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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 회적
1
아직 밤을 맞이하기엔 약간 이르다.
서쪽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었지만 동쪽 하늘은 아직 낮이라 부를 수 있는 오후의 색채를 머금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거리를 오가는 시간이다. 하지만 여긴, 단절된 세계의 건너편일 뿐이다.
파란 시트로 덮어둔 자재가 여기저기 쌓여 있고, 얇은 벽으로 빙 둘러싸인 새 빌딩 건설예정지에서 땅바닥이 크게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단단하고 평평하게 정리된 지반은 낮게 모래먼지를 일으키고, 공사가 중지된 지난주까지 이어지던 사람의 수고를 쓸모없게 만들겠다는 듯 중앙이 무참하게 패여 있다. 그곳을 발신지로 하여 여덟 방향으로 얇지 않은 균열이 달려 있었다.
균열의 중심에 있는 것은 한 명의 사내다. 키가 크며 어깨통은 믿음직스럽게 널찍해, 가녀린 달빛에 떠오른 실루엣은 거대한 야수 같다. 뒤쪽으로 넘겨 눌러둔 거친 헤어스타일은 갈기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시시하군.”
팽팽한 양복 아래에서 으르렁거리듯 낮게 중얼거리고, 그는… 발켄하인 헬싱은 막 땅바닥에 내리친 다리를 거두었다.
그 아래에 찌부러져있는 건 인간의 아기 정도 사이즈의 갑충이었다. 둥근 등은 두껍고 딱딱한 피부에 감싸이고, 그 아래엔 가위 같은 턱과 낫 같은 발톱이 있다. 하지만, 이미 이형의 벌레는 꿈쩍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자랑거리인 등의 갑옷은 산산이 부서졌고, 낫 같은 발톱도 한쪽을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다.
날아오른 순간에 발켄하인에게 붙잡혀 내리쳐지고, 뒤이어 실컷 짓밟혔다. 그저 그것만으로 벌레는 기능을 정지했다.
“벌레 퇴치 따위에 어째서 우리들이 솔선해 나서야 하는 거냐! 벌레를 찾아서 죽이고, 찾아서 죽이고… 이런 시시한 잡일이나 하려고 이 나라까지 온 게 아니라고!”
신발을 더럽힌 벌레의 체액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고, 발켄하인은 고개를 들어 시선 끝을 향해 내던지듯 고함쳤다.
표적이 된 것은 건설현장의 벽에 기대 팔을 꼬고 서있던 늘씬한 청년이었다. 발켄하인과 똑같이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위에서 나부끼는 보랏빛 망토가 이질적으로 눈을 끈다. 더욱이 가느다란 앞머리 아래에서 양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가죽 밴드가 또 한층 그에게 이상함을 더했다.
레리우스 클로버다. 강인한 체구의 발켄하인과 비교하면 몸집은 평균적이고, 그 특이한 차림을 빼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 풍경에 녹아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온화한 풍경이 눈곱만큼도 떠오르지 않는 무표정한 목소리로, 레리우스는 화내는 발켄하인에게 냉담하게 대답한다.
“이미 돈은 받았다. 일이야.”
“또 그거냐! 네놈의 대단하신 연구 어쩌고는 그렇게 돈이 드는 건가?!”
더 이상 흥미는 없다는 듯 벌레의 시체를 훌쩍 넘어 발켄하인은 큰 걸음으로 레리우스에게 다가간다.
그 불타오르는 듯한 분노에, 양촛불이라도 끄는 것처럼 레리우스는 자세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든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 아니 그럴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고 있지 않다는 태도에, 발켄하인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다. 따지는 것도 바보 같다.
노려보듯 내려다보는 발켄하인의 시선을 시원하게 흘려버리고, 레리우스는 양복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전화로 미츠루기 기관에 연락을 넣었다. 벌레 퇴치를 완료한 것, 사체의 회수가 필요하면 바로 오라는 것, 그 정도를 전하고 일방적으로 끊었다.
“…『완전한 인형의 창조』…였던가?”
역겨운 것이라도 보듯 레리우스의 휴대전화를 쳐다보며 발켄하인은 토해내듯 말한다.
그것은 레리우스가 전부터 입에 담던 그의 『목적』이었다. 그 연구를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그러니 미츠루기 기관에 협력한다. 덧붙여 미츠루기 기관에게서 주어지는 일을 통해 연구에 필요한 『강한 영혼』을 찾고 있었다.
발켄하인이 미츠루기 기관에 협력해 불사자 사냥꾼 따위를 하고 있는 건, 보다 강한 적을 원하기 때문이다.
