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남쪽 끄트머리 해안이 보이는 언덕에 차를 세우고 무작정
매화꽃이 핀 비탈로 들어갔습니다 매화나무들은 한창 꽃 생
산이 활발해서 천개의 마을과 만개의 골짜기에 일일이 신방
(新房)을 들였습니다 이 마을은 인구가 조밀하고 물자가 창
고마다 쌓여 있어서 벌과 벌레와 새 들이 상해나 서울과 같
은 큰 도회지를 찾아온 듯하였습니다 나는 매화나무들이 경
영하는 나라의 신민(臣民)으로 등재되기를 바랐습니다
내 이마 높이쯤에서 바다는 어린 날 오후의 치통처럼 칭
얼대었습니다 바다는 매화나무의 가랑이 사이로 들락거렸
고, 그래서 마치 내 마른 허벅지에 물때가 오르는 것 같았습
니다 나는 그때 매화꽃들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 입술로 꽃잎을 받는 일은 매화나무의 신체를 받는 일이
었습니다 매화나무는 낙화의 시절을 알면서도 참으로 괴롭
게 일생을 꿰매어 한땀 한땀 나뭇가지에 내걸었던 것입니다
서러워할 것들이 많은 매화나무의 발등에 적설량이 늘었습
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누님, 누님이 위독하다는 소
식이 봄날의 화유(花遊)였으면 했습니다 누님의 위독한 증
세는 매화나무로 이주하여 매화꽃은 배 속에 큰 병을 얻었
습니다 울지도 못하고 꽃이 피었다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죽
음은 한차례도 닿지 못한 누님의 내해(內海) 같아서, 살고 죽
는 일이 허공에 매화무늬 도배지를 바르는 일과도 같아서
나도 길에서 벗어나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수평선
을 바라보는 일이 나의 직업이라고 약력에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완성하지 못한 숙제는 출근처럼 아득하였습니다 저
기, 저기 좀 보십시오 누님의 치마폭을 닮은 꽃그늘이 일렁
이고 있습니다 밟고 다닌 모든 길을 착착 접어보면서 바다
는 파도, 파도,라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매일 해변에 자신
을 버리면서 평생 자신을 적재하는 바다에 이르려면 누님,
아직은 캄캄해질 때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암향(暗香)을 편지에 첨부하여 보냅니다 내년
봄, 매화꽃이 처녀와도 같이 자지러질 때, 밤길에 연애하러
갈 때 써보기를 바랍니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안도현, 창비시선 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