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웠던 여름이 끝났다. 시원해진 공기와 평소보다 이르게 오렌지색으로 물들여진 하늘은 가을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와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종로 거리의 한 장면이었다. 약국, 커피숍, 전당포 등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시작해서 마치 주변의 사람들, 심지어 도로를 지나치는 차들도 보라는 듯 현수막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취업 보증!
이라고 볼드체와 함께 화려한 파란색 배경이 칠해지면서.
몇 보를 걸어가다가 길 건널목에 보인 건물은 내 걸음을 멈추게 해줬다. 꽃을 연상케 하는 금빛 테두리 안에 廣藏이라고 적힌 황금색의 한자 위에 광장시장이라고 하얀색 글씨로 크게 적혀 있었다.
"빙고."
짧은 한마디와 함께 미소가 그려졌다. 엉뚱한 전철을 타서 잘못 온게 아닌가 해서 걱정했는데.
과연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시장답게 규모가 남달랐다. 눈으로만 봐도 기품이 느껴질 다양한 색으로 전시된 한복부터 시작해서 유행이 한참 지난 옷들을 눈으로라도 보고 가라는 듯 옷걸이나 혹은 벽에 걸려 있었다. 몇 걸음 더 걷더니 보기만 해도 푹신해 보이는 이불과 베개들이 쌓인 가게 옆에 다양한 색과 종류의 직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사가라는 듯 아줌마들이 지나가는 손님들을 재촉하는 와중에 천천히 구경하던 도중….
"정성운!"
찰싹! 한손으로 등을 때리는 느낌에 생선마냥 팔짝 뛰어올랐다. 목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뒤 돌아보니 소녀가 서 있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흑발의 검은색 계통의 교복과 빨간색 넥타이를 맨 소녀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체 작은 웃음을 내 뱉었다.
"뭘 그렇게 놀래. 다 큰 사내자식이-"
"사람들 다 쳐다보면 어떡하려고 그래? 엄청 놀랐잖아 덕분에."
"그건 네가 잘못한거야. 멍때려서 당한거라고."
약오르지? 라고 말하듯 혀를 쏙 내밀었다. 히히-하는 작은 웃음을 내뱉으면서.
"내가 늘 말했지? 방심하는 순간 그대로 기습당한다고. 이 누나가 몇 번을 말해야 하니 쯧-."
"어째 나를 어린애 대하는 듯 말하는 거 같다? 누나라느니 교육이라더니. 게다가 우리 동갑이잖아."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 애로 보인답니다 정성운 군. 돌봐야 하는 어린애."
쓴웃음이 지어졌다. 내가 여전히 어린 애로 보인다는 말에 저절로. 아직 세상의 빛을 본 지 얼마 안 되었을, 그 철없던 무렵부터 서로를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원래 아이들은 어렸을 때 동성끼리 어울리는 일이 흔하고, 이성끼리 어울리는 일은 흔치 않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라서 그런지 그것에 대한 어색함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
"오늘 해야 할 일은 기억하고 있지 성운아?"
"당연하지."
주변을 감싸는 음식들은 코와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알록달록 무지개 마냥 여러 색과 종류로 포장된 떡들로부터 시작해서 명란젓, 오징어젓 등 보기만 해도 하얀 쌀밥 위에 얹어 먹고 싶은 수많은 젓갈 종류가 비닐봉지로 감싸진 철 박스에 담겨 있었다. 그 옆에는 보기만 해도 양손으로 뜯어 먹고 싶어지는 두툼한 껍질로 감싸진 족발들이 각 크기와 종류별로 놓여 있었다.
"내일 시험을 대비해서 무슨 음식을 만들지 정하기. 주제가 어릴 적 먹어본 추억의 음식 맞지?"
"맞았어. 그런 의미로 아이디어를 얻기에는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지."
한참 동안 길을 걷다가 우리 두 사람은 자리에 섰다. 분식이라고 적힌 간판 아래에 쌓인 음식들 앞에.
"우리 모두의 추억 장소에. 정확히는 어린아이들의 추억 장소라고 해야할까?"
기다란 소시지처럼 둥글게 말린 검은색의 순대에서 김이 올라왔다. 그 옆에는 보기만 해도 한 수저 떠먹고 싶어지는 붉은 국물이 하얀 떡과 삶은 계란 그리고 어묵들을 똑같은 색으로 물들여졌다. 맨 앞에는 여러 종류의 꼬치들이 떡볶이 국물과 비슷한 색의 양념이 담긴 철판 위에 전시되어 있었다. 붉게 젖혀진 소떡, 떡꼬치 곁에 좋은 품질의 기름으로 튀겼는지 밝은 갈색의 그을린 핫바, 소시지 꼬치들 역시 같은 색으로 젖혀졌다.
"우리 어릴 적에 많이 와보았잖아. 올 때마다 엄마나 아줌마에게 졸라서 맛난 거 사 먹은 게 엊그제 같은데."
"특히 너는 매우 심했던 걸로 알아. 안 사주면 사줘! 사줘! 라면서 바닥에 뒹굴기도 하고."
"못됐어!"
양 주먹으로 내 몸을 망치로 못 박듯 쳐냈다. 둥글게 마른 손이 내 몸에 닿을 때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아픔이 느껴졌다.
"지우고 싶은 흑역사인데 왜 굳이 꺼내야 하는 거야! 간신히 머릿속에 지웠는데!"
"미안-미안-"
짧은 사과와 함께 나는 지갑을 들고 아까부터 지켜보시던 분식집 주인아줌마에게 다가갔다. 떡꼬치 2개를 주문했지만 하나 추가로 세 개를 주셨다. 여휴 총각-애인에게 잘 대해줘-라고 하시면서. 진짜 애인은 아니지만….