강한 존재. 그 점에 있어서만 레리우스와 발켄하인의 목적은 겹쳐져 있었다.
하지만 서로 각자의 목적과 사상을 존중하고 있냐 하면, 그렇진 않다.
“돈에, 영혼… 그런 걸 쏟아 붓지 않으면 안 되는 연구가, 제대로 돼먹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는군!”
으르렁거리는 듯한 발켄하인의 말에는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그런 식의 말을 듣는 건 익숙했기에, 레리우스는 눈을… 감춰진 시선을 향하지 않고 강인한 파트너의 옆을 지나치듯 걸어 나간다. 발이 향한 목적지에 있는 건 짓밟혀 으스러진 벌레의 시체였다.
“그보다, 발켄하인. 아까 발견한 사도의 시체 말이다만.”
이미 무기물 급으로 으깨진 벌레를 내려다보며, 레리우스는 그다지 흥미도 없다는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오늘밤, 이렇게 벌레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것은 두 번째다. 하지만 첫 번째는 자신들이 끝장낸 것이 아니다.
발켄하인이 두꺼운 가슴 위에서 그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한 팔을 꼬았다.
“…그래. 의심할 여지도 없지. 우리들 이외에도 스피너의 사도를 사냥하고 다니는 자가 있다.”
이형의 사도들은 보통 사람 눈을 피한다. 그림자 안에 숨어 꿈틀대고, 사람 눈이 닿지 않는 어둠에서 갑자기 마수를 뻗쳐오는 것이다.
그러니, 조명으로 반짝이는 번화가를 걸어 다니는 일반인들은 도저히 찾아낼 수 없다. 찾아냈다고 해도, 다음 순간엔 목숨을 빼앗길 것이다.
즉, 그다지 일반인이라곤 할 수 없는 누군가가 발켄하인 일행과는 별개로 벌레를 구제하고 있단 뜻이다.
“그것도 꽤나 열심히 말이지.”
레리우스가 혼잣말하듯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어제도 그제도, 레리우스와 발켄하인은 자신들이 관여하지 않은 사도의 사체를 발견한 것이다.
어느 쪽도 같은 인물에 의한 것이리라. 특징은 강렬할 정도로 날카로운, 그리고 집요한, 찢어발기는 듯한 참격의 흔적.
“…흥미롭군.”
사도를 찢어발기는 참격의 주인은 어떤 인물일까. 온화함과는 한참 멀리 거칠게 파괴된 발치의 사체에 얼굴을 향한 채, 레리우스는 가볍게 쥔 손을 턱에 대었다.
“키이로는 어쩌고 있지?”
지루해 보이는 발켄하인에게, 레리우스가 돌아보지 않은 채 답한다.
“조정중이다.”
“조정 중? 뭘 조정하…”
나오기 시작한 발켄하인의 말을 날카로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갈라놓았다.
숨을 삼키고, 몸을 돌린 건 발켄하인 쪽이 빨랐다. 먼지가 일 정도로 강하게 바닥을 차고 재빠르게 물러나자, 직후 그곳에 작은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펄럭, 하고 꽃잎이 흩날리듯 연분홍색이 춤췄다.
“레리우스!”
고함치는 듯한 경고와 동시에, 레리우스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둔한 소리는 레리우스의 망토 아래에서 나타난 하얀 인공 팔이 단단한 금속을 받아낸 소리였다.
받아낸 것은 칼날.
아직 해도 다 지지 않은 밝은 하늘 아래서 오히려 흉흉하게 빛나는, 일본도의 참격이었다.
“…계집?”
습격자를 가까이서 바라보며, 레리우스는 의아해 중얼거렸다.
뛰어든 것은 소녀였다.
아직 어린애다. 까마귀 날개 같은 검은 머리칼을 한 갈래로 모아 묶고, 가느다란 몸에는 연분홍색과 연보라색이 섞인 기모노를 두르고 있다.
그 하얀 손에는 아직 성장도 끝나지 않은 소녀가 한 손으로 가볍게 다룰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는, 진검 일본도가 쥐여 있고… 소녀는 그것을 재빠르게 번뜩여 허리 위치에 자세 잡은 칼집으로 되돌렸다.
갑자기 덮쳐든 건 테르미 사야였다.
날카로우면서도 맑은 붉은 눈동자를 차갑게 빛내며, 사야는 몸을 낮춘 채 준민하게 물러나 거리를 벌린다.
“발켄하인 헬싱?”
