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음과 괴성이 터져나오는 전장, 이 곳은 스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사람들의 피가 튀기고 괴물들이 불을 내뿜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런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갈색머리 여인 듀나. 그녀의 관심사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청년 가온과 대치하는 자그마한 소녀였다.
"이자벨이 싸움을 시작했나봐요. 저도 슬슬 나서야."
이자벨도 듀나도 보통의 인간을 넘어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다. 그 밖에 싸우는 이들은 머릿수를 맞추기 위한 용도에 불과한 것. 듀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중요 전력인 자기 자신을 전장에 투입하려 한다.
"음?"
터벅거리는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뒤에서 창을 던지지 않네요."
여인은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반신이 새까맣게 물든 괴물과도 같은 존재, 그러면서도 다른 한 쪽은 새하얀 눈처럼 순백인 청년이었다.
"어차피 네년에겐 창과 검이 통하지 않으니 말야."
"후후. 하긴 저도 뒤에서 느닷없이 날아오는 칼에 맞아, 옷이 피범벅이 되는 건 피하고 싶답니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거다."
"그나저나 당신. 어째서 저와 싸우려고 하는거죠? 당신의 나와바리를 건드린 게 거슬렸나요?"
"흥."
청년은 가소로운 듯 코웃음 친다.
"영역이니, 먹이니, 그딴 건 어찌되던 상관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내 가족을 위해서다."
"가족이라. 신기하네요."
듀나는 청년에 말에 의아해 하며 한쪽 뺨에 손가락을 짚었다.
"저와 같은 초월체. 괴물이 된 당신에게 가족이랄 것이 있나요?"
"있다마다."
"호오."
"네년은 저기서 싸우는 녀석들에게 군침흘리고 있는 것이였지."
시야에서 반은 희고, 반은 검은 청년이 사라졌다. 여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읏!?"
그러나 그 직후, 청년은 듀나의 목 아래에 기다란 손톱을 박아넣고 날개를 펼쳐 쌔앵 날아갔다. 청년의 두꺼운 손톱에 목이 꿰뚫린 채로 듀나는 몇 미터나 허공을 날아 커다란 건물 외벽에 쳐박혔다.
"으윽. 아파라."
뿌득거리는 관절을 움직이며, 듀나는 건물에 박힌 자기 몸을 빼냈다. 자신을 내동댕이 친 청년은 그녀의 앞에 서서 왼팔을 펼치고 카드를 올릴 판자를 펼쳤다. 판자는 용의 새까만 비늘을 수없이 많이 엮어놓은 듯 하다.
"네년은 나 이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눈독들일 필요 없다. 그러기도 전에 내게 죽게 될 테니까."
"독점욕이 강하네요. 그런 남자는 별로인데."
먼지를 툴툴 털어내며 듀나가 일어났다. 여인의 머리 위로 굽이진 양뿔이 튀어나오고, 하늘하늘한 드레스 위로 몽실몽실한 양털 옷이 입혀졌다. 푸근한 인상의 아름다운 여인은 소름끼치는 숨소리를 들이쉬고 뱉어내며 청년을 노려보았다.
"교정해드리죠."
"할 수 있다면 해봐라."
각자 뿔과 손톱, 날카로운 송곳니를 내밀며 으르렁대는 짐승처럼 서로를 보고 포효한다.
"듀얼!"
……
Selected Ones - 35
Yang
……
차가운 냉방, 캄캄한 어둠 속에 한 여인이 잠들어 있다. 여인의 머리는 초록빛이 은은하다. 펑퍼짐한 옷을 입었음에도 상체에서 하체에 이르기까지, 풍만하고 여성스러운 곡선이 감춰지지 않는다. 깨어있을 때엔 무척이나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지금은 며칠이나 잠을 자지 못 해 다크 서클이 짙게 깔린 피로한 과학자다. 피로에 절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이불 속에 기절한 것처럼 쓰러져 누워있는 여인의 꿈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라. 세라."
세라 밀리언스, 여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다.
"이 목소리는……."
세라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세라에게 있어서 친숙한 것이었다. 한동안 듣지 못 했던 사람의 목소리, 앞으로도 듣지 못 할 누군가의 목소리다.
"일어나. 세라."
"네이트라."
세라를 부르는 것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처럼 새빨간 머리를 늘어트린 여인. 세라와 마찬가지로 풍만한 몸매지만, 탄탄한 근육질이 잡힌 것이 큰 차이점이다. 그녀는 2년 전, 포피리아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세라의 친구 네이트라였다.
"네이트라.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일어나라. 세라."
세라를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새까만 머리의 소녀가 초록 머리 여인의 밀었다 당기길 반복한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자그마한 키. 머리 위로는 늑대귀 같은 귀가, 엉덩이 아래로는 강아지 꼬리같은 것을 살랑대며 세라를 깨운다. 그녀는 네이트라가 아닌, 세라의 링커 스트로리였다.
- 그러니까 일어나래두!
"으으. 좀만 더……."
- 좀만 더 30분 째야!
"나 사흘이나 잠 못 잤으……."
