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
멸망 전 한 때 세계 최강의 패권을 자랑하던 국가. 자유진영의 선봉이자 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 중 하나이며, 역사상 다시는 유래 없을 세계 최고(最古)의 다국적 연합군사기구인 NATO의 전력국가였던 미합중국의 심장과도 같은 곳. 그 위상은 철충으로부터 인류가 멸망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듯, 인류가 멸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대도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 멸망 전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건물들이 블록마다 나라비로 세워져 있고, 도로는 잘 포장되어져 있으며, 도시의 조경 또한 아름답게 잘 조성되어져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지만.
인류가 멸망 직후, 펙스의 수장 대리이자 레모네이드 비서들의 수장인 오메가는 회장들이 부활할 때를 대비하여 바이오로이드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워싱턴과 뉴욕을 비롯한 대도시들을 복원하였다. 그래서 겉으로는 온전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사는 도시는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도시에는 “사람” 이 없으니깐. 도시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은 그저 도시의 기능을 하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부속 부품에 불과했다.
이 거대한 워싱턴의 도심을 복원한 것도 그 부속품이라고 불리는 바이오로이드 노동자들이 피땀흘려 오랜 세월에 거쳐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1세기에 거쳐서 수도 워싱턴을 복원한 것에 대한 대가는 겨우 한 숨 돌리고 잘 수 있을 정도로 좁고 허름한 방에, 그나마 굶어 죽지만은 않을 정도로 배급나오는 맛 없는 딱딱한 빵과 물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불규칙적으로 나오거나 아예 배급이 안 나오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며, 또 어떤 날에는 빵도 크래커도 아닌, 원재료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무틔틔하고 물컹한 단백질 바가 나오는 날도 있었다.
오메가의 참모이자 비서인 유미도 마찬가지였다.
“... 으으...”
“벌써 새벽 4시야...”
평소 백악관 중앙 관저에서 따뜻하고 폭신하게 숙면을 취하고 있을 오메가를 생각한다면, 유미는 속으로 몇 번이고 오메가를 죽일 수 있었다.
적어도 잠이라도 좀 편하게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마저도 유미는 허락받지 못했다.
평소에도 항상 새벽 4시 언저리에 일어나 오메가의 앞치다꺼리부터 준비를 해야만 하는데다가, 하루가 끝나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녀의 뒤치다꺼리까지 다 마무리를 한 뒤에 오메가가 시킨 작업까지 다 해야지만 그녀의 일과가 끝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다음 날 자정이 되어서야 끝나서 그렇지. 그렇게 겨우 집에 기어 들어가서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워 눈이라도 붙이면 금방 다시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그녀를 괴롭혔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몇 번 했지만, 그러기에는 다른 자기가 죽었을 때 남겨져 고통 받을 자매들이 눈 앞에 아른 거려서 그러지도 못했다.
차라리 당장에라도 오메가를 찔러 죽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에는 그럴 수 없으니 속으로라도 유미는 오메가의 심장에 칼을 몇 번이고 찌르는 상상만 할 뿐이었다.
그나마 꼬시는 건 평소 자신보다 두 배는 넘는 시간을 자는 오메가도 요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오메가는 철충의 침공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던 펙소 콘소시엄의 영토에 최초로, 그것도 철충도 아닌 다른 바이오로이드 군벌 세력의 공격으로 인하여 지난 사흘 동안을 밤잠을 설쳐야만 했었다. 혹시라도 또 침공할 군벌 세력의 공격에 대비하여 오메가는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 내 모든 펙소 콘소시엄의 도시에 대공망을 강화시켰고,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서부 해안 일대에 해안 경계를 강화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오메가는 자신의 개인의 경호까지 강화를 하였다.
수도 워싱턴을 재건할 때에도 그렇고, 더치걸 한 명이 고층에서 작업하다 떨어져 죽은 걸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시체를 치워버리라고 한 주제에, 제 목숨은 소중한지 자신의 대한 경호를 강화하라는 지시에 유미는 어이가 없었다.