사야와, 레리우스와, 발켄하인. 의도하진 않았지만 동일한 간격으로 벌어진 거리에서, 사야는 검은 벨트로 눈을 덮은 남자와 강인한 장신의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아직 순진함을 간직한 목소리는, 10대 전반이라는 연령에 비해 묘할 정도로 차갑다. 거기 있는 것이 따듯함 따위 없는 살기라고, 레리우스도 발켄하인도 눈치 채고 있었다.
“아는 사이인가?”
레리우스는 발켄하인을 보며 물었다.
두꺼운 눈썹을 좁혀 깊게 주름을 만들고, 발켄하인은 난입해온 기모노 차림의 소녀를 바라본다.
“아니, 모른다.”
“하지만 저쪽은 네게 용건이 있는 모양이군.”
따라서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레리우스는 발켄하인과 사야의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질러 공사현장 구석으로 이동했다.
레리우스가 관객석에라도 틀어박히듯 물러나 자연스레 발켄하인은 사야와 똑바로 마주보게 되었다.
“무슨 볼일이냐, 계집이.”
위압하는 듯한 무게로 발켄하인은 본 적 없는 소녀에게 물었다. 앙상한 높은 코를 떨었다.
소녀에게선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불길한 냄새다.
애초에 사람 눈을 신경도 안 쓰고 진검을 들고 날아든 소녀가 온건한 존재일 거라곤, 잘라 말해 코가 없어도 생각 안 한다.
사야는 팟 하고 등을 펴 자신의 정면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겁이나 억압된 듯한 기색은 없다. 오히려 드디어 찾았다는 듯한 고양과 표적을 노리고 곤두세운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
정상인의 눈이 아니다. 발켄하인의 험악한 표정이 경계를 품는다.
“…발켄하인 헬싱.”
사야의 입술이 다시 한 번 표적의 이름을 불렀다.
거기에 발켄하인이 무언가 대답하려고 한 순간 마주보고 있던 서로의 거리가 거의 제로가 되었다.
언제, 어느 타이밍에 땅을 박찬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야는 단숨이라는 여유도 주지 않고 강인한 남자의 눈앞까지 접근해 허공에서 그 몸을 빙글 돌렸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 같은 가벼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봄바람처럼 빠르다.
호흡보다도 빠르게 칼이 칼집을 미끄러진다. 꽃이라도 기를 것 같은 소녀의 단아한 손은 손가락을 감듯 칼 손잡이를 붙잡아 바람이 들판을 눕히는 듯한 속도로 대각선 아래에서 베어 올렸다.
“큭…!”
발켄하인은 크게 몸을 돌려 강하게 뒤쪽으로 뛴다.
반쯤 강제로 몸을 틀어 땅에 한 번 손을 짚고 물러난다. 그 어깻죽지를, 칼날이 스치듯 베고 지나갔다.
근육까진 닿지 않았다. 하지만 옷 째로 살갗이 살짝 찢어져, 발켄하인은 아픔보다도 경악으로 눈을 크게 뜬다.
“호오… 빠르군.”
저 멀리 관객석에서 레리우스가 감탄의 목소리를 흘린다.
그 강인함과 거친 성격에서 힘에 맡기는 싸움법을 상상하기 쉽지만, 발켄하인의 진가는 속도에 있다. 그 발켄하인의 눈에도 잡히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인간이 존재하다니, 하물며 그것이 인간 소녀라니 놀랍다.
“그 버러지는 제 사냥감입니다. 손대지 말아주시길.”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칼을 다시 칼집으로 되돌리고, 사야는 차가운 견제를 보낸다. 말을 듣지 않겠다면 베겠다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이 말하고 있었다. 그만큼 극단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는 것도.
발켄하인이 불쾌함에 눈썹을 치켜 올린다.
“손대는 게 싫으면 우리보다 빠르게 처리해버리면 될 일이지. 시시한 이유로 덤벼들 시간이 있으면 빨리 다른 벌레라도 퇴치하러 가는 게 어떠냐!”
“아니요. 귀하의 목을 노린 것은 벌레 따위 때문이 아닙니다. 발켄하인 헬싱. 귀하의 죄는…”
차가운 칼날 같았던 사야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열을 띤다. 얼어붙은 고드름이 안쪽에 불꽃을 품고, 곧이어 불기둥으로 변하듯… 사야는 분노와 살의를 품었다.
“제 오라버니를 죽인 것!”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사야의 몸은 발켄하인의 등 뒤까지 이동했다. 반원을 그리듯 미끄러뜨린 발로 브레이크를 걸고, 그 자리에서 회전해 칼을 뽑아 휘두른다.
조용히 칼집에서 빠져나와 번뜩인다. 얼음 같은 냉기가 목덜미를 기어올라, 발켄하인은 판단보다 빠르게 땅을 박찼다.
