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중 잠을 청하기 전 가끔 나는 야구 리스트를 떠올린다. 정말 무엇이든 쓸 수 있다. 조라는 이름을 가진 최고의 야구선수나 내가 본 최고의 커브볼러(마크 아이크혼 또는 누구라도?)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니폼일 수도 있다.
좋아하는 리스트 중 하나에는 공을 가장 강하게 때린 타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비거리가 가장 긴 홈런을 친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별개다. 코너의 내야수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땀을 흘리게 할 정도로 공을 강하게게 때리는 그 타자들의 이야기다. 타석에 들어서면 야구장에서 다른 공기가 느껴지고 투수의 얼굴이 바뀌며 숨이 멎을 정도로 공을 강하게 치는 장면을 고대하는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다.
랩 라조이는 그가 공을 얼마나 강하게 치는지로 유명했다. 폴 워너도 마찬가지였다. 스탠 뮤지얼과 테드 윌리엄스는 공을 으스러뜨렸다. 벅 오닐이 늘 말하듯이 조시 깁슨의 배트에서 공이 떨어졌을 때는 다른 소리가 났다.
나는 불행하게도 그들을 본 적이 없고, 미키 맨틀이나 프랭크 하워드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리스트에는 내가 생애에 본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을 순서대로 나열하거나 베스트 10 같은 목록을 만들진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런 종류의 목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상상력과 향수어린 뉴런이 불꽃을 일으키는 두서없는 이야기 일 뿐이다. 나는 이것을 시에 더 가깝다 생각한다.
딕 앨런. 앨버트 벨. 리코 카티 (나는 그를 매우 좋아했다). 애덤 던. 에드윈 엔키나시온, 조지 포스터, 조이 갈로. 조시 해밀턴. (타격 연습에서의) 이치로. 보 잭슨. 하먼 킬브루(Harmon Killebrew.). 그렉 루진스키, 윌리 맥커비, (공이 잘 맞았을 때 그는 강하게 때렸다) 마이크 나폴리. 알 올리버. 데이브 파커. 카를로스 쿠엔틴. 프랭크 로빈슨. 윌리 스타겔. 짐 톰. (매우 빠른 스윙의) 체이스 어틀리. 블라디미르 게레로. 데이브 윈필드, (X가 필요하지만 공을 많이 친다. 잰더 보가츠(X가 필요하지만 공을 아주 세게 쳤다.needed an X but he hits the ball plenty hard)), (칼) 야스트렘스키, 그리고 물론 이 명단에서 본인을 제외시키면 용서하지 않을 잭 그레인키.
다른 세 명은 특별한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인 토니 올리바는, 공을 너무 강하게 때린 나머지 미네소타에서는 여전히 그의 파울볼을 회상한다.
게리 셰필드도 있다. 위키백과 페이지에 "이보다 무서운 타자와 대면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라는 나(조 포스난스키)의 인용구가 소개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겔 카브레라가 있다.
미기는 타격 신동이었다. 16세의 나이에, 스카우트들은 그와 사인을 하기 위해 1999년 베네수엘라에 있는 그의 집 주변에 줄을 섰다. 다저스의 스카우트 카밀로 파스쿠알은 선수들과 계약할 수 있는 첫날밤 0시에 카브레라 집에 있었다. 카브레라는 대신 말린스와 거의 200만 달러에 가까운 금액으로 계약했는데, 당시 국제 선수의 계약 중 가장 큰 계약이었다. 유일한 걱정은 그의 포지션이었다. 양키스는 그가 유격수를 보기에는 너무 키가 크다는 이유로 입찰에 응하지 않았다. 그들이 옳았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틀렸다.
카브레라는 첫 경기에서 탬파베이의 알 레빈을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쳤다. 당시 20세였던 그는 포스트시즌에서 말린스의 클린업으로 NLCS에서 홈런 3개(1이닝 케리 우드를 상대로 3점 홈런을 포함)를 때려냈다. 그는 또한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로 경기가 기울자 로저 클레멘스를 상대로 홈런을 날렸다.
그 후, 그는 베이스볼 레퍼런스 페이지를 보는 것이 거의 태양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13시즌 연속 멋진 경기력을 보였다.
카브레라에게 그라운드 밖에서의 삶은 거의 일관성이 없었다. 그는 끝이 없는 실수와 잘못된 선택을 했다. 음주 운전으로 체포되었다. 가정 폭력을 벌이고 경찰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불륜 관계였던 여성으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알코올 중독 센터에 갔었고, 모든 면에서 그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타자로서는? 그것이 더 쉬워 보이진 않았다. 약점이 없었다. 온갖 종류의 공을 쳤다. 그는 모든 위치에 공을 때렸다. 매년, 미기는 .324 또는 .339 또는 .328 또는 .316의 타율로 공을 쳤다. 매년 그는 34, 27, 44개의 홈런을 쳤다. 그는 매년 100 타점을 기록했고, 매년 100개의 득점을 했으며, 매년 40-50개의 이루타를 때렸다.
