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하쿠레이 무녀의 호의로 머물게 된 것은 좋았지만, 정작 만나려던 인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식객으로서 해야 할 잡무만 늘어났다. 그리하여 한 달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선 린노스케는 완전히 좋을 대로 부러 먹히는 머슴이 다 되어 있었다.
하루 일과는 아침부터 밤까지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자급자족을 위한 텃밭을 가꾸는 것부터 빨래와 청소를 비롯한 집안일까지 전부 그의 몫이었다. 하루 세끼 식사를 준비하고 장작을 패서 밤에는 목욕을 위한 뜨거운 물까지 준비하니 주인이 할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끔 찾아오는 참배객의 의뢰를 제외하고는.
이러다 보니 하루 종일 빈둥빈둥 대는 것이 무녀의 일상이었다. 싫은 살림을 전부 린노스케에게 떠 넘겨 버린 무녀는 린노스케가 언제까지고 자신의 신사에 머물렀으면 했다. 하지만, 그가 머무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계로 갈 단서인 경계의 요괴를 만날 때까지. 부러 먹기 좋은 편리한 노동력은 그때까지만 제공될 뿐이었다.
무녀는 그래서 경계의 요괴인 야쿠모 유카리가 최대한 늦게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녀가 모습을 드려낸다면 머슴이나 다름없는 식객이 훌쩍 떠나버리기에.
차라리, 겨울에 찾아왔으면 좋았을 것을.
겨울이라면 적어도 봄까지 머무는 것이 보장되는데, 안타깝게도 때는 여름. 나태해질대로 나태해진 무녀는 툇마루에 옆으로 누운 채, 그런 아쉬운 생각을 했다. 린노스케가 찾아온 지도 벌써 이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점심이 조금 지난, 해가 하늘 정중앙에 떠 있어 따가운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이 시간에도 텃밭 일에 소홀하지 않는 린노스케가 잠시 휴식을 취하려 툇마루로 걸어왔다. 방금까지 일을 해서인지 그의 상체는 온통 땀범벅이었지만 워낙 훤칠한 외모 덕분인지 그닥 더러움이 느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가 다가오자, 누워 있던 무녀가 상체를 일으켜 양반다리를 한 자세로 앉았다.
"열심히네."
".. 누구 때문인데."
아무리 식객이어도 린노스케 혼자 신사의 일을 전부 떠맡고 있는 건 문제였다. 이렇게 까지 의존해 버린다면 당장, 그가 떠났을 때 어떻게 될 지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무녀는 미래의 일에 대해 애써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난 이렇게 까지 해 달라고는 하지 않았어."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빈둥대기만 했지."
린노스케가 정론을 찔러왔지만, 그래도 태연작약. 무녀의 무신경에 린노스케는 진절머리가 났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야쿠모 유카리를 오매불망 기다린지도 벌써 이주 째인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건 무슨 연유란 말인가. 아니, 정말 이 신사에 나타나기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유카리를 만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은 여기가 유일했다. 그러니 무녀의 저런 태도에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주 전에 떠났을 것이다.
툇마루에 앉아 땀을 식힌 린노스케는 갑작스런 갈증에 별채 뒤편에 있는 자그마한 우물가로 갔다. 뒤에서 시원한 냉수가 마시고 싶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애써 무시하며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을 벌컥벌컥 마셔 넘겼다. 물은 뒤통수가 저릿해질 정도로 차가웠다. 갈증과 함께 체내의 열을 모두 식힌 린노스케는 입가에 흘려 내리는 물을 닦아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 무녀가 남자를 다 들이다니. 별 일도 다 있네?"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린노스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 뒤의 여성에게 물었다.
"하쿠레이 무녀와 아는 사입니까?"
"그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야."
그 얘기에 린노스케는 그제야 뒤를 돌아 여성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그는 경직된 것처럼 굳어졌다. 여름 햇볕에 조금도 그을리지 않은 새하얀 얼굴에 이국적인 이목구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은 햇살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찰랑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숨이 머질 것 같은 미녀였다.
도저히 인간의 용모라 보기 힘든 미모에 린노스케는 어렵지 않게 여성의 정체를 특정해낼 수 있었다.
"야쿠모 유카리."
린노스케의 중얼거림에 유카리가 조금 놀란 듯 말했다.
"어머,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안 거야?"
이런 외딴 신사에 저 만치 아름다우면서 수상한 여인이 발을 들인다면 그녀 말고 달리 생각할 존재가 없었다. 자신을 알고 있는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유카리는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바로 요괴 대현자. 야쿠모 유카리야. 그러는 넌 누구지?"
"모리치카 린노스케."
"후훗."