그 와중에 오메가는 자신의 개인 비서 겸 참모인 유미더러는, 저 목숨은 알아서 부지해야지 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목숨만 지키려는 모습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지금 쯤이면 오려나...”
“아, 저기 오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한 유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 밖으로 나와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러자 저 멀리서 어둠을 뚫고 고급진 SUV 한 대가 조용히 나타났다.
“유미 씨.”
“리스트컷 씨, 오랜 만이네요.”
“델타 님은요?”
“뒷 자리에. 귀마개에 안대까지 하고 아주 그냥 세상 팔자 핀 사람 마냥 곤히 퍼질러 자고 있네요.”
“알래스카에서 그 지경을 겪고도 저렇게 자고 있다니...”
“우리 서로 이런 일로 만나지 말자고 약속했었었는데, 또 지키지 못했네요.”
“그 약속 아직도 유효한가요? 전 솔직히 포기했는데...”
“...”
“저도 반쯤 포기했어요.”
“일단 타시죠. 바로 중앙 관저로로 가면 될까요?”
“예, 아마 오메가도 지금 쯤 일어나 있을 겁니다.”
유미의 앞에서 차를 세우고 차창을 내려 나타난 사람.
바로 레모네이드 델타 세력의 참모이자 델타의 비서인 테일러 리스트컷이었다.
동북아시아의 신흥 군벌 세력이 알래스카 페어뱅크스 공동관할구역에 대규모 공습을 가한 후, 폭격 속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레모네이드 델타와 그녀의 비서인 테일러 리스트컷이 곧 워싱턴에 도착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비행장에 전용기마저 불타버리는 바람에 지상길로 피난을 올 수 밖에 없었던 델타와 리스트컷은, 알래스카에서 오는데에는 무려 사흘이란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워싱턴에 도착할 수 있었다.
65시간을 쉬지 않고 운전하였기에 졸릴 법도 하겠지만, 리스트컷은 의외로 전혀 피곤한 기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안 피곤 해요? 얼마나 운전해서 왔어요?”
“한... 65시간 정도?”
“쉬지도 않구요?”
“아니, 어떻게요?”
“아시면서.”
“아...”
“... 네, 그랬죠, 참...”
유미는 리스트컷의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여나 델타가 들을 까봐 하는 것도 있었지만, 유미는 리스트컷의 그 네 글자 한 마디가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이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로터리를 빠져나왔다. 침묵 속에서 셋은 로터리를 나온 뒤 29번 국도를 타서 다운타운으로 진입하였고, 그 이후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쭈욱- 달려 백악관에 도착하였다. 중앙관저랑 웨스트윙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오메가가 깨어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백악관에 도착할 즈음이 되어서야 리스트컷도 델타를 깨웠다. 자면서도 회장님을 찾던 델타는 비몽사몽해 하며 겨우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유미가 리스트컷과 델타를 데리고 중앙관저에 들어가자 오메가는 잔뜩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집무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역겨운 배신자들 같으니라고...”
“오랫동안 자매들을 등쳐먹은 걸로도 모자라서 감히 우릴 공격해...?!”
“오메가 님?”
“유미! 델타는 데리고 온 거야?!”
“예, 그렇습니다. 같이 뫼셔왔습니다.”
방금 막 잠에서 깬 상태지만 여전히 대규모 공습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델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모양새였다.
비록 레모네이드 자매들끼리 영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제타와 자신과 함께 충성파의 큰 축을 담당하는 델타였기에, 오메가는 그녀를 마치 지극정성으로 대하였다. 물론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말이다. 유미가 리스트컷과 델타와 함께 들어오자 오메가는 곧장 델타에게 달려가 그녀를 폭신한 소파에 앉히고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오메가로부터 차를 건네받은 델타는 목을 축이고 난 뒤, 떠듬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 녀석들이... 그 녀석들이 감히... 회장님의 별장을...! 나와 회장님의 별장을...!!”
“회장님과 나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장소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어...!!!!”
“그래, 그래. 그 놈들이 나쁜 거지.”
‘... 소중한 장소긴 개뿔...’
