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류연방 국가선포식 당일 새벽.
“인류가 멸망했던 그 날...”
“돌아갈 곳을 잃은 우리는 며칠을 바다 위에서 표류하였다. 제법 오랫동안 말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몰라, 세어보지도 않았어. 솔직히 이제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고, 그 때는.”
“간간히 지상에 기항해서 간간히 자원 같은 것을 챙기긴 했지만, 이미 철충들이 점령한 땅 위에서는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의 식량만 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갈 곳을 잃은 우리는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지.”
“아니지, 이 경우엔 강이 아니라 바다니깐 연어라고 해야하나?”
실없는 농담을 했지만, 유진은 그녀가 애써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하여 하는 말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그녀의 두 눈가에 우수가 찬 것을, 유진은 알 수 있었다.
벗은 안대 아래로 상처 입어 옅은 붉은색 홍채를 띄고 있는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아뢰기를, 용과의 결투에서 얻은 자랑스러운 상처라며, 내 죽는 날까지 결코 치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던 그 눈동자마저도, 이토록 그리도 슬퍼보일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어쨋건, 그렇게 오랜 세월을 표류하면서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살아갈 즈음이었다. 내가 이끌던 함대는 유럽 지역으로 가려고 했었다. 그나마 철충들이 덜 모여있는 지역이었으니, 장소만 잘 솎아내면 우리가 정착할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거든.”
“유, 유럽...?”
유럽이란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압통이 느껴졌다. 순간 식은땀이 한 방울이 이마에서부터 흘렀고, 감마를 바라보던 눈동자도 갈 곳을 잃은 것 마냥 방향을 잃었다. 인류가 멸망하고 자연히 잊혀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유럽 대륙은 유진에게 있어서는 역린에 가까운 장소였다.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유진이 유럽이라는 말에 불편해하고 있음을 느낀 감마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며 말하였다.
“그건 자네 잘못이 아니었어.”
“달리 방법이 없었잖아. 우리도 그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깐.”
“... 고마워.”
“하여튼... 그래서 유럽으로 갔다고...?”
“아무리 철충이라도 해도 방사능 앞에선 무력한 것 같더군. 철충 신호가 거의 잡히질 않았으니깐. 눈 앞에 나타나는 잔챙이들야,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선에서 아직 쓰러뜨릴 수는 있을 정도였고.”
“사실... 처음에는 영국으로 가려고 했었다.”
“자네도 프리드웬에 대해선 알고 있지?”
“아, 알다마다.”
“2차 연합전쟁 때 그룬더 인더스트리랑 포세이돈 중공업에서 삼안 산업을 공격하려고 만든 스트롱홀드 전용 수송선 겸 군수지원함이잖나. 포츠머스에서 완공이 되어진 것 까지는 내 기억을 하는데...”
“... 하여튼 근데 그게 왜?
“원래 내 부관이 되려고 했던 자가 한 명이 있었어. 이름은 멀린인데, 정작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메로페 소령이 아니었단 말인가?”
“연합전쟁이 슬슬 막바지로 접어들어갈 때 내 전속 부관으로 오려다가 갑자기 프리드웬의 함장으로 인사이동을 받았거든.”
“그래서 궁금했어. 어차피 인류도 멸망한 판에, 남는 건 시간이니, 이름 들어본 것 빼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부관이 살아나 있는지, 한 번 보고나 싶었거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전속 부관이라...”
“... 만나면 뭘 하려고 했는데?”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고 있는지, 힘든 건 없는지, 인류가 멸망한 걸 알고 있는지...”
“뭐, 그런 거 이야기나 하고, 생각있으면 데려오려고 했지.”
“그런데 모로크 앞 바다를 지날 즈음이었어.”
“구조 신호를 하나 포착했지.”
“어디서?”
“몰타 섬에서.”
“쩝...”
“... 커피 하나 더 시킬까?”
“잠 못 잘걸?”
“괜찮아, 어차피 잠 다 잤어.”
들려줄 이야기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았음을 직감한 감마는, 눈 앞에 얼음만 동동 떠나디는 아이스커피 잔을 달그락 거렸고, 이내 샷을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무시할까 생각했었어. 당장 내 코가 석잔데, 누가 누굴 도와주나, 하고.”
“하지만 결국 도와주러 갔지.”
“미련한 일이었지.”
“아니지. 그건 자네 인품이지.”
“내가 아는 자네는, 현역 시절 바이오로이드 출신 군인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군참모총장이 될 거라고 해군부 제독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었어. 지휘관으로서 능력과 인품 둘 다 훌륭한 사람이라는걸 제독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소리지 않겠나?”
“구조 신호를 무시해도 됨에도 불구하고 굳이 뱃길을 돌린 건, 그건 자네라는 사람의 본성이고 품격이야. 용 조차도 자네는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라고 했으니.”
“그런가?”
