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시려오는 차가운 바람이 하늘을 휩쓸었다. 감옥 외부에서 침입자들을 처단하려던 수많은 날개 달린 괴물들도, 지옥에서 올라온 새까만 용들조차 모두 얼어붙었다. 새하얀 김이 피어오르며, 빠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어붙은 괴물들의 몸이 부숴져 땅바닥에 떨어지고 박살나는 소리였다.
"내 패배다."
한스 라이너는 온몸에 힘이 빠져서 반쯤 무릎을 꿇은 채로 쓰러쳐졌다. 패배한 한스는 별다른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기에, 초아는 그를 죽이지 않고 카드 한 장을 실체화시켜 몸을 구속했다.
한스를 구속하고 난 다음, 초아는 괴물들과 대치하던 남자들을 모아 감옥 내부로 발을 옮겼다. 한스가 지키던 거대한 문은 그들을 초대하듯 서스럼없이 열렸다. 그 안에는 키가 큰 남성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코트 메달리아가 아니었다. 머리는 미역처럼 구불구불한 검은 색이고, 새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였다. 무기를 들고 전투 태세를 취하지도 않고, 여유롭게 안경을 고쳐 쓰는 모습에 초아 일행은 도리어 당혹감을 느꼈다.
"한스 라이너로 당신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나 보군요."
"너는 누구지?"
"소개가 늦었습니다."
미역머리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일어나며 동시에 의자 위에 돌출된 버튼 몇 개를 눌렀다. 그러자, 감옥 외벽에서 나왔던 것처럼 수십 마리의 괴물들이 천장과 벽에서 나타났다.
"저의 이름은 닥터. 한스 라이너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막는다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문지기는 한 명이 아니었나. 덤벼라!"
"흥분하지 마시길. 저는 당신과 싸우려는 게 아닙니다."
"뭐라고?"
"애초에 저의 듀얼 실력은 한스 라이너와 비교하면 형편없는 수준. 그와 제시아 호라이즌을 이긴 당신을 제가 상대한다고 해봐야 지는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오호라. 몬스터들만 소환해놓고 도망치겠다 이 말인가."
초아와 그의 일행들이 듀얼 웨펀을 써서 몬스터들을 불러냈다.
"하지만 그럴거라면 굳이 우리 눈 앞에 나타나지 않고, 몰래 숨어서 몬스터만 불러내도 됬을텐데?"
"그렇지요. 바로 보았습니다."
닥터라는 남자는 왼팔을 들어 듀얼디스크를 작동시켰다.
"저는 보스가 신목을 흡수하는 동안, 이기고 질 것 없이 시간만 끌면 될 뿐이니까요."
"쯧."
닥터의 설명에 초아는 혀를 찼다. 듀얼의 목적이 승패가 아니라 단순히 시간 끌기라는 것을 외친 이상, 그와 듀얼을 한다고 하더라도 초아가 얻을 것이 없다.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스타더스트. 공격해라!"
듀얼을 할 것 없이, 듀얼 웨펀으로 소환한 몬스터로 직접 싸우는 수밖에.
"원시적인 싸움법. 좋아요.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지요."
닥터는 초아의 방법에 응수하듯, 듀얼디스크 위에 새까만 카드들을 순식간에 여럿 올려놓았다. 그의 카드들은 솔리드 비전의 형태로, 몸 구석에 제각기 이름에 써진 숫자를 띄우며 나타났다. 으르렁대며 포효하는 여러 몬스터들이 격돌하며, 감옥 내부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듀얼디스크는 제가 만든 것과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어요."
"이건 우리 편의 천재가 만들어낸 물건이거든."
"그렇군요.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만나보고 싶어요."
닥터가 소환한 몬스터가 초아가 불러낸 용을 멀리 밀쳐냈다. 닥터는 그 모습을 보며 뺨을 씰룩댔다.
"출력은 제가 발명한 것에 비해 밀리는 모양이지만요."
