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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 옵스퀴르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중편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이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하고, 레딧과 여러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토론을 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 재미도 끝내고, 좋은 감정을 안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러나, 아직 제가 할 일이 하나 남은 것 같군요. 바로 헌사입니다.
헌사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창작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즐거움’과 ‘감동’일 겁니다. 희극을 보며 웃기도 하고,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죠. 활극에서 활력을 얻기도 하고, 슬래셔물에서 짜릿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감정들은 결국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니까요.
그리고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또 다른 큰 선물은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실제 삶의 선택 순간에 도움을 얻거나, 인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고민해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현실의 눈으로 바라본 Clair Obscur’이라는 주제로 몇 개의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Clair Obscur의 세계는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 사람들이 만들고 즐기는 만큼 현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 모든 분석과 사유가 제가 이 게임과, 제작자와, 그리고 여러분께 진정한 경애와 존경의 마음으로 바치는 "헌사"이며, 저는 그것이 이 멋진 게임에 바치는 작별 인사로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했던 글이며, 영어로 쓴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서론을 살짝 길게 쓰고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그럼, 이제 본론인 33 분석 논문 여섯번째 칼럼,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중편"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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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에서 계속..)
3. 3막 이후의 전체적인 문제
└ 3-1. 서사적 밸런스
└ 3-2. 시점의 혼란함
└ 3-3. 맵 밸런스
3. 3막 이후의 전체적인 문제
'체호프의 총'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작품에 총이 등장했다면, 그 총은 발사되어야 한다"라는 명문으로 요약되는 서사의 밀도에 대한 이야기죠.
이는 이야기에 쓸데없는 장면, 혹은 연결되지 않고 의미없이 사라지는 장치들을 최소화하라는 의미를 가진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창작물이 독자의 몰입과 흥미를 끌어당길 수 있는 시간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하므로, 쓸데없는 장치들이 들어가 밀도를 희석할수록 이야기 전체의 품질이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독자들이 반드시 엔딩까지 감상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챕터 2에서 짚었듯 이 게임은 온갖 비유와 복선, 상징들을 지나칠 정도로 남발하고 있고, 그중 많은 것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여러모로 밸런스가 좋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3막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3막이 앞선 복선들을 해소하는 파트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3막 이후의 밸런스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1. 서사적 밸런스
이 게임은 2막까지, 다양한 등장인물의 과거와 현재, 이성과 감정, 욕망과 대의가 서로 엇갈리며 밸런스를 맞춰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갑니다. 그러나 2막 중반을 지나 에필로그에 접어들면서, 이 서사적 밸런스는 급격하게 무너집니다.
초반에는 각 세력마다 큰 대의, 즉 행동원리가 하나씩 있었고, 그것들이 대립하면서 서로의 입장차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생존"을 추구하는 33원정대, "인류 절멸"을 추구하는 페인트리스, "영생"을 추구하는 페인티드 르누아르라는 세 세력이었죠.
하지만 3막 시점에서 모든 대의는 사라지고, 오로지 마엘, 베르소, 르누아르라는 세 개인의 이기적 욕망만이 남습니다. 그러면서 이전까지 중요하게 다뤄지던 여러 주제들이 전부 가차없이 버려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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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버려지는 것은 '인간 찬가' 입니다. "내일은 온다"나 "모두 쓰러져도 우리는 나아간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인간에 대한 예찬이죠.
압도적인 절망 앞에서도 신념을 지키며 굳건히 전진하는 인간, 선두가 희생되어도 그 다음 선두가 다시 깃발을 들어올리는 인간,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인간, 사금을 그러모아 황금을 빚어내는 의지의 표상 인간, 공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공포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존재, 인간. 인간 찬가는 의지에 대한 찬양이며, 희생에 대한 경배이며, 인내에 대한 칭송입니다.
그러나, 3막 엔딩 시점에서 이것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그렇게나 멋있게 내세우던 의지, 희생, 인내는 이 시점에서 그저 코미디일 뿐입니다. 33원정대원들의 의지, 희생, 인내는 더 이상 극의 진행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무력하게 처분을 기다리는 입간판일 뿐, 그들이 대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요? 손짓 한번에 죽을수도, 살릴수도, 영생을 부여할 수도 있는 한낮 피조물에 불과할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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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버려지는 것은 '인연'입니다. 이 게임은 초반부터 사람 사이의 인연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소피와 엠마부터 시작해 모든 캐릭터들이 각자의 인연을 가지고 있고, 동료들은 아예 동료 퀘스트까지 따로 존재하며, 동료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인연을 깊게 쌓아 전투력으로 환원하는 시스템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동료 퀘스트를 통해 인연을 쌓아올리는 장본인 베르소는 100여년간의 인연을 쌓아올린 모노코와 에스키에, 성관계를 나누는 루네와 시엘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가차없이 죽이잖아요.
"인연이란 이토록 허무한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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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버려지는 것은 '대화와 타협'입니다. 마엘이 구스타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히스테리를 부릴 때, 루네와 시엘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히스테리를 받아줍니다. 시엘은 적극적이고 감정에 솔직한 성격답게 곧바로 마엘에게 다가가 눈을 맞추며 설득하려 합니다. 루네는 소극적이고 생각이 많은 성격답게 마엘이 자신을 맹비난할때는 자리를 피했다가, 나중에 감정이 식고 난 후 조근조근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러나, 또 다시 말하게 되지만, 이런 대화와 타협이 무슨 의미가 있죠? 마엘이든 베르소든 결국 '나 빼고는 전부 귀머거리'라는 자세로 자기 주장만 반복하잖아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거나 타협하려는 생각이 일절 없습니다. 르누아르 씨? "너네 말이 맞긴 한데, 그래서 너네가 뭘 할수 있는데?"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엔딩 시점에서 이 문제는 정말 심각해지는데, 최종 국면에서 르누아르, 마엘, 베르소 셋은 전부 상대를 거짓말로 속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르누아르는 마엘을 믿는다, 불을 켜고 기다리겠다고 말하지만, 베르소 엔딩에서 르누아르는 마엘을 믿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마엘이 제압되자마자 캔버스를 불태워버렸습니다. 마엘은 위험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겠다 말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돌아갈 생각이 없었죠. 베르소는, 원래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해서 더 놀랄 것도 없지만, 어쨌든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안식인데도, 마치 마엘을 위해 캔버스를 파괴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죠.
