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 방치된 지 30년은 지난 것 같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펫도 침대도 가구도 내선 전화기도 없었고 심지어 불을 켜는 스위치조차 없었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보였고 차가운 나무 바닥 위에 작은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위로는 타자기와 촛대, 성냥갑 하나가 전부였다. 심지어 개인용 화장실도 없었다.
“말도 안 돼!!”
벅스 버니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걸 신호로 모두 복도로 나와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항의할 참이었다.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요. 저런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자라니!”
평소 협조적이던 피글렛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따졌다.
“저는 대부님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대부님께서 그럴 리 없어요. 우린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는데!”
그녀는 여전히 대부님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설마 연극이 실망스러웠다고 벌을 주는 겁니까? 이건 너무 유치하군요.”
평소 말을 아끼던 정신과 의사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나보다.
내가 따져 물을 때 날 힐난하던 그들이 이번에는 전투적인 자세로 항의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집사는 계속되는 공세에 끄떡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나? 입이 있으면 뭐라고 대답 좀 해보쇼!”
부랑자가 바짝 다가서자 집사의 등 뒤에 선 두 하녀가 일제히 총구를 들어 올렸다. 부랑자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다 구두 뒷굽으로 내 발가락을 세게 밟았다. 하지만 아픔보다 더 놀라운 건 집사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냥 닥치고 받아들여. 이 버러지들아.”
우리가 충격에 휩싸인 사이 집사와 하녀들은 복도 밖으로 나갔다.
“곧 저녁식사를 가져다 드리죠.”
그리고 문을 잠갔다.
***
엽총을 맨 하녀가 열쇠로 문을 열고 저녁 식사가 담긴 트롤리를 끌고 왔다. 저녁은 딱딱한 바게트 한 덩어리와 접시 끝에 발린 얇은 버터 그리고 플라스틱 병에 담긴 물이 전부였다. 우린 응접실 식탁에 모여앉아 양초를 켜고 이 거지 같은 상황을 한탄했다. 다행히 응접실 쪽에 공용화장실이 있었다.
덕분에 우린 빵 쪼가리를 아껴 먹는 동안 종종 누군가 볼일을 보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던 중 안경 쓴 여자가 창가의 커튼을 열어젖혔는데 그때, 맞은편 쪽에서 환한 불빛이 쏟아졌다. 우린 모두 놀랐다. 우리가 머물렀던 3층 응접실에서 낯선 이들이 음식과 술을 퍼마시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저게 뭐야? 저 사람들은 누구지?”
피글렛의 손에 들린 바게트가 탭댄스를 췄다.
“여기 웬 망원경이 있는데?”
부랑자가 응접실 한쪽 구석에 세워진 망원경을 발견하고 식탁으로 가져왔다. 나는 그에게서 망원경을 빼앗아 거치대를 똑바로 세우고 맞은편 응접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소파에 둘러앉아 게걸스럽게 기름진 요리를 먹어치우고 술을 마셔댔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니 이틀 전 괴상한 공연을 했던 바로 그 일행들이었다.
“뭐예요? 뭐가 보여요?”
안경 쓴 여자가 물었다.
“우린 저들과 경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중얼거렸다.
“저들이라니?”
피글렛이 물었다.
“이런 미친! 직접 한번 봐요. 이걸로 우리가 훔쳐보길 바란 건가?”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그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누려야 할 술과 음식이 그들의 손에 넘어간 것에! 오직 히치콕을 감동시키는 자만이 저 객실에 머물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귀머거리나 다름없는 집주인한테 대사로 가득한 대본을 쓴 이유가 뭐야?! 말해봐!”
벅스 버니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주먹을 움켜쥐고 나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내가 웅얼거리는 식으로 대본을 써야 한다고 말했잖아! 내 말을 들었으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텐데. 내 말을 들었더라면!”
부랑자가 카랑카랑한 쇤 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내 탓이라는 거요?”
“그럼 누구 탓이야? 당신이 썼는데?”
