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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cted Ones - 58
갈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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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설원 위에 모래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 설원은 언제나, 여태까지 그래왔듯 하얀색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그 빛깔이 변해갔다. 모래와 눈이 뒤섞여,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지층이 생겨났다. 그 기묘한 대지 위로, 한 남자의 신발 자국이 짙게 새겨졌다. 그의 몸무게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무척이나 무거웠기에 커다란 짐승이 뒷발질을 한듯 땅이 움푹 패였다.
폭시와 마찬가지로 하얀 머리를 가진 남자, 양이 지면에서 튀어오르며 발을 뗀 그 순간, 새까만 칼날같은 것이 땅바닥에서 솟아 올랐다. 칼날이 솟아오른 자리에는 그 칼날의 씨앗이 뿌려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모래가 나타났던 그 떄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던 그 자리에 그저 생겨났을 뿐이었다.
칼날이 솟구쳐 오른 뒤로, 남자는 지면에 발을 온전히 올리지 않았다. 양은 오직 앞발만을 이용해, 땅을 콕 짚듯이 찌르고는 토끼처럼 앞으로 뛰어 갔다.
"요리조리 잘 피하는구나."
목소리의 주인은 폭시 크리스타. 여우 귀를 머리 위로 쫑긋 세우고, 허리 아래로는 구름처럼 몽실몽실한 꼬리를 아홉이나 늘어트린 여인. 눈처럼 하얀 머리를 쓸어내리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묘령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세월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을 늘어트렸다. 양을 향하여 섬찟한 공격을 가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어린 아이와 노는 노인처럼 풀어진 목소리였다.
"그럼 이것도 피할 수 있을까."
여인이 몸을 낮추면서, 오른팔을 크게 휘둘러 땅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바닥에서만 치솟던 칼날은 하늘에서 몇 자루나 나타나 하늘을 까맣게 가렸다. 여인이 땅에서 손을 떼자 땅바닥의 칼날과 하늘의 칼날이 입이 닫히듯 서로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후우."
양은 위아래로 덮쳐드는 새까만 칼날 사이로 기다란 창 한자루를 꽂아넣었다. 그것은 여인이 뽑아든 검은 칼날과 마찬가지로, 새까만 창살 하나 였다. 이빨 사이로 기다란 막대가 꽂힌 입은 온전히 닫히지 못 했고, 양은 그 틈을 타서 빠르게 빠져나갔다.
폭시는 재빠르게 팔을 움직여 양에게로 새까만 칼날들을 던졌다. 다섯 갈래로 나뉘어 빠르게 다가오는 칼날들은 커다란 여우의 발톱과도 같았다.
"하압!"
양에게 집중하던 사이, 폭시의 뒤에서 또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합 소리가 들린 동시에 묵직한 주먹이 떨어졌다. 주먹의 주인은 초록 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는 여성, 세라 밀리언스였다. 그녀는 여성치고는 큰 키와 체격을 앞세워서 커다란 바위를 던지듯 폭시에게 공격을 가했다.
폭시는 그 주먹을 재빨리 피하며, 주먹을 내지른 여자에게 발길질을 가했다. 여성은 폭시의 그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으나, 별다른 아픔을 표하지 않고 도리어 폭시의 다리를 잡아 허공에 한 바퀴 돌리기까지 했다. 반 바퀴 정도 돌았을 때, 폭시의 시야에 두 개의 인영이 보였다. 하나는 양, 다른 하나는 세라의 링커인 스트로리였다.
"칫!"
폭시는 자기 머리 위로 떨어질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세라를 세게 걷어차고는 뒤로 튀어나갔다. 그녀가 도망친 자리에서 고작 한 걸음 정도를 두고, 양의 칼날이 땅바닥에 꽂혔다. 폭시는 몇 걸음 뒤로, 가볍게 도약했다.
- 일섬.
"!?"
앞에서 나타난 이들의 공격을 모두 피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등 뒤에서 나지막히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서슬퍼런 칼날이 그녀의 목덜미를 덮치려 했다. 양의 링커인 루어시였다. 폭시는 재빨리 꼬리를 움직여 어린 소녀의 칼을 튕겨내고는 방어를 다잡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싸움이 질질 늘어지자, 폭시는 왼손을 펼쳐 카드 한 장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손에 생겨난 카드는 새까만 카드, 그녀의 링커였다.