사실, 그 말들이 모두 거짓말이란 것조차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상대방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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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사라진 것은 '협력'입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구스타브, 베르소, 루네, 시엘, 마엘, 에스키에, 모노코 각자가 바라는 것과 행동원리는 전부 조금씩 달랐어요. 하지만 '페인트리스를 쓰러뜨린다'라는 큰 목표가 같았고, 따라서 그들은 때론 말다툼을 하거나, 상대를 거부하거나, 비난하고 욕하면서도 협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3막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들 사이에는 어떤 서사적 협력이나 유기관계도 없어요. 서로 자기 할일을 할 뿐입니다. 엔딩 시점까지 가면, 협력이란 것은 그야말로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그저 모두가 자기 하고싶은대로, 이기적으로 행동할 뿐이죠.
아, 그 "모두"에서 루네, 시엘, 에스키에, 모노코, 뤼미에르 시민들은 제외해야겠군요. 엔딩 시점에서 그들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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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반부에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주제들이 갑자기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현상'은 대개 반전에 지나치게 치중한 작품이 빠지는 함정입니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죠.
뤼미에르 세계가 일반적이지 않고, 페인트리스가 악당이 아닐 수도 있으며, 모든 등장인물들이 가상의 인물일 수 있다는 암시는 꾸준히 주어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반전의 빌드업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반전의 임팩트만을 위해, 1~2막에서 쌓고 다루어온 모든 주제들이 일거에 와르르 무너지면서 '가치없는 것'으로 변해버리니까 당최 이야기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아요.
이것이 바로 서사적 밸런스의 문제로, 간단하게 말하자면 33원정대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은 왔는가? 라는 물음에는 누구도 쉽게 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던 내일이란 희망, 구원, 미래, 의미였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사라진 세계에서 사람들이 만들어갈 나날이었죠. 그거, 왔어요? 뤼미에르가 통째로 학살당한 베르소 엔딩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마엘 엔딩에서도 뤼미에르의 미래를 자아내는 것은 뤼미에르 시민들이 아니라 알리시아잖아요.
원래 희망, 구원, 미래, 의미를 추구하는 작품에서 끝내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는 엔딩은 흔합니다. 대표적으로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 카프카의 '심판'의 재판, '1984'의 형제단 등도 작품 끝날 때까지 끝내 등장하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그걸 추구하던 이들의 결말로 끝나기는 하잖아요. 그런데 클레르 옵스퀴르:33원정대는 33원정대의 결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누구도 쉽게 답하지 못할 간단한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래서 "모두 쓰러져도 나아간 33원정대원들"은 결말에서 어디로 나아갔죠? 그들은 아무 곳에도 가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니까요. 그들은 오로지 통제병자, 자살지망자, 정신 질환자 셋이 서로에게 거짓말이나 늘어놓으며, 이기적으로 자기주장만 하다가 끝내는 연장을 뽑아들고 칼부림을 벌이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긴 쪽에게 일방적인 처분을 받았을 뿐입니다.
대체 왜 이 게임 제목이 33원정대인거죠?
3-2. 시점의 혼란함
이 게임은 각각 1막 구스타브-2막 베르소-3막 마엘이라는 세 명의 주인공 체계로 진행되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극의 진행을 매끄럽지 못하게 만들어요.
게임의 주인공이란 곧 플레이어 자신의 아바타입니다. 그 아바타인 구스타브의 죽음은 매우 충격적이죠. 그러나, 이후 그 자리에 베르소가 대신 들어오는 과정이 애매하게 전환됩니다. 물론 주인공의 희생과 대체 주인공의 투입이라는 과정 자체가 주는 감정적 충격은 확실히 있고, 극으로서의 재미도 분명히 있습니다만, 전환 과정이 매끄럽지 않아요.
예컨대, 베르소가 들어오던 시점에서 플레이어는 구스타브가 되어 마엘, 루네, 시엘과 이미 한참 관계를 쌓아왔어요.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전부 리셋되고, 처음부터 다시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게 좀 당황스럽죠.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딱 봐도 호감형인' 구스타브와는 달리, 베르소는 섹시하긴 하지만 호감형이라 하기는 어려운 인물이거든요. 숨기는 것도 많고, 그렇다고 제대로 뭘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고.
결국 이 지점에서 플레이어는 굉장히 혼란스럽고 꺼림칙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같은 존재 증명의 질문이죠. 인간성이란 주변과의 공명으로 구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구스타브)를 오랜 우정을 지닌 친구로 대하던 주변인들이 갑자기 나(베르소)를 의심하고, 적대시하고, 거리를 둬요. 심지어 나(플레이어)도 내가 누군지 잘 몰라요. 이 부근에서 많은 분들이 굉장한 감정적 혼란을 겪게 됩니다.
레딧에 잠깐만 있어도 이 부근에서 게임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거나, 아예 접었다는 의견을 굉장히 쉽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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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플레이어는 다시 차근차근 관계를 쌓아가면서 베르소에 점차 감정이입할 수 있게 됩니다. 근데 3막에서 또 마엘로 주인공을 바꿔버려요. 그래서 시점이 굉장히 난잡해집니다.