"이거 사줄 테니까 그만 화 풀어. 두 개 너 먹고."
"우…. 그러다가 훔쳐 먹는 거 아니지?"
"내가 왜…."
삐져 나온 입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세상에 불만이 가득 찬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아까 받은 꼬치 두개를 건네주었지만 찡그러진 표정은 풀리기는 커녕 구겨진 종이마냥 더욱 일그러졌다. 내가 너무 놀린건가..
"내가 훔쳐 먹을 이유가 뭐가 있어. 그러다가 너에게 혼나는-"
"잡았다-"
찰칵!
검은색 교복 안에 감추어진 가냘픈 팔로 나를 감싼 뒤 셔터음이 들려왔다. 그녀의 한 손에는 떡꼬치를 쥐었고, 반대쪽 손에는 스마트폰을 쥔 체 허공에 떠오르고 있었다. 스크린을 보니 어떻게든 귀여워 보이려 하는 듯 혀까지 내밀면서.
"뭐한 거야 너 또."
"우리 둘만의 기념사진-이렇게 단둘이서 재래시장에 오는 것은 처음이잖아. 무엇보다-"
손에 들고 있던 떡꼬치를 깨물었다. 붉은색 양념으로 발라져 있는 꼬치가 맛있었는지 음-하면서 한 손으로 우물거리는 볼을 이루어 만졌다.
"우리 성운이가 처음으로 나처럼 예쁜 여자애에게 추억의 떡꼬치를 사주었잖아. 역사적인 순간이야."
"역사적인 순간까지는. 그냥 네가 화 풀어줬으면 해서 그런 건데."
"너는 참 예나 지금이나 겸손해. 변함없이 말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얄궂은 것은 물론 선머슴 같은 성격은 어디 가지 않은 것을-라고 입밖으로 내 뱉을뻔 했다. 정말로 그랬다가는 왠지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뻔하지만. 겨우 화가 풀렸는데 괜히 기름 붓는 짓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도 고마워. 이렇게 떡꼬치도 사줘서."
"천만해. 기분 풀어져서 다행이야."
그녀 따라 꼬치를 입에 넣었다. 구워진 떡의 아삭함이 귀로 들려오면서 빨간 양념에 물들여진 떡의 매콤달콤한 맛이 혀를 젖혔다. 변함이 없었다. 어릴 적 어머니 따라 재래시장에 올 때마다 느꼈던, 나이를 먹어 고등학생이 되었음에도 항상 끌리는 맛이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인지 양손으로 꼬치를 하나씩 베어 먹고 있었다. 미소를 지은 체, 행복하다는 듯.
"한시내."
☆☆☆☆☆
오렌지색이었던 하늘에 어두운 사파이어색이 번졌다. 진한 푸른색과 오렌지색이 섞인 구름과 하늘은 저녁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아직 늦은 시간임에도 놀이터에는 여전히 애들이 놀고 있었다. 머지 않아 부모님으로 추정되는 어른들이 나타나 애들을 한두 명씩 데려갔지만.
저녁 특유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안에는 사람들이 없어서 올라가는데 쾌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녀석 왜 여태까지 안 들어와! 저녁이 되어가는데도!"
"오늘 시내하고 같이 재래시장에 간다고 했잖아요! 곧 오겠지!"
"사내대장부가 언제까지 요리나 하고 다닐 거야!? 계집애도 아니고!"
그 기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깨져버렸다.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 조각 난 찻잔처럼. 들려왔다. 평소처럼 들리는 고함이. 쇠로 만들어진 문안에서 들려 왔지만 마치 귀에 대고 외치는 거 같았다.
"자기 누나와 형은 대학원 졸업해서 의사에 변호사가 됐는데 어쩌다가 혼자서 어벙한 녀석이 된건지 알수 없어! 무슨 요리사가 되겠다면서 조리 학과에 가고!"
"그러다가 옆집 사람들이 듣겠어요! 적당히 하세요!"
가라앉을 생각이 없으셨다. 한번 시작된 고함은 마치 불에 붙인 기름이 서서히 불타오르듯 커져갔다. 잠잠해지기를 기다렸지만 나는 한숨과 함께 가방 속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열쇠를 돌리기에 맞추어서 등줄기와 심장이 동시에 떨렸다. 추위 또한 느끼면서.
"다녀왔습니다."
"넌 또 어디 갔다 이제 와!"
끼익-하는 미약한 쇳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고함이 귀를 찢고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애가 밤늦게까지 쏘다니고 와! 그렇게 해서 어느 대학에 들어가려는 거야!?"
"시내랑 재래시장 갔다 오느라."
"언제쯤 너희 형하고 누나처럼 될래! 두 사람은 독립해서 자기 밥벌이를 하면서 사는데! 언제쯤 계집들이나 하는 요리나 하고 앉아 있을 거야!?"
"여보 그만해요! 제가 있다가 잘 얘기해 볼 테니까!"
"당신이 그러니까 애가 저 모양 저 꼴이잖아!"
최대한 귀로 흘려보내면서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너 어디가!? 아버지 얘기 마저 들어야 할 거 아니야!?"
방에 들어갈 때쯤 귀에서 들려왔다. 늘 항상 하지만 이젠 익숙해진 단어가.
"한심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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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ovelpia.com/viewer/3274826
지난번에 올린 에피소드 1-1화를 지우고 다시 리메이크 해서 올립니다. 나머지 내용은 위에 링크에서 볼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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