면 두렵고,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저렇게 까지 거부감이 드는 존재는 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이젠 절망스럽기 까지 했다.
코우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부터 통곡에 가까운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이성을 잃은 것 같은 절규 소리가 터져 나와 흥겹던 백귀야행은 비통의 행렬로 탈바꿈해 버렸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해서 고개를 돌린 코우의 눈에 절망으로 일그러진 세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도대체 '저것'이 무엇이기에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가 절망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고개를 제자리로 돌린 코우는 이번엔 센라의 등을 바라보았다. 선배도 자신과 요괴들처럼 절망하고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부정하듯 센라의 등이 거리낌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게 또 무슨 조화냐? 이 손으로 직접 쳐 죽여 버린 빌어먹을 놈들이 왜 내 눈앞에 멀쩡히 살아있냔 말이다."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센라의 등을 바라보며, 코우는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선배는 '저것' 두렵지 않은 걸까. 자신을 포함한 여느 요괴와는 격을 달리하는 센라의 뒷모습이 너무도 크고 안심이 되어 코우는 극심한 공포심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공포심을 누그러뜨린 것은 코우 뿐만이 아니었다.
형상화된 공포에 향하는 센라의 당당한 모습에 통곡과 절규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런 광경에 코우는 괜스레 선배가 자랑스러워 졌다. 이걸로 선배에 대한 인상이 좋아 졌을 거야. 그렇게 확신하며 불길한 인영과 마주한 선배의 멋진 모습을 응시하는 코우였다.
"왜 멀뚱히 서있어? 나한테 원한이 있는 거라면,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그런데, 선배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모두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공포스런 '저것'에 겁먹지 않고 대항하는 건 대단하지만, 그보다 '저것'에게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선배가 무어라 하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확실한 것은 선배와 '저것'이 구면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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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에서 원작캐가 나왔음.
아무튼 나왔음.
누군지 알아 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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