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 문화, 동인 활동이라고 하면 개인 일러스트나 유명 작품의 패러디, 코스프레 등에 열광하는 (주1)오타쿠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80년대의 게임 시장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러한 문화가 존재 했는지 알아보고, 나아가 PC 잡지 등에 게임 분석 기사가 실리게 된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었던 시대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은 MSX에 있어 황금기이면서 황혼기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매니아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컴퓨터학습이라던지, MSX와의 만남과 같은 전문 잡지의 등장은 각지의 학원가, 대리점 등을 중심으로 점조직화되어 있던 커뮤니티를 일거에 전국 규모의 네트워크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전문 잡지들의 막 단에 보면 하나같이 중고 장터에서 시작해 단체, 동호회 등의 결성을 알리는 광고가 빼곡히 들어차곤 했는데 이 동호회, 클럽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어서, 지금처럼 인터넷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광고를 낸 사람에게 전화를 해 각자의 주소를 알려주고 정기적으로 오프 모임을 가진다는 것이다. 통신 시설 및 인프라가 지금에 비해 백 분의 일 수준도 안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만큼 당시 MSX에 열광했던 유저들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나 역시 이러한 유저 중의 한 사람이었고, 어느 날 우연히 컴퓨터학습을 읽던 중 발견한 동호회 회원 모집 광고를 보고 여의도에 있는 MSX클럽이라는 동호회에 가입을 했다. 처음 찾아갔을 때의 광경이 아직도 생생한데, 광고를 낸 동호회 시삽이 알려준 주소대로 찾아간 아파트 안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유저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광고를 냈던 시삽도 단지 광고 한 줄 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줄은 몰랐다며 여간 당황하는 눈치가 아니었던 것. 비록 광고 한 줄이었지만 같은 생각, 같은 코드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들 온갖 수고를 마다 않고 모인 것이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나마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고 MSX에 대한 여러 화젯거리를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에 가서는 한결같이 정부의 일방적인 8비트 제외 정책에 대한 볼멘소리도 빠지지 않았고……. 그렇게 서로 상견례를 마치게 되면 일주에 한번 또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오프를 가진다. 그리고 서로의 소프트웨어를 교환하거나 정보를 교환하는 일 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 불법 복제 소프트를 공유하고자 하는 단체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단지 불법 복제를 목적으로 한 것만은 아니었다.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회원 중에는 서로 의기투합해서 간단한 게임 프로그램을 만들어 본다거나, 그래픽 작품을 만드는 등의 아마추어 창작 활동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지금의 게임 개발사 중 전통 있는 회사들의 이력을 살펴 보면 앞서 소개한 것 같은 커뮤니티 활동에서 출발한 기업이 많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활동하고 있던 MSX클럽이란 동호회에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게 되는데…….
MSX 게임도 실어 주세요 클럽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는 놀랍게도 한국일보사에서 온 것이었다. 한국일보에서 매월 발간하는 (주4)학생과학이란 월간지에 전국 각지의 PC 클럽 등을 소개하려고 하니 짤막한 소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간단히 클럽의 소개문을 보내주자 다음달에 클럽 소개가 실린 책을 보내 줘서 읽게 되었는데 부록에 16 비트 PC 게임의 분석 코너가 있는 것이었다. 왠지 16비트 게임만 다루고 있다는 것이 섭섭해서 다짜고짜로 한국일보사에 전화를 했다. 담당기자에게 MSX 같은 것은 왜 다루지 않느냐고 묻자 그가 되묻는 것이었다. “MSX가 뭐지?” 그는 한참 내 설명을 듣더니 한번 회사로 올 수 있겠느냐고 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3일 밤을 새워서 200자 원고지 100여 장에 [스페이스 맨보우]라는 MSX 게임의 분석을 써가지고 한국일보사에 찾아갔다.
한국 일보사의 편집실은 굉장히 너저분하면서도 활기가 넘치던 곳으로 기억한다. 마감에 쫓겨 원고가 책상 여기저기 널린 풍경하며, 사방에서 전화 벨이 울리는…… 비록 지금은 (주5)DTP 프로세스의 발전과 페이퍼 매체의 퇴보로 인해 볼 수 없게 된 풍경이지만…. 기자는 한 장씩 내 원고를 넘겨 보더니 마지막에 원고 뭉치를 손으로 탁 치면서 매우 재미있을 것 같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바로 페이지를 신설하고 싶은데 그러자면 게임 화면을 찍어야 하니 집에 가서 찍어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내가 쓴 글이 전국 규모의 월간지에 나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알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나는 듯이 돌아왔다.
