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마관 소녀들이 이끄는 운과 선택의 모험, 허풍쟁이 산의 마리사
인디 규모로 출발해 어엿한 메이저로 올라선 게임 IP는 꽤 많지만, 그 가운데 장장 30년간 지속되며 본래 정체성을 유지한 경우는 ‘동방 프로젝트(東方Project)’가 유일하지 싶다. 이는 원작자 ZUN이 소위 동인(同人) 정신에 입각해 2차 창작을 거진 무제한 수용한 덕분이기도 하다. 혼자서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IP 확장이 수많은 동료, 선후배 동인에 의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다만 원작이 탄막 슈팅이라 2차 창작도 액션에 편중된 경향이 있는데, 이달 19일 한국어화 정식 발매될 ‘허풍쟁이 산의 마리사’는 모처럼 완전히 색다른 기획이다. TRPG와 아날로그 게임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TRPG와 게임북에 착안한 '동방' 공인 2차 창작 '허풍쟁이 산의 마리사'
TRPG(tabletop role-playing game)는 문자 그대로 여러 명이 탁자에 둘러앉아 떠들며 즐기는 방식이다. 반면 ‘허풍쟁이 산의 마리사’는 혼자 즐기는 비디오 게임이므로 이 역할을 레밀리아, 플랑드르, 사쿠야, 파츄리-지면 관계상 ‘동방’ 캐릭터들 상세 정보는 생략하겠다-가 맡았다.
어느 날 묘한 게임북을 들고 홍마관에 방문한 파츄리는 한 가지 이야기를 꺼내는데, 친구 마리사를 찾으러 간 주인공 레이무가 갑작스레 마법서에 빨려 들어갔다고. 공교롭게도 파츄리가 게임북이라 가져온 것과 똑같이 생긴 책에 말이다. 그렇게 넷은 실제로 레이무가 겪는 모험일지도 모를 게임을 시작한다.
함께 별을 보자던 마리사가 사라지고, 레이무 역시 마법서로 빨려 들어간다
…라고 적긴 했으나 실제로 레이무를 조작하는 건 본작의 진짜 플레이어, 그러니까 우리다. 게임 속 배경은 마치 팝업북이 펼쳐진 모습이며 레이무를 비롯한 등장인물은 말판의 기물처럼 표현된다. 이 레이무를 원하는 위치로 움직여 GM(Game Master, 아나운서 마츠자와 네키가 녹음)의 해설을 듣고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자.
이때 레밀리아, 플랑드르, 사쿠야, 파츄리는 각자 성격에 어울리는 의견을 낸다. 파츄리는 지식 추구, 사쿠야는 준비 철저, 레밀리아는 대화 우선, 플랑은 냅다 때려 부수기. 누구 의견을 듣느냐에 따라 다음 행동이 달라짐은 물론 해당 캐릭터의 영향력 수치가 오른다.
홍마관의 네 소녀 중 누구 손을 들어줄지는 자유, 물론 그 결과가 뒤따른다만
여기서 최고의 선택을 했다면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주사위 굴림이 이어진다. 주사위 두 개를 굴려 그 눈을 더하는데 이 결과 역시 여러 가지다. 가령 적의 공격을 피할 때 4 이하는 실패, 9 이상은 성공, 사잇값은 절반쯤 피했다는 식. 앞서 사쿠야 의견을 들어 수비를 굳혔다면 성공의 폭이 넓어질 테고 플랑 말마따나 무작정 되받아쳤다면 그 반대일 터.
다만 꼭 높은 눈이 나와야 좋은 게 아니라 종종 아주 낮은 수, 혹은 까다로운 사이값을 요구하기도 한다. 따라서 미리 다종다양한 주사위를 모아뒀다 시기적절이 활용하는 게 ‘허풍쟁이 산의 마리사’를 쉬이 공략하는 요령이다.
선택이 판단의 영역이라면 주사위는 운의 영역, 물론 CP 같은 안전장치가 존재
그렇다면 주사위는 어떻게 모을까? 레이무가 적과 싸워 이기거나 퍼즐을 푸는 등 주어진 난관을 타계하면 소정의 경험치와 주사위 획득 기회가 주어진다. 승부사, 놀라움, 중용처럼 주사위 명칭으로 그 효과를 가늠할 수 있는데 일례로 짝을 찾는 마음은 모든 면이 짝수 눈으로 구성됐다.
또한 경험치가 10 모여 레벨이 오르면 레이무의 능력치(HP, CP, ATK)나 주사위 소지 상한을 늘리는 것도 가능하다. HP(히트 포인트)야 흔히 아는 개념과 같고 CP(치트 포인트)는 주사위를 다시 굴리고 싶을 때 쓴다. ATK(공격력)은 공격 시 최종 피해량에 가산된다. 본인 운이 좀 따르는 편인지 고려하며 육성하자.
HP, CP를 우선할지 ATK에 모조리 투자할지. 본인의 끗발을 고려해 육성하자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시스템 소개이고, 이제 실제로 게임이 어떻게 흘러가지는 살펴보자. 레이무가 빨려 들어간 마법서 내부는 수많은 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서관이다. 올빼미처럼 생긴 사서장이 관리하는 이곳은 장서를 좀먹는 종이벌레가 득시글대며, 무엇보다 마리사의 어두운 일면 같은 존재가 호시탐탐 레이무를 노린다.
필자는 게임 초반부를 시연했을 뿐이지만 이 마법서, 즉 도서관이 마리사의 심상 세계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하는 바다. 문제는 도서관 내부가 미로처럼 얽힌 데다 곳곳이 파손돼 곧장 오르내리기 힘들다는 것.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진득이 탐험할 수밖에 없다.
마리사의 어두운 일면을 품은 도서관은 높고 깊고 신비로우며 혼란스러운 공간
평소 TRPG와 아날로그 게임북을 즐긴다는 디렉터 토쿠오카 마사토시의 취향이 깃들었지 싶은데, 탐험 방식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고전적이다. 명확한 방향과 단서를 제공하기보다 게이머 스스로 답을 고민해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는 식.
일례로 사서에게 말을 걸 때마다 종이벌레가 튀어나오는 층이 있다. 딱히 강한 적이 아니라 처치하긴 어렵지 않으나 그래서 어떻게 다음 층으로 갈지 막막하다. 이때 정답은 회랑을 내려가는 방향으로 찬다, 이다. 그리고 뒤쫓아 내려가면 굴러온 종이벌레에 놀란 책들이 날아서 도망치니 얼른 거기 매달리자. 이렇듯 머리 좀 굴려야 하는 퍼즐이 많다.
퍼즐은 A를 하면 B가 되지 않을까? 같이 어느 정도 머리를 굴려야 하는 방식
보다시피 ‘허풍쟁이 산의 마리사’는 빈말로도 모두를 위한 게임이라 권하기 어렵다. 물론 TRPG나 아날로그 게임북을 엄밀히 재현하려는 무리수도 아니고 되려 룰과 시스템은 간소화된 편이다. 다만 꼼꼼히 글을 읽고 한 번 더 고민하며 시간 들여 즐기는 방식이 요즘 대중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인디, 동인 게임답다고도 할 수 있겠다. 메이저가 좀체 시도하기 힘든 기획, 뼛속까지 게이머인 괴짜 디렉터의 마니악한 비전이 ‘동방’과 함께 결실을 맺었다. 모두를 위한 게임은 아닐지언정 누군가는 올해 최고의 게임을 꼽을지 모를, 그만한 잠재력을 지닌 작품이다.
CLEK가 이런 거 참 잘 챙긴다. '동방' 팬에게 선물 같은 한정판도 정식 발매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