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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 옵스퀴르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하편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이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하고, 레딧과 여러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토론을 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 재미도 끝내고, 좋은 감정을 안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러나, 아직 제가 할 일이 하나 남은 것 같군요. 바로 헌사입니다.
헌사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창작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즐거움’과 ‘감동’일 겁니다. 희극을 보며 웃기도 하고,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죠. 활극에서 활력을 얻기도 하고, 슬래셔물에서 짜릿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감정들은 결국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니까요.
그리고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또 다른 큰 선물은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실제 삶의 선택 순간에 도움을 얻거나, 인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고민해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현실의 눈으로 바라본 Clair Obscur’이라는 주제로 몇 개의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Clair Obscur의 세계는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 사람들이 만들고 즐기는 만큼 현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 모든 분석과 사유가 제가 이 게임과, 제작자와, 그리고 여러분께 진정한 경애와 존경의 마음으로 바치는 "헌사"이며, 저는 그것이 이 멋진 게임에 바치는 작별 인사로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했던 글이며, 영어로 쓴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서론을 살짝 길게 쓰고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그럼, 이제 본론인 33 분석 논문 여섯번째 칼럼,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하편"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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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에서 계속...)
5. 플레이어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
└ 5-1. 장르의 변화
└ 5-2. 공격적인 태도
5. 플레이어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
앞서 짚었듯 이 게임은 서사적 반전과 충격적인 진행, 그리고 슬픔의 현실적 묘사를 통해 플레이어에게 깊은 정서적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좋게 보지도 않아요.
요컨대 "뭔가 있어보이는 그럴듯함"과 "플레이어에게 감정적 충격을 주는 것"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그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이 모호하고 엉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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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감정적 충격' 그 자체에만 의존하는 작품은 흔합니다. 예컨대 잔인한 장면을 통해 말초적인 충격을 주는 슬래셔물, 외설적인 장면을 통해 말초적인 쾌감을 주는 ㅍㄹㄴ물, 불행과 비극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정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불행 ㅍㄹㄴ물이나 신파극 등이 그렇죠.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해두지만, 저는 그런 작품들과, 그런 작품들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사실, 제가 레딧에서 댓글이나 메시지로 정말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이 게임의 수준에 대해 제가 오해하고 있다는 식의 말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매체의 수준'이라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영화, 게임, 소설, 시, 운동을 포함하여 모든 '취미생활'은,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대하고 멋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물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 즉 취미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 이 논의가 ‘게임’이라는 매체에 관한 것임을 고려하면, 전 세계적으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는 천박한 장르’로 취급되는 현실을 고려해봐도 '수준이 더 낫고 덜 낫다’는 식의 이야기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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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품성이나 예술성, 그리고 메시지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작품의 깊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리고 33원정대는, 그 깊이가 너무 얕아요.
아주 유명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소설의 어느 장면이든, 닌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모든 등장인물을 죽여버리는 것보다 재미있지 않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소설에서 최악의 전개 중 하나가 ‘갑자기 초능력자가 등장해 기존 등장인물을 몰살시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을 재미있게 생각했는데, 이 말이 유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런 게임이 나온 것에 정말 놀랐습니다.
저는 이 칼럼 시리즈 전반에 걸쳐 이 게임의 얕음과 모호함을 비판해왔습니다. 이제, 그것이 플레이어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그것이 왜 나쁜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5-1. 장르의 변화
제가 계속해서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 게임이 '내일은 온다'나 '모두 쓰러져도, 우리는 나아간다'라는 문구로 대표되는, '종말이라는 역경에 맞서는 인간들의 의지와, 용기와, 희생을 찬양하는 드라마'인 것처럼 광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게임의 엔딩은 명백하게 전혀 다른, 예컨대 '초능력을 지닌 미치광이 가족들이 게임 중독에 대해 이기적으로 다투는 이야기' 쪽에 가깝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33원정대원들은 그들의 여정에 걸맞는 결말을 맞이할 자격이 있습니다. 1막과 2막에서 절망과 싸운 여정 말입니다.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과, 고귀한 의지에 맞는 결말, "내일이 왔다"로 끝나야 했습니다. 설령 그 여정의 마지막에서 원정대원들이 모두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투쟁에 비례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어야 했습니다. 서사적으로 원정대원들이 믿는 '내일'이란, 원정대원들의 생존이 아니라, 원정 이후 뤼미에르에서 싹틀 희망을 뜻하니까요.