한 걸음 나아가면 적은 한 걸음 물러나고, 적이 한 걸음 다가오면 한 걸음 물러난다. 일진일퇴를 반복하며 그들의 싸움이 팽팽하게 이어지던 도중 이변이 일어났다. 새까만 감옥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 모양이 점점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지?"
"바닥이!"
바다가 파도치듯 울렁이고, 천장에서 굵고 곧은 쇳덩이 여럿이 삐져나와 몬스터들의 머리를 찔렀다. 마치 감옥이 의지를 가지고 형상을 바꿔가는 듯 했다. 닥터는 이 이변을 눈치채고, 듀얼디스크를 거둔 채 뒤를 돌아 걸어갔다.
"흠. 여기까지 해둬야겠네요."
"도망치는 거냐."
"도망친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시간을 끌 필요가 없어졌다 그 말이죠."
"그렇다는 건!"
닥터는 코트 메달리아가 신목을 흡수하는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해 나타났다고 했다. 그가 물러난다는 것은 곧 코트가 신목을 완전히 흡수했다는 뜻.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변들은 모두 그 영향일 것이다.
"큭. 서둘러라. 빨리 녀석을 해치워야 해!"
코트가 신목을 완전히 흡수했다면, 그 힘으로 작동하는 듀얼 웨펀 또한 먹통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무기도 없이 싸우는 꼴이 된다. 초아와 그의 일행은 감옥 내부를 뛰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안쪽에 있을 코트를 향해 달려갔다.
괴물들이 사라지고, 감옥은 시시각각 변해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초아에게 구속당해 움직일 수 없는 한스 라이너의 눈에는 다른 것이 비치기도 했다. 그의 기억 속에 이미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엑시즈 차원의 건물이 스탠다드에 덧씌워지고 있다."
닥터가 코트를 대신해서 그에게 했던 말이 있다. 코트는 신목을 흡수하고 곧장 세계 통합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지금 현실이 되어, 스탠다드의 하늘에 엑시즈 차원에 있던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지상또한 마찬가지로, 지상과 지하의 건물 또한 엑시즈 차원에 존재하는 건물들로 덧씌워 질 것이다.
"이곳은 이미 엑시즈 차원이 되었음이나 다름 없다."
한스 라이너는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완전히 고정된 것은 아니기에, 땅바닥을 기어서 움직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는 제 몸을 끌며 비참하게 벼랑 끝을 향했다. 적에게 패배하고, 동정받아 목숨조차 잃지 않은 일은 그에게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다.
"패배한 전사는 필요없다."
그는 새파란 하늘에 몸을 던졌다.
……
Selected Ones - 49
Fight with us
……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방 안.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폭시와 싸우고 난 뒤로 기절했던 양은 몸을 움찔대며 눈을 떳다.
"일어났나."
양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그를 닮은 또다른 청년, 그의 동생인 류세였다. 그의 기억 속에선 분명히 폭시와 싸우던 류세에게 큰 소리를 내어 쫒아내고 양이 대신해서 싸웠었다. 그런데 어째서 류세가 그의 옆에 있을까. 양은 곤혹스러웠다.
"듀얼은 무승부로 끝났다. 여우 녀석은 결국 놓쳤다."
"땅바닥에 기절해 쓰러져있던 너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지금이야 겉으로 드러난 회복된 것 같지만,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싸웠던 거지?"
"너도 그 때 봤을텐데. 녀석은 나의 반신을 용으로 만들고, 그녀석과 똑같은 괴물이 되게 했다."
"복수인가."
"물론이다. 내 생명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 건 복수심. 그것 뿐이니까."
양의 적은 가온에서 폭시로 바뀌었을 뿐, 옛날과는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류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양은 입을 닫은 류세에게 다시 몇 마디를 덧붙였다.
"뭐. 내 생에 남아있는 건 복수만이 아니다. 지켜야 할 것이 있거든."
"지켜야 할 것?"
"그래. 복수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던 옛날과는 다르게 말야."