3막의 주인공 교체는 2막의 구스타브-베르소 전환과는 전혀 다른데, 첫째로는 베르소가 들어왔을 때는 구스타브가 극에서 완전히 퇴장한 상태라 (매끄럽진 않아도) 감정을 정리하고 새 감정을 쌓을 수 있었던 반면, 마엘이 주인공이 되었을 때는 여전히 베르소가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관성적으로 베르소의 시점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둘째이자 더 중요한 문제는, 구스타브, 베르소, 플레이어 셋은 각자 다른 객체이지만 마엘에 대한 입장은 똑같았다는 사실입니다. 셋 모두에게 마엘은 여동생이나 딸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물론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각각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큰 줄기는 분명히 유사합니다.
즉, 마엘에 대한 입장과 감정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그 마엘은 바로 너다"라고 말해봐야 와닿을 리가 없죠. 심지어 그녀는 플레이어가 알던 마엘도 아니고, 알리시아와 융합된 상태잖아요.
여기서 제작사의 의도는 '마엘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구현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플레이어는 여전히 구스타브에서 시작되어 베르소로 이어진 시점, 마엘을 여동생이나 딸로 여기는 시점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불협화음이 자꾸 생겨요.
"나는 이 가상 세계가 너무 좋고, 가족을 포함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그냥 이 즐거움만을 위해 살고 싶다"라는 마엘의 주장은, 그녀에게 깊이 공감했을 때 비로소 설득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니까요. 하지만 '베르소'의 시점으로 이것을 보게 되니까, 어리광을 부린다는 생각이 들기 쉽죠. 왜냐하면, 그것은 나(플레이어)의 문제가 아니니까.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주인공으로 감정이입하고 있는 것은 베르소니까요. 그래서 마엘의 주장을 들었을때, 감정적인 동조보다는 객관적인 분석이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결국, 이 '시점의 혼란함'이 내러티브의 설득력을 깎아버립니다. 세 명의 주장이 모두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느낌이 있어야 내러티브적인 설득력이 생기는데, 그게 안되고 있어요.
3-3. 맵 밸런스
다시 말씀드리지만, 3막은 지나치게 밸런스가 좋지 않아요. 앞서 짚은 서사적 밸런스 문제도 그렇고, 애초에 서사 자체가 "르누아르와 다른 한명을 순차적으로 제압한다, 끝"이기 때문에 너무 짧아요. 1~2막에서 쌓아온 빌드업이 제대로 결론지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맵적인 밸런스도 굉장히 좋지 않은데, 정확히 어딜 가야 하고 뭘 해야 할지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이전까지는 순차적으로 유도되고 제시되던 목표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최종전으로의 일직선 대로만 남아있으니까요. "나머지는 뭐... 해도 좋고, 안해도 좋고,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식으로 흩뿌려져 있습니다.
동선이 명확하지 않으니까, 따로 공략을 찾아보지 않을 경우 닥치는대로, 발길가는대로 맵을 흝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난이도 밸런스가 무너집니다.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제어되던 난이도 곡선이 갑자기 이리저리 꺾여버려요. '플레이어의 동선을 유도하고, 그 유도에 맞춘 난이도의 적을 제시하던' 작용원리가 사라졌으니까.
전투 시스템도 이상해집니다. 이전까지 훌륭히 기능하던 '한 합씩 정교한 공방을 교환하면서 차근차근 빌드업을 쌓아 큰 기술로 마무리'라는 문법이 이 시점부터 제대로 작동하질 않습니다. '한방 때리면 죽이는 것이고, 한방 맞으면 죽는 것'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다수죠. 여기서 그나마 벗어나 있는 것은 시몽과 클레아인데, 얘네들은 또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아서 너무 따로 놀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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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맵을 흝으면서 레벨업과 보상을 챙길 경우 최종보스전이 너무 조촐하게 끝난다는 점입니다. 최종보스가 시몽보다 더 어려울거라 생각해서 온 맵을 클리어하고 뤼미에르로 진입하면 거의 첫 턴에 잡게 됩니다.
스토리적으로, 창조신이자 신적인 힘을 휘두르는 르누아르가 단지 피조물 중 하나일 뿐인 시몽보다 훨씬 약한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시몽이 그토록 강하다면 그가 모든 사건을 해결해버릴 수 있던 것 아닌가?"이라는 의구심이 들수밖에 없으니까요.
4. 불안정한 서사
└ 4-1. 성장하지 않는 인물들
└ 4-2. 남발되는 주제
└ 4-3. 깊이 없는 결론
4. 불안정한 서사
앞서 살펴봤듯, 이 게임의 핵심적인 문제는 3막 이후 내러티브와 게임성이 급속도로 망가진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는 서사 그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1~2막의 문제가 3막에서 풀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는 좋은데, 3막에서 "사실 1~2막 내용은 별 의미없는 시간낭비였다"로 귀결되어버리면서 전혀 상관없는 딴세상 이야기로 가버리는 것은 좋은 맺음이라고 하기 어렵죠. 많은 분들이 이 전환 과정을 "사실은 전부 꿈이었다는 거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시는 것도 이해할만한 일입니다.
앞선 챕터에서 짚은 구조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서사에만 집중했을 때, 이 게임은 아래의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4-1. 성장하지 않는 인물들
많은 창작물들이 그렇지만, 특히 내러티브에 집중하는 게임은 인물과 스토리가 서로 상호작용해야 합니다. 인물이 스토리에서 진행되는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고-> 성장한 인물이 스토리에 개입하고 -> 그로 인해 다른 스토리가 진행되고의 반복인거죠.
왜냐하면, 그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당사자인 플레이어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플레이어의 아바타이자 페르소나인 주인공이 성장하지 않으면 괴리감이 생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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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베르소와 마엘은 수많은 사건을 겪습니다. 괴로움도 겪고, 놀람도 겪고,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여러 오지를 여행하고, 야영지에서 동료들과 추억을 만들고... 하지만 베르소와 마엘은 그 모든 사건들을 거치면서도 하나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베르소는 33원정대와의 여행으로 무엇을 깨닫고, 어떤 부분이 성장했고, 어떤 부분이 바뀌었을까요? 답은 '그런거 없다'입니다. 그는 첫 등장할 때부터 엔딩까지 꾸준히 자살에 대한 욕망, 주변 사람을 속이고 배신하는 기질, 정신병리적 특징을 그대로 간직합니다.