하지만 게임의 결말에서, 원정대원들은 '미치광이 초능력자 가족'들이 다투는 현장에서 입간판처럼 무력하게 서있다가 한마디 자기 변호조차 하지 못하고 날파리처럼 으깨지거나, 열여섯 살 소녀의 인형극에서 단순한 소품으로 전락하여 '트루먼 쇼'같은 익살극의 배우로 살아가게 됩니다.
창작물로서, 이것은 단순히 '광고와 달랐다' 혹은 '반전이 있다'는 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명백하게 장르가 달라진 것이죠.
예컨대 달콤하고 서정적인 멜로 영화에 대한 광고를 보고 극장을 찾았을 때, 그것이 주인공들의 결별이라는 '반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가 (멜로 장면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주인공들이 납치당해 고문당하고 해부당한 후 죽게 되는 결말로 끝난다면 누구나 당황할 것입니다. "잠깐, 어...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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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 중반 이후부터 엔딩까지, 33원정대는 완전한 배경 소품으로 취급됩니다. 모든 주도권은 마엘과 르누아르(+베르소)에게 넘어가고, 원정대원들은 처분을 기다리는 소품으로 전락하죠. 그 순간, "내일은 온다"나, "모두 쓰러져도 우리는 전진한다" 같은 것은 코미디가 되어버립니다. 말했듯, 원정대원들은 한마디 자기 변론조차 하지 못하고 창조주의 결정에 의해 무력하게 처분되는 '수동적인' 존재들이니까요.
죽은 인물이 초능력자의 손짓 한번으로 되살아나는 시점에서 '희생'같은 것은 가치가 아니라 하나의 개그 요소입니다. 이것은 절대 작품을 비꼬는 발언이 아니라 창작물을 비평하는 사람이 가지는 합리적인 견해입니다.
예를 들어 "톰과 제리"에서 톰은 (현실이었다면) 즉사나 영구적인 장애를 유발할 수 있는 치명적인 공격(진짜 총이나 미사일도 포함해서)에 매번 피격당하지만, 그것은 긴장감이나 심적 고통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웃음을 유발하죠. 왜냐하면 톰은 절대로 그 공격에 죽지 않고, 그것을 관객 모두가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죽음이 없어진 세계'인 3막 이후의 캔버스 세계(+마엘 엔딩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니 명백한, 그리고 급격한 장르의 변환이 있는 것이죠. 초반의 장엄하고, 구슬프고, 죽음을 무겁게 다루던 작품의 기조가 갑자기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가족 드라마로 변해버리니까요.
그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였던 거지?"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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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원정대의 세계는 모두 가치없는(진짜로 게임 내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가짜야."
만약 이 게임의 제작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며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33원정대의 광고는, 지금처럼 "내일은 온다, 모두 쓰러져도 우리는 나아간다"라면서 세계의 종말에 맞서 고귀한 희생과 인간의 의지를 찬양하는 화면을 넣으면 안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공정하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고 바르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면, 그들은 광고에 이렇게 써둬야 했습니다:
"여러분, 게임 중독은 위험한 것입니다. 여기, 가치없는 가상세계에 16살짜리 여자아이(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중독되면 무슨 꼴이 일어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5-2. 플레이어를 향한 공격적인 태도
결국 마엘 엔딩과, 베르소 엔딩에서 일관되게 보여지는(그렇게 느껴지는) 메시지라는 건 굉장히 교조적인 메시지입니다. '게임 좀 그만해, 이 게임 폐인들아.'정도의 메시지죠.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이 엔딩을 보고 불편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엘의 선택을 지지할경우, 현실의 나(플레이어)가 게임 폐인/히키코모리가 된 듯한 불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엘이 즐기는 뤼미에르 세상, 거기서 고통받는 베르소의 모습, 그리고 그 환상 속에서 시들어 죽어가는 마엘의 모습이야말로 현실의 게임 폐인 그 자체니까요.