양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사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싸우지 못 하는 인원을 임시적으로 보호해둔 셸터인 것 같았다.
"폭시를 놓쳤다고 했었지. 그녀석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류세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로 했다.
"우리와 같이 싸워줘."
"……."
양은 눈을 감았다 한 차례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어 대답하려는 순간, 땅이 크게 뒤흔들렸다.
"그 여우년인가!"
폭시와 듀얼하는 도중에 이렇게 지진이 일어난 듯한 충격은 몇 번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진동은 그 때보다 더 커다랗고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갈라지는 벽면 사이로, 기괴한 생김새의 몬스터들이 몇 마리 기어나왔다.
"큭! 가이저!"
지금 이곳처럼, 셸터 내부에도 몬스터들이 나타났을 수 있다. 류세는 그렇게 판단하고 바로 듀얼 웨펀을 작동시켜 몬스터를 소환했다. 그가 불러낸 새까만 용은 벽의 틈새에서 나타난 몬스터들을 제압했다. 류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셸터 안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등 뒤로, 류세의 사각지대에서 새까만 괴물 한 마리가 뛰쳐나와 그를 덮치려 했다. 그 괴물이 가까이 다가와 빠르게 진동하는 날개 소리가 귀에 들어와서야, 류세는 등 뒤의 자객을 눈치챘다.
"윽!?"
몬스터를 불러내서 막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깝다. 외마디 탄성을 내지르는 것이 고작이었던 류세에게, 양이 넙적한 칼 한 자루를 들고 뛰쳐가 괴물의 머리에 꽂아버렸다.
"아주 잠깐이다. 도와주지."
"그래. 고맙다."
동맹을 맺은 두 남자 옆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그림자가 생겼고, 그것이 곧 유리창을 깨고 갑작스레 양과 류세 사이에 끼어들었다.
"비켜! 비켜!"
갑작스레 난입한 그것의 정체는 D휠 한 대. 거기에는 갈색 머리 남성과 녹색 머리 여성이 타고 있었다. 남자는 가온, 여자는 세라 밀리언스였다. 세라는 D휠이 정지함과 동시에 토하려는 듯 했다. 류세는 그에게 가장 먼저 의문을 말했다.
"1층도 아닌데 여길 어떻게 D휠로 들어온거야."
"외벽이 휘어졌더라고. 그걸 타고 올라왔지."
"허 참……."
세라는 당장이라도 토를 할 것 같은 창백한 표정을 하고서 가온에게 소리쳤다.
"시속 200km가 넘는 속도로 건물 유리창에 꼬라박는 게 어딨어!"
"여기서 저번에 그 여우놈의 냄새가 난댔다고 했잖아. 한시가 급한데 가릴 게 어딨겠어 아줌마."
"누가 아줌마란 거냐!"
멀미를 일으키는 세라를 내버려두고, 가온이 헬맷을 벗어 던졌다. 가온은 앞을 쳐다보며 싸울 준비를 했건만, 정작 그곳에 있는 것은 여우 꼬리를 내다놓은 여성이 아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양……!"
"다시 보게 됬나."
"네가 왜 여기에!"
- 이상하다. 여기서 분명 그 여우의 냄새가 났는데!
세라의 옆에서 그녀의 링커인 스트로리가 삐져나왔다. 다른 이들에 비해서 탐색 능력이 월등히 높은 그녀는 이곳에 폭시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으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폭시가 아니라 양이었다.
- 야. 냄새 제대로 맡은거 맞아?
- 틀릴 리 없어! 내가 틀리는 거 봤어?
- 그건 옛날 일이고, 지금은 약해졌잖아.
- 으. 아니래두!
스트로리의 옆에 모르포가 나타났다. 그녀는 스트로리에게 제대로 탐색한 것이 맞냐며 쪼아댔고, 스트로리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쫑알쫑알 떠들어대는 그들을 보고 양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허둥대지 마라. 내 목적도 여우년을 잡는 것이니까."
"뭐라고?"
