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내용이 좀 길군요. 스크롤 압박에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원래 이렇게 오래 쓸 글은 아니었는데, 현실의 일도 바빠지다보니 아무래도 연재가 느려지고, 또 기본적인 스토리 얼개야 맞춰져 있었습니다만 살이 붙다보니 자꾸 길어지더군요. 글을 좀 더 간결하고 명료하게 쓰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원...
소설은 만화나 일러스트와 달리 접근하기 힘든 콘텐츠입니다. 읽는 데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읽어주시는 점 감사합니다.
1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7748
2편: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7816
3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8050
전편: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8305
-----
철충들의 시체로 산이 쌓였다. 외딴 숲의 한켠에 거의 작은 언덕을 만들 기세로 철층들이 쓰러져갔다. 그리고 서로 누가누가 더 높이 시체로 산을 쌓나 경쟁하듯이 놈들을 도륙해 나가는 건 두 마리의 고양이였다. 어둠이 내려깔린 숲 속에서 눈에 확 튀는 하얀 번개와 그보다는 어둠에 녹아든 검은 번개가 짝지어 철충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꺄하하하-따라올 수 있겠어?”
“입다물고 싸움에나 집중해!”
인정하긴 싫지만, 페로는 포이가 강하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부상당한 주제에 검은 고양이는 페로만큼이나, 가끔은 페로도 따라가기 벅찰 만큼 민첩하게 뛰어다니며 적들을 잘라댔다.
“내 움직임에 맞추라고!”
“아-앙? 동생이 언니에게 맞춰야 하는 것 아닐까?”
“다쳐서 빌빌대는 게 무슨...!”
서로 티격태격대면서 두 고양이는 미친 듯이 철충들 사이에서 날뛰었다. 말 한마디 없이 단지 서로의 눈빛과 몸짓만 봄에도 두 고양이는 서로가 어떻게 움직일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페로가 허리를 돌리자 포이는 그녀가 좌측에서 다가오는 칙을 오른손으로 후려칠 생각임을 알아차렸다. 포이가 왼발을 구르자 페로는 그녀가 뒤로 튀어올라 우측의 센츄리온의 공격을 회피할 작정임을 알아차렸다. 포이는 페로의, 페로는 포이의 근육의 떨림 하나하나, 눈동자의 꿈틀거림 하나하나로 그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너무 잘 보였다. 두 고양이 중 어느 쪽도 서로를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녀들은 자매요, 같은 컴패니언이요, 그리고 같은 유전자를 지닌 고양이였다. 서로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심지어 서로의 실수조차도.
“멍청아! 뒤!”
페로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포이의 손톱이 페로의 뒤에서 달려드는 케미컬 칙을 갈랐다. 역한 체액을 뿌리며 쓰러지는 놈을 아연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페로에게, 포이가 비웃듯이 픽 던졌다.
“빈틈투성이인 건 여전하네! 그러니까 나한테 지지!”
그러나 페로는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포이에게 뛰어올랐다. 아니, 이 시국에 그걸 갖고 나한테 덤벼? 하고 그녀가 놀라려는 찰나에 페로는 포이의 어깨를 짚고 뛰어올라, 그녀의 머리 위에서 내려찍으려는 스카우트를 두동강냈다. 그리고 내뱉었다.
“...너도 마찬가지 같은데?”
이건 다쳐서 그래! 다쳐서 미처 못본거야!라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철충들이 계속해서 밀려왔기에 그녀들은 서로 길게 대꾸하는 대신 한 놈이라도 더 가르기로 했다.
“헤헷, 오르카로 돌아가면 두고보자, 동생아.”
“동생 아니랬지”
페로는 헉헉대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미친 듯이 철충들의 대군을 가로지르며 놈들을 베어넘기고 종횡무진 할퀴어댔지만 이놈들의 물결은 끝이 없었다. 정말 인간 하나를 잡으려고 이 부근의 모든 철충들이 죄다 집결한 것 같았다. 그리고 페로의 체력도 무한하지는 않고, 방금 전에 겨우 회복한 포이 역시 그 한계가 명확했다.