인간의 모습으론 늦는다. 오한과도 닮은 본능에 따라 거대한 늑대로 모습을 바꾸고, 발켄하인은 내쏘아진 참격보다도 높이 뛰어오른다. 허공을 차고, 공중제비를 돌며, 벌레의 시체가 굴러다니는 바닥의 균열을 넘어 반대편까지 물러났다.
그럼에도 사야의 칼은 발켄하인의 털을 스쳐 허공에 흩뿌렸다.
“이건… 제법 괜찮은 영혼이군.”
갑자기 흥미가 일었다는 듯 레리우스가 한발 내딛는다. 자신의 힘으로 소녀의 진가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두발 째를 발켄하인의 노성이 가로막는다.
“손대지 마라! 내가 하겠다!”
늑대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겨우 발켄하인은 전투태세를 취했다. 꽉 매인 넥타이를 당겨 풀어버리고, 셔츠 가슴팍을 연다.
“네년의 오라빈지 뭔진 모르겠다만, 경솔하게 덤벼든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이것 참.”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레리우스는 어깨를 움츠리고 내딛은 만큼 물러났다.
발켄하인은 날카로운 송곳니 같은 늑대의 이빨을 내보이며, 전의에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다. 이미 상대가 어린 소녀라는 것 따윈 요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발켄하인에게 있어서 지금 저 소녀는 적이다. 그것도, 자신을 빨리도 수화(獣化)시킨 적이었다.
발켄하인은 수화하게 된 것을 불만스러워하고 있다. 딱히 늑대 모습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가만있어도 높은 신체능력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수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손쉽게 내몰렸다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극히 단순하게 그의 투쟁본능에 불을 붙인다.
“죽이지 마라. 그 소녀를 살펴보고 싶다.”
일단 그리 이야기는 해 두었다만, 과연 어디까지 기대할 수 있을까. 지켜보는 레리우스 앞에서, 발켄하인과 사야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2
거리를 좁히는 건 역시 사야 쪽이 빠르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것 같은 속도다. 단숨에 발켄하인의 옆까지 전진한다.
하지만 빠르단 걸 알고 있으면 상응하는 대처도 가능하다. 다시 칼을 뽑아, 이번에야말로 목을 떨어뜨리겠다고 살기를 뿜는 사야에게, 발켄하인은 시선을 보내기보다도 먼저 몸을 틀었다.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속의 발차기를 먹이기 위해.
한 순간, 희미하게 사야의 눈이 초조함을 띤다. 공격을 예측하고 있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것도 이 정도의 반응과 속도다.
칼을 뽑은 채로 쥐고 있던 칼집을 세로로 잡아 사야는 수인의 우레 같은 일격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냈다.
“큿…”
작은 몸은 충격을 채 받아내지 못하고 튕겨나듯 날아간다.
하지만 자세를 무너뜨릴 정돈 아니다. 낮은 자세로 바닥을 미끄러지며 착지해, 사야는 재빠르게 고개를 들고 다시 뛰었다.
번쩍이는 것 같은 속도.
발켄하인은 다시 뒤를 잡힌다.
“성가시군!”
포효하고, 발켄하인은 날아들 칼날을 경계해 옆으로 뛰었다. 뛰려고 한, 그 축이 된 다리를 칼집에 들어간 채인 칼이 걸듯 쓸었다.
“뭣…?!”
동요하는 발켄하인에게, 뒤이어 칼자루가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진다. 사야가 노린 것은 미간이다.
하지만 그것은 발켄하인의 반응에 이기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휘둘러진 통나무 같은 팔이 사야의 칼을 쳐올린다.
높게 팔이 쳐올려진 것은 사야만이 아니다. 스스로 팔을 휘두른 발켄하인도다.
그 벌어진 품, 긴장된 옆구리에, 소녀의 자그마한 장저(掌底)가 꽂힌다.
발켄하인의 입에서 꽉 뭉친 소리가 새었다.
옆구리에 꽂힌 장타는 소녀의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이 강력해, 그대로 손톱이 파고들어 고기를 도려내는 줄 알았다.
뻗어진 손목을 붙잡아 발켄하인은 사야의 목에 손을 뻗는다. 하지만 어떻게 된 몸놀림인지, 사야는 먹잇감을 사로잡는 송곳니 같은 그 손을 슥 빠져나가 가벼운 스텝으로 뒤쪽으로 물러났다.
마치 재롱이라도 부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불쾌함이 극에 달해, 발켄하인은 팔랑팔랑 눈에 거슬리게 소매를 흔드는 소녀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심상찮은 속도로 때려 넣었다.