“당장에라도 쳐들어가야만 해...!! 그 놈들... 그 강아지들을 모조리 다 불태워버리고 말겠어...!!!”
“알파고, 감마고, 모조리 다... 똑같이...!!!!”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깐 진정하자, 일단은.”
“리스트컷? 상황을 좀 대신 설명해주겠어?”
“예, 오메가님.”
“델타 님께서 아시아로 보낸 병력들로부터 연락이 끊긴지 열 두 시간 뒤에, 정체 불명의 폭격기 편대가 페어뱅크스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원래라면 마리오네트 병력들을 추가로 생산하여 후발대를 보낼 예정이었습니다만, 적들의 대규모 공습으로 인해서, 펙스의 마리오네트 및 AGS 생산 설비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레이더 장비 있었을 거 아니야. 거기에도 걸리지 않았단 말이야?”
“스텔스기로 무장한 장거리 전략 폭격 부대 같았습니다. 대공 레이더에는 전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정체 불명의 폭격기 편대라는게 설마...?”
“오메가 님과 델타 님께서 말씀하신 아시아의 신흥 군벌 세력... 아니.”
“정규군 부대입니다. 확실합니다.”
“하아...”
리스트컷의 설명을 들은 오메가는 두통이라도 밀려오는 듯 두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원래라면 멸망 전 미합중국 대통령의 자리였을 서재에 털썩 앉은 오메가는, 조용히 읊조리듯 끓어오르는 분노를 씹어 내뱉듯 말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알아차렸을 때부터 그냥 무력으로 밀고 쳐들어갔었어야 했었던 건데...”
“철충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골치 아픈데, 이젠 배신자들에 정규군 세력이라니... 알파와 감마를 믿고 보냈던게 내 실책으로 돌아올 줄이야...”
“... 유미?”
“예, 오메가 님.”
“지금 당장 알파에게 VTC(Video teleconferencing : 원격 화상회의)연결하도록 해. 알파가 안 되면 감마 그 년에게라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한 번 들어봐야겠어.”
“예, 알겠습니다.”
“아, 아니야.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유미에게 알파 혹은 감마에게 통신을 연결할 것을 지시한 오메가는 급하게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금방 자신의 지시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리스트컷에게 물었다.
“리스트컷? 분명 거기에 ‘인간’ 이 있다고 그랬었지? 그것도 둘 씩이나.”
“어... 예, 그렇습니다.”
“그럼 거기 우두머리 되는 것도 그 ‘인간’ 들이겠네. 알래스카에 폭격을 퍼부은 것도 분명히 그 작자들이 시킨 일 일테고 말이야...”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아예 그 군벌 세력의 수장이라는 인간이 뭐 하는 사람인지 쌍판떼기 좀 한 번 봐야겠어. 혹시 또 모르잖아? 위기가 기회가 될지.”
“더군다나 그 군벌 세력, 영토가 아시아 권역이라면서?”
“어, 그러니깐... 그건...”
“유미! 알파랑 감마에게 연결하지 말고, 아예 그 군벌 세력에게 바로 통신을 연결할 수 있도록 해. 회선을 찾던지 주파수를 찾던지, 그것도 아니면 앱실론한테 부탁해서 전파라도 납치하던지 최대한 빨리 연결해.”
“...”
“뭘 꾸물대고 있어? 시간없으니깐 빨리 시작해!”
“...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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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중 삽화로 사용되는 그림과 사진의 출처는 구글링과 핀터레스트입니다.
아마 다음 화가 이번 챕터 마지막일 듯 합니다.
미리 다음 챕터를 알려드리자면, 흐린 기억 속의 나라입니다.
챕터 제목은 "두 도시 이야기" 입니다.
아직 바이오로이드들이 인간으로 대우를 받던 시절의 키리시마 스캔들을 다룬 도쿄와,
또 다른 도시에서 동시기에 벌어진 사건의 연관성에 대해서 풀어볼까 합니다.
어떤 나라의 어떤 도시인지, 또 어떤 사건인지 한 번 예상해보시길 바라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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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옛시절이죠 | 23.12.28 19: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