루네와의 합주, 시엘과의 수영 연습, 달밤 아래 마엘만을 위한 콘서트, 에스키에 등에 올라탄 달밤의 비행, 그 이전 수많은 원정대원들과의 만남, 여행, 야영지에 울려퍼지는 레코드, 와인과 건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나요? 그는 처음 계획한대로 모두를 죽이는 데 성공했고, 그들이 되살아나자 또다시 죽이려 합니다. 배신과 거짓말을 이용해서.
마엘은 구스타브를 잃었고, 상실의 아픔을 알았습니다. 루네와 시엘을 맹비난했다가 사과하면서 관계를 다시 구축하기도 했고, 베르소를 거부하다가 그에게 끌리기도 했죠.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어차피 그녀는 그림 속의 삶 그 자체에 푹 빠져있고, 슬픔을 극복하지도 못했으며, 관계 구축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아빠나 베르소도 설득하지 못하잖아요.
르누아르, 알린, 클레아? 똑같아요. 그들은 게임 내의 그 수많은 사건 중 어떤 것에서도 배우고, 깨닫고,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르누아르는 통제병자고, 알린도 뤼미에르 캔버스만 보고 있고, 클레아는 그런 가족들을 한심하게 보고 있죠. 어머니인 알린이 허우적대면서 쓰러지는데 한번 돌아보지도 않는 클레아의 차가움을 보세요. 그녀가 대체 뭘 깨달은거죠?
루네나 시엘은 넘어가죠. 뭘 배우고, 뭘 깨달았든 어차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모노코는 노코의 죽음으로 뭘 깨달았을까요? "인생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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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모든 사건들은 단순한 수단으로서만 기능했을 뿐,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습니다. 사건들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해요. 이 점이 33원정대의 서사적인 설득력과 완성도를 크게 떨어뜨립니다.
원정대가(그리고 플레이어가) 경험하고 헤쳐나온 1~2막의 모든 사건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서사적인 결말은 전혀 다른 곳에서 나니까요. 그 모든 순간들이 의미없는 시간낭비처럼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많은 플레이어가 '그게 다 꿈이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이야기는 위에서 했군요.
4-2. 남발되는 주제
조커가 "중요한 것은 메시지야!"라고 외친 이후 17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저는 입을 쭉 찢고 다니는 사람의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말만은 깊이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죠.
이 게임의 주제의식이란게 대체 뭐였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모든 창작물에 반드시 깊은 주제의식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지나치게 여러 주제들을 남발하면서도, 그 주제들에 대한 성찰이나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버립니다. 그래서 '뭔가 있어보이'기는 하지만, 깊이 있는 고찰이나 제대로 된 주제의식은 없어요.
이 게임이 남발하고 있는, 제대로 회수하지 않는 주제의식을 몇가지 짚어보자면 이렇습니다.
(A) 가상과 현실은 어떻게 다른가?
'현실과 가상'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매된 '공각기동대' 등에서부터 정말 지겹도록 우려먹힌 요소입니다. "어떤 인물 A와 이 인물을 완벽히 복사한 B가 있다면 그 중 누가 진짜인가?", "존재를 정의하는 것은 사유인가, 육체인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인격은 가짜인가, 진짜인가?", "기계의 인권이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권과 어떻게 다른가?" 같은, 20세기 말쯤에 지겹게 우려먹혔던 철학적 소재들입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유래하는 이야기들이죠. 이제는 새롭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고, 철학적으로 보이지도 않으며, 아주 지루하기까지 한 주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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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원정대의 캔버스 속 인물들은 분명 현실 세계에 살아있는 인물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캔버스 안에서는 분명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고통을 느끼고, 감정을 가지며, 죽음을 맞죠. "이 가상의 존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가 바로 이 게임이 후반부에서 플레이어에게 던지는 철학적 담론입니다.
1) 페인티드 르누아르처럼 단순한 '인격을 가지고 있든 말든 상관없는 타자(타인이나 타인의 물건)'으로 보아야 하는가?
2) 르누아르처럼 '인격은 인정하지만, 인권은 존재하지 않고 한순간에 지워버려도 상관없는 단순한 사물'로 보아야 하는가?
3) 마엘처럼 '현실과 완전히 똑같은, 살아있는 인물'로 대해야 하는가?
4) 베르소처럼 '살아있는 인물이지만, 현실을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게 맞는가?
5) 한번 사라졌다가 마엘이 부활시킨 시엘이나 루네같은 인물은 33원정대의 원본 인물인가, 아니면 그 인물의 데이터를 복사해 만들어진 새 인물인가?
이런 질문들은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것들이긴 하죠. 문제는 이것입니다. 게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슬쩍 회피해버려요.
뤼미에르 사람들이 어떤 존재들인지조차 애매합니다. 현실의 사람과 동등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초능력의 창조물이기도 하고, 죽음도 부활도 화가 마음대로 가능하다보니 애매하죠.
반대로 완전히 AI나 심즈 캐릭터라고 보자니, 그들은 명백하게 자신의 의사와 자유의지를 지닌 지성체거든요. 이 게임의 다른 많은 부분들처럼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의 반복입니다.
베르소 엔딩에서 르누아르에 의해 루네와 시엘을 포함한 모든 뤼미에르 시민들은 영원히 죽게 됩니다. 현실로 치자면 그야말로 대량학살이죠. 하지만 게임에서는 이 부분을 비추지 않고 슬쩍 넘어가버립니다.
두 엔딩 모두 이런 식으로, 절정에서 결말로 넘어가는 과정에 끊김이 있습니다. 베르소 엔딩은 '가상 인물들을 학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합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는 하는데, 그 답을 제대로 거두질 않아요. 마엘 엔딩은 '고통받는 현실에서 벗어나 가상 세계에 갇히는 것은 좋은 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역시 그 답을 거두지 않습니다.
