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부처인 석가모니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출연한 부처는 28명. 미륵은 석가모니의 열반 이후,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난다는 29번째 부처다. 먼 미래 이상적인 국토로 변한 사바세계는 병도 수명도 존재하지 않는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찬 이상적인 세상. 그것이 바로 미륵이 강림하는 미륵정토다.
궁예는 먼 과거, 철원에 도읍을 세우고 태봉국이라 명한 땅에서 이상적인 세상, 미륵정토를 실현 시키고자 했다.
한 번은 좌절 되었던 염원.
사토리(궁예)는 이번에야 말로 실현 시키겠다는 집념으로 불경을 외운다.
「옴 마니 반메훔! 옴 살바 못다 모지 사다야 사바하!」
극락으로 가는 육자진언.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는 사토리의 몸에서 요상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거대한 불상의 형태를 이루었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는 그녀의 성스러운 자태에 추종자들은 탄식하며 황홀해한다.
「오오! 이 얼마나 신성하신 모습인가!」
사토리의 배후에 생겨난 찬란하게 빛나는 불상. 오니들의 눈엔 그것이 무엇보다 위엄있게 보여졌다. 저분이야 말로 자신들 위에 설 자격이 있는 자라며 모두가 감격의 눈으로 바라본다.
지저마을에 큰 소동을 일으켰던 불신자 폭행건으로 인해 사토리의 추종자는 더욱 늘어나 있었다. 그들 중에서 오니가 아닌 요괴도 있었으며, 그 대다수는 가혹한 폭력에 이기지 못해 굴종하거나 자신도 가해자측이 되고 싶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와있는 자들은 예외 없이 순수하게 사토리의 사상에 감화된 요괴들이다.
저 신성한 모습을 보고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부좌를 푼 사토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로이 신하가 된 요괴들을 환영했다.
「내 그대들을 환영하네. 관심법으로 보아하니 모두들 나를 진심으로 따르는 듯 해 기쁘오.」
서드아이로 읽은 추종자들의 마음에 사토리는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신하들이지만, 다행히도 머릿속에 똥만 찬 똥막대기는 없는 모양이었다. 만약, 그런 미련한 놈이 있다면 철퇴로 때려죽이면 그만이지만.
「지저의 모두가 나를 따르게 된다면, 이 근처에 대법당을 세우고 고승 대덕들을 불러 법회를 열것인데, 어떻는가?」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런가? 그럼, 대법당은 여기 건축을 잘하는 오니와 츠치구모에게 맡기겠네.」
「네엡! 맡겨만 주십시오. 삐까번쩍하게 짓겠습니다.」
중대한 명을 받은 오니들은 의욕이 넘쳤다. 뛰어난 건축 기술을 지니고 있음에도 일이 없어 매일을 술로 보내던 그들은 오랜만에 솜씨를 뽐낼 수 있겠다며 즐거워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츠치구모도 사토리의 지명을 받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대법당에 관한 문제는 대충 해결 되었고, 이제 남은 건 법회에 부를 고승이었다.
「문제는 고승인데... 내가 알기론 여기엔 덕이 높은 법사가 없어.」
사토리가 미륵정토를 세우려고 하는 지저는 애초부터 환상향에서도 두려움과 미움을 사는 요괴들이 쫓겨나다시피 정착한 무법지대. 덕이 높은 고승은커녕 불가의 가르침도 전파되지 않은 땅이었다.
당면의 문제는 아니나, 언젠가는 해결해야할 과제였다.
「부처의 나라를 세우는데, 제대로 된 중 한명 없다니. 이거 참, 탐탁지 않아!」
미륵은 있는데, 스님이 없다. 우스운 촌극이 따로 없었다. 늘어난 신도와 순탄한 계획에 들뜨던 기분이 한 순간에 착찹하게 가라앉는다. 그런 사토리의 지적에 추종자들은 웅성거리며 저마다 의견을 나누며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한 츠치구모가 손을 높이 쳐들었다.
「저기! 법회에 딱 맞는 고승을 알고 있는데요!」
「말해 보아라.」
그의 의견에 사토리가 관심을 보였다. 이어 모두의 이목이 츠치구모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최근 지상에 화제가 되고 있는 스님이 있는데. 글쎄, 비사문천의 화신을 휘하에 두고 있다지 뭡니까. 그 스님은 틀림없이 덕이 높은 고승일겁니다!」
「그 중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히지리 바쿠렌이라고 합니다.」
뜻밖의 희소식에 사토리의 눈이 이채를 되찾는다.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도 풀어져 미소가 지어진 사토리는 옳다구나 하고 말했다.
「히지리 바쿠렌이라고 했던가. 허허허. 비사문천의 화신까지 있다면 자격은 충분하겠군. 그 자에 대해선 이 내가 직접 만나 보겠다.」
골머리를 좀 썩일 줄 알았는데, 그런 인재가 있었다니. 환상향이 어떤 곳인지 잘 아는 사토리는 반쯤 체념하고 있었던 문제였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줄이야. 기쁨을 주체 못해 웃음소리가 계속 새어 나온다.
「오늘 어전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경들은 각자 돌아가, 성실히 맡은 바를 다하길 바라오.」
네! 하는 우렁찬 대답과 함께 로비를 꽉 채운 수많은 추종자들이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요괴들이 썰물처럼 빠져 순식간에 고요해진 로비. 혼자 남은 사토리는 먼 곳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순조로워 점차 현실이 되어가는 미륵정토의 꿈이 그녀를 즐겁게 한다. 전생에서는 막연하기만 했던 대업이 지금은 뻗으면 잡힐 듯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택 밖과 이어진 정문을 바라보며 앞으로 펼쳐질 진정한 낙원에 올라간 입꼬리가 좀 체 내려오지 않는다.
