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하와이, 허니문, 마가리타로 세 잔을 채우고 난 후, 조니를 지독하게 괴롭혀서 마니티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 난 조니에게 대충 이렇게 지껄였던 것 같다.
“신이시여. 저에게 저주를 내려주소서!! 제 축복을 가져가시고 대신 이 가엾고 우람한 친구의 저주를 제게 주소서! 그리하여 이 친구가 행복할 수 있다면 평생 1아르쉰의 공간에서 선 채로 살 각오가 되어있나이다!”
그렇게 마티니가 나왔다. 젠장! 이 맛을 위해 난 부모도 팔 수 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이미 돌아가셨고 어머니와는 연락이 끊겨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지만.
마티니를 마시면 이 세상을 용서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물론 세상은 내 용서를 바라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난 모든 걸 용서할거다.
원고를 내려놓고 내 왼편에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퍼마신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워 글라스 잔을 손에 들고 딸꾹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며 잔에 담긴 술을 흘렸다. 조니는 그의 딸꾹질이 멈출 때까지 술잔을 들어주었다. 기가 막힌 풍경이었다.
“이봐! 너라도 먼저 들어가 곧 문 닫을 시간이야.”
바에는 딸꾹질하는 사내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 똥 덩어리는 하나로 족하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올리브만 남은 칵테일 잔 옆에 지폐를 올려놓았다.
“네가 쓴 원고는 가져가야지.”
조니가 내가 쓴 원고를 건넸지만 나는 손사래를 쳤다.
“다시 올 때까지 네가 맡아줘.”
“제발 그러지 마.”
“네가 맡아주지 않으면 집에 가는 길에 우체통에 넣어 버릴 거야.”
조니는 별수 없다는 듯 툭 튀어나온 눈썹 뼈를 긁었다.
***
어릴 적 12층 높이의 창문 난간에 올라 내 발밑에 있는 세상을 내려다 본 적 있었다. 클로버가 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고 플라타너스 나무가 바람에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뎠다면 그대로 추락해 목이 부러졌을 거다. 내 방에 들어온 부모님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이 심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그저 하얗게 질린 그들의 얼굴을 5초 정도 관찰하다 스스로 난간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지금 내겐 그런 대담함이 없다. 난간 위에 올라서기는커녕 높은 건물의 난간에 팔을 걸치는 것조차 두렵다. 그땐 왜 그렇게 겁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난 겁쟁이처럼 죽을 것이다.
부모님이 이혼한 뒤 난 아버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가 남긴 유품들은 모두 내 수중에 들어왔다. 그때 난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면서 대부분의 물건을 헐값에 처분했다. 물론 그 중 팔지 않은 것이 몇 개 있다.
아버지는 세계를 떠돌며 공사 현장을 감독하는 엔지니어였고 출장을 다니며 희귀한 우표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중에는 컬렉터들이 탐낼만한 물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내가 나이를 먹자 그 우표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그렇게 세계 각국의 우표들은 내게 술을 사줬다. 아버지는 세계를 떠돌며 그것들을 열심히 모았지만 나는 술을 퍼마시며 그걸 흩뿌리고 다닌다. 언젠가 아버지의 우표를 모두 팔아치워 한 개도 남지 않게 된다면, 나는 더이상 술을 마실 수 없을 것이다.
병원 대기석에 앉아 이런 생각을 했다. 염병할! 난 이제 생각이란 걸 좀 그만하고 싶다. 그래서 이곳에 온 것이다. 망할 생각을 죽이기 위해.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나는 담당의사에게 옥사제팜 두 달 치 분량을 요구했다. 외진 곳이란 건 둘째 치고 대기실에서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는 동안 애써 서로 모른 척하면서 훔쳐보는 이곳의 분위기가 너무 끔찍하다.매달 찾아오는 게 귀찮은 건 말할 필요도 없고.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의사 양반은 일어서서 팔짱을 낀 채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병원은 처방을 길게 써주는 편이에요. 이미 최대 분량의 약을 주고 있다고요. 다른 곳은 3주 분량만 처방해 주기도 해요. 그런데 여긴 30일 치 처방을 합니다. 저번에도 처방전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올 때마다 이런 식의 요구를 하시면 매우 곤란해요!”
그의 말투는 정신과 의사치고 지나치게 신경질적이었다.