입 주위에 버터가 묻은 피글렛이 날 쏘아보며 말했다. 배고파서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 상황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굳이 탓을 하자면 댁들의 개 같은 연기 때문이지! 그 몇 줄 안 되는 대사를 줄여줘도 버벅 댈 정도였으니까! 뭐 대충 예상은 했어. 또 종이쪼가리 하나 준비하지 못한 의사 양반 책임도 있고.”
“왜 나를 끌어들입니까?”
정신과 의사는 심히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모두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친다던지... 그런 걸 의학적인 용어로 뭐라고 해요? 뭐 있지 않아요?”
벅스 버니가 옆에 앉은 의사에게 물었다.
“어머! 랍스터를 먹고 있어!”
그때, 망원경으로 맞은편을 보던 안경 쓴 여자가 소리쳤다. 우린 개처럼 으르렁 대며 싸우는 걸 멈추고 망원경으로 그들이 먹는 음식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 나도 마지못해 그들이 즐겁게 웃으며 만찬을 즐기는 모습을 들여다봤다. 여긴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자정이 지나자 사람들은 응접실에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려다 전날 봤던 푸른색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를 펴보니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오늘 저녁 6시까지 20페이지 분량의 희곡을 제출하십시오. 공연은 오늘 저녁 9시입니다.'
또 나였다! 매일 매일 이 미친 짓을 해야 하다니! 봉투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어쩔 수 없이 응접실로 되돌아가서 그들을 깨웠다. 곧 우린 졸린 눈을 비비며 빼앗긴 객실을 되찾기 위한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우선 대사를 없애고 상황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끔 대본을 써야 해요.”
정신과 의사가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중재자 역할을 하며 꽤 신임을 쌓아둔 상태였다.
“연기에 영혼을 실어요! 만약 그게 무리라면 에너지를 발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죠. 이번에는 무조건 우리가 이겨야 해요.”
피글렛이 고지를 눈앞에 둔 조지 패튼처럼 맞은편 응접실을 가리켰다.
“뭐가 됐든 이젠 난 안 쓸 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누가 쓰라고?”
안경 쓴 주황머리가 말했다.
“돌아가면서 쓰던지 아니면 제비뽑기를...”
“우리 중에서 이야기를 쓸 사람은 당신 말고는 없어요.”
정신과 의사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래요! 이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았으니 더 고민을 해 봐요.”
벅스 버니가 의사의 말을 거들었다. 아주 얄미웠다.
“돌겠네! 왜 또 나야?!”
“당신은 작가잖아! 당신 방에만 타자기가 있는 게 뭘 의미하겠냐구.”
피글렛이 내 방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힘든 건 이해합니다. 창작의 고통! 그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죠. 그래도 우리가 이 어려운 상황을 해쳐나가려면 당신 도움이 절실해요.”
의사 양반이 영혼 없는 목소리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결국 나는 밤새 타자기를 두들기고 종이를 계속 찢으며 어떤 이야기를 써야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아무 의미도 없는 이딴 개짓거리, 저 머저리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내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야만 하는 현실에 미친 듯이 화가 났다. 문득 전날 히치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감정이 연극에 실려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가 내게 영감을 줄줄 꿈에도 몰랐다. 어쨌든 난 이 분노를 표현해 보기로 했다. 좋아. 한번 상황을 설정해 보자고. 여기 한 남자가 탁자 위에 앉아서 타자기를 두들긴다. 그리고 제대로 풀리지 않는 자신의 상황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종이를 찢고 탁자를 발로 차고 타자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그래 발로 한번 차보자! 나 역시 책상을 발로 세게 찬다. 바로 이 느낌이다. 그때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아내가 방에 들어온다. 그럼 당연히 무슨 일이냐며 나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겠지? 하지만 난 이미 분노에 불길에 휩싸여있다. 그래서 그녀의 뺨을 때린다. 철썩! 뒤이어 그녀의 아버지가 들어와 나에게 무어라 웅얼거리며 따진다. 바닥에 뿌려진 원고들을 주워 모아 공중에 마구 흩뿌리면서 말이다. 그러면 나는 방을 나가 권총을 들고 무대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죽겠다며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고 협박을 한다. 그러면 부녀는 겁에 질려 나를 설득하려 한다. 그때! 천사 날개를 단 여자와 악마의 뿔을 단 남자가 등장하는 거다. 정말 개 같은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래서 천사는 나에게 부녀를 가리키며 불쌍한 저들에게 남겨질 인생을 생각하라는 듯 웅얼거리고 악마는 내동댕이쳐진 타자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타자기를 두들기는 시늉을 하며 날 비웃는다. 대충 너에게 남은 삶은 그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글을 쓸 뿐이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악마와 천사가 나를 설득하는 동안 나는 책상에 주저앉아 머리에 권총을 겨눈 채 흐느껴 운다. 그동안 부녀는 서로를 꼭 껴안으며 열심히 안절부절 못하는 연기를 한다.