- 네이트라였음 빨딱 일어났을 거라구!
"네이트라는 네이트라. 나는 나……."
- 으으으. 정말!
스트로리는 양팔로 세라를 안아서 번쩍 들어올렸다. 이불 째로 들어올려진 세라는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으나, 갑옷처럼 단단하게 세라의 몸에 둘둘 말린 이불덕에 아무런 아픔도 없었다.
"에너지를 비축해야 되……."
- 바깥에 난리났다니까!
"바깥……?"
그 말을 듣자, 세라가 비비적 눈을 비빈다.
"무슨 일인데?"
- 녀석들이 쳐들어 온 것 같아.
"왔구만."
- 아무것도 아닌 조무래기들이 태반이지만, 조심해야 할 녀석도 몇몇 있어.
"그렇다는 건 초월체가 여럿 있다는 뜻이야?"
- 지금 느껴지기로 셋 정도.
스트로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서 주의를 기울여 주변 일대를 탐색한다.
- 그리고 근처에도 하나!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압력이 느껴졌다. 커다란 암반에 짓눌리는 듯한 강한 힘이 세라의 이마를 낮췄다.
"이 느낌은!"
잠에서 확 깬 세라는 초월체로서 가진 힘을 방출하며, 거대한 압력에 저항했다. 몸을 틀어 뒷쪽을 바라보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한 명 서있었다. 여우같은 인상을 한 묘령의 여인. 스물은 넘었을 법한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여학생들이 입을법한 세라복을 입고, 푹신해 보이는 새하얀 꼬리를 여럿 살랑댄다. 그녀는 다름 아닌 폭시 크리스타였다.
"오랜만이구나."
"며칠이나 됬다고 오랜만이라는 건지. 낯짝도 두껍군."
"헤어진지 일주일 정도 되었잖느냐. 그정도면 오랜 시간이지."
"스트로리. 준비해."
- 계속 준비하고 있었다구.
주먹을 맞부딪히는 스트로리. 이제 막 깨어난 상태지만, 세라 또한 듀얼디스크를 펼치고 당장 싸울 태세를 마쳤다.
"너무 서두르는 구나."
"싸우러 온 거 아냐? 당장 듀얼디스크 펼치시지 그래."
"뭐. 싸우기는 하겠다만, 잠시 이야기라도 하지 않겠느냐."
"무슨 이야기를 한단거지."
"궁금하지 않은 것이냐. 나에 대한 것이."
"너에 대한 것? 미안하지만 난 그런 취향이 아니거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폭시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우선 나의 정확한 소속부터 밝혀야 겠구나."
"소속? 엑시즈 차원이 네 소속이겠지."
"꼭 그렇지만은 않단다.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내 위에 보스, 코트 메달리아가 있으리라 생각하나?"
세라도 스트로리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겉으로 보이기엔 그의 부하를 자처하며, 엑시즈 차원을 위해 싸우고 있긴 하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
자신은 엑시즈 차원의 편이 아니다. 그렇게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는 폭시의 말에 두 여성은 당황한다. 그런 모습이 우스웠는지, 폭시는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내 목적은 코트 메달리아를 죽이는 거야."
"너네 대장한테 반란을 일으킨다는 거냐."
"아차. 말이 좀 이상하게 전해졌구나. 내 손으로 직접 그를 죽인다는 게 아니니라."
- 그렇다면 어떻게 죽인다는 거야?
"그를 죽게끔 유도하는 것이지."
"너네 대장이 죽도록 한다?"
"코트 메달리아는 왕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이곳, 엑시즈 차원, 그리고 과거의 싱크로 차원. 그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그 이외에 왕관을 가지고 있는 자는 없었어."
"……."
"그러나 그 일은 12년 전을 기점으로 틀어졌지."
"12년 전? 그 때는 분명……."
"스탠다드의 지배자. 트리는 죽기 직전에 왕관을 만들어냈다."
"!"
"물론, 완성하고 그것을 자기가 사용하기 전에 죽게끔 했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 했다는 이야기잖아."
"그렇지. 12년 전에는 말이다."
폭시는 시간을 12년 전의 과거에서 조금 더 가까운 과거로 이동한다.
"그러나 2년 전, 이변이 발생했느니라."
"2년전!"
세라에게는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남은 때. 폭시는 자기 입으로 스스로 그 때를 불렀다.
"가온이라는 꼬마가 무슨 연고인지 왕관을 완성시킨 것이다."
"!!!"
"하지만, 그것 또한 완전하지 못 했기에 얼마 못 되어 파괴되었지."
왕관이 만들어지고 파괴되기를 2번 반복한다. 정말로 파괴되어 이제 없다면 폭시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라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젠 더이상 없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 확신했지. 왕관은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잔해가 아직 그 꼬마에게 남아있음을."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걔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니. 그 반대다."
"반대라고?"
"그 애가 왕관을 완성시키게 하여, 코트 메달리아를 죽이도록 한다."
……
내일 기숙사에서 맥주+핏짜 꽁짜로 준다네요
그래서 기숙사 왔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