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퍽퍽.
웅크린 슈텐을 발로 밟아대는 소리가 아주 경쾌했다. 슈텐에게서 욕지거리가 들려왔지만, 그만두는 이는 없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밟고 있는 여자가 정말로 슈텐인지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있는 대로 멋진 척 해놓고 실상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여럿에게 둘러싸여 집단 구타를 당하는 슈텐의 모습은 코우에겐 다른 의미로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싸우는지 잘 보라고 일러 놓고는 막상 저 꼴이라니. 한 순간 정말로 멋진 싸움을 보여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이 우스워질 정도였다. 두령은 이런 결과가 될 거라는 것을 몰랐던 걸까?
그래도 자신 있었으니까, 대부분의 힘을 봉인한 채 싸움을 시작한 게 아니겠는가. 물론, 그 결과는 참담했지만.
얼마나 밟았을까.
참다 못한 슈텐이 고함을 왁 질렀다.
"더는 못 참아. 씨/발놈들 다 죽었어!"
하늘에 떠있던 작은 태양이 파앙-! 하고 터지더니 미세한 가루가 되어 아스러졌다. 그리고 이어 슈텐을 밟아대던 오니들이 갑자기 발해진 충격에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아까까지 웅크러 있던 슈텐이 주먹쥔 양팔을 좌우 대각선으로 기지개를 펴듯 뻗으며 서있었다. 그녀는 분노가 가득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이 중얼 거렸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그리고 갑자기 큰 지진이 난듯 지축이 흔들렸다. 요괴들은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뒷걸음질 치며 우왕좌왕했다. 본능적으로 용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코우도 이 자리에 계속 있다간 요괴들과 함께 슈텐의 분노에 휩쓸릴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대요괴에 범접한 불사력이라도 슈텐의 폭력에는 무사할 수 없다. 코우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고 그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분노로 분별력이 없어진 슈텐의 폭력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4척 5촌 정도의 슈텐이 순식간에 20척에 달하는 귀왕 보다 훨씬 더 커진 것이었다. 어림잡아도 60척은 넘어 보인다. 그 정도만 해도 무지막지하게 큰데, 더 무서운 것은 아직도 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머리가 달까지 닿을 기세로 커져가던 슈텐이 드디어 그 끝없는 성장을 멈추었다. 그리하여 최종적인 크기는 약 140척. 올려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커진 슈텐은 인정사정없었다.
그 거대한 손으로 바닥을 한 번 쓰니, 수십에 달하는 요괴들이 건물들과 함께 쓸려 나갔으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주먹에 요괴들이 머물던 거처는 지면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광경은 말로 필설할 수 없을 정도로 대재앙이었다. 백귀야행의 요괴들은 아비규환 속에서 밟혀진 개미 신세가 되어 죽어갔고, 강건하기로 유명한 오니도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떡이 되었다. 분노로 거대화한 슈텐을 막을 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어 보였다.
처음부터 자신을 모욕한 백귀야행을 처단하러 온 슈텐이었으나, 그 정도가 심했다. 백귀야행은 둘 째 치고, 자신의 싸움을 보고 배우라며 데려온 코우 마저도 무자비한 폭력에 휩쓸리게 만든 것이었다.
거대한 손바닥에 쓸려 나가고 내려 찍히고, 또 한 번 쓸려 나가기를 반복한 코우는 이대로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슈텐의 밑에서 수행을 시작하면서 수없이 많은 상처와 죽음의 고비를 넘어온 코우는 이제 어지간한 중상으로도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정신이 단련 되었지만, 이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는 도저히 살아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슈텐을 퇴치하려 왔던 사내에게 가슴이 뚫렸을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땐, 가슴을 중심으로 몸 전체에 퍼져나간 영력 때문에 정신을 잃었지만, 영력이나 신력, 또는 법력 같은 파사의 힘이 없이 순수한 패력 만으로 절명할 것 같았다.
아무리 대요괴의 불사력이 있으면 뭐하는가?
어떤 상처든지 순식간에 치유된다고 하더라도 그 치유가 따라 잡지 못할 정도의 피해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것을.
몸 곳곳에 살이 떨어져 나가고 새하얀 뼈가 흉하게 드려난 코우는 이 순간만큼은 슈텐의 제자가 된 것을 후회했다.
*
슈텐은 아침이 밝아오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머리에 쏠렸던 피가 가라앉자 보인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괴멸적인 참상. 그제야 저질렀다는 것을 인지한 그녀는 원래의 크기로 돌아가 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깨끗하게 쓸어 버렸네."
초토화 되다 못해 비가 오면 연못이 생길 구덩이들을 제외하곤 아무 것도 없는 황야를 만들어 놓고 내뱉는 감상평이 고작 그 정도였다. 슈텐은 나 몰라라 하는 심정으로 옆구리에 찬 표주박을 집어 들고는 마개를 열어 안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셔 넘겼다. 절경을 감상하는 듯한 여유로운 얼굴이었지만, 눈에 보이는 건 파괴의 흔적만 있는 황량한 대지뿐. 다시 한 모금 마셨을 때, 불현듯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맞다. 그 녀석 괜찮으려나?"