“물론 알아요. 근데 사실 제가 약을 건너뛰어 먹으면 먹었지 과다복용한 적은 없잖아요. 다만 당분간은 병원에 달마다 한 번씩 들리기가 곤란한 상황이라 그런 겁니다. 만약 사유가 필요하다면 제가 적절한 이유를...”
“환자분. 옥사제팜은 향정신성 약물입니다.”
환자분이라니!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다. 게다가 그는 아이를 다루는데 능숙한 선생 같은 얼굴을 하며 내 말을 잘랐다.
“이런 건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아시겠어요?”
'아시겠어요?'라고?! 놈은 진짜 쪼잔한 자식이다. 나는 말없이 한동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한 달 뒤에 뵙도록 하죠.”
그는 친절하게 문을 열고 나를 쫓아냈다.
처음부터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거기엔 내 탓이 크다. 난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 게 싫어서 대충 말을 지어냈다. 완전 소설은 아니었지만 이 의사양반이 내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뒤로 날 의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상담 따위는 소용없다고 생각했고 난 그저 약을 원했을 뿐이니까. 몇 달이 지나자 들어가 눈인사를 하면 “늘 먹던 걸로?”라고 묻는 식당 주인과 단골손님의 관계가 되어있었다. 그가 주문표를 계산대에 맡겨놓고 돌아가면 난 그걸 들고 약국에 가서 포장된 내 음식을 찾아가는 식이다. 망할 코미디가 따로 없다.
한번은 상담실에 들어간 지 20초도 안 돼서 나온 적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그 기록마저 경신하고 싶다. 다른 병원을 찾고 싶지만 그럼 또다시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지어내야 하니 병원을 옮기는 것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내가 멍청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자식은 비열한 놈이다. 엄청나게 거만한 놈의 표정을 직접 본다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래도 어쩌겠어? 그 약은 너한테 필요한 거잖아.”
조니가 말린 바나나가 담긴 그릇을 건넸다.
“이봐! 난 모욕당한 거야. 사료 그릇 앞에서 침 흘리는 개 취급을 당한 거라고!”
“개는 마티니를 마시지 않아.”
그가 내 손에 들린 마티니를 향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냐?”
“위로라니? 넌 위로받기에 너무 까다로운 녀석인걸.”
“하긴...”
난 금세 수긍했다. 그리고 마티니를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익숙한 얼굴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내가 갈 곳이 이곳밖에 없는 구제불능이란 것은 조니의 단골들도 알고 있다. 그들은 내가 타자를 치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흘러나오는 음악과 그들의 대화 소리가 뒤섞여 타자치는 정도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뿐더러 이곳에 앉아있는 상당수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갔기 때문이다. 가끔 타자기를 두들기는 내게 다가와 느닷없이 시비를 걸어오는 취객들이 있긴 했지만 조니가 있는 한 그 이상의 난동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단순한 바텐더가 아니라 친구이고, 의사이자 판사였으니까. 그리고 이곳을 찾아오는 모두의 어머니였다.
아! 이쯤에서 조니라는 이름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조니는 본명이 아니라 닉네임이고 그가 키우던 래브라도 리트리버의 이름이다. 윤기 나는 검은 털에 호기심이 아주 왕성한 녀석이었다. 바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조니가 조니를 산책시키는 것을 몇 번 본 적 있다.
아무튼 어느 날, 두 발 달린 조니가 네 발 달린 조니를 바다로 데려갔는데 갑자기 녀석이 바위로 달려가 거기에 묻은 뭔가를 핥았다고 한다. 두 발 달린 조니는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부터 녀석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녀석은 죽었다. 아주 슬픈 이야기다.
“조니! 나랑 어울리는 칵테일 한 잔 만들어 줘. 뭐가 됐든.”
나는 정성 들여 카나페를 만드는 조니를 향해 외쳤다.
“지금 바쁜 거 안보여?”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곤 다시 얇게 썬 토마토를 치즈 위에 얹는 데 집중했다.
“나도 여기 손님으로 온 거야. 그거 잊지 마!”
나는 검지를 들어 올리며 녀석의 신경을 긁었다.
“진짜 귀찮게 하네.”
그는 카나페를 내 등 뒤에 있는 일행들에게 건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선반에 놓인 스카치위스키와 드람뷔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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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단편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