그렇게 히죽대던 사토리의 시야가 일순 흐려졌다. 무언가 강한 충격이 두부에 가해진 것이었다. 실이 끊어진 것처럼 뇌의 제어를 잃은 육신이 황금빛 옥좌에서 미끄러진다. 이윽고,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진 사토리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머리를 뒤로 돌려 자신을 기습한 자를 올려다봤다.
아─. 역시, 너였구나.
진정한 미륵이 된 자신이 가장 경계하던 현생의 여동생. 코메이지 코이시가 그녀를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째서?'라고 묻고 싶지만, 입은 움직이지 않는다. 여동생의 마음을 관심법으로 읽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눈꺼풀이 서서히 감기는 사토리에게 코이시는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리는 데는 충격요법이 좋다고 했어.」
감정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섬뜩한 어조였다.
도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속으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에 딴죽을 거는 사토리의 두부에 다시 한 번 강한 충격이 가해진다.
퍽!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벽돌.
쪼그려 앉은 자세로 언니의 머리를 벽돌로 내려친 코이시는 무덤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완전히 정신을 잃은 언니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 봤다.
들고 있는 벽돌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쓰러진 사토리의 머리 주변도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누가 봐도 살해현장이었다.
죽었을 지도 모를 언니를 내려다보던 코이시가 하얀 이빨을 드려내며 웃었다. 눈이 활처럼 휘었으며 양 입가가 광대뼈까지 올라간다. 자신의 뺨에 피 묻은 손을 갖다 댄 코이시는 희열을 느끼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뱉어냈다.
「후히.. 후하하하하.. 아하하하하-!」
그리고 의식이 없는 언니에게 말을 건넸다.
「언니, 미안해. 하지만, 이걸로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고마워 해야해!」
악의가 없는 그저 비틀린 선의.
상식이 결여된 순수함이 만들어낸 참혹함이었다.
코이시는 쓰러진 언니를 안아 들고 그대로 그녀의 침실로 옮겼다. 바닥에 새겨지는 짙은 선홍빛의 궤적.
심연으로 가라앉은 궁예의 의식은 붉은 카펫에 삼켜진 피처럼 허망하게 사라져갔다. 마치, 덧없는 물거품처럼.
그토록 염원하던 미륵정토의 꿈.
한 망국의 왕자의 망집은 그렇게 끝을 고했다.
*
사토리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오니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믿을 수 없을 만치 빠른 손절인 것이다. 자신이 인정한 지도자에겐 군말 없이 따르지만, 한번이라도 실망하게 되면 등을 돌리는 습성 때문이었다.
추락한 옛 지도자 따윈 관심 없다는 듯 사토리에 대한 얘기를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지독한 족속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약육강식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당연했다. 우두머리에겐 복종하지만, 그 우두머리를 쓰러뜨린 자가 있다면 그 자를 새로운 우두머리로 따른다.
패배한 전(前)우두머리를 쓰러뜨린 자의 신상이 확실했다면 오니들은 그 자를 따랐겠지만, 아쉽게도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탓에 지금은 평온한 일상을 보낼 따름이었다.
「오늘이라도 병문안을 갈까?」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거리를 바라보던 호시구마 유기가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큰 소동으로 번졌던 집단 난동 사태. 그녀는 얼마전에 있었던 그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원흉으로 지목되는 사토리에게 만큼은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본의가 아니었다 해도 결과적으론 상처 입힌 격이니.」
설마, 자신이 한 조언을 말 그대로 실행할 줄이야. 사건이 종결되던 날, 자신을 찾아온 사토리의 여동생의 고민을 들어준 유기는 그녀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주었었다.
'자극을 주면 어떨까?'
아직 도입부인데, 코이시는 그 말만 듣고 사라졌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들려온 사토리가 누군가에게 피습 당했다는 소식.
그러라고 해준 말이 아니었는데.
코이시의 인내심을 얕본 것이 실책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본래 얘기하려던 '추억을 자극'하는 것 따위 보다 확실했으니 나쁘지만은 않은가?
「기분이 참 묘하네.」
고개를 살짝 들고 온통 붉게 타오르는 지저의 하늘을 바라보며, 유기는 슬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사토리는 이제 저택 안의 정원 정도는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요괴답게 불과 이틀 만에 호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하지 않아 걸을 때마자 절뚝거린다.
작은 연못이 있는 뒷마당을 걸으면서 사토리는 며칠간의 기억의 공백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씨름하다 눈을 감은 것만 기억날 뿐. 눈을 떴을 땐,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이나 지났다니.
상처 때문인지 머리가 자꾸만 쑤신다.
간혈적으로 이는 두통에 사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언가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한. 모르겠다. 떠올리려 할수록 두통이 심해진다. 가슴의 서드아이도 떠올리면 안 된다는 듯 핏발이 잔뜩 서있었다.
「아... 아─!」
두통이 멎었을 때는 이마를 비롯해 온몸이 식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다소 거칠어진 숨을 다듬기 위해 심호흡을 크게 한 사토리는 불온한 기색을 느끼고 시선을 뒤로 돌렸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과민반응을 했나 싶어 한숨을 크게 내쉰 사토리.
불현듯 내려다본 연못에는 자신이 비쳐지고 있엇다.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이.
연못에 비쳐진 또 다른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며 불길한 미소를 짓는다.
─사토리요괴인 내가 전생에 궁예였던 건에 대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