제발 적당히 구색만 맞춰줬으면 좋겠다. 결국 난 방아쇠를 당기며 죽는다. 그러면 부녀는 의자에 축 늘어진 내 몸을 부여잡으며 흐느껴 운다. 뒤에서 악마는 빙글빙글 춤을 추고 천사는 어둠속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친다. 이 대본을 쓰는데 고작 30분이 걸렸지만 근래에 이토록 몰입한 적은 없었다.
난 기지개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3층, 내가 이틀 전 묶었던 객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커튼 너머로 책상에 앉은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난 그가 내 경쟁상대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기괴한 서커스의 설계자. 이틀 전, 그 역시 이 어두운 곳에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을 보고 있었겠지.
본문
[연재] 드렁크 타이핑 9화 - 귀머거리의 저택(8)
추천 0 조회 276 댓글수 0
ID | 구분 | 제목 | 글쓴이 | 추천 | 조회 | 날짜 |
---|---|---|---|---|---|---|
118 | 전체공지 | 업데이트 내역 / 버튜버 방송 일정 | 8[RULIWEB] | 2023.08.08 | ||
30565749 | 잡담 | Xatra | 170 | 2024.02.24 | ||
30565748 | 잡담 | Xatra | 91 | 2024.02.24 | ||
30565747 | 잡담 | Xatra | 176 | 2024.02.24 | ||
30565746 | 연재 | 루리웹-5897898491 | 179 | 2024.02.24 | ||
30565744 | 연재 | 페르샤D | 153 | 2024.02.21 | ||
30565743 | 연재 | 페르샤D | 186 | 2024.02.14 | ||
30565742 | 연재 | 미친돌고래 | 262 | 2024.02.09 | ||
30565741 | 연재 | 미친돌고래 | 187 | 2024.02.08 | ||
30565740 | 연재 | 미친돌고래 | 237 | 2024.02.07 | ||
30565739 | 연재 | 페르샤D | 1 | 830 | 2024.02.07 | |
30565738 | 연재 | 미친돌고래 | 207 | 2024.02.06 | ||
30565737 | 연재 | 미친돌고래 | 203 | 2024.02.05 | ||
30565736 | 연재 | 미친돌고래 | 217 | 2024.02.04 | ||
30565735 | 연재 | 미친돌고래 | 200 | 2024.02.03 | ||
30565734 | 연재 | 미친돌고래 | 230 | 2024.02.02 | ||
30565733 | 연재 | 미친돌고래 | 526 | 2024.02.01 | ||
30565732 | 연재 | 페르샤D | 113 | 2024.01.31 | ||
30565731 | 연재 | 김QQ | 163 | 2024.01.27 | ||
30565730 | 연재 | 김QQ | 101 | 2024.01.26 | ||
30565729 | 연재 | 김QQ | 131 | 2024.01.25 | ||
30565728 | 연재 | 김QQ | 165 | 2024.01.24 | ||
30565727 | 연재 | 페르샤D | 107 | 2024.01.24 | ||
30565726 | 연재 | 김QQ | 286 | 2024.01.23 | ||
30565725 | 연재 | 김QQ | 158 | 2024.01.22 | ||
30565724 | 연재 | 김QQ | 139 | 2024.01.19 | ||
30565723 | 연재 | 김QQ | 131 | 2024.01.18 | ||
30565722 | 연재 | 페르샤D | 164 | 2024.01.17 | ||
30565721 | 연재 | 김QQ | 276 | 2024.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