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사고 싶어요.”
멍하니 술을 마시다 눈앞에서 힘겹게 숨을 내쉬듯 말하는 새하얀 소녀의 말에 나는 술잔을 입안으로 털려다 행동을 멈춘다. 이상하다. 병약한 그녀인지라 일부러 무도수의 술만 마시게 했는데 설마 아주 소량의 알코올이 병약한 그녀의 몸을 만나 고도수의 보드카로 탈바꿈한 것인가!
그럴 리가 없지.
진정해라 나. 이 소녀와는 만난 지 이제 겨우 몇 달 정도이지만 리베롤이 장난을 친다거나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알지 않은가? 생각하자. 오랜 지휘관의 경험을 살려서 대응하는 거다. 나는 눈앞의 새하얀 소녀에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리베롤. 아프면 쉬고 싶다고 말했어야지.”
“...지휘관. 저 아직 멀쩡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놈의 경험이여. 살짝 삐진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하는 리베롤의 모습에 나는 앞으로는 지휘관의 경험 따위는 전투 이외에는 써먹지 말자며 다짐하며 잔에 든 싸구려 소주를 비웠다. 매케한 알코올 향이 가슴속 깊이 퍼져나갔다.
“미안하다. 리베롤. 하지만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니....”
“..죄송해요. 너무 뜬금없었죠?”
“아냐! 내가 취기가 올라오다 보니 머리 회전이 잘 안돼서 그래. 알잖아? 나 단순한 거? 나 자주 실수... 앗!”
“...후후.”
오버하듯 그녀에게 반응하다 옆에 벽에 손가락을 부딪치고 말았다. 흑흑, 예쁘게 자랐던 흰색 손톱 부분이 깨지고 말았어. 나는 조심히 테이블에 손톱을 비벼대며 최대한 매끄럽게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고 그런 내 모습에 리베롤이 입을 가리고 조그맣게 웃었다. 다행히 아까 삐진 건 풀린 모양이다.
“그런데 여름을 사고 싶다.... 라는 건 무슨 의미야? 여름을 좋아했었니?”
“아니오. 선호하는 편은 아니에요. 여름에는 빈혈로 하루 종일 부대 안에서 기절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아. 오늘따라 지뢰밭만 밟아대는구나. 어째 이야기 주제를 잡을 때마다 지뢰를 찾아내는 거지? 나는 지휘관 생활을 관두고 앞으로 인형들의 안전한 전투를 위해 지뢰를 제거하는 지뢰 제거 반으로 활약해볼까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새로운 소주병을 들어 그의 머리를 삭발해주었다.
“그럼 여름을 사고 싶다는 건 무슨 의미야?”
“여름을 사면 가을이 오잖아요? 그런 의미에서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의미를 이해하였다. 그렇지. 봄여름 가을 겨울에서 여름이 빠지면 바로 가을이구나. 나는 조금 머리가 차가워지는 게 느껴져 서둘러 빈 술잔에 소주를 채웠다.
“가을이면 네가 여기 지원을 끝내고 돌아가는 시기구나.”
“네. 가을에 제 지휘관이 데려온다고 했으니까요.”
리베롤의 말에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그녀는 다른 부대의 지휘관이 군수 요청으로 보내준 인형이다. 이번 가을까지 그녀는 우리 부대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니 약속인 가을이 되면 본래의 부대로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다.
“....얼른 부대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아니오. 그건 아니에요.”
아아, 힘없이 말하는 리베롤의 모습이 왠지 측은하면서도 가슴을 끓게 하였다. 괜히 내 눈치를 보고는 저런 말을 하는 거다. 본심은 본래 부대로 가고 싶은걸 거다.
“아냐. 네 입장에서 보면 본래의 부대가 나을 거야. 우리 부대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으니까.”
“......”
비아냥대는 듯한 내 말에 리베롤이 입을 다문다. 제길! 아무래도 너무 술을 급하게 들이붓다 보니 취기가 돈 모양이다.
“..미안해. 여기는 내가 정리할 테니 들어가서 쉴래? 몸도 약하니까....”
“바깥.”
“네?”
짧게 답하는 리베롤의 말을 이해 못하고 멍청하게 되묻자 리베롤이 무표정하게 손가락을 위로 들어올린다.
“위에서 마저 마셔요.”
화난...걸까? 하지만 내가 그녀의 표정을 마저 읽어내기 전에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혈액 팩을 챙겨 지휘실을 빠져 나갔고 나는 허겁지겁 안주용 마른 오징어와 남은 술병 하나를 챙겨 그녀 뒤를 따라 나섰다.
이윽고 우리는 옥상을 도착하였다.
“언제 봐도 여기 밤하늘은 예쁜 것 같아요.”
리베롤의 감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방에 위치한 우리 부대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가 바로 도시 근처에서는 볼 수 없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밤하늘일 것이다. 밤하늘을 수놓는 반짝이는 비단이 밤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네 부대는 도시에 있었지?”