다음날 담당기자와 사진기자 한 명이 같이 집으로 왔고, 신문기자가 집으로 왔다는 말에 놀라는 가족들을 진정시키며 방안에서 불을 끄고 게임 화면 찍는 일에 돌입했다. (-_-) [스페이스 맨보우]라는 게임은 코나미가 MSX 마지막 슈팅 게임으로 내놓은 타이틀이다. [그라디우스] 시리즈에 비해 두 배 이상 커진 용량과 MSX2의 슈팅 게임으로서는 예외적으로 종횡, 대각선 스크롤이 복잡하게 전개되는 스테이지를 채용하고 있었던 탓에 볼륨이 굉장히 높았다. 당연히 플레이 시간도 길어지기 마련…… 5시간째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사진 기자가 불평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김기자 이 딴 게임, 그 화면이 그 화면 같은데 대충 찍고 (주6)시마이 합시다” “조용히 해요. 지금이 마지막 과정이니까” 담당기자는 내가 열심히 플레이 하는 모습에 감명이라도 받았는지 사진기자의 말을 일축하고 모니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지 7시간째가 돼서야 사진 찍는 일이 다 끝났다.
사진기자가 투덜거리며 분주히 사진장비를 챙기는데, 그제서야 얼떨떨한 느낌으로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1시가 된 것을 보고 왠지 미안해져서 담당기자에게 이야기했다. “죄송해요. 이거 (주7)디버그 모드도 없고…… 워낙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게임이라 오래 걸렸어요” “아니다, 니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 해도 재미있던걸? 이 친구는 지루했는지 몰라도" 그러면서 사진기자를 바라보며 웃는 것이었다. 삐죽거리며 장비를 챙겨 나가는 사진기자를 따라나서며 담당기자가 내게 말했다. “다음달에도 써 줄 수 있겠지?” “물론이죠. 시켜만 주시면……” 그렇게 해서 게임에 대한 글을 언론 매체에 싣는 일이 시작된 것이었다.
[스페이스 맨보우]로 (주8)데스크에서 인정을 받아서인지 다음달에도 또, 분석을 쓰게 되었다. 학생과학의 편집부장한테도 정기적으로 좋은 글 기대할 테니 재미있게 써달라고 부탁하는 말을 듣고는 용기백배해서 이번에는 클럽의 다른 회원들과 시삽까지 끌어들여, 여러 명이 역할을 분담해서 써보자고 했다. 먼저 사진 찍는 타이밍을 직접 잡고 싶어서 담당기자에게 사진을 직접 찍어 주겠다고 하자, 담당기자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그 사진 찍는 일이 쉽지 않아, 전문가한테 맡겨도 되는데 왜 직접 하려고?” “그게…… 아무튼 번거롭지 않게 게 해드릴 수 있으니 맡겨주세요”
사진을 직접 찍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옆자리의 사진기자가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봤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할 순 없었지만 이전에 사진 찍을 때 그 사진기자가 보였던 태도가 못 미더워서 그랬던 것이었다. 솔직히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른 타이밍으로 찍고 싶은 장면도 많았지만 사진기자가 워낙 투덜거리는 통에 본의 아니게 그냥 지나간 샷이 많았고, 나중에 책으로 나왔을 때 사진들을 보면서 후회하던 끝에 클럽 내부의 다른 회원에게 고가의 사진 장비를 빌리기로 약속하고 그렇게 말을 한 것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생각했던 대로 책에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고 생각이 들자 밤에 잠이 안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로 분석한 것이 (주9)[테그쟈-2 파이어 호크] 라는 게임이었다. 이 게임은 게임아츠사에서 MSX 마지막 타이틀로 만든 게임이었고, 전편에 비해 용량도 늘어나고 스토리도 꽤나 강조 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대사를 번역해서 실을 각오를 했다. 방을 암실처럼 만들기 위해 암막 커튼을 치고 밀폐시키는 바람에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열기가 있었지만 작업에 참여한 회원 모두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원래 설정했던 위치에서 대사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스페이스 맨보우]와 마찬가지로 디버그 모드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컨티뉴를 수십 번이나 반복하면서 진행한 끝에 오전 10시에 시작한 일은 오후 5시가 돼서야 끝났다. 모든 필름을 챙기며 같이 참여했던 사람들 모두가 서로의 땀에 젖은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웃어댔고, 그것이 생애 처음으로 여러 사람들과 협력하여 하나의 목표를 성취했을 때 얻는 쾌감이었다는 사실은 몇 년 뒤에 알게 된다. 총 100여 장 이상 나온 사진을 아무 생각 없이 들고 가서 학생과학 편집실에 내밀자, 담당기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이거…… 직접 다 찍은 거야?” “예,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찍어 올 수도 있어요” 담당기자는 난처한 표정을 하며 사진을 한 장씩 살피기 시작했다. 담당기자의 표정이 애매했기 때문에 걱정이 돼서 물었다. “이상한 부분이 있나요?” “그게…… 사진은 굉장히 잘 찍었어…… 포커스도 맞고 사이즈도 적당하고…… 컬러도 무난한데……” “그럼요?” 