또다시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인거죠. 명확하게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없어요.
(B) 배타적 공리주의는 옳은가?
배터 굿, 그레이터 굿이라는 도덕에 대한 낡은 담론 역시 게임에서 던져지는 주제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소수의 누군가가 희생하는 것은 옳은가?"의 문제입니다. '선한 의도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가?'의 문제도 여기 포함되죠.
그레이터 굿(공공선)의 윤리적 딜레마는 현실 그 자체입니다. 많은 분들이 게임을 하며 떠올리셨을 트롤리 딜레마가 바로 그 대표죠. 한명의 생명은 다섯 명의 생명에 비해 5분의 1의 가치를 지니는가? 여기서 좀 더 딜레마를 깊게 하기 위해, 한명은 기관사(선택하는 사람)의 가족이라고 하는 버전도 있습니다.
이 게임의 각 엔딩에서는 명백하게 행복을 잃고 희생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마엘 엔딩을 선택하면 베르소와 데상드르 가문 사람들이, 베르소 엔딩을 선택하면 뤼미에르 시민들이 단두대에 오르죠. 숫자로 보자면 뤼미에르 시민들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내용으로 보자면 뤼미에르 시민들은 현실의 살아있는 인간인 데상드르 가문 사람들과 동치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게임은 꽤 무게감 있게 제시된 이 주제를 제대로 결론짓지 않고 슬쩍 넘어가버립니다. '뤼미에르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광경'이야말로 베르소 엔딩에서 던져졌어야 할 윤리적 책임인데, 게임에서는 그 부분을 묘사하지 않아요.
제 생각에, 이는 딜레마의 반대편에 있는 '데상드르 가문의 희생'을 표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마엘이 캔버스 안에서 고립사할 때, 알린이나 클레아가 울부짖으며 괴로움을 느끼는 광경은 어색하니까요. 그녀들은 마엘을 학대한 장본인이며, 마엘에 대한 시점이나 자기 반성의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니까.
결국 울부짖어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르누아르 씨 하나 뿐인데, 마엘이 캔버스 안에서 죽을 작정임을 알면서도 "불을 켜고 기다리겠다"라고 말했던 그가 울부짖는 것도 어색하죠. 결국 제작진 입장에서 이쪽 엔딩의 딜레마를 표현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슬쩍 넘어가는' 식으로 희생된 부분을 묘사하지 않다보니, 앞서도 말했듯 서사적으로 절정에서 결말로 넘어가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고 중간이 끊어져 있으며, 무엇보다 딜레마의 무게감이 지나치게 축소되어버립니다.
예컨대 "마엘이 캔버스 안에서 죽느냐,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느냐"라는 간단한 문제로 떨어져버리는 것이죠. 엔딩 시점에서 마엘은 '공공선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감수하는 선택'을 내렸나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자기 자신, 개인의 이기심을 위한 선택을 내렸으니까요. 그럼 베르소는 '더 나은 선과 개인의 자유의지를 위한 선택'을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살을 위해 다른 수많은 동등한 생명체를 박살내고, 마엘의 자유의지를 폭력으로 억압하는 선택을 내렸으니까요.
결국 '공공선에 대한 윤리적 고찰'은 그럴듯하게 던져지기만 할 뿐, 그저 개인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결말 안에서 소리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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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현실의 우리들은 '공공선의 추구가 내포하는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공공선을 위할 때 최선의 노력을 바칠 것이다"라는 전제로 구축된 아이데올로지, 즉 공산주의의 폐해를 알고 있으니까요. 이전 칼럼에서 짚은 게임 이론, 특히 공유지의 비극 같은 주제가 이 문제를 매우 직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공공선이라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주제 중 하나입니다. 게임에서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군요.
(C) 능력은 권리를 포함하는가?
즉,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걸 자기 마음대로 발휘해도 좋은가?"라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보시는 순간 직관적으로 '아니, 당연히 안되지'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주먹을 휘두를 자유는 남의 코 앞에서 사라진다"라는 자유의 명백한 한계, 곧 도덕이 있으니까요.
도덕은 전인습적인 것에서 후인습적인 것으로 발달합니다. 로렌스 콜버그의 도덕발달이론에 따르면 :
1) 전인습적 = 주변에서 강제로 주입하는 단계의 도덕
- 1단계: 강제되는 도덕(벌과 복종으로 이루어지는 도덕, 기초적인 형태의 법)
- 2단계: 도구적 상대주의에 의한 도덕(존중하지 않으면 존중받지 못하기 때문에 지켜지는 도덕)
2) 인습적 = 주변 눈치를 보고 습득하게 되는 단계의 도덕(* 칸트의 정언명령(손익과 상관없이 집단 내에서 무조건 지켜야 하는 선))
- 3단계: 대인관계 조화(없으면 대인관계가 어렵고 사회 안에서 고립됨)
- 4단계: 법과 질서(사회 안에서 성과를 이루기 위한 안전선)
3) 후인습적 = 스스로 성숙해지면서 깨닫게 되는 단계의 도덕
- 5단계: 사회계약(사회가 개인에게 기여하고, 개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깨달음)
- 6단계: 보편윤리(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윤리가 있음을 깨달음)
로 도덕이 발달하죠.
이 중, "능력이 있어도 남을 해치면 안된다"같은 것은 1단계인 아주 기초적인 도덕입니다. 사실 인습적인 도덕(3~4단계) 정도만 되도 지역마다, 사람마다 범위가 굉장히 다르기 때문에 딱 '어떤 것은 도덕적인 잘못이다'라고 정의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남을 해쳐서는 안된다'라는 것은 정의하기가 매우 간단한, 그만큼 강력한 도덕적 잘못인 것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공통, 만국 공통이죠.