다시 말해, 그녀들이 오르카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숨이 차오르고, 놈들의 공격에 옷이 군데군데 지쳐나가며, 온몸의 근육이 피로를 호소하기 시작하자 페로 역시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미새 노릇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리리스 언니가 주인님을 구했을까, 그녀는 궁금했다. 그러면 자신들이 여기서 이 난동을 피우는 것도 의미가 있을 텐데. 그녀는 리리스 언니가 가르친 잠입작전의 절대 명제를 다시 되새겼다. 절대, 절대로 적에게 들키지 않는 것.
그러면 이미 철충들에게 노출된 그녀들을 기다리는 운명은 무엇이겠는가?
이미 적들에게 들킨 이상 - 정확히는 스스로의 의지로 그리한 이상 - 그녀들이 압도적인 철충들 앞에 짓눌리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였다. 리리스 언니와 자매들이 도우러 온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무리 리리스가 잘 싸운다 해도 그녀는 기본적으로 경호원 겸 잠입암살자지, 대규모의 군세 앞에서 무쌍을 찍는 대량살상형 바이오로이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페로와 포이를 구하겠답시고 나머지 컴패니언즈가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은 오히려 컴패니언즈의 전멸만을 초래할 미친 짓이라는 이야기다. 페로의 머릿속에는 따라서 이 상황에서 큰언니가 취할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릴 두고 가겠지. 그게 맞는 길이야’
그게 맞는 선택이다. 고양이 둘을 구하기 위해 컴패니언즈가 모두 전멸할 필요는 없다. 그건 개죽음이고, 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 될 것이며, 무엇보다도 저승이 있다면 페로와 포이가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리리스 언니는 주인님을 사랑하며, 또한 경호원이며, 또한 구출팀의 리더다. 그녀의 본분과 역할을 생각하면 리리스가 무슨 선택을 할지는 명확했다. 따지고 보면 결국 페로는 섶을 지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든 셈이고, 포이도 고작 살아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연장된 것에 불과한 셈이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을지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절망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녀는 오히려 더더욱 열을 내며 철충들을 자르고 베었다. 그리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쨌든 리리스 언니는 틀림없이 주인님을 구할 것이다. 언니가 실패할 리가 없다. 분명, 주인님을 무사히 구해서 오르카로 돌아가리라. 다만...다만 아무리 언니라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자신을 구하러 오진 못할 뿐이다.
그래도 괜찮다. 주인님이 살아계신다면, 주인님이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다면. 그걸로 그녀는 만족하리라.
비록 다신 뵙지 못하게 되겠지만, 다시는 그분의 등 뒤를 바라볼 수 없게 되겠지만. 다시는 그분이 안아주지 못하게 되겠지만.
페로도 컴패니언이다. 주인님을 지켜드린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또한 그녀 역시 사령관을 사랑한다. 포이처럼 적극적이지 않을 뿐.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주인님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그저 지켜드려야 할 분 뒤에서 꼬리만 살랑거린다고,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고 해서 그분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녀 역시 주인님이 자신을 꼭 껴안아주길 바랬다. 사령관이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랬다. 어쩌면, 그녀가 자유분방한 포이에게 가졌던 그 감정은 단순히 언니로서의 권위의식에서 온 게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질투에서 온 것인지도. 늘 그분 앞에서 망설이고, 컴패니언즈의 의무를 되새기는 나는 못 하는, 그 자유분방함이 부러웠던 건지도.
“멍청아! 뭘 넋놓고 있어!”
포이의 고함에 페로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대인 살상용임이 분명한 소형 발사체들이 숲의 어둠 저편에서 날아와 페로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큭....!”
페로는 급하게 뒤로 튀어올랐다. 그러나 그 미사일은, 여느 철충들과는 다르게 지친 고양이만큼이나 날랬다. 그리고 원래 폭발하는 물건은 웬만큼 거리를 두고 떨어져도 사람울 즉이는데 충분한 화력이 나오는 법이다.