“네. 거긴 여기만큼 밤하늘이 밝지 못해요. 그래도 거기 밤하늘도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이곳만큼은 아니에요.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야기 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웃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 역시 별을 담아 반짝였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리베롤 너는 여름을 사기보다는 밤하늘을 사야 하지 않을까 싶네.”
“아뇨. 산다면 역시 여름이에요. 그래야 가을이 올 테니까요.”
이 대답만큼은 확고하구나. 나는 이번만큼은 실수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까지 본부로.... 가을을 기다리는 이유가 뭐야? 본대에 중요한 문제가 있는 거야?”
“없어요. 있다고 해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겠죠.”
그럴 테지. 그녀가 만약 현역 소대에서 활동하는 인형이었다면 굳이 몇 달이라는 긴 시간이나 군수로 보내질 리가 없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고장 난 인형이다. 쉴 새 없이 쓰러지기 바쁘니 자연스레 전선에서도 이탈되기 십상일 것이다. 전투에 도움 되라고 만들었더니 쓰러지기 바쁜 인형을 누가 쓰겠는가?
‘그러니 몇 달이나 군수 보내고선 연락 한번 안 오는 거겠지 망할.’
그녀를 이곳으로 보낸 후 그 흔한 전화 연락 한 번 안 오는 리베롤의 지휘관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부관은 시도 때도 없이 잊지 않고 바꾸면서 군수 보낸 인형한테 안부 하나 물어보는 건 왜 깜빡하는 걸까?
그리고 리베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힘없이 말하였다.
“전 고장 난 인형이니까요.... 전투에도 큰 도움을 주지 못해요. 전투에 힘을 쓰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피곤한 지휘관의 힘낼 수 있도록 보조라도 해야 하지만 저는 수시로 쓰러져서 도리어 지휘관이 저를 돌봐야 해요. 저는 제 몸 하나 건지기 힘든 몸이에요. 지휘관이 절 멀리 한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아, 웃기지 마쇼.”
내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하였다.
“아픈 게 네 탓이야? 왜 아픈 것도 서러운 애한테 건강하지 못하다고 지랄들이야. 아픈 게 만만해? 손가락 살짝 베여도 발정난 것처럼 약이랑 민간요법으로 침까지 발라대는 인간들이 꼭 남이 아프면 아주 그냥 무통증 환자마냥 이겨내라고 지랄들이야.”
“지휘관?”
“아! 그래. 말 나온 김에 네 지휘관도 그래. 수시로 부관은 철통같이 바꿔대면서 너한테 연락 안하는 이유는 뭔데? 장난해? 꼭 보면 죄다 젖탱이 큰 아이들만 모아놨더라. 아주 시발 남자의 수치야 그 자식은! 가슴이 그리도 좋냐! 그 젖탱이 큰 인형들 정보 모을 시간에 네 안부나.... 물.....”
나는 흥분해서 말하다 리베롤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말을 끊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이상하네? 내가 혹시 뭔가 웃긴 말이라도 했던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한 그녀의 웃음에 내가 술기운과 혼란이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조금은 진정할 수 있었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져온 술을 잔에 따랐다.
“그럼 아무런 할 일도 없는 본대에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야? 쉬고 싶은 거야?”
“아뇨. 일단 돌아가면 곧바로 부대를 나올 생각이에요.”
너무나 담담히 이야기해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 기절할 듯 놀라서 그만 마시던 술을 입에서 뿜어내고 말았다. 나는 멍하니 리베롤을 보았다.
“부대를 그만둔다고?”
“네. 여기서 군수 활동을 하면서 오랫동안 생각했던 거예요.”
오, 하나님 맙소사! 그 말은 즉슨 퇴역을 한다는 뜻이잖아! 나는 침착하게 리베롤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야해. 리베롤.”
“이미 오래 생각을 했어요.”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직 성급하기는 일러. 넌 아직 그 의미를 모르는 것 같아. 그리폰의 전술 인형을 그만두게 되면 모든 지원이 끊기게 된다는 뜻이야. 가뜩이나 몸도 약한데 혼자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지휘관.....”
“응? 다시 한 번 생각해봐. 그래도 있을 곳이 있던 네 부대가 바깥보다는 나을 거야.”
“제가 있던 부대에는 제가 있을 곳은 없어요. 지휘관.”
“리베롤.”
“인간의 기준은 모르겠지만 저는 적어도 돌아가도 있는지 없는지 알아주는 이 없는 곳을 '있을 곳'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술 때문에 입안이 텁텁하고 화끈거린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리베롤...”
“줄곧 가을을 기다려 왔어요.”
내 말을 끊으며 리베롤이 밤하늘을 보며 말하였다.