당연히, 능력이 있다고 해서 남을 해치면 안되죠. 안되는데,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와 완벽히 동일한 일이 아주 일상적으로 벌어집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이 눈치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네, 바로 낙태 문제입니다.
행간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일은 참 재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때로는 생각하기 싫은 주제에 도달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다루고 싶지 않아요.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주제에 충격받으실 수도 있는 여러분들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도덕발달론 같은 것을 길게 말한 이유도 동일합니다.
그런고로, '이 게임은 의외로 낙태에 대한 메타포를 여럿 사용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의견이나 나름의 성찰을 제시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버린다는 사실'을 짚기만 하고 넘어갑니다.
(D) 부모가 아이를 통제하는 것은 정당한가?
르누아르는 가족을 사랑할까요? 누가 제게 그렇게 묻는다면, 제 답변은 '완벽히 그러하다'입니다. 그러나 만약, 르누아르가 좋은 아버지냐고 묻는다면 '완벽히 그러하지 않다'가 제 대답입니다.
아이를 올바르게 훈육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아이는 말을 잘 듣지 않고, 떼를 쓰고, 구르고, 속이고, 거짓말을 합니다. 신경을 지나치게 쓰면 통제받았다고 비뚤어지고, 신경을 쓰지 않으면 방임되었다고 비뚤어지죠. 인간이 지상을 걷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언젠가 심판의 날을 맞이할 때까지, 이 문제는 수많은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힐 딜레마입니다.
아이를 훈육하는 아버지 역시 그저 한 명의 미숙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에 때론 참지 못하고 고함을 치거나, 손찌검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르누아르가 단순히 마엘을 통제하려 드는 그 자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잘못이라기보단 모자란 점이죠.
그러나 그의 행동을 봅시다. 그는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요. 아이가 말하는 것을 정정하거나 반박해서 깨달음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공감하지도 않아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네 말은 맞는데, 달라질 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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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학대'라는 말을 들었을 때, 허리끈을 푸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물론 많은 가정 학대 사례에 그러한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이 미야자키 히데타카 같은 위인을 탄생시키기도 했죠. 하지만 의외로, 가정 학대의 사례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사례는 정서학대입니다.
시기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정서학대는 총 가정학대 사례의 대략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신체학대는 15~20% 사이로 나타나죠. 적다고 기뻐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정서학대에는 욕설, 비하, 조롱 등의 언어적 학대와, 지배 및 통제 등의 심리적 학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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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마엘을 봅시다. 그녀의 언니와 어머니는 그녀를 대놓고 비난하죠.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어요. 가족 전체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명백하게 학대받고 있었어요.
물론 마엘 자신의 책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학대를 원활하게 해결하지 못한 것은 르누아르의 책임입니다. 그는 가장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부장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정확히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가부장 그 자체였던 19세기 프랑스 상류층 집안의 가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이 상황에서 르누아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완전한 지배와 통제입니다. 마엘의 말을 듣지 않고, 공감하거나, 반박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의사를 따르길 강요하죠. 이건 옳은 일일까요? 게임은 이 주제를 꽤 주의깊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엘이 직접 언급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 주제 역시 다른 주제들처럼 어떤 성찰이나 대답 없이, 슬쩍 넘어가버립니다. 베르소 엔딩에서, 데상드르 가문의 아동학대 문제는 해결되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르누아느도 알린도 마엘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서로 껴안고 휙 지나가버리거든요.
역시나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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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변주가 하나 더 등장합니다. 바로 루네죠. 그녀는 부모님의 예비 플랜으로 길러진 아이고, 그 사실에 깊이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서브 퀘스트에서,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진짜로 예비 플랜으로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지죠. 하지만 거기서 끝이에요. 서사적으로 루네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그저 루네 자신이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씩 웃고 넘어갈 뿐입니다.
(E) 슬픔은 어떻게 극복하는가?
33원정대는 '슬픔'에 대해 깊이 다루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에는 많은 슬픔이 나옵니다. 하지만 슬픔을 표현하기만 할 뿐, 그 극복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아요.
마엘을 봅시다. 그녀는 구스타브의 죽음이라는 큰 슬픔을 겪었고, 그로 인해 비뚤어지면서 주변 사람들을 맹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엘과 루네는 "모두 쓰러져도 나아가야 해. 너도 알잖아"라고 말하며 그녀를 달래고, 슬픔의 극복을 도와주죠. 네, 앞서 말했듯 그저 블랙코미디로 소모되는 그 말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슬픔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으로 제시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당연한 것인데, 슬픔을 극복하려고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큰 슬픔을 겪은 사람이 다른 것에 집착하다가 더 큰 슬픔을 만들어낸 많은 사례들을 알고 있잖아요.
반대로 베르소를 봅시다. 그의 슬픔이 정확히 뭐죠? 100여년을 살았다는 거? 그게 어떻게 '슬픔'이 될수 있는거죠? 주변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거? 어차피 그는 모든 사람을 죽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며, 많은 사람들을 직접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슬픔이나 고통은 지나치게 모호하게 표현됩니다. "오래 살면서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었겠지"라는 식입니다. 거기다 그가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은 세계의 멸망을 통한 자살입니다. 누구도 그것이 올바른 슬픔의 극복 방식이라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다 그는 마엘이 슬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는데, 그 방법은 마엘을 때려눕히고, 그녀가 애착하는 세계-그녀 오빠의 유품이자, 그녀가 지독하게 집착하는-를 박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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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는 슬픔에 대한 변주가 더 제시되지만, 그것들도 다 똑같아요. 슬픔에 완전히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린 알린, 슬픔 그 자체를 가치없이 취급하며 넘어가버리는 클레아, 슬픔을 안으로 갈무리하고 직시하지 않는 르누아르. 그나마 르누아르가 좀 어른스럽게 슬픔을 극복하기는 하는데, 이게 거의 부각되지 않아요. 그가 뤼미에르 캔버스에 대한 감정을 말하며 슬쩍 비춰질 뿐입니다.