몸통을 노리고 뒤쪽에서부터 파고드는 주먹을, 사야는 간발의 차이로 피한다. 뒤이어 발켄하인의 다리가 붕 소리를 내며 쌓인 자재 더미를 단숨에 박살냈다.
하지만 사야는 붙잡을 수 없다.
겨우 몇 밀리, 겨우 한 순간의 속도 차이로, 소녀는 바닥을 스치듯 미끄러지며 물러나 맹렬한 공격을 피한다.
“이 년이…”
이렇게 조바심이 느껴지는 전투도 그다지 경험할 일이 없다. 붙잡을 수 없는 허상과 싸우는 듯한 기분에 발켄하인의 표정은 험악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상대는 허상이 아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다.
그것이 말 그대로 코앞에서 저러니, 더욱 짜증난다.
느려, 하고 놀리듯 사야가 고개를 기울여 보인다.
사소한 행동 하나에, 발켄하인의 피가 격앙으로 들끓는다. 다시 늑대 모습으로 변해 건방진 계집애를 노리고 덤벼든다.
앞발로 바닥을 차고, 청년 모습일 때완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사야에게 육박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엔 숨을 삼키고, 사야는 짐승의 이빨에 쥐고 있던 칼을 내밀었다.
발켄하인의 이빨이 상관없다는 듯, 차라리 무기를 부러뜨려버리겠다는 듯한 기세로 칼집을 물어 붙잡는다. 그대로 크게 목을 돌려 소녀를 가볍게 옆 부지까지 던져버렸다.
옆 부지엔 잿빛으로 칙칙해진 낡은 건물이 서 있었다.
공사현장을 둘러싼 하얀 덮개 째로 날려진 사야는, 지저분한 벽에 격돌하기 직전에 휙 하고 공중에서 뛰었다.
사야가 긴 머리칼을 크게 흔들며 고개를 든다.
거기에 거대한 늑대의 추격이 날아든다.
네발로 박찬 속도를 유지한 채 도약해, 체공 중에 강인한 청년으로 모습을 되돌린다. 그 기세 그대로 억센 팔이 내리쳐졌다.
분쇄기가 콘크리트를 깨뜨리듯, 발켄하인의 주먹은 빌딩 벽을 박살내고 잿빛 먼지를 일게 했다.
시야를 가리는 모래먼지 커튼 속에서 발켄하인은 성대하게 혀를 찼다. 놓쳤다.
사야는 벽을 차고 뛰어올라, 유리창을 칼집으로 깨고 건물 2층으로 도망쳤다.
그 모습을 시야 구석에 포착한 발켄하인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낮게 으르렁거리고 건물 2층 창문까지 뛴다.
깨진 유리창은 안쪽을 향해 날카로운 모서리를 세우고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밟아 으깨며 강제로 안으로 들어선다.
안쪽은 아마 어떤 점포였을, 텅 빈 철제 선반이 몇 개씩 난잡하게 남겨진, 어둑어둑하고 먼지 냄새 나는 빈 공간이었다. 긴 시간동안 누군가가 들어온 적도 없을 것이다. 발켄하인은 얕게 쌓인 먼지 위에 난폭하게 발을 내린다.
그러자, 그 순간을 노리고 구석에서부터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격에 망설임은 없다.
끝장낸다.
지독히도 순수한 살기가 형태를 취한 것만 같은 칼날이다.
노리는 것은 목. 비스듬히 단칼에 베어낸다.
오싹 하고 달린 위기감에 반응해, 발켄하인은 몸을 던져 먼지투성이 바닥을 굴렀다.
다행히 일으킨 몸에는 목이 아직 붙어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해내진 못했다. 어깨를 훑은 칼날이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살을 얕게 베어낸 것이다.
“흠… 이거 재미있군.”
뒤늦게, 벽에 자라난 인형 팔을 계단 삼아 2층으로 올라온 레리우스가 담담한 목소리에 역력히 흥미와 의욕을 담는다.
“점점 더 신경 쓰여.”
“짜증난다! 중얼중얼 입 놀리지 마라!”
베인 어깨를 만지고, 거기서 흐르는 검붉은 피로 손바닥을 더럽히며, 발켄하인이 거칠게 고함친다. 흥을 깨뜨리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 관객석인 층 구석으로 이동하며, 레리우스는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난폭히 굴지 마라. 어찌됐던 슬슬 시간이다.”
시간, 이라는 말에 발켄하인이 아닌 사야가 반응을 보였다.