담당기자는 사진들을 모두 쓸어서 봉투에 담더니 말을 꺼냈다. “이전에 내가 페이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안 했나 보구나, 우리가 할당받은 페이지는 6페이지야. 즉, 그 안에서 일을 끝내야 한다는 이야기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확실히 분석을 잘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잡지에서 지면의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6페이지에 들어갈 원고도 빠듯한데 사진을 아무리 작게 해서 넣어봐야…… 채 20장도…… 안 들어갈 거라 생각하니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풀이 죽은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담당기자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기왕 잘 찍었으니까 말이야…… 내가 부장님한테 이야기해서 지면을 좀 늘려보마” “정말요?” “그럼, 나만 믿고 집에 가서 기다려, 그 대신 많이 빠지는 건 이해해야 된다?”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고, 보름 뒤에 [테그쟈-2 파이어 호크]의 분석이 들어간 책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지면은 10페이지로 늘어나 있었고 최대한 레이아웃을 변경해서 많은 사진이 수록되어 있던 걸 보고 뛸 듯이 기뻐한 기억이 난다.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었던 시대. 그렇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기 위해서 그 시대의 많은 다른 아이들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갔을 것이다.
지난 2003년 6월 27일은 MSX 규격이 세상에 발표된 지 정확히 20주년 되는 날이었다. 미국 마이크로 소프트와 일본 아스키가 공동으로 제창한 8비트 PC의 통일규격 MSX가 마쯔시타, 소니 등 다수의 메이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며 발표를 눈앞에 두고 있을 무렵, 마찬가지로, 손 마사요시씨가 이끄는 일본 소프트 뱅크가 디지털 리서치 등과 협력하여 독자 규격의 PC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 진영이 각각의 규격을 발표하기로 했던 1983년 6월 27일, 손 마사요시씨는 "우리도 MSX를 지지한다" 라는 뜻밖의 발표를 한다. 기자회견이 있던 전날, 양측이 회담을 열어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로써 MSX에 의한 규격 일원화가 확정되었던 것이다.
주1 : 특정 유형의 문화 장르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주2 : 1988년에 헤르츠에서 MSX2용으로 발매한 횡스크롤 액션 게임. MSX2의 화면 표시위치 조정 기능을 8도트 스크롤 기능과 접목하여 하드웨어 스펙을 뛰어 넘는 부드러운 스크롤을 구현한 게임이었다. 이후 이러한 테크닉은 헤르츠의 하이디포스에도 그대로 이어지며 개발진의 일부가 코나미로 이적함에 따라 코나미의 격돌 페넌트레이스2, 스페이스 맨보우 등에서도 쓰여지게 되었다. 주3 : 1989년 T&E 소프트가 발매한 MSX용 그래픽 툴. DD구락부라는 이름은 DOT DESIGNER\'S CLUB의 약자로 실제 T&E 소프트 내에서 도트 그래픽을 만들 때 사용된 개발 툴을 보강해서 제품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주4 : 1965년에 창간 되었으며 1984년에 한국일보사에 인수 되어 1995년까지 발간 되었다. 소년중앙이나 새소년 등과 달리 과학에 대한 정보를 많이 싣는다는 모토로 출발하여, 개인용 PC붐이 일었던 1980년대 후반부터 정기 부록으로 16비트 PC 게임과 MSX게임을 수록하였다. 주5 : Desktop publishing의 약자. 개인용 컴퓨터나 워크스테이션을 이용한 출판물의 입력, 편집, 인쇄 등의 전 과정을 컴퓨터화 한 전자 편집 인쇄 시스템. 주6 : 하던 일을 종료한다는 뜻의 일본어. DTP가 활성화되기 이전의 한국 출판계는 인쇄소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작업 용어를 그대로 실무에서 쓰는 경우가 많았고, 기자 간에도 업무적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일본식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주7 : 게임 프로그램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 내어 버그를 리포팅 하는 일. 프로그래머가 지정한 단축키를 이용해 게임을 손쉽게 플레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패미컴통신 등에서는 개발사의 협조를 얻어 사용하거나 했었다고. 주8 : 취재부의 총책임자. 취재부장이나 편집장이 역할을 담당한다. 주9 : 1989년에 MSX2용으로 발매 된 디스크 전용 게임. FM팩 대응으로 오프닝에서 흐르는 베토벤의 월광이 인상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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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ETC] 한국 게임시장의 흥망사(6)-동호회 문화에서 잡지 분석기사까지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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