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노예들을 방석 대신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왕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내겐 유일한 자유, 징그러운 자유인
죽음 같은 성욕이 나를 짓눌렀다.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 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해 보다가도
은근히 왕이 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내 눈앞에는 왕의 화려한 하렘과
교태부리는 요염한 시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얄미운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나는
온갖 비참한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 아이의 퀭한 눈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
그런데도 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왕의 게슴츠레한 눈과
피둥피둥 살찐 쾌락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오히려 비참과 환락의 대조가 나를 더 흥분시킨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그 흥분은 지워지지 않아
나는 그만 신경질적으로 수음을 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다음날도 나는 다시 극장엘 갔다.
나의 쾌감을 분석해 보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한데도 역시 왕은 부럽다 벌거벗은 여인들은 섹시하다.
노예들을 불쌍히 생각해 줄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그 동경 때문
에 쾌감 때문에
그러나 왕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양심을, 윤리를, 평등을, 자유를
부르짖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노예의 그 비참한 모습들이
무슨 이유로 내게 이상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걸까
왜 내가 평민인 것이 서글퍼지는 걸까
왜 나도 한번 그런 왕이 되고 싶어지는 걸까
아니 그럭저럭 적당히 출세라도 해서
불쌍한 거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지는 걸까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할까
왜 진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가자, 장미여관으로
마광수, 책읽는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