뽑은 채였던 칼을 휘둘러 날을 적신 피를 털어내고, 발을 바닥에 미끄러뜨리며 간격을 잰다. 그것은 이제껏 없던 신중한 자세잡기였다.
작은 흉기는 경계하고 있다. 레리우스가 말한 대로 『시간』을.
“계집… 네년, 앞으로 몇 분이나 움직일 수 있지?”
아마 술법인지 뭔지로 일시적으로 신체능력을 강화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 치고는 너무 빠르다, 너무 강하다. 치고받으면서 줄곧 위화감을 느끼고 있던 발켄하인이, 낮게 물었다.
사야는 대답하는 대신 칼을 칼집에 넣었다. 한 걸음 발을 뺀 자세로 서고, 손은 칼자루에. 항복하는 의미의 납도가 아니다. 반대다.
“어떤 수법인진 모르겠다만, 먼저 덤벼든 건 네년 쪽이다. 이제 와서 자비 따위는 기대하지 마라!”
그럴 셈이라면 봐줄 필요는 없다. 발켄하인은 좁아진 전장을 단숨에 달렸다.
강하게 내딛어, 주먹을 때려 박는다. 그 손은 부드러운 천을 스쳤다. 사야의 기모노 소매다.
뒤이어 그 자리에서 옆으로 휘둘러 돌려차기를 넣는다. 내린 다리를 다음 축으로 삼아 이번엔 높은 위치에서 내려치듯 긴 다리를 휘둘렀다.
한발 한발 그것만으로도 일반인의 목숨을 빼앗기에 충분한 무거운 일격이었다. 그러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하지만 사야는 몸을 굽히고, 혹은 칼집으로 받아 흘리며, 미끄러지듯 피해냈다.
아직 빠르다. 아직 잡아낼 수 없다.
끝이 스치긴 하지만, 발켄하인의 연격은 유효타까진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몇 발 째인지 모를 공기를 울리는 상단차기에, 사야는 붙잡히고 말았다.
“으, 큭…”
회피가 제때 되지 않아, 들어 올린 팔로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방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사야는 등부터 벽에 충돌했다.
사야를 받아낸 잿빛 벽에 얕게 금이 간다. 그 중앙에서 가볍게 벽에 박힌 사야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았다.
그 거리를, 발켄하인은 재빠르게 좁힌다.
“죽이지는 않겠다. 허나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을 거다.”
사야의 눈앞까지 뛰쳐나와 발켄하인은 성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고속의 주먹을 찔러 넣었다.
“윽, 무슨?!”
다음 순간, 발켄하인은 경악에 눈을 크게 떴다.
휘두른 주먹이 깨뜨린 건 소녀의 의식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금이 간 차가운 벽이었다. 먼젓번 충격으로 약해져 있던 그 표면은 발켄하인의 두 번째 공격에 부서져 내려, 진흙처럼 주먹을 팔목 중간쯤까지 삼켜버린다.
꽂힌 팔 아래에서, 미소 짓는 기척이 일었다.
“아아… 다행이다. 이제야 멈춰주셨군요.”
앳되면서도 등골을 훑는 듯 어딘가 기분 나쁜 목소리로, 벽과 발켄하인 사이에서 사야가 속삭인다.
처박힌 벽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사야는, 발켄하인의 주먹이 자신에게 닿기 직전에 몸을 미끄러뜨려 그 자리에서 낮게 주저앉은 것이다.
“네년, 아직도…!”
아직도 할 생각이냐며, 발켄하인이 깊게 파묻힌 팔을 당겨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사야가 일어난다.
그 손에 칼은 쥐여있지 않았다. 칼집에 들어간 칼은 그녀의 발치에 버려둔 채로, 사야는 무기도 없는 양손을 스륵 하고 발켄하인의 팔에 감는다.
그리고.
“윽, 뭐, 냐…?!”
갑자기 발켄하인의 무릎이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엄청난 현기증이 평행감각을 파괴하고, 버티는 다리를 떨리게 한다. 비틀거리며 버티는 게 고작인 상태인 발켄하인을 돕듯, 사야는 벽에 꽂힌 팔을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발켄하인이 송곳니를 드러낸다.
빨려나간다. 힘이, 아니 좀 더 근본적인 것이, 다. 자신에게 닿은 소녀의 손을 통해 빼앗기고 있다.
“그것은… 소울 이터인가!”
떨어진 곳에서, 레리우스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파트너의 들을 일 없는 목소리를 둔해지는 청각으로 들으며, 발켄하인은 결국 서있지도 못하게 되어 인간의 모습도 잃었다. 강인한 청년에서 거대한 늑대로 강제적으로 변모한다.