그리고 그보다 공을 더 강하게 치는 사람은 본 적 없다. 미기의 방망이에 맞고 나오는 공은 근본적으로 다른 데가 있었다. 그의 땅볼은 내야를 뚫고 나가곤 했다. 그의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는 선상을 가로질렀다. 한 경기에서 타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많지만, 카브레라가 매 경기마다 1점을 너무 세게 쳐서 그에게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13시즌 동안 그는 502루타, 434홈런, 연평균 110타점으로 .323/.402/.566을 기록했다. 야구 역사상 그런 13시즌을 보낸 선수는 거의 없다.
2017년 이후 카브레라의 힘은 부상과 마모·파열을 일으키며 급감했다. 그는 지난 3시즌 동안 4할 정도의 장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앞으로 4년 동안 1억 2천만 달러 이상의 계약이 남아 있기 때문에, 미기에게 특별히 축하할 만한 결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헨리(행크) 애런, 배리 본즈, 데이비드 오티즈, 알버트 푸홀스와 함께 500홈런과 600루타를 친 다섯 번째 선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아주 자주, 그는 공을 향해 몸을 돌리고 눈이 거의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때린다. 그것은 마치 7월 4일의 일처럼 느껴진다.
여러 면에서, 나는 그가 놀라웠던 트리플 크라운 시즌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기꺼이 인정한다. 나는 그 시즌이 얼마나 특별한지, 나름대로 그리워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야구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트리플 크라운 시즌이었다고 믿는다.
야구 역사상 최초의 "진짜" 트리플 크라운은 1901년에 있다. 그 당시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진 나폴레옹 라조이가 .426을 치고, 14개의 홈런을 치고 125타점을 기록했다. 그렇다, 19세기에 다른 트리플 크라운이 몇 개 더 있었다. 폴 하인즈는 1878년에 해냈지만,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가 아니었다. 팁 오닐은 1887년에 우승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만 메이저 리그의 자격이 있는 올드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에서 우승했다.but he won it in the old American Association, which qualifies as Major League only in the most technical of ways.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라조이가 가장 먼저 해냈지만 그의 트리플 크라운도 꽤 의심스럽다. 그는 아메리칸 리그 첫 해에 그것을 했다. 리그는 아직 발전 중이었고, 그저 8개 팀 뿐이었으며, 경쟁은 덜 치열했다. 트리플 크라운 3개 부문 중 상위 10위 안에 든 또 다른 유일한 명예의 전당 헌액자는 알려지지 않은 지미 콜린스라는 3루수였다, 그는 올드-타이머 위원회에서 그의 수비 덕에 득표했다. The only other Hall of Famer to finish Top 10 in any of the three triple crown categories was someone you probably did not know was in the Hall of Fame, a third baseman named Jimmy Collins who was voted in by the Old-Timer’s Committee mostly for his defense.
요점은, 라조이의 트리플 크라운도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1909년 타이 콥의 트리플 크라운이 최초의 진짜 트리플 크라운이 된다. 하지만, 정말 누군가 9개의 홈런으로 트리플 크라운 시즌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년 시절, 어린 야구팬들에겐 트리플 크라운들을 모두 외우는 것이 중요했다. (500홈런 클럽의 모든 선수들을 아는 것 처럼) 난 항상 그 무리에서 가장 애매한 하이니 짐머맨을 기억하곤 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이 하이니였기 때문이다. 그는 1912년 컵스에서 우승했다. 그는 14개의 홈런을 쳤다.
짐머맨 이후, 명백한 트리플 크라운 시즌이 생기기 시작한다. 로저스 혼스비는 두번에 걸쳐-1922년과 1925년에-기록했고,-두 번 모두 .400을 기록했고, 42홈런과 39홈런, 152와 143타점을 기록했다.
그 후 오랜 기간 위대한 타자들이 쏟아졌다. 1933년, 명예의 전당 헌액자 척 클라인과 지미 폭스는 다른 리그에서 각각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했다. 루게릭은 이듬해, 덕키 메드윅은 3년 후에 달성했다.
1940년대에 테드 윌리엄스는 두 번 달성한다. 두 번째인 1947년은 아메리칸 리그에서 이상한 해였다. 윌리엄스 말고는 그 누구도 타율 0.330과 30홈런과 100타점을 올린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MVP는 조 디마지오에게 돌아갔다. 조 디마지오는 WAR(수비 포함)로는 해당 시즌 테드 윌리엄스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다음 세 개의 트리플 크라운 - 56년 미키 맨틀, 66년 프랭크 로빈슨, 67년 칼 야스트렘스키 - 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축하를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 저마다 훌륭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 맨틀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훌륭하고 사랑받는 젊은 선수였다. - 어린 켄 그리피에 어린 브라이스 하퍼를 더한 어린 로날드 아쿠나 주니어의 선전를 생각해보자 - 그리고 나서 그는 상상하기 힘든 이 시즌에 도달했다. 타율 .353 , 52홈런, 130타점. 그는 거의 모든 면에서 리그 선두였다. 천재가 모든 것을 묶는 것을 보는 건 아주 만족스러웠다.