"나오너라. 나인……."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링커의 이름을 호명하던 그 순간, 귀를 찌르는 바큇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정체는 샛노란 D휠 한 대. D휠은 칼날이 날아다니고, 지면이 움푹 패이기도 하는 전장으로 난데없이 날아들었다.
"오호."
폭시는 D휠에 타고있는 남자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거친 갈색 머리. 건장한 체격. 걸레짝처럼 찢어진 새빨간 머플러. 그녀가 스쿨에서 본 사람중에 저런 복장을 한 남자는 단 한 명 뿐이었다.
세라는 그 남자에게 소리쳤다.
"어디 갔다가 이제 나와!"
"썬더 스피드 3호를 찾으러 갔었지.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거니까! 근데 저놈은 누구야?"
가온이 폭시를 보고는 물었다. 그가 알고 있는 폭시는 새까만 머리에 새하얀 꼬리를 가진 모습의 여인. 눈 앞에 있는 여성은 모습은 같을지언정 검정이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후후. 후하하!"
폭시는 링커를 거두고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뭐가 웃기지?"
"그래. 이상하다 생각 했느니라."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여성은 가온을 똑바로 쳐다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뺨을 씰룩댔다.
"양과 세라. 이 두 패거리에 네가 같이 껴다니는 것이야 당연한 일인데말이다."
"그게 뭐 어쩄다고."
"누가 죽나.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울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느니라."
여인은 여유롭게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꼬리를 움직였다. 그녀의 아홉 꼬리가 유연하게 움직이더니, 하늘에서 새까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너는 코트 메달리아를 쓰러트려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어딜 가려고!"
가온이 카드 한 장을 뽑아들고 실체화시켰다. 세찬 바람과 함께 뜨거운 불꽃이 폭시를 향해 날아들었다. 폭시는 꼬리들을 움직였다. 새하얀 꼬리 끝은 칼날처럼 날카로워 졌고, 화염을 베어내자 그 주변에 있던 불꽃까지 꺼져버렸다.
새까만 빗물은 바늘처럼 날카롭게 가온을 비롯한 세 사람의 몸을 찔렀다. 가온은 카드를 뽑아들고, 양과 세라는 피부를 두텁게 만들어 그것들을 비껴냈다. 그들이 바늘비를 버텨내자, 폭시는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 년은 내가 쫒겠다."
양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가온이 그를 바라 보았다.
"아까까지 고전하고 있었잖아. 너 혼자서 괜찮겠냐."
"이미 한 번 무승부가 났다. 다음은 이길 뿐이다."
양은 날카롭게 벼린 칼 한 자루를 빼내었다.
"바닥을 봐라."
"이건……모래?"
눈밖에 없을, 있어봐야 먼지같은 탁한 것들이 쌓였을 곳에 갈색 모래알갱이가 있는 것에 가온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까 기둥이 나타나거나 지형이 변하던 것. 눈에 보일만큼 커다란 것들만 변하더니, 이제는 눈 위에 모래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건……."
"여우년이 한 짓은 아닐거다. 그년이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도 이런 걸 할 재주는 없을테니."
"코트 메달리아."
"그래."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은 그녀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라. 나는 그년을 쓰러트린 뒤에 따라가겠다."
"맡긴다."
양이 큼지막한 날개를 활짝 펼치고는 높게 뛰어올랐다. 박쥐처럼 날개를 퍼득거리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링커인 루어시도 어느새 사라졌다. 가온은 다시금 D휠에 시동을 걸고, 세라에게 외쳤다.
"어서 타. 빨리 그녀석을 박살내러 가야지!"
"잠깐. D휠에 타기 전에 우선 마음을 가라앉."
"어서 타래도!"
"끄아아악!"
가온은 짐짝을 실듯이, 세라 밀리언스를 D휠 뒤에 대충 쳐박아 넣었다. 그녀가 무어라 불평하는 소리는 우렁찬 D휠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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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얼(물리) | 17.09.15 12:4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