덕분에 팔의 형태가 변해 자연히 벽에서 해방되었지만, 감겨드는 사야의 손은 더욱 발켄하인에게서 빼앗아갔다.
소울 이터. 타인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최악의 드라이브.
존재만은 들은 적 있던 발켄하인은 믿기 힘들어 자신을 가느다란 팔 두 개로 붙잡아 억누르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이런 어린애가 소울 이터를 소지하고 있다니, 어떻게 예상할 수 있겠는가. 진짜 존재하는지 어떤지마저 의심되는 드라이브였던 것이다.
“…죽어버릴 텐데요? 안 도와줄 겁니까?”
바닥에 쓰러져가는 늑대의 앞발을 하나 끌어안은 채, 사야는 뒤쪽에 멈춰선 레리우스에게로 고개를 향한다. 입가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발켄하인에게 당한 발차기의 대미지는 요만큼도 남아있지 않다. 빨아들인 생명력에 의해 이미 나은 것이다.
이제 잠시만 더 이러고 있으면 이윽고 늑대 사내는 죽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과는 자릿수가 다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곤 해도, 목숨은 유한하다. 끝까지 빨아내버리면 거기까지.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 고통스러워하는 늑대로선, 보기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억누르는 사야의 손을 떨쳐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레리우스는 구석의 관객석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뿐이랴 벽에 등을 기대고 계속 방관했다.
“아깝군….”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것도 아니면서 레리우스가 툭 내뱉었다. 꼰 팔 위에서 하얀 장갑에 싸인 손가락이 무언가를 카운트하듯 톡톡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손가락이 갑자기 멈춘다.
“시간이다.”
레리우스가 어딘가 아쉬워보이는 한숨을 쉰 순간, 덜컥, 하고 사야의 무릎이 접혔다.
“아차…”
괴롭게 눈썹을 좁히며, 사야는 끌어안고 있던 발켄하인의 팔에 달라붙는다. 하지만 그 손에 조금 전까지처럼 심상치 않은 힘은 없다. 지금, 거대한 늑대를 억누르려고 하는 건 한 명의 가녀린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제한시간은 3분인가…. 어떤 수법으로 신체능력의 강화를 해내고 있는 건지는 조사해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꽤나 반동이 큰 모양이군. 그 상태론 서있는 것도 괴롭겠지. 실용적인 수법이라곤 못 하겠군.”
가려둔 눈으로 어디까지 꿰뚫어보고 있는지, 레리우스는 굴곡이 없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딱히 사야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상태를 관찰해, 그 결과를 입에 담고 있을 뿐.
중얼중얼 계속 말하는 같은 편의 해설을 듣고, 발켄하인이 기세 좋게 짐승 머리를 들어올린다. 구부러진 등을 들어 올리듯 일어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몸을 돌려, 팔을 붙잡고 늘어진 사야를 떨쳐내 던졌다.
반대편 벽 근처까지 날아간 사야는 낙법도 취하지 못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구른다.
작게 신음하고, 사야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바닥에 댄 손은 희미하게 떨리며 가벼운 체중조차 간단히 지탱해주지 않았다.
“유감입니다…. 앞으로 조금, 남았었는데.”
끌듯이 상체를 일으키며, 사야는 어느새 완전히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분함에 중얼거렸다.
앞으로 조금만 더 있었으면, 생명력을 다 빨아들일 수 있었는데. 사신의 억지다.
바닥에 엎드리고서도 진심으로 그런 기분 나쁜 말을 할 수 있는 사야를 향해, 비틀거리면서도 발켄하인이 크게 발을 내딛는다.
“소울 이터… 그런가. 사용자를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놓아줄 순 없지.”
“발켄하인. 죽이지 마라.”
계속 나아가는 상처 입은 늑대인간에게 레리우스는 다시 한 번, 주의를 주듯 말을 걸었다.
하지만 발켄하인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레리우스의 말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대로 몇 걸음 걷자, 그 발걸음은 간격을 좁히기 위한 발구름이 되었다.
사야가 꽉 하고 팔에 힘을 넣어 스스로를 끌어낸다. 허나 아무리 생명력을 빼앗겼다고 해도 상대는 수인이다. 생물로서의 기초가 다르다.
늑대 남자의 속도는 줄지 않는다. 그에 비해 사야는 몸을 일으키는 게 고작이고, 애용하는 칼도 저 멀리 있다.
늑대의 포효를 울리며 발켄하인이 날카로운 손톱이 번뜩이는 손을 휘두른다. 그 팔은 피부를 찢고 근육을 뚫고 뼈를 부술 것이다. 용서도 자비도 없다.