“하하하~ 이거... 자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쑥쓰러운데...”
“그에 반해서 정작 자네 회장이었다는 사람은...”
“에효...”
“그 양반 이야기는 말해서 뭐하나, 입만 아프게스리...”
레모네이드 감마를 비서로 사용했던 포세이돈 중공업의 회장도, 포세이돈 중공업의 회장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미 해군의 장교이고 제독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별을 달고 제독이 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인성이며 품격이며 하나 같이 제대로 굴러가는 구석이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유진 벨리코프 제독에게 있어선 해군사관학교의 자신의 8기수 후배되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자기 손으로 직접 경질을 하여 군문에서 쫓아낸 사람이기도 하였다.
전 미 해군 함대전력사령부 해군수상함군사령관이기도 하였던, 레베티커스 콘월 해군 제독.
최종 계급은 소장(✯✯)
그 양반 개짓거리 한 거 열거하려면 참 많은데, 유달리 벨리코프 제독과 악연이 많았던 이유는, 멸망 전 벨리코프 제독의 숙원사업이었던 다크스타 프로젝트를 무산시킨 사람이 포세이돈의 회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벨리코프 제독이 미 합참의장으로 있던 시절, 미군의 차세대 전력 증강 사업인「배틀포스 2100」계획의 일부였던 다크스타 프로젝트를, 그 당시 갓 중장으로 진급하여 함대전력사령부 해군수상함군사령관으로 취임한 콘월 중장은 미 의회의 상, 하원의원들을 만나 반대 로비를 하면서 사업을 무산시켰다.
이유는, 극도의 수상함 예찬론자 겸 무인기 예찬론자인 그의 눈에, 다크스타의 개발비용은 너무나도 낭비처럼 보였다나 뭐라나.
그래, 그래도 위의 사유는 나름대로 적당히 끼워맞친 합리적인 이유라고 들 수 있겠지만, 문제는 반대를 위한 로비가 합법이 아닌 불법이었고, 그 과정에서 함대전력사령부 소속의 바이오로이드 출신 군인들을 의원들의 성접대를 위하여 보냈으며, 다크스타 사업이 무산되면서 나온 개발비용의 일부를 횡령하려고 했던 사실이 들어났다. 포세이돈 회장, 그러니깐 레베티커스 콘월 중장은 그렇게 자신의 최상급 상관인 러셀 유진 벨리코프 해군 대장에 의해 경질/해임되었고, 인사법에 따라 중장 이상부터 3년 이상 복무를 하지 않았기에 소장으로 강등되어 퇴역하였다.
그렇게 소장으로 강등당하여 군문을 나온 콘월 제독은, 얼마 안가서 펙소 콘소시엄 그룹 산하의 해군 방산업체인 포세이돈의 회장이 되었다.
애시당초 콘월 제독과 벨리코프 제독은 다크스타 사업 외에도 크고 작은 마찰이 많았기에 여러모로 사이가 껄끄러웠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하여튼 몰타 섬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지브롤터를 지나 지중해에 들어서 몰타섬에 도착하니, 날 반기는 건 몰타 섬을 향해 포격을 날리는 또 다른 함대였다. 그리고 그 구조 신호를 보낸게...”
“... 지금의 내 부관인 메로페 소령이다.”
“메로페를 만난 건 그 날이 처음이었고, 애초에 그녀는 원래 군인이 아니었어. 삼안이 가디언 시리즈로 만들어낸 플레이아데스의 일곱 자매들 중 막내였지.”
“플레이아데... 뭐라고?”
“있어. 삼안이 만들어낸 가디언 시리즈로 나오려 했던 경호원들. 나도 처음 들어본 거라서 솔직히 말해서 잘 몰라.”
“하여튼 몰타섬에 있는 아틀라스인가 뭔가 하는 삼안의 장비를 지키기 위해 멸망 직전에 급하게 파견된 거라고 하는데, 내 그런 기업의 자세한 내막까지는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겠어. 하여튼 눈에 떡하니 함대 단위 부대 하나가 섬을 향해 통째로 포격을 날리고 있었고, 우리는 곧장 그 함대의 정체를 알곤 곧 바로 교전에 들어갔지.”
“누구였는데?”
“레모네이드 델타.”
“델타라고?”
그 순간 주문했던 커피가 나오고, 커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인 감마는 재차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가기 전부터 델타는 수시로 몰타 섬을 습격했었고, 그 곳 주민들은 매번 델타의 병력과 크고 작은 싸움을 벌였었지. 그래도 자기네들끼리 어찌저찌 델타의 병력을 잘 막아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델타가 그 섬에 살고 사람들에게 교섭을 요청한거야. 평화협상을 하자면서.”
“메로페는 자기를 비롯한 자기 언니와 함께 델타의 함에 승선했고, 그 순간 델타의 함대는 몰타섬에 일제히 포격을 날렸다. 그 뿐만 아니라, 애초에 메로페와 자기 언니랑 함께 승선했던 델타의 함선에는, 처음부터 델타가 승선해있지 않았어.”
