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설 수 있는 길
오래된 길들은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꿈꾸는 모습
아버지와 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디뎠던 발자국이
햇살 속 바위에 벽화처럼 짐의 무게로 희게 남아 있다
돌들은 자국을 쉽게 지우지 않는다
아버지의 길은 나의 현실이 되어간다
홀로 걷는 산길, 아버지의 외로운 발걸음은 지금 보아
도 외수가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다니는 족제비와 바위 구 ㄹ속
다람쥐
낙엽이 쌓여 썩은 바위틈이나 나무 밑동, 바람이 지나
가고
햇살이 들었다가 금세 사라지고, 빗물이 고였다가 마
르고,
눈이 쌓여 있다가 녹던 곳
마른 나뭇잎 뒤 축축한 곳이 발 많은 곤충들의 집이다
새들이 날아가는 나뭇가지 사이,
별들이 바스락거리며 지나다니는 그곳
내가 꿈을 꾸는 곳, 보행자의 길
거센 바람이 휘어졌다가 일어서는
힘으로 이기고 선 눈 매운 나뭇가지들처럼
눈을 씻고 다음 발길을 옮긴다
잊은 다음을 잊어야 다음이다
토끼와 노루와 수꿩이 앞서 지나간 길
보폭이 보인다
쓰러진 풀잎을 뛰어넘고 어린나무를 비켜 돌아간 긍정
의 길
나뭇가지에 얹혔다가 자유를 누리며 다시 떨어지는 수
긍의 눈송이들, 그것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내가 꿈꾸는 모습
다람쥐가 바위를 딛고 다음 바위를 딛는 믿음
작은 벌레들이 마른 참나무 잎을 넘어가는 소리
돌들이 없다면 어둠은 어디서 오고
물고기들은 어디다가 정든 집을 지을까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간다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김용택, 문학과지성 시인선 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