틀림없이 자신이 휘두른 폭력에 휩쓸렸을 코우가 그제야 걱정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운이 좋으면 살았을 테고, 나쁘면 죽었을 테지. 자신의 패력과 코우의 불사력을 감안해 볼 때, 그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단, 운이 좋았을 경우를 상정하기로 한 슈텐은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코우를 찾기위해 눈을 가늘게 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자가 영 없지는 않았다. 비록 코우는 아니었지만, 운이 좋은 녀석이 꿈틀거리며 땅을 기는 게 보였다.
그런 놈들이 총 여섯. 모두 오니였다. 아침녘까지 계속된 파괴 행위 속에서 운만으로 살아 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 모두 강철의 육체를 가진 오니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찾고 있던 코우는 의외로 가까운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바로 뒤쪽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하긴, 다른 오니도 살아남았는데 코우가 살아남지 못할 리가 없었다. 슈텐은 코우가 무사를 확인하고는 안도감이 들었는지, 절로 입가가 올라갔다. 그리고는 피식, 싱거운 웃음을 뱉어내며 정신을 잃고 있는 코우를 사뭇 온화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때, 끄응, 하고 코우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눈이 살며시 떠졌다. 정신을 차린 코우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슈텐을 발견하고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가누기 힘든 몸으로 슈텐과 마주한 코우가 입을 열었다.
"이제 화가 좀 풀리셨습니까?"
안부처럼 묻는 그 말엔 가시가 박혀 있었다. 기껏 자신의 싸움을 보여 준다고 했는데, 격분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난동을 부린 격이니 원망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슈텐은 미안한 기색하나 없이 활짝 웃으면서 답했다.
"응. 풀렸으니까, 멈춘 거 아냐?"
제대로된 싸움을 보여주긴 커녕 하마터면 자신마저 죽일 뻔 해놓고,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 슈텐의 모습에 코우는 솔직히 기가 찼다. 하지만, 두령이 저런 게 한 두 번인가? 그녀가 무책임한 두령이라는 것은 제자로 그 밑에서 몇 달 수행을 해본 그로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 이제 와서는 새삼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나저나 참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애당초 참고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서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건만, 설마 이렇게까지 참고가 안 될 줄이야.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과 직접 눈으로 본 것의 차이는 상당했다. 이건 말 그대로 힘으로 밀어버린 것이었다.
얼마나 엉망진창이었으면, 엉망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막무가내식 수행을 묵묵히 참아왔던 자신조차 질러버릴 수준이었다. 이런데도 장본인은 술을 마시면서 즐거운 듯이 히죽대고 있다.
표주박의 술을 다 비워버린 슈텐은 취기가 도는지 양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쩝 다시면서 아쉽다는 듯 말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할 걸."
비어버린 표주박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후회의 말을 뱉어낸 슈텐의 시선은 구덩이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는 황야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혀를 쯧, 차며 뒷말을 이었다.
"ㅁㅁ들 술통만큼은 남겨놨어야 했는데.."
후회는 결국,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시 시선을 코우에게로 돌린 슈텐이 씨익, 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이 슈텐도지가 싸우는 모습 어땠냐?"
코우에게 있어 솔직하게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하려니 거짓을 고하는 것이 되고, 그렇다고 바른 말을 하려니 심한 대답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뜸을 들이며 고민을 하던 코우는 별 도리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두령다운 싸움이었습니다."
결국, 택한 것은 에둘러 말하는 절충안. 두령다움이라는 말에 그가 가진 감상 그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슈텐은 캬캬캬, 하고 제 무릎을 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지? 나답게 아주 끝장나게 멋있었지?"
"....."
제아무리 둘러말하는 것에 능한 코우라 할지라도 그 물음만큼은 대답할 수 없었다. 불합리한 힘으로 행한 일방적인 유린을 도대체 뭘 어떻게 봐야 멋있는 게 되는 걸까? 결국, 슈텐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동의한다는 의사나 기색이 없는데도, 슈텐은 자아도취해서 구구절절 제 자랑을 이어갔다.
"이게 바로 강자의 싸움이다. 내가 1할 이하의 힘으로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는 적진을 홀로 뛰어드는 모습 봤지? 때로는 적의 수준에 맞춰 줄 필요도 있는 거야. 그것이 바로 사나이란 거지."
확실히 잘 봤었다. 그렇게 멋진 척 온갖 뽐을 다보여 놓고 순식간에 둘러싸여 구타 당하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구타당하면서 욕설을 내뱉으며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는 그 모습도 절대 잊혀 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 보는 제자의 시선이 차갑게 식어 있음에도 슈텐의 덕담 아닌 덕담은 끝날 기미 없이 이어졌다.
"진정한 힘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싸움의 승패는 상대를 시선으로 제압하는 것으로 결정 나지."
정말로 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