“?!?!?”
“다 함정이었지. 델타의 함대가 몰타 섬을 향해 포격을 날리는 동안, 델타는 그 메로페가 승선한 기함에도 폭발시켰어.”
“다행이 메로페는 부상을 입은 채로도 어찌저찌해서 함선을 탈출했는데, 불행이도 그 자리에서 제 언니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함선과 함께 폭사당하고 말았다.”
“델타의 기함에서 하나 남은 비상용 구명정을 타고 탈출했던 메로페는 구명정에 있던 통신장비를 건드려서 구조 신호를 보냈고, 그게 운 좋게 그 근방을 지나가던 우리의 함대까지 닿았던 거다. 난 그 곳에서 메로페를 구해줬고, 델타의 함대를 격퇴시켰지만, 몰타 섬도, 그리고 우리 함대도 만만찮은 피해를 입었지.”
“사망자가 너무 많았어.”
“...”
후룩-.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감마도 이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착잡한 듯 하였다.
하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델타의 함대를 격퇴했지만, 피해도 만만찮았던데다가 자매 한 명까지 잃었던 탓에 메로페의 다른 언니들은 델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녀석을 암살하기 위해서 잠시 섬을 떠났었다.”
“난 당연히 만류했지, 너무 무모한 짓이라고.”
“하지만 자신들을 속인 걸로도 모자라, 자매를 죽이고 몰타 섬을 공격하려고 했던 델타를 용서할 수 없었고, 결국 플레이아데스의 자매들은 델타를 암살하기 위해 파리까지 갔다.”
“정확히는 메로페랑...”
“... 언니들 중 한 명인 알키오네만 빼고 말이야.”
플레이아데스의 자매들 중 부상을 입은 메로페를 제외하면, 알키오네는 만일의 있을 상황에 대비해서 몰타 섬에 남아 남은 민간인들을 감마의 함대와 함께 지키겠다고 하였고, 그렇게 나머지 자매들은 델타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몰타 섬을 떠났다. 그러나 델타의 본진인 파리로 출발한 지 거의 두 달이 가깝게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알키오네는 델타를 암살하러 간 자매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며 그녀도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먼저 파리로 출발했던 자매들을 구하기 위해 떠난 알키오네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재차 두 달 뒤였다. 혈흔자욱이 가득한 다섯 개의 범고래 꼬리, 그리고 알키오네는 겨우 사람 한 명 탈 수 있는 작디작은 뗏목에, 마치 곤충 표본처럼 손발에 못에 박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채로 지중해의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던 것을, 낚시를 나갔던 몰타 섬 주민이 발견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천운이 따로 없었다. 만약 그 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알키오네는 영영 뗏목에 몸이 묶인 채로 망망대해를 표류하다가 고통 속에서 굶어 죽어갔을테니깐.
돌아온 알키오네는 도무지 제정신이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매들을 자기가 죽였다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정신붕괴 증상을 보이던 그녀는, 메로페와 감마는 그 당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치료를 하였다.
“아까 내가 몰타 섬에 삼안이 만든 아틀라스인가 뭔가 하는 기계 장치가 있다고 했잖나.”
“어, 그랬지.”
“그게 아무래도 마키나 교수님의 그 낙원이랑 좀 비슷한 장치인 것 같더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플레이아데스의 자매들이 지키고 있던 아틀라스라는 장치. 메로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람의 꿈을 조작해서 정신병적 증상을 치료하는 장치라더군. 삼안이 개발하였고, 철충이 침공했을 때 이를 지키기 위해서 가디언 시리즈로 발매 직전에 있었던 그 일곱 자매들을 몰타 섬으로 보낸 거였어.”
“하여튼 나와 메로페는 알키오네를 아틀라스에 넣었고 치료가 되기를 바랐지만...”
“... 도대체 거기서 뭘 보고 온 것인지, 또 어떻게 해야지 델타에게 그렇게 당해서 온 것인지 몰라도,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더군.”
“설마...?”
“맞아...”
“... 아직도 몰타 섬에 잠들어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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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중 삽화로 사용되는 그림과 사진의 출처는 구글링과 핀터레스트입니다.
드디어, 제3차 연합전쟁, 제4차 세계대전의 시작입니다. 최근에 헬다이버즈2를 사서 게임 플레이하는 중인데, 메인 테마가 좋더라구요. 헬다이버즈2 메인테마 틀어놓고 썼습니다 허헣.
그리고 저희 세계관의 레모네이드들은, 연합전쟁 한참 전에 보르비예프 박사의 친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알파, 베타, 감마. 이렇게 세 명과, 그 후에 펙스에 의해 태어난 델타, 엡실론, 제타, 오메가로 나뉘어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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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3.17 19: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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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3.17 22:5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