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숭이들의 노래
벌거숭이로 칼 앞에 섰다.
땅이
피에 젖어갔다.
기미년 3월 1일 그날 이 땅의
모든 소리에서는
모국어에서는
자유에서는
흰 피가 솟았다.
삼천만은 피 한 덩이
뜨건 김 솟는 수풀이었다.
종달이 메밀꽃 엉겅퀴 바위
코납작이 쌀순이……
한데 타올랐다.
하나의 통곡으로.
하나의 만세로.
* 서기 1919년(단기 4252년) 기미년 3월 1일 전국은 만세에 휩싸였다.
이화학당에서는 2월 28일 이문히(以文會) 정기 모임에서 3월 1일 전
교생이 소복하고 대한문 앞에 나가 망곡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
국의 제지로 10여 명의 이화학당 학생들만이 담을 넘어가 만세 대열
애 참가하고 시위대와 함께 교내로 들어와 만세를 외쳤다. 이는 3월
5일 만세 시위로 이어졌으며 이때 박인덕, 신준려 두 교사가 학생 선
동 주모자로 검거 투옥되었다.
수천 개의 질풍으로
바람이 질풍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참으로 예기치 않은
번갯불
그러나 얼마를 별렀던 일,
만 리 밖에서 뇌우가 치고
나무들이 후둑후둑 잎을 털고
소나기 오듯 햇살이 꽂히고
방방곡곡에서
수천 개의 목청이 터졌다.
“만세 만세”
“물러가라, 침략자 당장 물러가라”
“게다짝은 느그 나라로 당장 꺼져라”
*기미년 3월 5일 유관순은 연일 계속되는 시위에 이화학당의 서명학,
국현숙, 김분옥, 유점선, 김희자 등과 참가하였다.
대륙 낭인의 발굽
지상의 법칙 중 하나가
약한 것은 강한 것의
밥이 된다는 것이다.
하늘이 열린 이래
작은 것들은 언제나
큰 것들에게 얹히게 되어 있었다.
작은 것들은 늘 새우가 되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단 하나의 기적, 단 하나의 오리 새끼,
그것이 바로 니혼(日本)이었다.
메이지유신으로 숨통을 연 후
그들은 비 온 뒤에 풀이 자라듯 무성히 자라났다.
섬은 비옥했고 눈은 째졌으며
손은 간교했고
칼은 피를 보아야 끝이 났다.
하다 못하면
제 배라도 가르며 찬란해졌다.
그러나 본디 섬이 그들의 마당,
그것은 무더위보다도
더 갑갑한 노릇이었다.
샤미센에 피어나는 매화꽃
게다 소리에 감겨오는 뜨락의
대수풀의 눈빛에도
성이 차지 않았다.
낭인들은 말을 달렸다.
그 숨통 트는 길은
대륙주의(大陸主義)밖에 없음을 알았다.
무릎을 탁 칠 수밖에……
한반도로부터 시작하여
만주로 몽고로 시베리아로 가자스라.
검은 개가 달을 삼키듯이
동아시아에
개기일식이 시작되었다.
대륙 낭인(大陸浪人)들의
호기 어린 꿈 하나가
길 가다 돌부리 하나
툭! 차는 듯한 몸짓 하나가
아아, 이 ᄄᆞᆼ에 서른다섯 해 동안
해가 뜨지 않게 했다.
목숨들이 죽어
장작더미로 쌓이고
큰 사람들이
풀로 바스라지고
열여섯 소녀
유관순
그녀가 만신창이 시체로
역사 위에 눕게 했다.
귀향하는 관순이
기적이 울었다.
충청도 땅 천원군 목천면 지령리
서울 유학생
관순의 적삼 속에
뜨거운 화산 하나 담겨 있었다.
기적이 울면
새들이 암호로 따라 울고
가랑잎도 바람도 산자락도
윙윙 울며
남행 열차를 따라갔다.
이 땅에 진동하는 눈물 내음 속에
관순이는 귀향하고 있었다.
* 유관순은 서명학, 김분옥 등 다섯 명의 친구와 결사대를 조직하여 시
위에 참가하려 했으나 프라이 학당장의 만류로 실현하지 못한다. 무
기 휴교로 기숙사를 나와 사촌언니 에다와 함께 귀향하였다.
* 유애다(柳愛多, 유예도柳禮道, 1896~1989): 유관순의 사촌언니로
이화학당에 다녔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의 만세 시위에 유관
순과 함께 가담 활약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향 천안에서 유관순과 만
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나중에 한학자 한철유와 결혼하여 2남 3녀의
어머니가 되었다.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목숨하고 만세하고
씽씽 올라간다.
만세 부르러 올라간다.
짐승 발에 차이고
헌 신처럼 목숨이 찢기는
그 엄청난 소리를 지르러
씽씽 올라간다.
유씨(柳氏) 집안 고명딸
우리 관순이
목숨하고 만세하고
바꾸러 간다.
* 귀향한 유관순은 조인권과 청산(靑山)학교 김구응을 만나 “목숨과
바꿀 일을 한번 해보자“고 만세를 약속한다. 김구응의 모친과 부인은
부녀자를 규합하고, 그녀는 애다와 함께 하루 밤낮 70리,80리를 걸어
만세를 부르자고 호소하였다.
아아, 사인(死因)
천지가 하얗게 색이 바랜 날
1920년 10월 12일
오전 8시 12분
가던 시계가 갑자기 우뚝 섰다.
하늘에선 유난히
새파란 유성이 그어지고
감방 안에 매달린 알전구가
저 혼자 깨졌다.
새는 파득이던 날개를 마지막 접었다.
“저들은 망한다. 절대로 망하고야 만다”
이 한마디,
작은 비명처럼 흘려 내보내며
꽃모감 부러지듯 고개 떨구었다.
열일곱 해 머물던
조선땅
영원히 떠났다.
그녀의
사인은
꿈속에서조차
말하기 떨리지만, 열일곱 살 그녀의 사인은
살아 있는 이 지상의 모든 핏속에
새겨둬야 하리라
“자 궁 파 열”
* 이화학당 월터 교장이 유관순의 시신을 학교로 운구해왔다. 정동교회
에서 영결식을 올리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으나 도시 개발에 밀
려 묘지가 사라졌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2019년 건국훈장 대한
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화여고는 1996년에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문정희
아우내의 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