집속 미사일이 폭발했다. 이미 꽤 거리를 두었음에도 폭발의 충격과 비산하는 집속탄의 파편들이 페로를 휘감았다. 그것이 그녀의 옷을 가르고 살을 찢었다.
“악!”
“페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프다. 당연히 아프겠지. 폭발의 열기와 날카로운 파편들이 살을 파고들어 근육을 찢고 혈관을 잘랐는데 안 아플 리가 없다. 페로는 힘없이 날아가 데굴데굴 굴렀다. 안 돼...좀 더 싸워야 하는데. 좀 더 버텨야 하는데. 힘이 쭉 빠진다. 고통으로 눈앞이 흐려진다. 저만치서 포이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잡고 흔드는 것이 느껴진다
“야! 괜찮아? 괜찮냐고!”
“윽...크흑....”
“정신차려 봐! 야!”
페로는 꿈틀거리며 부르르 떠는 자신의 볼에 뭔가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짠내가 난다. 희미하게 눈을 뜨자 자신을 안고 눈이 그렁그렁한 오드아이가 보인다.
“포이...? 지금 혹시 울어?”
“누가 운다고 그래! 일어나기나 해!”
쓰러져 나뒹구는 페로의 앞으로, 육중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이전의 조무래기 잡졸 철충들과는 확연히 다른 덩치의, 배는 더 못생기고, 배는 더 악랄하고, 배는 더 사악해 뵈는 놈이 나타났다. 센츄리온 제너럴이라. 그래, 드디어 이 숲의 주인께서 납셨군. 이 녀석이 오늘 창궐하는 벌떼처럼 넘쳐나던 놈들의 왕초시로군. 포이는 초조하게 입을 다시며 페로에게 다가가는 놈의 앞을 막아섰다.
“다가오지 마!”
당연히, 놈이 포이의 말을 이해한 것 같진 않았다. 이해한다손 쳐도 들어 줄 이유도 없었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다섯 개 남은 클로를 놈에게 겨누었다. 그녀도 지쳤다. 페로를 만나기 전의 부상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자매와 함께 날뛰면서 또다른 피로와 상처가 쌓였다. 이 상태로 이놈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뒤에서 페로가 내뱉었다.
“바보야, 폼 잡지 말고 그냥 튀어”
“언니는 동생 안 버려!”
“그러니까, 동생...아니라고....”
놈이 다가온다. 그녀들을 가만 놔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당연하겠지. 오늘 우리가 몇 놈이나 쓰러뜨렸는데. 포이는 놈을 향해 튀어나갈 자세를 잡았다. 페로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으려나. 놈이 포이를 조준하고 발사 시스템을 조준하는 게 보였다.
아우우우우------
어디선가 기나긴 늑대의 하울링이 들렸다. 그래, 숲속에서 들릴 만한 참으로 비장한 배경음이군.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의 장렬한 싸움을 마무리하는 데는 역시 이런 배경음이 제격이지. 덤비라고. 마지막까지 멋지게 싸워 주지. 그런데 고양이가 싸우는 걸 뭐라고 하던가, 캣파이트?
-----우우우우우!
근데 가만, 이 울려퍼지는 늑대 울음소리 어딘가 익숙한데. 포이가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 풀숲에서 빨간 유성이 솟구쳐 올랐다.
“쓰아냐앙 시이이작!”
그 빨간 유성은 센츄리온 제너럴이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놈에게 그 스스로를 갖다 박았다. 콰작 하고 놈이 휘정이는 사이 펜리르는 놈의 정수리에 올라타 두 자루의 체인 블레이드로 놈을 마구 유린했다. 포이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에 그 옆에서 하치코가 언니를 따라 달렸다.
“으릉! 언니들 괴롭히지 마!”
거대한 방패로 제너럴의 미사일과 칙들의 사격을 빗겨내며 하치코가 이를 드러냈다. 그 위로 소리도 없이, 정확히는 작은 푸드덕 소리가 전부인 조용한 암살자가 날아들었다.
“......”