- 근데 여우는 어디갔어?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그 여우는 여기 있었으니까.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군."
- 끄으응. 도망친건가!
양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가온의 어깨에 류세가 손을 올렸다.
"안심해. 협력하기로 했으니까."
"저녀석이랑 협력을?"
가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양은 류세의 말을 긍정했고, 가온은 얼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 한 채 수긍하기로 했다.
"그것보다 급한 게 있어. 아까 지진이 일어나면서부터 건물 내부에 괴물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셸터 안쪽도 위험해."
"안에 아직 사람이 있잖아?"
"그러니까 빨리 구하러 가야해."
"알겠어."
가온은 멀미하는 세라를 일으켜 세우고 류세의 뒤를 따랐다. 양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갔으나, 가온은 아직도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런데 네가 우리랑 협력을 하겠다니. 참 별난 일이네."
"그래. 나도 5분 전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렇냐."
"그리고 나에게도. 지켜야만 할 것이 있거든."
"?"
"앞을 보기나 해라."
"알고 있어."
셸터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네 사람은 듀얼 웨펀을 들어 카드를 뽑았다.
……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의 모습이 점점 변해간다. 스탠다드의 낯선 풍경, 두 세력의 싸움에 유린되어 가는 지상의 모습은 눈에 익은 모습과 점점 겹쳐졌다.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코트 메달리아, 엑시즈의 보스가 의도한 바. 그의 계획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호즈 호라이즌. 코트를 따라서 신목을 향한 제시아 호라이즌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나이 육십에 이른 노병이다. 흰머리가 검은 머리를 뒤덮었으나 완전히 백발은 아니다. 검정과 하양은 대치하는 두 세력과도 같이 서로 공존하며 짙은 회색처럼 보였다.
"여기 있었나. 폭시 크리스타."
그는 새하얀 꼬리 아홉을 거느리고 있는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산짐승처럼, 사람 하나를 잡아놓고 그의 장기를 뜯어먹고 있었다. 이름이 불린 폭시는 호즈 호라이즌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 보았다.
"여기는 무엇하러 왔느냐."
"폭시 크리스타. 최초의 침공 시기에는 SS의 배정 지역을 멋대로 바꾸고 스쿨을 습격하게 해 전사하게 만들었다."
그는 폭시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여인은 사람의 피가 잔뜩 묻은 입가를, 새까만 장갑을 쓴 손으로 스윽 지웠다.
"그리고 재정비 시기, 세라 밀리언스라는 스탠다드의 인물에게 접근하여 닥터의 실험 자료 일부를 멋대로 넘겨주었다."
"흐응."
"그리고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죄들을 지었다."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
"폭시 크리스타. 널 반역죄로 처형하겠다."
"호오."
폭시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사람의 시체를 대충 발로 쳐냈다. 장기를 먹혀, 배가 텅텅 비어있는 어린 아이였다.
"그 아이는 아직 나이도 차지 않은 듯 하군. 전사가 아니야."
"상관 없느니라. 아니 차라리 어린 아이가 더 낫지. 어린 아이의 피와 살, 장기들은 어린 송아지의 것과 같이 깨끗하니까."
"요망한 것."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아들 뻘 되는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그 누구도 너를 어른이라 여기는 자는 없다. 어리석은 것."
"그렇더냐?"
폭시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그렇다면 그 부족한 머리에 이 어미가 예절을 가르쳐주마. 꼬마야."
"허튼 소리."
두 사람은 각자 왼팔을 들어 소리쳤다.
"듀얼!"
……
호즈 할아버지는 요렇게 생기셨죠
(IP보기클릭)211.200.***.***
아니 시간을 끌려고 한다면 더더욱 듀얼해라!!!(※못합니다)
(IP보기클릭)59.15.***.***
"내 목적은 시간을 끄는 것이다" "...!!!" "나와 듀얼하면 시간만 낭비하게 되는 거지." "그렇다면 듀얼이다...!!!" | 17.08.26 21: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