그러니 굉장히 불쾌하죠. 플레이어가 게임 폐인이라면 마치 '너는 이 꼴이 될거야, 근데 계속 게임할거야?'처럼 느껴질 것이고, 취미로 게임을 하는 정도라도 '니가 게임 계속하면 저렇게 된단다.'하는 꼰대질로 느껴질 테니까. 베르소가 '가상세계에 그만큼의 가치는 없어!'라고 말할 때, 극 내에서 그 말을 듣는 것은 마엘이지만, 현실에서 그 말을 듣는 것은 플레이어입니다. 가상세계에 가치가 없다고요? 그럼 지금 이 33원정대라는 가상세계를 즐기는 나는 어떻게 되는거죠?
베르소의 선택을 지지할 경우, 나(플레이어)는 현실에 충실하자는 일반적인, 올바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 세계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고 애정을 가졌던 모든 인물이 끔살당하는 결론으로 이어지니 굉장히 속이 불편합니다. 게임 클리어를 위해 들였던 그 수많은 시간들, 노력들, 그 안에서 울고웃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사라진 거니까요.
귀엽고 이쁜 루네를 비롯해, 애정을 줬던 그 수많은 인물들이 전부 다 한순간에 죽어버렸으니 '이게 맞나? 내가 잘못한 거 아닌가?'하는 불쾌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죠. 거기다 시엘도, 루네도 명백히 납득하지 못한다는 제스처를 보여주면서 사라지거든요. 나(플레이어)는 지금껏 얘네들의 고생을 봐왔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 선택으로 그들이 몰살당합니다. 죽음에 직면한 루네가 한맺힌 시선으로 째려보는 것은 극 내에서는 베르소지만, 실제로는 플레이어입니다.
아, 물론 저는 33원정대의 제작자가 아니고, 그래서 실제로 제작자가 무슨 의도,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엔딩을 짰는지는 모릅니다. 대화를 나눠본 것도 아니고. 제가 말하는 것은, 플레이어 입장에서 저렇게 받아들일수밖에 없는 구조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엔딩에 기분이 상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죠.
저는 이런 사태와 아주 흡사한 창작물을 두 개 댈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라스트오브어스 파트2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게임 제작자가 예술병에 걸렸을 때 어떤 참사가 일어나는지를 알수 있고, 이 사태는 33원정대의 결말과 유사한 지점이 있어요. 물론 33원정대가 라오어2급의 망작이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나(플레이어)가 고른 올바르고,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의 결과가 애정어린 등장인물의 끔찍한 최후로 이어진다'는 줄기는 분명 비슷하죠.
두번째는 앞서도 몇번 말했던 에반게리온, 그중에서도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리피트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제작자가 관객들에게 '애니 그만보고 현실을 좀 살아라, 이 씹덕들아'라는 교조적인 태도가 작품 전체에 물씬 풍기죠. 구극장판 엔드오브에반게리온도 사실 이 기조 자체는 비슷했고요.
사실 이 게임 자체가 에반게리온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가족간의 문제가 세계를 들었다놨다하게 되는 스케일 점핑, 심약한 외톨이 청소년 주인공의 고뇌, 믿을 수 있는 애어른의 장렬한 희생, 생존싸움의 이면에 숨겨진 창조신화적인 진실, 꽉 막히고 음산한 개꼰대 아버지 캐릭터 등이 그렇습니다.
저는 에반게리온을 실시간으로 본 세대는 아니지만, 이 게임이 에반게리온에서 다루던 주제들을 다루고 있고, 에반게리온처럼 여러 겉핥기식의 철학과 상징을 무의미하게 남발하고,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의 논쟁을 고의로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알수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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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33원정대는 분명 명작이지만, 그 엔딩만큼은 정말 별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체 무슨 생각과 의도로 엔딩을 저렇게 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저 충격을 위한 충격, 반전을 위한 반전, 논쟁을 위한 논쟁만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결국 어느 쪽 엔딩이든, 불쾌하고 찝찝할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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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재미를 드릴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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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제게 더할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당 ㅎㅎ | 25.06.16 01:58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