*맨틀은 3할5푼3리를 치고 112번의 볼넷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출루율에서 리그 선두를 달성하진 못했다. 그의 뛰어난 출루율 .464 위에는 예상대로 37세의 테드 윌리엄스 (.479 OBP)가 있었다.
• 로빈슨의 트리플 크라운은 신시내티 레즈가 그를 밀트 파파스와 트레이드한 지 1년 만에 나왔다. 로빈슨은 어쨌든 그의 투쟁심으로 유명했다. 그는 항상 좀 화가 난 듯 보였다. 하지만 66년에 특히 화가 났다 그는 한 시즌에 40개의 홈런을 친 적이 없었- 다시는 없을 것이다- 지만 그 해 그는 49개의 홈런을 쳤다. 트리플 크라운 부문 외에도, 그는 득점, 출루율, 장타율에서도 리그를 이끌었다.
• 1967년 야즈(칼 야스트렘스키)의 트리플 크라운 시즌은 아마도 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다섯 시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불가능한 꿈의 레드 삭스를 정규 시즌에 -정말로 이끌면서- 리드했다.
이것들은 모두 야즈 이후 45년간 트리플 크라운이 없었다는 긴 이야기다. 2012년 카브레라가 해낼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트리플 크라운은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내 말은, 이 항목들을 보자: 타율? 출루율의 성취가 낮은(그러나 화가 날 정도로 유명한) 스탯 말인가? 홈런? 2012년까지 많은 야구 팬들은 홈런에 질렸다. 그리고 타점? 개인 통계가 아닌 팀 기반 통계이다.
카브레라의 트리플 크라운 (.330, 44, 139)은 우리 현대 야구 팬들에겐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에 우리는 카브레라의 MVP 수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다. 물론, 나도 그 싸움에 가담한 일원이었고, 후회하지 않는다. 그 해는 마이크 트라웃이 부상했던 해였고, 그는 구식 통계에서 패한 반면, 출루율은 더 높았고, 베이스 주자이자 수비수로는 훨씬 더 뛰어났으며, 20점을 더 득점했다. WAR에서 트라웃은 카브레라보다 3이 더 가치가 있었지만, 그것은 작은 차이는 아니었다.
카브레라는 확실히 득표율에서 차이가 나는 MVP 를 수상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가 수상해서 기쁘다. 말하자면, 그렇다, 트라웃이 수상했으면 좋았다, 난 여전히 트라웃이 더 좋은 만능 시즌을 보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브레라의 트리플 크라운은 기억해야하는 면에선 특별했다. 그는 1969년 리그가 확장된 이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다. 그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혼스비, 폭스, 윌리엄스, 맨틀이 상을 수상했을 때, 그들은 훨씬 적은 경쟁과 훨씬 작은 리그에서 우승했다.
맨틀의 '56년 시즌'을 보자. 그 해 아메리칸리그에 정말 훌륭한 타자가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렇다, 테드 윌리엄스가 있었지만, 언급했듯이, 그는 그때쯤 37살이었다. 그 해 맨틀의 56홈런에 2위를 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빅 워츠 그는 32개를 때렸다. 알 칼린은 정말 훌륭한 선수지만, 그는 타점 부문에서 윌리엄스에 이어 2위를 했다. 요기 베라는 전설적인 선수였지만 은퇴 전 시즌은 노쇠한 포수였다. 래리 도비는 훌륭한 선수였지만 역시 선수 생활의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미노 미뇨소는 명예의 전당 후보지만 타율 홈런-타점을 위협할 위치는 아니었다.
이제 카브레라의 트리플 크라운을 보자. -그는 마이크 트라웃을 물리쳐야 했다. 그는 데릭 지터, 조 마우어, 아드리아안 벨트레, 로빈슨 카노, 더스틴 페드로이아 등을 제압해야 했다. 그는 조쉬 해밀턴, 에드윈 엔키나시온, 프린스 필더, 폴 코너코, 크리스 데이비스, 호세 바티스타, 애덤 던, 넬슨 크루즈를 제치고 한 시즌에 40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최고봉에 올라야 했다. 그는 아메리칸 리그에 새로 합류한 남자 앨버트 푸홀스보다 더 많은 득점을 해야했다.
맨틀이 8개 팀 최고의 타자들을 상대로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한 반면 카브레라는 15개 팀 최고의 타자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맨틀은 여전히 대부분 (인종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미겔 카브레라 자신은 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리그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다.
요점은, 트리플 크라운 자체가 낡고 재미없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카브레라는 야구 역사상 가장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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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홈런 기념으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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