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은 N의 인스타그램을 뒤적이다 그가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R은 다음날 새벽 6시에 N이 사는 오피스텔 앞에 차를 대고 안에서 그를 기다렸다. 20분이 지나자 운동복 차림의 N이 나왔고 R 역시 차에서 나와 그의 뒤를 밟았다.
N은 근처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뛰었다. 총 4바퀴를 돌았는데 달리는 속도가 꽤 빨랐다. 운동을 끝내자마자 N은 허리를 숙인 채 헛구역질을 했다. R은 산책로와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찌나 괴로워하던지 N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이제 R은 외투 주머니에 넣어둔 생수병을 꺼내 N에게 다가간다. R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N은 당황한다. 물론 R은 이 상황을 예상한 듯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는 마침 잘됐다며 생수 두 병을 꺼내 하나를 건넨다. 굉장히 어색하게도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함께 물을 마신다. 그런데 R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 물병 안에는 독약을 넣어두었던 것이다! ‘잠깐. 그런데 어째서 내 얼굴이 부풀어 오르지? 설마 바뀌었나?’그가 망상에서 깨어났을 때 N은 이미 공원을 떠난 뒤였다.
***
R은 그 이후로도 며칠 더 N을 감시했다. N은 정확히 매일 아침 6시 20분에 집에서 나와 산책로를 뛰었다. 정확히 4바퀴였다. R은 주말 내내 N의 뒤를 밟았는데 그러다 그의 비밀을 하나 발견했다. 사실 N은 문어발이었다. 그는 주말 동안 총 다섯 명의 여성과 데이트를 했는데 그 중 둘과 아주 진한 스킨십을 나눴다. 한 명은 레스토랑 야외테이블에서 다른 한명은 차 안에서. ‘빌어먹을. 빌어먹을! 양심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네. 정말 눈곱만치도 없다고! 주변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잖아! 심지어 회사 안에서도!!’
분노가 가라앉자 극도의 우울감이 찾아왔다. 집에 돌아온 R은 늪지대로 향하는 굼뜬 양서류처럼 뜨거운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어둠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렇게 화낼 일이 아니잖아. 좀 냉정한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어. 지금 ‘그 사건’ 때문에 너무 예민...”
작지만 소중한 자존심이 뿌리째 뽑히던 날의 기억이 펼쳐졌다. 그 치욕적인 상황, 애써 웃음을 참는 표정 너머에 하이에나들의 비열한 웃음, 겁에 질려 도망친 나!
“젠장, 또 떠올라 버렸네. 신경 쓰지 말자. 그냥 넘기자. 그래! 그건 일종의 해프닝이었어. 지금은 아무도 기억 못한다고.”
하지만 수면 아래의 무의식은 그를 비웃기라도 물었다.
‘정말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평생 물고 씹을 안주거리나 다름없는데? 헤헤! 넌 이미 망했어. 되돌릴 수 없다고.’
그러더니 고약하게도 그 날 벌어진 끔찍한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R은 허겁지겁 욕실에서 나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지만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곧 환장할 정도로 강렬한 공포가 그를 덮쳤다.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거친 파도 속에서 그는 얼굴을 내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며칠 전 쓰레기통에 쏟아 버린 신경안정제가 떠올랐다.
R은 미친 사람처럼 쓰레기통을 뒤졌다. 더러운 잔해 속에서 주황색 알약 2개를 찾아내 물도 없이 삼켰다. 약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거짓말처럼 공포가 사라지며 호흡도 제 속도로 되찾았다. 그때였다. R은 장식장 유리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널린 쓰레기들 가운데 앉아있는 중년 남자가 좀도둑질 하다 들킨 것처럼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며칠이 흘렀다. R은 결연한 표정으로 부엌 달력에 빨간 표시된 날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왼손에 들린 주황색 알약을 삼키고 오른손에 들린 유리컵을 들이켰다. R은 지그시 눈을 감고 곧 맞닥뜨리게 될 순간을 떠올렸다. 오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혁명적인 날이 될 것이 분명했다. R은 새로 산 라임색 등산복을 입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폴리에스테르 94%과 폴리우레탄 6%를 질감. 느낌이 좋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R이 집밖을 나섰을 때 시계는 새벽 5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N이 사는 오피스텔까지 차로 28분이 걸렸다. R은 초조하게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목표물이 나오길 기다렸다. 6시 30분이 지났지만 N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전에 그가 Y에게 말했던 끔찍하게 하기 싫은 날이 오늘인지도 몰랐다.
“일어나. 오늘 죽이고 싶으니까. 오늘 아니면 네가 널 용서해줄지도 몰라. 그러니까 일어나 개자식아.”
R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주문이 통한 걸까? 오피스텔 입구에서 운동복 차림의 N이 나왔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됐다. 공원으로 향하는 N을 바라보며 R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그는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가 멀어지자 R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차에서 내렸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얼굴은 창백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구역질이 났다. 문득 주변의 모든 것들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멀리 보이는 N의 뒷모습이 그랬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어느 새 둘은 공원에 도착해 있었다. N은 멈춰 서서 가볍게 몸을 풀고 공원 외곽 산책로를 뛰기 시작했다. R은 어색한 걸음으로 공원 중앙에 놓인 벤치로 다가가 앉았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공원 한 바퀴를 돈 N의 모습이 들어왔다. 시원스럽게 뻗는 긴 다리, 하늘을 찌르는 탄탄한 팔 근육, 자신만만하고 여유 넘치는 얼굴. 이 모든 남성적인 상징들이 R을 두렵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바퀴, 세 바퀴째가 되어도 R은 여전히 앉아있었다. 그는 무엇이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놓았는지, 그리고 여전히 끈덕지게 붙잡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벤치에서 일어나면 인생이 끝장 날 것 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그랬다.
마침, N이 모습을 드러냈다. 4바퀴를 막 채운 그는 평소처럼 고개를 숙인 채 헛구역질을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R이 드디어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잰걸음으로 N에게 다가갔다. N은 자신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모자를 푹 눌러 쓴 웬 중년 남자가 그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중년남자가 모자를 벗자 이마에 새겨진 맥도날드 로고가 드러났다.
“하아...하아... 어? 대리님. 여긴 어쩐 일로?”
N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다시 붙자.”
R이 작게 중얼거렸다.
“하아...뭐라고요?”
“남자답게 붙자고 이 개자식아!!”
R이 절규했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네 눈엔 내가 제정신 같아?!”
“이런 미친! 하아...잠깐.. 잠깐만! 지금은 내가...”
N이 뒷걸음질 치자 분노한 집행자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상황이 장난이 않음을 직감한 N은 등을 돌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기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R은 전속력으로 뒤쫓아 N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
“정말 괜찮아요?”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R을 향해 N이 멍투성이가 된 주먹을 매만지며 물었다. R은 주저앉은 채 코를 훌쩍거리며 한 손으로 잔디를 쥐어뜯었다.
“저, 방금 전 일은...”
“그래. 없었던 걸로 하자구. 내가 병가를 낼게.”
N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한테도 말 안 할게요.”
“고맙다.”
R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N이 떠나간 뒤, R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이 차올랐다. 그 날 아침 일찍 산책을 하던 사람들은 잔디밭에 엎드린 채 서럽게 우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구름사이로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가벼운 바람에 춤을 추는 나뭇잎. 끝내주게 평화로운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