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타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맨 처음에 사과한 시점에서 그 뒤에 따라가는 이유 같은 건 구질구질하다고 아나타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구질구질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취한 이유는 레이센이 아닌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이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그럼으로써 레이센을 위해 이어서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을 납득한 시점에서 더이상 길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나타는 고개를 숙인 채 레이센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레이센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아나타는 실망감을 점점 더 감출 수 없게 되어갔다. 그리고 망연자실하기 직전 아나타는 어떤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고개를 휙하고 들었다. 아나타는 당황한 듯이 무언가 어정쩡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레이센? 대답이 없으면 들어가겠습니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어딘가 어정쩡했던 아나타의 얼굴이 슬슬 구겨지기 시작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아나타는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나타는 불안했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기쁨이나 통쾌함을 느낄 여력은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낭비한 자신에게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거대한 허탈감이 아나타의 몸을 지배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젠장할……."
아나타는 완전히 구겨진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서 잠깐의 지체도 없이 몸을 돌려 뛰어갔다. 누가 보면 영원정에 불이 나서 탈출하려는 사람으로 오해할 정도로 분주한 움직임이었다.
아나타가 그렇게 달려간 이유는 바보 같이 혼잣말을 한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다. 레이센을 한시라도 빨리 찾기 위함이었다.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낭비한 이상 느긋하게 걸어가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늦기 전에, 감정이 희석이 되기 전에 사과해야 한다. 오직 그 생각만으로 아나타는 달려나갔다.
* * *
야고코로 에이린은 갑자기 들려오는 외침에 신경이이 확 쏠렸다. 방금 전까지 빗소리를 들으며 깊은 상념에 빠져있던 그녀지만 외침이 들려온 그 순간 바로, 그 외침이 비명 같은 것이 아닌 누군가를 찾기 위한 고함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아나타가 레이센을 찾고 있었다.
술래잡기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평상시라면 아나타와 레이센이 공주님과 놀고 있을 시간이라는 것을 떠올린 에이린은 그렇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1초도 안되 그 생각을 머릿 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러기엔 아나타의 외침이 어쩐지 다급해보였다. 그 다급함만 빼면 이때까지 몇 번 있었던 일이었다. 만약 에이린이 아나타의 외침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그녀는 시끄러운 소리를 무시하며 다시 사색에 잠겼을 것이다.
그렇지만 에이린은 아나타의 외침에서 사라진 가족을 찾는 듯한 다급함을 느꼈다.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정말 레이센이 집이라도 나가버린 걸까?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었지만 동시에 며칠 동안 아나타와 레이센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정말로 있을 법한 일로 생각됬다. 할 수 없이 에이린은 아나타를,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아나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가면 된다. 아나타는 레이센의 이름을 외쳐대며 이방저방을 들락날락 거리는 중이었다. 잡동사니 창고로 들어가는 아나타를 발견한 에이린은 문 밖에서 느긋하게 아나타를 기다렸다. 곧 얼굴에 실망감과 피로감을 가득한 아나타가 창고를 나왔다. 에이린은 아나타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거야? 아니면 술래잡기?"
아나타는 에이린을 보고 살짝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에이린의 말을 듣고 아나타는 다시 실망감 가득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이린의 느긋해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짜증난다는 기색조차 엿보였다.
"장난쳐드릴 시간은 없는데 말이죠."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나타는 레이센을 찾아야한다는 급한 마음에 대충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순간 상대가 에이린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에이린이라면 레이센이 어디있는지 알지도 모른다. 모른다 하더라도 아나타 자신보다 레이센과 훨씬 많은 시간을 지낸 그녀라면 정말 도움을 빌릴 수도 있을 지 모른다.
에이린의 제안은 무시하기엔 지쳐가는 아나타에겐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아나타는 속는 셈치고, 그리고 실날 같은 희망을 품고 카구야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요악하자면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의 연장선이라는 소리지?"
에이린인 아나타의 설명을 잠자코 듣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아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린이 너무나 간단히 요약하기 했다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전에 애초에 아나타가 자신의 감정을 추스릴 수 있었다면 아나타도 길게 말하는 대신 에이린처럼 별반 다를 바 없이 요약해서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레이센이 어딨는 지는 아시나요?"
"아니, 몰라."
"본 적은 있고요?"
"아까 다같이 식사할 때는 봤지."
"……."
아나타는 태평하디 태평한 에이린의 대답에 벙쪘다. 이 여자가? 이때까지 에이린의 부당한(?) 취급에 불만을 품었던 적은 많지만 폭력성을 품었던 적은 없었다. 아나타는 처음으로 정말 에이린을 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나타에겐 여러모로 다행히도 아나타에겐 그 생각을 실천할 행동력이 없었다. 또 에이린에겐 아나타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근데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불렀는데도 레이센이 안 나타는 걸 보면 그냥 네가 보기 싫은 게 아닐까?"
"설마 그럴리……."
무심코 반박하려던 아나타는 갑자기 뒷말을 흐렸다. 깊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머릿 속으로 아무리 에이린의 지적을 부정하려고 해도 아나타는 그 지적이 뼈아플만큼 가혹한 사실로 느껴졌다. 그것이 현실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따지고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영원정이 아무리 넓다지만 그건 네다섯명이 살기에 넓은 것이지 절대적인 면적은 '넓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나타가 아니라 소극적인 사람이 소리쳐도 그 외침은 영원정 전체에 울릴 것이다. 그리고 그 외침이 들렸다면 신경이 거슬려서라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지 않는한.
아나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 없어요. 못 들은게 분명해요."
"억지 주장이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텐데."
"몰라요. 그래서 용건이 뭐죠? 정말 도와줄 생각은 있기나 한거에요?"
"헛고생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시켜주는 것도 도와주는 게 아닐까?"
에이린은 그렇지 않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을 본 아나타의 눈초리가 갸늘어졌다.
"유감스럽게도 아니에요."
"고집 부리지마. 레이센이 지금 어떤 감정인 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이 지경이 되서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혼자 있고 싶다는 소리야. 그 생각을 존중해주고 배려해줄 생각은 없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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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분량 다 올리는 것도 어려버요
이 망할 귀차니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