스노우페더는 다른 두 자매들만큼 요란하게 떠들어대진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밤은 그녀의 시간이고 그녀의 영토다. 센츄리온 제너럴에게, 그리고 놈을 호위하겠답시고 달려드는 칙과 팔랑스들에게 수직으로 내리꽂는 순백의 번개는 다른 두 자매보다 더 날카롭고 치명적이면 치명적이었지 덜 날카롭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빠진 두 고양이의 뒤로 컴패니언 시리즈의 맏언니가 걸어나왔다.
“흐음. 포이, 페로? 둘 다 괜찮나요?”
포이는 비틀거렸고, 페로는 겨우겨우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리리스는 무표정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페로는 언니가 그런 표정을 언제 짓는지 알고 있었다. 제대로 화가 났을 때, 오히려 리리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죽은 눈으로 미소짓는다.
“동생들을 다치게 한 대가는 치루셔야 할 거에요, 이, 리제만도 못한, 개, 쓰레기, 철충 여러분”
“어, 언니, 이러시면 어떡해요!”
페로는 부상 입은 자신보다 리리스와 자매들을 더 걱정했다. 잠입작전에서 반드시 숨어 다녀야 한다고 동생들에게 강조한 건 바로 리리스 자신이었다. 침투팀이 발각된다면 전멸은 시간문제라고 가르친 건 바로 리리스 그녀였다. 아직도 철충들은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다. 저만치서 펜리르가 승리의 하울링을 부르짖으며 센츄리온 제너럴의 마지막 숨통에 체인블레이드를 꽂아넣는 모습은 보였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숲 속은 아직도 붉은 눈망을들로 가득했고, 어둠이 깔린 숲그림자 속에서 끊임없이 놈들이 몰려나왔다. 놈들은 자기들 대장 죽은 걸로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컴패니언 시리즈가 모두 나서면 놈들로 한동안 시체의 산을 쌓을 수 있겠지만, 결국 압도당할 것이다. 이러면 페로와 포이가 나머지 컴패니언즈들을 주인님과 함께 탈출시키려고 일부러 시선을 끈 게 모두 헛되지 않은가. 리리스의 이러한 행동은 위험해도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 포이, 페로, 이 언니에 대해 너무 오해하고 있는걸요”
페로의 의문에 찬 눈빛을 본 리리스는 미소지어주었다. 그 미소는 조금 전 센츄리온 제너럴을 향할 때와는 전혀 다른, 동생들을 대할 때만 보여주는 포근한 미소였다. 그녀는 자매들이 쌓아가는 철충들의 시체더미를 뒤에 두고 두 고양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물론 이 언니가 주인님과의 위험천만한 로맨스를 즐기긴 하지만....”
어디선가, 멀리서, 무언가 발사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리리스는 자매들에게 뒷말을 이었다.
“자1살하는 취미는 없답니다?”
쾅.
다음 순간, 밤의 숲 속이 갑자기 한낮이 된 듯, 눈이 멀도록 밝아졌다. 귀청이 떨어질 같은 폭발음도 함께. 순식간에 숲 머나먼 곳에서 거대한 화염의 벽이 솟구쳤다. 어찌나 거대한지 거기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페로와 포이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피유우우우우-
포탄은 초음속으로 날아온다. 포탄이 숲 속에 착탄한 후에야 아련하게 포탄들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다. 수없이 많은 포탄들이 낙하하는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들린다. 밤이라 어두워서 포탄이 보이진 않지만, 그 소름끼치는 - 특히 철충들 입장에서 그러할 - 소리만큼은 들린다. 다음 순간, 또다시 숲 전체를 으스러뜨릴 듯한 굉음과 함께 파니와 비스트헌터, 그리고 셀주크들이 발사한 것이 분명한 무수한 포탄들이 무자비하게 대지를 두드렸다. 그 위에 선 철충들도 함께.