결국, 이 게임은 슬픔을 묘사하는 것에는 굉장히 공을 들이지만, 그 슬픔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성의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같은 식이죠.
(F) 페르소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이 게임은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마엘을 봅시다. 그녀는 마엘이기도 하고, 알리시아이기도 합니다. 그 둘 모두가 그녀의 진짜입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인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것은 가상현실이다'라고 인식하고 다이브한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그녀는 게임에서 다시 태어나면서 마엘로서의 일생을 거쳤거든요.
자아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16세 청소년이 두 번의 탄생과 일생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그 두 인생 모두 꽤 불행한 편이었죠. 현실에서는 심각한 정신분열이나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유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물론 그녀가 정신적으로 멀쩡하지 않다는 것은 보면 알죠. 어차피 이 게임엔 정신적으로 멀쩡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기도 하고.
(* 사실, 인간 심리에 대해 다루는 서사에서 '멀쩡한 정신상태를 가진 인간'이란 것은 다루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깊게 다루자니 혼자만 잘난척하는 것처럼 튀는데다 딱히 할 이야기가 없고, 얕게 다루자니 재미가 없으니까요. 어차피 현실에서도 "정신이 멀쩡한 인간"이란 것은 굉장히 보기 어려운 존재인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요. 두보가 말했듯,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하니까.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멀쩡한 인간이란 것은 슈퍼맨과 비슷한 것입니다. 멋있죠.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엘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입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마엘이라 부르고, 마엘로서 행동하려 합니다. 그럼 그녀는 마엘일까요? 하지만 르누아르는 여전히 그녀를 알리시아로서만 대합니다. 그녀의 페르소나인 마엘은 그저 게임 아바타로 대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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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모두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에게 보여주는 솔직한 모습, 누군가의 가족으로서의 모습, 누군가의 친구로서의 모습, 누군가의 지나치는 사람으로의 모습 등등.
그 모든 페르소나는 분명히 '만들어진 가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나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팔이 다리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듯, 입이 항문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듯, 그저 각자의 역할이 있을 뿐이며, 모두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하나의 요소입니다.
페르소나가 없이 모든 것을 순수한 자아에 의탁했을 경우, 인간 사회는 성립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맛있는 것은 혼자 다 먹어치우고 싶고, 예쁜 여자를 보면 로맨스를 떠올리며, 마음에 안 드는 놈은 때려주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에겐 특혜를 주고 싶은 이기적인 자아(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신에게 솔직하게 행동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진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거짓말이 사라진 사회"라는 소재를 다루는 많은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주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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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채셨을거라 생각합니다만, 마엘은 두 개의 자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소나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해요. 그녀는 표리일체하게 자신을 다룹니다. 욕망에 솔직하고, 감정적이며, 이기적이죠. 바로 그래서, 그녀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페르소나가 중요한 거에요. '사회 속에서 조정된 역할의 가면'이란 것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눈치 없는 사람,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미치광이로 취급되어 고립되기 쉽습니다.
역으로, 페르소나에 집착하면 내면의 자아가 그 안에 갇히게 됩니다. 흔히 볼 수 있죠, SNS 중독으로 대표되는 '남들의 관심과 칭찬에 목마른 사람들.' 관심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망입니다. 하지만 오로지 그것에만 집착하면 그 뒷면의 실존하는 자신이 갇혀서 축소되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많은 유명인들이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ㅁㅇ에 중독되죠.
역시 눈치채셨을거라 생각합니다만, 베르소는 자신의 페르소나에 매몰된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을 구하려던 사람을 파괴하고,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배신하고, 그 자신을 죽이죠. '구원자의 페르소나'에 빠져든 광신도가 흔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네, 폭탄테러범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죠. 하는 행동도 베르소와 똑같고. 심지어 그 뒤 진짜 자아가 황폐해져 있다는 사실도 동일합니다.
시렌전에서, 33원정대원들은 각자의 욕망을 봅니다. 그러나 베르소는 아무 것도 보지 않죠. 진정으로 원하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네, 이것이 바로 "욕망하지 않는 인간", 즉 황폐화된 자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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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게임은 이 둘을 포함해 페르소나에 대한 여러 주제를 던지지만, 그 모든 주제들은 그저 던져질 뿐,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나름의 답은 전혀 주어지지 않아요. 마엘은 알리시아일까요, 마엘일까요? 게임에서는 모호하게 넘어갑니다. 베르소는 대체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역시 게임에서는 모호하게 넘어갑니다.
결국 이 주제도 똑같아요.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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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변주가 하나 더 등장합니다. 바로 시엘이죠. 그녀는 남편과 아이를 잃은 고독한 유부녀를 자아를, 쾌할하고 적극적인 가면을 뒤짚어써서 숨기고 있는 인물입니다. 가면지킴이가 "누구에게나 가면이 필요하다"라면서 가면 공격을 가할 때도, 그녀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죠. 이미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동료 퀘스트를 진행할수록, 가면 뒤의 그녀가 곪아서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에요. 이 갈등이 해결되는 방식이 더 기막힌데, 전능한 마엘이 허공에 휘휘 손을 저어서 남편을 살려내는거죠. 그야말로 그린듯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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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러 깊은 철학적 주제들이 무차별로 던져지고, "해석에 맡긴다"면서 버려지는 일련의 과정은 지나치게 무책임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현대미술을 보는 것 같습니다. 현대미술 전시장에서 어떤 사람이 선글라스를 벗어서 내려놓자, 많은 사람들이 그 선글라스가 어떤 심오한 의미를 가진 작품인 줄 알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감상하더라는 이야기는 유명하죠.
이는 예술사조의 큰 흐름을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르네상스부터 19세기 사이에 유행했던 비평 방법은 '저자 중심주의'였습니다. 말 그대로 저자의 의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대두된 '저자의 의도'라는 용어도 문학 시간에 다들 한번쯤 들어보셨을거라 생각합니다.
