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집 뒤에는 달과 밤이 한집에 산다
1
딸에게 올해 쓴
시들을 정리해 보냈다
문자가 왔다
“아빠 시 좋다
제목을 ‘꿈을 생시로 잇다’
이걸로 하면 좋겠다
‘일어설 수 있는 길’ 이 시 좋다
약간 혼잣말이 많은 것 같아
아빠에게 머물러 있고
아직 ‘여기까지’ 안 온 것 같은
그런 느낌도 있어요“
‘여기까지 안 온 것’ 같다는 말 중에 ‘여기’를 한 손에
‘까지’를 저 손에 들고 강으로 갔다
무슨 말인지 안다
날아가는 새에게 수긍하여주었다
오지 않았으니,
아직 하늘은 맑다
2
대천 가는 길 오른쪽 마을에 가을이다 쓸데없는 욕심
을 산 뒤에 묻어둔 그만그만한 지붕들이 마을 하나로 잠
잠하다 마을을 품에 다 안은 뒷산이 제일이고, 자기 몸을
논과 밭으로 내어주고 저만큼 멀리 마을을 나가 나지막
하게 앉아 있는 앞산도 제일이다 집과 집 사이 중간중간
누구네 집 감 달린 감나무가 제일이고, 이런저런 존대 없
이 정든 집들의 높이와 크기와 간격이 제일이다 논밭을
나와 마을 앞길로 모인 길들을 나누어 집 안으로 들어간
길 하나가 물 마시고 마루 끝에 앉아 쉬다가 다시 논과
밭으로 길을 따라 들어갔다 누가 이고 가다가 넘어졌는
지 노란 물감이 높은 논에서 낮은 논으로 흘러 논마다 공
평하다 세상에 무슨 일로 저렇게 마을이 일일이 하나하
나가 다 가을이란 말인가 가을이란 말은 누가 지은 말인
가 해와 달과 바람이 머물고, 개구리와 비가 그곳으로 뛰
어갔다 필시 지금 나는 꿈길을 가고 있다 생을 탓하랴 꿈
인들 아쉬우랴 산그늘을 따라 산을 넘어 마을 안길로 간
신히 내려온 묵은 길 하나가 누구네 집 대문간에 서서 뒤
란 감나무를 보고 있다
3
올 때는,
저쪽이 서쪽이구나
마을을 걸어 나온 몇 개의 길이
바람만 바람만 바람을 따라 굽이굽이 모여들어 한길로
바다에 이르렀다
생각이 있어서, 차마 버릴 수 없는 생각들이 가슴까지
차올라서
그 말을 하려고 누구든, 그 누구도
바다로 나간 길까지 출렁출렁 생각을 채워 걸었을 것
이다
우리나라 서쪽 바다 순한 파도가 철썩이며 들어왔다
뒷걸음질로 차르르 자갈 굴려 나가는 바닷가에는, 누
가 앉아 있다
4
집에 왔다
내가 사는 집 뒤에는
깊은 밤이 달과 한집에 산다
겨울이 살다가 봄으로 나온다
내 집은 돌 많은
산 밑에 있다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김용택, 문학과지성 시인선 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