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1) 살다보면 취향이란게 문득 이상하게 느껴질때가 있지요. 내가 왜 이걸 좋아하지? 가끔은 내가 선택한것 같지가 않단 말이에요.
유물론자들은 유전적 요소라고 설명할수도 있게지만은요. 이게 좀 이상스럽단 말이지요.
가령 제 형은 마요네즈를 좋아하는데 전 케찹을 좋아하지요.
전 이성의 피부가 까만피부를 선호하는데 형은또 희연 것을 좋아한단 말이지요.
같은 환경과 비슷한 형질의 형제가 취향이 다르다는 것은 유물론자들의 설명으로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지요.
종국에는 '문화, 심리, 신체적인 것들이 잘 섞여들어 나라는 존재의 취향이 만들어 졌다'라는 샌님스런 결론에 도달할 것이지요.
1.1) 근데 또 한편으로는 대부분 사람의 취향이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단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모두의 심미적 취향이 개개인의 고유한 특질과 환경에 기여해서 나타난다면, 취향을 다른이와 공유할 수 있을까요?
가령 0or1 같은 이진논리로 사람의 미학적 관점이 규정된다면 이런 문제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겠지마는,
취향이란것이 무척 오묘해서 연두색은 싫은데 민트색은 좋고 그렇단 말이지요.
그런 미묘하고 다양한 취향의 차이가 개개인의 다양한 형질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면,
모두 다른것을 좋아하는 아주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겠지요. (형과 나조차 이렇게 다른데!)
그렇담 아무도 취향을 공유할 수 없을 거지요.
헌데 다음 까페에만 수많은 동호회나 팬까페가 쭉빵 회원수만큼이나 존재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취향을 공유하는 것이지요!
1.2) 그렇다면 취향이란것이 내가 선택한 것 같지도 않고, 너무나도 다양한 것 같은데도, 결국 사람들은 비슷한 것을 좋아한단 말이에요.
결국 인간은 남들과 '다름'이라는 부분을 타고나는데, 취향은 곂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이쯤 되면 '보편 절대적인 인간의 미학적 기준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되고 검증하지 않을수 없는 부분이지요.
따라서 나는 내 취향이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탐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무척 샘솟는 것이었지요.
또 내 취향(심미적 기준)의 발전과 미술사, 혹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등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두개가 합치된다면 경험론적 자료로서 '보편 절대적인 인간의 미학적 기준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다가가는
가치가 있는 것이 되겠지요?
2) 나는 내 미학적 취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음악'을 꼽았습니다.
다른것들은 잠시라도 내곁을 떠난적이 있었지만은, 이 음악, 이 소리만큼은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나 내곁을 떠날줄을 몰랐지요.
당장 이마트에 가도 부탄가스찬가가 흘러나오니 말이지요. 음악이란 것, 결국 미디어의 노예로 즐기며 살아가는 나, 우리에게 가장많이 노출되어 있던
미학의 콘텐츠인 것입니다!
2.1) 시간을 거슬러 어린시절의 나, 나는 음악의 존재자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시각, 미각, 후각등 너무나도 새롭고 다양한 자극들이 나를 기다리고있었지요.
반지사탕의 달콤함, 흙바닥의 섬섬한 촉감, 엄마의 살냄새 등 내게는 즐길만한 콘텐츠가 너무나 많은 것이었습니다.
배부른 강아지에게 벽돌햄이 무슨소용이겠어요? 한숨잘때 베고나 자는 것이지요.
새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앉아서 음악을 진중하게 듣기란 어린 내게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지요.
때문에 미학적 가치에 대한 개념을 숙고하지 않아도 나는 완전한 행복의 존재였지요.
2.2) 시간이 좀 지나서 어린 나도 점점 감정의 섬세함을 깨달았지요. 화남, 슬픔, 기쁨 이런 직선적인 감정들이
화나면서 슬프고, 웃기면서 쓸쓸하기도 하고, 기쁜데 죄책감이 든다거나 하는일로 내 어린감정의 예리함이 날로 담금질 되었지요
이쯤되니 내 감정들이 표현되기에는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음악에 귀를 기울인 것이지요.
왜냐면 언어나 내 존재로는 표현이 안되는 다중복합적 감정들이 아름다운 소리와 노랫말로 내 마음에 와닿는 경험을 하게된 것입니다.
내 감정을 표출하지 않아도 오히려 찾아와 위로하다니! 혁명적인 심리치료사가 아닐수 없지요.
2.3) 그러나 가장 사랑하는 음식도 3일이면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 난더 내 감정을 세밀하게 애무해줄 음악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애무를 가장 잘 수행해주는 가치는 단연 '아름다움'이였지요. 음악의 그 섬세한 노랫말과 사랑이야기!
사랑이 뭔지는 몰랐지만, 어른들만이 향유하는 가치란 것만으로도 내게 더 큰 판타지를 주는 것이었지요.
때문에 나는 음악에서 점점더 아름다움을 탐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간, 제반의 한계로 결국 음악적 아름다움을
경험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껴버리고 시큰둥해 질 뿐이었습니다.