유카리가 작게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에게 호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가진 호감에는 그의 잘생긴 외모도 한몫 했지만, 그보다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절실함이 느껴지는 눈이네? 그래. 하쿠레이 신사에 온 건 날 만나기 위해서겠지."
린노스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무슨 이유로 날 찾은 건지 들어 볼까?"
유카리가 재촉하듯 묻자, 린노스케는 기다렸다는 듯이 빙빙 둘려대지 않고 그녀를 찾은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명계에 가는 방법을 알고 싶다."
"명계?"
유카리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썩였다. 무슨 연유로 자신을 찾은 건가 싶었더니, 명계라니. 산자가 명계에 발을 들이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 들어줄 만한 이유가 아니기에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 거절의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린노스케의 눈이 너무나 절실해 보였기 때문에.
요괴로서 짧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저렇게까지 절실해 보이는 눈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명계에 무엇이 있길래 저런 눈을 한단 말인가?
눈웃음이 옅어지고 무표정이 된 유카리가 선듯 대답을 들려주지 않자, 초조해진 린노스케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애원하면서.
"부탁이다. 제발, 명계에 갈 수 있게 해다오."
똑바로 응시하는 두 눈에서 당장이라도 닭똥같은 눈물이 흘려 내릴 것만 같았다. 유카리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저 눈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져 갔다. 이러다 정말, 그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고작, 동정심 때문에 금기를 어기는 짓을 하게 된다면 현자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는 꼴이다. 유카리는 자신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시선에서 고개를 돌려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그건 좀 곤란할지도."
그러나 결국, 강하게 거절하지는 못했다. 수락의 여지를 남겨 놓고 만 유카리는 시선을 회피한 채 그런 자신의 연약함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나정도 되는 요괴가 고작 남자의 눈빛에 약해지다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린노스케는 그런 유카리를 의아하게 쳐다봤고, 둘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흘렸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별안간 들려온 무녀의 목소리에 둘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어쩐지 안 온다 싶더니!"
무녀는 수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이서 몰래 밀회를 하고 있다니. 선남선녀라 그런지 그림이 되는구나."
감탄사처럼 뱉어낸 말엔 비꼬는 듯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레이카도 참!"
유카리는 무녀의 오해를 푼답시고 양손을 휘저으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지만, 무녀. 레이카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기만 했다.
"네네~ 알고 있어요. 오랜만에 나타나서 처음 본 남자를 꼬시는 유카리님."
"그 이상 놀리면 나 울어버릴 거야!"
짖굿게 굴며 자신의 반응을 즐기는 레이카의 행동에 유카리는 양 볼을 잔뜩 부풀렸다. 일설로는 나이가 네 자리 수에 육박한다는 현자가 떼를 쓰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당황한 것은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린노스케였다.
지금의 유카리는 아까 자신과 대화하던 자와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이가 컸던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신 연령이 한 자릿수까지 내려간 듯한 지금의 유카리가 친근감이 생겨 대하기 쉬워 보였다.
"알았어. 그만 놀릴게."
이 이상 놀렸다간 진짜로 삐쳐 버릴까봐, 그만 놀리기로 한 레이카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유카리는 얼굴을 토라진 표정에서 원래대로 돌리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글쎄."
"글쎄라니. 애매한 대답이네?"
"안 되는 게 당연하지만.."
왜 일까?
문득, 곁눈질로 쳐다본 린노스케를 보자니 마음이 괜스례 울렁거린다. 도대체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이토록 흔들리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유카리는 살짝 좁힌 미간으로 말했다.
"안 될 것도 없다고 할까?"
"뭐야 그게?"
"그럼, 명계에 데러다 주겠다는 건가!"
불명확한 말에 레이카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노려봤고, 린노스케가 그 뒤를 이어 물었다. 그러나 쓴웃음만 지을 뿐, 유카리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굳게 닫힌 입으로 침음성을 흘릴 따름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유카리는 모든 게 귀찮아 졌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미안, 잊고 있던 볼일이 생각나서 가봐야 겠어."
그러더니, 유카리는 별안간 생겨난 검정에 가까운 보라색 공간에 삼켜져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를 삼킨 공간은 바로 실선으로 변하더니,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없었다. 린노스케는 확답을 들려주지 않고 도망쳐버린 유카리가 있던 장소를 말없이 바라보았고, 그런 모습에 레이카가 한숨을 내뱉었다.
"당장 대답하기 곤란해서 저러는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레이카는 그녀가 다시 나타나기 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별채 툇마루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린노스케는 한참을 그 곳에 서 있다가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레이카가 마실 물을 길었다.
그리고 레이카의 말대로 유카리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그 모습을 드려냈다. 사라질 때와 같이 허공에 생긴 기괴한 공간. 틈새에서 나온 그녀는 결단을 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