피유우우우우-
으르렁거리는 포격은 끝이 나지 않았다. 두 고양이의 눈에 푸르른 궤적을 그리며 다음 포탄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레일건의 궤적이다. 에밀리가 온 모양이다. 거기에 더하여 아무리 봐도 함포급 사이즈, 그러니까 8인치는 됨직한 놈이 발사한 게 분명한 폭발들이 숲 저편에서 치솟자 페로와 포이는 해군 세이렌들마저 여기에 끼어 무제한 포격을 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늘이 붉게, 밝게, 그리고 부옇게 달아올랐다. 그 불타는 하늘에서, 포격으로 대공망이 무력화된 철충들의 무리를 향해 밴시들이 낙하하는 것이 보인다. 시커먼 하늘에 숨어 있던 나이트앤젤 특유의 날개들이 그 불빛에 드러났다. 셀 수도 없는 실피드와 지니야의 날개들은 덤이다. 그녀들로부터, 폭탄이 떨어진다. 다시 한 번, 연속적인 폭발음이 두 고양이들의 귀청을 찢어놓았다.
천지가 뒤집히는 것 같다. 귀가 멀 것 같다. 그야말로 숲 전체를 갈아엎을 기세로 대지가 진동했다. 세상이 불과 폭발로 종말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오르카는 다 계획이 있었다.
사령관의 신변이 확보되었다면 더 이상 화력투사를 망설일 이유가 없다. 사령관의 위치를 알고, 또 침투조의 위치가 알려져 있다면 더 이상 아군 오폭을 걱정하며 화력을 쏟아붓는 것을 주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철충놈들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밀고들어왔던가? 그에 맞선 오르카의 답은 화해(火海)전술이었다. 범고래는 철충들을 향해 불과 열기로서 선을 그었다.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철충이라도 그 분노의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리라.
내가 이겼어. 너흰 실패했어.
이 선을 넘어오지 마.
치직, 치지직, 하고 리리스가 들고 있던 무전기가 울렸다.
“흐음, 방금 포격으로 놈들 재밍이 끝장난 모양이네요”
아마도 포격이 놈들의 재머를 때려 침묵시킨 모양이다. 리리스는 미소지으며 무전기에 입을 가져다 댔다.
“아아, 화력반? 리리스랍니다. 포격 범위를 좀 더 남쪽으로 확대하셔도 될 것 같아요.”
“여기는 아스널. 사령관은 무사한가? 만일을 위해 묻네만 사령관의 ‘그곳’에 이상이 있진 않겠지? 사령관의 정력은 중대문제다”
“....포단장, 그런 건 좀 나중에 물으시오”
“용이여, 그것이야말로 오르카에게 최중요 문제가 아닐지? 그리고 전략폭격단장도 궁금해하는 것 같소만”
“누, 누가 궁금해한다고 그래!”
“....네, 이상 없으세요”
리리스는 한숨을 폭 쉬고 무전 저편의 상대들에게 응답했다. 그 무전내용은 지금 무려 세 개의 군부대 - 캐노니어, 둠브링어, 그리고 호라이즌 - 가 이 지역에 무차별적인 화력을 퍼부어대고 있다는 의미였기에 페로의 안 그래도 창백한 표정이 더 해쓱해졌다. 그 정도면 이 숲을 싹 밀어버리고 황무지로 만들어버리기에도 충분한 화력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무차별적으로 포격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주인님을 모시고 지켜드려야 할 언니가 지금 여기 있다면 주인님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저...언니? 주인님은요? 주인님은 어디 계시죠? 설마 주인님을 두고...”
“어머나, 페로, 이 언니가 그렇게 경우 없고 무책임한 경호원으로 보이나요?”
“하지만...언니가 여기 있다는 건....”
“페로. 언니도 다 생각이 있답니다. 언니의 인맥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요?”
미소짓는 리리스의 손에 들린 무전기에서 이번엔 다른 주파수로 통신이 잡혔다.
“치직-칙, 해충? 여기는 리제, 시저스 리제야. 신호를 보내준 위치에서 주인님을 확보했어. 자매들과 같이 모시고 이동하고 있어”
“잘 했어 스토, 크흠, 잘 했어요, 시저스 리제 양, 서남쪽으로 가면 몽구스 팀의 저격수와 스틸라인의 응급반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그녀들에게 주인님을 인계하세요”
“싫어. 히히히히. 리제가 주인님을 마지막까지 모시고 갈 거야. 끝까지 주인님과 함께할 거야”
페로는 언니의 관자놀이에 작게 힘줄이 돋은 것을 보았다.