2.4) 그러던 중 나는 이내 교복이 입혀지고 맙니다. 중학교에 가서는 같은 교복속에서 내 자아감을 찾기란 쉬운일이 아니었지요.
그때문인지 나는 내 자아감을 자신이 아닌 다른곳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단연 음악도 빠질수가 없는것이지요.
오컬트, b급문화를 향유하고, 마이너를 지향하면서 나는 특별하다는 자기위로가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그당시 한국에서 소외되었던 음악, 힙합을 듣게 된 것이지요!
음악의 목적이 아름다움에서, 내 자아와 존재감을 위해서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쯤되니 가치의 충돌이
생겨버렸습니다. 힙합은 내 귀에는 영 아름답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화성학이 15세기에 발명됐는데 이 음악은 영 화음을 쌓을줄을 몰랐지요.
그러나 그 날것스러움! 아무도 안듣는 나만의 음악의 달콤함이란! 홍대병의 프로토타입이었죠.
나는 아름다움보다 내 무뎌진 자아감을 찾기위해 못생긴 음악을 감내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미학적 관점에서 즐겼냐 아니냐의 논쟁은 그만두기로 하죠. 나도 모르겠으니까요.
2.5) 그냥 무작정 듣는것이었습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땐 남이와서 내가 뭘 듣는지 확인해줬으면 하는 맘으로요. 전과는 무척 다른 태도지요.
그러던중 힙합의 진짜 가치를 알게 됩니다. 일종에 계단적 성장, 깨우침같은 것이었지요.
힙합에는 그들만의 감성과 문화, 그리고 시혜적인 가사가 숨어있던 것입니다. 아 너무나 아름다운 가치였죠.
하지만 나는 그전에 미디어와 환경이 만든 '아름다움'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갇혀서
미처 힙합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때 아름다움이란 개념이 확장된 것이지요.
그때의 전율이란!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깨우친 오랫만의 경험이였습니다.
중학생만 되도 삶이 재미없는 재방송이 되어버리는데, 그 삶속에 신선한 신생채널이 생긴 것이지요!
그때부터는 힙합이 정말 즐거웠고 아직까지도 주로 듣는 음악이 되어버렸습니다. 첫경험이 무척 중요한 것이지요.
2.6) 그이후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교복색이 좀 밝아진거 말고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지요.
그 격동의 시기에 나는 일종에 강박에 휩쌓여 버렸습니다. 힙합을 통해 내가 믿던 '아름다움'이란 가치가 깨부서 지는 것을 경험한 이후,
나는 극단적으로 새로운 것이 목말랐습니다. 아름답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지요.
말 그대로 음악 안에서 내 경험이 확장될 정도의 새로움. 그 새로움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나는 극단적으로 많은 장르를 한꺼번에 찾아 듣게 되었습니다.
비밥, 스윙, 브루스, 레게 , 라틴, pbrnb, 소울, 클래식, 국악, 부두음악까지 내 정보력 안에서 안들어 본 것이 없지요.
그 과정에서 힙합에 준하는 새로움들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지요. 한동안은 또 나름의 세계에서 취향을 소모했지요.
2.7) 그렇게 또 몇년이 흘러 이제는 '새로움'이 내 정력을 쏟아 음악을 찾아 들을만큼에 감동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신경계란 얼마나 거만한지! 또 둔감해져 버린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새로움을 찾아서 이제는 음악이라고 할수 없는 경지에 이른 소리들마저 듣게 되는, 현대아트같은 아주 요상한 모양새가 되버렸습니다.
본질적 가치를 잃은것 같기도 한 느낌이 드는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지요.
2.8) 그러다가 장사익 - 찔레꽃 이라는 음악을 듣게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 한국인 본질 자체의 목소리! 그것은 노랫말이나 어떤 음계로 표현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향, 그의 지역색 그 자체였지요. 조수미도 훌륭한 가수는 자기 국가를 표현하는 가수라고 했다지요?
이후 밥말리와 같은 가수에게서도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아름다움은 이미 전제된, 당연한 것이고
그들은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수단으로 자신의 고향, 지역과 사회를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은 일종에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나에게 그들의 신념과 목적성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었지요.
아름다움으로 더 위에있는 아름다움을 창출하다니! 아름다움이 탄소라면 엔트로피총량이 역전된 것같은 상황이지요.
3)그러나 결국 예상했듯 나는 또 시큰둥해 져 버렸고, 현재는 옛날의 시간을 추억해주는 음악들을 듣는식으로 음악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론이 또 이렇게 싱겁다니 너무나 슬픈일이지요. '새로움'은 음악의 형식을 부술만큼으로 역치가 올라가 버렸고, '아름다움' 자체를 탐미하는 것 또한
미술사의 고전과 낭만의 영원한 자리다툼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나중에 또 어떤 경험을 할지 기대가 되지만 이제 더 내 미적 취향이 나아갈 길이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내 미적 취향의 자취가 다른 사람들의 미적기준의 성장과 비슷할까요? 문득 궁금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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