“언제나 여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언젠가 선선한 가을날이 되면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열매가 자라 맺혀 생명이 충만한 가을이 되면, 그런 시기가 오면 저 역시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언제나 무더운 여름이었어요. 무관심한 열과 빛 때문에 메말라갈 뿐이었어요. 그래도 언젠가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았어요."
제가 움직이지 않으면 이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고. 리베롤이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그래. 리베롤은 여름의 햇빛에 지친것이다. 물론 여름의 햇빛은 식물들에게 많은 에너지를 주니 좋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밑에 몇날 며칠이고 있게 된다면 분명 메마를 테지.
그러니 리베롤은 스스로 떠나기로 결심할 것이리라. 그것까지 알게 되자 더 이상 그녀를 막을 명분이 없었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그래. 네 의지가 확고하다면야 어쩔 수 없지. 혹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이야기 해주겠니?”
“도울 일인가요?”
“맞아. 그래도 너보다 내가 사회생활을 먼저 경험했잖니? 민간 생활은 이곳 부대하고는 많이 다르니까 말이야. 퇴역하게 되면 하고 싶은 거 생각해 두었니?”
그런 나의 말에 리베롤이 잠시 턱에 손을 얹고는 곰곰이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퇴역하고 나서는 모르겠지만.... 일단 부대에서 나오게 되면 하고 싶던 건 있어요.”
“오! 뭔가 생각해 둔 게 있었나 보네? 뭔지 알려줄 수 있어?”
내 물음에 리베롤은 답 없이 갑자기 손짓하기 시작했다. 옆에 와달라는 건가? 아무래도 직접 말하는 게 부끄러워 귀에 대고 소곤소곤 말하려나 보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어떤 건데 그래?”
내 물음에 그녀가 귀를 가져다 대달라고 부탁하는 제스처를 취했고 그럴 거라 생각해 나는 고개를 그녀 쪽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쪽.
말랑한 감촉이 오른쪽 볼 가득히 느껴진다. 잠시 그것이 어떤 감촉인지 알지 못했기에 나의 반응 역시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얼굴이 벌게진 채 바보같이 어 어 하며 리베롤을 볼 뿐이었고
그녀 역시 붉어진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 특유의 요염하고 나른한 어조로 말하였다.
“매번 웃으면서 함께 지내준 여자라면 꼭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그러 그녀의 말에 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 아 그래. 나 여자지. 맞아. 주민등록에도 당당히 등판되어있는 훌륭한 여자. 비록 군인이라 꾸밀 기회는 많이 없지만 손톱 관리하고 그러는 엄연한 여자애이다.
그런데 방금 그녀가 뭐라고 한 거지? 머리가 쉽게 진정되지 않았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 진정하고는 물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떨리다 보니 이상한 톤이 되었다.
“퇴역한다고 하지 않았어?”
“..지휘관. 저는 부대를 나온다고 했었어요. 한 번도 퇴역한다고는 안했어요.”
엥? 그랬나? 나는 곰곰이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고 결국 내 쪽에서 먼저 퇴역이라고 단정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으아아아. 오늘은 무슨 흑역사 갱신기인가? 하루에 몇 번씩 부끄러운 일을 만들어 내야 속이 풀리는 걸까?
‘그나저나 나 방금 고백을 받은 건가?’
“지휘관.....”
혼란에 빠져 있는 내 얼굴을 조그맣고 새하얀 손가락이 감싼다. 이윽고 내 앞으로 새하얀 소녀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혹시..... 불쾌하셨던 건가요? 같은 여자라서 싫으신 건가요?”
리베롤의 조그마한 얼굴이 불안에 휩싸였다. 잠시 혼란스러워 유지하고 있던 침묵이 그녀에게는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던 모양이다.
밤이 깊어진다. 밤하늘은 한층 깊어지고 별들은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다. 바람은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인지 잠정 파업에 들어가고는 전혀 불지 않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 더운 것 같다.
“저기.... 지휘관...”
“리베롤.”
갑작스런 내 방해에 리베롤이 입을 다문다. 그리고는 불안이 담긴 눈으로 두려움에 떨며 나를 보았다. 그렇기에 나 역시 편히 다음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새하얀 머리칼을 감싸고. 새하얀 그녀의 볼을 매만지며
약간 분홍빛을 띄우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살포시 내 입술을 겹쳤다.
“........”
영원이라고 생각될법한 시간이 지나고 내 입술과 그녀의 입술이 떨어진다.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처럼 은빛의 실이 내 입술과 그녀의 입술 사이를 끈끈히 연결되어 있었다.
“....지휘관.”
리베롤이 붉어진 얼굴로 나긋나긋하게 신음을 흘린다. 그 모습을 본 나 역시 약간 신음을 흘렸다. 곧 이어 나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여름을 사는 건 성공했나 보네?”
“네?”
“벌써 이렇게 더운걸 보니 말이야.”
내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리베롤 역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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