“리제 양, 내 말 들어요. 주인님은 출혈이 심해요.”
“히히히히. 리제 피를 드릴 거야. 그러면 될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수혈하려면 장비가 필요하단 거, 간호사 경험 있는 리제 양도 알죠?”
“...........”
“주인님을 죽게 하고 싶진 않겠죠?”
“......쳇, 해츙, 알았다고”
페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큰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다른 바이오로이드에게,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시저스 리제와 페어리에게 주인님을 양보했다고? 이거 우리 언니 맞아?
물론 리리스와 컴패니언즈가 페어리에게 가진 악감정과는 별개로 어쨌든 언니다운 합리적인 선택이긴 하다고 페로는 생각했다. 페어리 역시 주인님을 모시는 메이드들이다. 주인님을 어떻게 모시면 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그녀들은 전원 기동형이다. 출혈이 심해 한시가 급한 주인님을 모시는 데에는 비행이 가능하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그녀들이 쓸모가 있을 터였다. 합리적이다. 하지만...하지만 페로는 그 리리스 언니가 그런 결단 - 자신이 아닌 다른 바이오로이드, 그것도 페어리의 손에 주인님을 맡기는 -을 내렸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해충, 우리가 네 고민 해결해 줬지? 너 이걸로 내게 하나 빚진 거다?”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다달았는지 리리스는 앞에 동생들이 있다는 것도 잊고, 질긴 인연의 오랜 악우(惡友)에게 빽 소리지르고 말았다.
“뭐? 야, 스토커! 듣자듣자하니 어이가 없네? 우리가 넘긴 걸 주워먹은 주제에! 주인님을 모실 소중한 기회를 줬으니 오히려 너네가 고마워해야지! 페어리가 우리에게 빚진 거라고!”
“히히히히. 휴전은 끝이야. 나중에 이 빚을 뭘로 받아낼까.”
“야! 스토커! 야! 듣고 있어?”
“히히히. 주인님을 모시고 가서 잔뜩 사랑해드려야지”
”아오오!!! 거기 페어리들! 자매 관리 똑바로 안 해?”
무전기에 대고 뺵빽 소리지르는 리리스를 보고 나서야 눈치 빠른 페로는 큰언니와 리제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았다. 휴전이라.
리제와 리리스. 페어리와 컴패니언즈. 둘 사이의 악연도, 경쟁도, 투쟁도 모두 주인님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다. 주인님이 없다면, 둘 사이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페로의 추측이 맞았다. 오르카에서 출격하기 전, 리리스는 리제와 단둘이 담판을 지었다. 주인님이 없으면 시저스 리제도 리리스도 살아가는 데 아무 의미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행하는 투쟁도, 주인님의 사랑을 두고 벌이는 경쟁도 아무 의미가 없다. 둘의 삶의 목표가 위협받는 지금, 서로 아웅다웅하며 싸울 때가 아니었다. 따라서 오르카의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보았다면 정말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일시 휴전이 맺어졌다. 금방 깨질 휴전이긴 했지만, 그래도 리리스가 신호기로 주인님의 위치를 오르카와 페어리들에게 알리고 자매들을 구하러 달려갈 때까지는 유지되는 휴전. 리리스가 자신의 딜레마를 해결할 때 써먹을 수 있는 휴전.
‘진짜로 도움을 요청하고 싶진 않았지만 말이지’
웬만하면 페어리들 따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컴패니언즈 선에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한창 무전기에다 열을 내던 리리스는 자매들이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 - 그리고 이게 ‘언니의 인맥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명제에 해악이 된다는 걸 알아차리자 - 흠흠, 하고 다시 표정관리를 했다.
“페로와 포이는 둘 다 열심히 했어요”
“......”