이 방법이 현대에 와서 의미를 잃은 가장 큰 이유는 :
1.저자 본인이 아닌 이상 독자는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음(현실적 한계)
2. 작품은 저자의 손을 떠난 순간 독자에게 전달된 순간 독자의 해석 안에서 새롭게 구축되는 세계임(저자사망론)
3. 사회/문화/역사 등 맥락적으로 의미를 분석해야 함(문화맥락주의)
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해석을 통해 작품을 해체하고, 새롭게 받아들이며, 해석의 자유를 가지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신세대'적인 센세이셔널함입니다.
하지만 앞선 현대 미술의 예에서 아실 수 있듯, 해석의 여지를 지나치게 강조한 모호함은 분명한 의미를 만들어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그 모호함이 '의도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로서 활용된 점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일부러 사람들을 다투게 만드는 것에 어떤 고상함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4-3. 깊이 없는 결론
고대 그리스 연극 용어 중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장치로 이루어진 신)'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 사이의 복잡한 갈등을, 천장에서 내려온 신이 단숨에 해결해버리고는 "역시 신은 위대하다"라고 결론짓는 듯한 모양새를 가리킵니다. 현대에서는 사실상 '완결성이 부족한 작품', '결말이 이상한 작품', '장르적 톤을 유지하지 못한 작품' 등을 비꼬는 말로 쓰이는데, 저는 33원정대의 결말이 바로 그렇다고 느낍니다.
앞서 4-2에서 다루었듯, 이 게임은 지나치게 여러 주제들을 무의미하게 남발하면서도 그것들을 제대로 회수하지 않으며, 그래서 설명이 어려운 부분들은 모호하게 처리해서 슬쩍 넘어가버립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초능력자들의 이기심만 남아, 그들의 폭력으로 귀결되죠. 이 부분의 억지성이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짚고 있는 것입니다.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때문에, 이 게임의 결론조차도 굉장히 애매해집니다. 결국 이 게임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가상세계에 과몰입하지 마라?"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비극을 맞이한다?"
"구원은 없다, 내일은 오지 않는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은 신의 변덕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이기심은 악이다?"
"누군가 슬퍼하면, 그 슬픔이 사라질 때까지 그를 때려라?"
어떤 것이든간에, 너무 조잡합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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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재미를 드릴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다른 분들도 보실 수 있게 추천 한번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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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칼럼 예고 :
분석 칼럼 :#1 현실과 캔버스의 시간 비율(부제 : 캔버스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가?)
분석 칼럼: #2 캔버스의 위험성(부제 : 왜 화가들은 위험해지는가?)
분석 칼럼: #3 마엘은 행복할까? (부제 : 베르소의 선택이 가진 위험성)
분석 칼럼: #4 "베르소 엔딩은 굿 엔딩일까?"(부제:엔딩 논란의 이유)
분석 칼럼: #5 최선의 답은 없었을까? (부제 : 정신 질환이 초래한 비극)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상편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중편<-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하편
분석 칼럼: #7 이 게임은 좋았는가? (부제 : 비평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33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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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당 ㅎㅎ 르누아르가 캔버스를 불태웠다는 것은 추측이며, 그 추측의 근거는 당시 거울방에 있던 모든 그려진 인물이 붉은 색 꽃잎을 흩뿌리며 고마주당하기 때문입니다. 페이딩 보이, 즉 그림이 스스로 자살할 수 없다는 가정 하에, 그림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르누아르 뿐이라는 점도 이 추측을 지지합니다. 페이딩 보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춤으로써 캔버스가 소멸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그림이 스스로 자살할 수 있다면, 화가가 캔버스에 들어가는 행동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화가가 캔버스에 들어가 있을때 그림이 소멸하면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알린이 뤼미에르 캔버스에 사로잡혔을 때 르누아르가 뤼미에르 캔버스를 불태우지 않고 알린을 따라 다이브했다는 점에서, 화가가 다이브한 캔버스가 소멸할 시 화가에게도 어떤 종류의 위험이 닥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림이 자살할 수 있다는 것은 캔버스에 들어 있는 화가에 대한 위협이 됩니다. 이 경우, 10살 남짓이었던 베르소(페이딩 보이)가 클레아와 같이 뤼미에르 캔버스에 들어가 놀았던 행동은 장전된 총을 가지로 러시안 룰렛을 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 됩니다. 따라서 논리적 사유의 결과로, 본문에서는 그림이 자살할 수 없다는 전제를 하고, 따라서 캔버스를 불태우고 고마주를 실행하는 것은 르누아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판단에 대해서는 6번 칼럼 상편(이 칼럼의 전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 25.06.16 01:5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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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용 기억합니다 다만 직접적인 묘사가 있었는데 제가 놓친 장면이 있었나 싶어서 여쭤보게 되었습니다 사이드 퀘스트 다 해 보니 저도 베르소 영혼의 조각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건 어색하게 느껴졌거든요 답글도 정성스럽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25.06.16 02:0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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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원정대는 재미있고 훌륭한 게임입니다. 저도 참 좋아하고요. 그러나, 부정적인 부분이 워낙 많은 게임이라 리뷰하다보면 여러 부정적인 부분을 짚을 수밖에 없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냥 감상으로라면, 3막 이후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명작이었어요. 그러나 현실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구멍 투성이입니다. 또한, 다각도의 시선으로 파볼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함'을 증명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GTA도 논란이 많지만, 그게 대단해서는 아닙니다. 그냥 도덕성 이슈가 여럿 있는 거죠. 역으로 발더스 게이트3는 훌륭한 게임이지만, 논란은 없죠. 아,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라 33원정대처럼 일부러 '이렇게도 보일 수 있고, 저렇게도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잔뜩 뿌려놓은 다음,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자, 대충 알아들었지?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라는 식으로 논쟁을 유발하는 기재가 없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ㅎㅎ | 25.06.17 19:4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