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도 집에 안 계시는데
아버지, 날이 너무 가무네요 집에는 어머니도 안 계시
는데 물새가 들깨밭 가에 앉아 울고 강물은 우리 집 마
당에서 너무 멀어졌습니다 마른 잔디 끝, 배배 꼬인 마늘
속잎, 속 없는 봄배추, 현수네 텃밭 콩 새순 잘라 먹는 고
라니, 피다가 만 흥수네 하지감자꽃 닷새, 호박 넝쿨은 기
다가 말고, 마른 거미줄, 돋아난 해바라기 싹은 쓰고 나
온 씨껍질도 안 벗네요 강물 쪽으로 휘어진 당숙모 허리.
바짝 마른 손의 방향, 날이 왜 이런다냐 비 오기는 진즉
글렀다 푸석거리는 하늘 봐라 안 울던 새 우네 물고기들
은 어제보다 더 높이 뛰어오른다 어디, 비야 얼굴 좀 보
자 아버지, 가문 날 마른 비가 뿌리고 지나가면 풀썩거리
는 먼지를 뒤집어쓴 빗방울들을 보며 아이고, 간에 기별
도 안 갔다고, 먼지도 재우지 못했다고 근심 어린 구름을
보며 어머니께 말씀하셨잖아요 적어도 간에 기별이 가야
말이 되고 그 말이 입으로 나와 싹이 되지요 천둥소리가
비를 몰고 산을 넘어올 줄 알았는데, 비냄새만 넘어왔네
요 어머니도 집에 안 계시는데 어머니는 빗낯 든다며 장
독을 덮고 밭에 나가셨지요 그러면 비가 와서 열무김치
간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좀체로 비가 얼굴을 안 드네요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어디다가 얼굴을 숨겨두었는
지, 당분간 비 소식은 없대요 내 말끝이 강을 향해 이리
간절하게 타들어갈 때가 없었어요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김용택, 문학과지성 시인선 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