“그리고, 포이”
리리스는 상처투성이에 지치고 찢어진 채 헉헉대는 포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페로 때문에 흘린 눈물을 보일새라 황급히 팔로 눈물을 훔치는 그녀를. 리리스 역시 페로와 마찬가지였다. 이 새로운 여동생이 미덥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오르카 함교에서 말했듯이, 자기 욕망에만 충실해 보이는 아이. 정말 이 아이가 다른 컴패니언즈와 함께 서서 주인님을 지켜드릴 수 있을까? 지난 번 사령관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고나 치는 게 아닐까? 자매들이 그녀를 믿고 등을 맡길 수 있을까?
오늘, 포이는 그것을 증명했다.
“지켜야 할 분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알다니, 포이도 훌륭한 컴패니언이에요.”
포이도 페로도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말하기엔 오늘 너무 지쳤다. 그래서 그녀들은 그냥 그녀의 동생들이 원없이 날뛰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두운 밤을 불사르며 일렁이는 붉은 불꽃을 배경으로, 하치코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펜리르가 철충들에게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페더가 그 발톱을 세우고 급강하하는 것이 보였다. 그 불길 속에서, 그 엄청난 불바다의 소용돌이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남은, 불타고 허우적대는 소수의 철충들을 청소하는데는 그녀들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리리스는 흙과 땀으로 지저분해졌지만 밝은 얼굴로 동생들에게 미소지었다.
“다들, 오늘 하루 고생 많았어요. 이제, 돌아갈 시간이에요”
< E N D >
-----
리리스와 시저스 리제의 만담 같은 이야기는 이 소설(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2892) 을 참조했습니다. 물론 원작자로부터 허락은 받았습니다.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길어지고 분량이 늘어났던 이야기가 일단 끝났습니다. 생각보다 되게 길어졌는게 끝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라오게에 그림이나 만화 올리시는 분들의 작품이 뭔가 아이디어를 준다면 그분들께 요청하고자 하는데,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뭐 제 소설 써먹으실 분은 없으시겠지만, 혹시 제 글들을 갖고 뭔가 만들거나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싶으시다면(말하자면 2차창작의 2차창작...곧 3차창작이랄까요) 언제든지 마음껏 하셔도 됩니다. 제게 알려만 주세요.
사실 저는 라오게도 콘텐츠 - 그림, 만화, 소설 등 - 를 만드시는 분들끼리 협업이나, 2차창작의 파생작이 좀 활성화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뿐만 아니리 창작자들에게는 여러분이 좋아해주시는 덧글과 추천이 큰 힘이 됩니다!
이번 주 목/금요일이나 다음 주 초에 후기를 포함한 에필로그로 찾아뵙겠습니다.
p.s: 에필로그는 대충 잔잔하고 훈훈할 겁니다(적어도 저는 그렇게 쓰려고요). 괜찮은 음악 추천 받아용
(IP보기클릭)14.36.***.***
(IP보기클릭)211.44.***.***
(IP보기클릭)14.36.***.***
(IP보기클릭)211.44.***.***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1.15 19:21 | |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11.44.***.***
그렇죠. 여러 가지로 이 사건 뒤에 얽힌 양측의 전술적 공방과 실수도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끝에 써 두었듯이 음악 추천 받아용 | 20.11.15 19:22 | |
(IP보기클릭)58.227.***.***
https://youtu.be/2OqigCz2S1w 어떤 음악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언더테일 브금 추천합니다. | 20.11.15 20:09 | |
삭제된 댓글입니다.
(IP보기클릭)211.44.***.***
용자추종자
언제나 항상 읽어주셔서 바쁜 일상 도중에도 글 쓰는 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후기도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올리겠습니다.. 후기(에필로그)에 올릴 음악도 추천 받아용 | 20.11.15 19:23 | |
(IP보기클릭)211.201.***.***
(IP보기클릭)211.44.***.***
사령관을 구하는 데에는 전 오르카가 발벗고 나서게 되지 않겠읍니까...ㅎㅎ | 20.11.16 00:15 | |
(IP보기클릭)125.176.***.***
(IP보기클릭)211.44.***.***
재밌게 읽어주셔서 저도 기쁩니다. 제 글이 또다시 동기부여를 준다는 게 더 기쁘구요. 덕분에,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재미있는 소설을 하나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1.16 23:4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