먹잇감의 숨통을 끊는다. 그저 그 목적만을 위해 날카로운 손톱이 허공을 갈랐다.
거기에―.
“으랴아아아앗!”
젊은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까만 그림자가 날아들어, 발켄하인의 옆얼굴에 거칠게 발차기를 꽂았다.
3
먼지가 쌓인 바닥은 자갈 같은 거친 소리를 울리며 착지한 나오토의 발을 미끄러뜨렸다.
임대 간판은 남아있지만, 내부는 지하에 있는 스낵바를 제외하곤 텅 빈 폐허 직전의 낡은 잡거빌딩.
그 2층의 원래 비디오 숍이었던 점포에 깨진 유리창으로 뛰어든 나오토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댄 손을 털며 고개를 들었다.
텅 빈 철제 선반이 여기저기 쓰러져 마치 실패한 도미노처럼 벽에도 기대있는, 답답한 공기로 가득한 곳이었다. 층 자체의 넓이는 제법 되지만, 중앙에 두 개 서있는 두꺼운 기둥과 방치된 선반이나 상자가 원래보다 훨씬 비좁아 보이게 한다.
공기는 먼지 냄새가 나며, 들이마시니 숨이 막힐 것 같다.
그런 와중에서 나오토는 지금 막 날아차기를 먹인 키 큰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강하게 적의를 담아 노려보았다.
시선 끝에 있는 것은 거꾸로 선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뒤로 난잡하게 넘긴 키가 큰 남자다.
발켄하인 헬싱. 늑대와 인간 두 가지 모습을 가진 수인이며, 미츠루기 기관에 고용된 불사자 사냥꾼.
그가 입고 있는 깊은 색조의 양복 소매에는, 나오토의 운동화 발자국이 허옇게 남아 있었다.
“너네 타깃은 불사자 아니었냐?! 이런 인기척 없는 곳에서 어린애 상대로 진지해지지 말라고, 변태 새끼야!”
“네놈은… 쿠로가네 나오토. 일부러 죽으러 온 건가?”
경멸을 담아 토해낸 나오토의 말에, 발켄하인은 사나운 눈빛에 더욱 적의와 살의의 불꽃을 담았다.
이름을 불렸단 것에 나오토는 약간 놀란다. 하지만 바로 정보의 경로를 깨달았다.
분명 키이로에게서 들었을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에서마저도 이곳엔 없는 미츠루기 기관의 수수께끼 가득한 그녀의 존재가 느껴져, 나오토는 가슴에 달라붙는 기분 나쁜 감각에 얼굴을 굳혔다.
그 시야 구석에, 난입한 나오토보다 약간 늦게 바람과 함께 라켈이 방치된 간판 자국에 단아하게 내려선다.
그것만으로 약간 공기가 화사해진 것처럼 느껴진 것은 라켈이 가진 이차원적인 고귀한 분위기 덕분일 것이다.
먼지투성이의 불결한 실내에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굳히고, 라켈은 주변을 확인하듯 둘러본다. 그 시선을 끈 것은, 혼자 떨어진 장소에 서 있던 눈가를 검은 벨트로 덮은 사내다.
“오늘은 소년의 그림자 속이 아니로군.”
던져진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란 걸 깨닫고 라켈은 눈을 가린 남자, 레리우스를 지긋이 바라본다.
“레리우스 클로버…”
발켄하인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인 클라비스 알카드를 노리고 있는 불사자 사냥꾼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안쪽까지 들여다보듯 구석구석 바라본 후, 라켈은 의아하다는 듯 가늘게 정돈된 눈썹을 좁혔다.
“…달라. 당신이 아냐.”
라켈은 방 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에 피가 오른 나오토는 그것에 신경 쓰기는커녕 의식에 담지도 못했다.
그로부터… 하루카에게 부탁받은 저녁거리 쇼핑을 하러 가던 도중, 갑자기 라켈이 아오의 힘을 느꼈다고 중얼거린 후부터.
어디선가 드라이브 능력자가 날뛰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여기저기 찾아보고 라켈과 함께 하늘까지 날아 현장을 발견했더니 이런 상황이었다.
어째서 사야와 발켄하인이 치고받고 있는 건지, 사정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야도 발켄하인도 뭐든 흉흉하고 거친 수단으로 일을 해결하려 하는 타입이다. 어차피 어느 쪽이 싸움을 걸었을 게 뻔하다.
‘그것도 아마 사야겠지…’
흘긋 어깨너머로 뒤쪽에 있는 여동생을 쳐다보고, 나오토는 괴롭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사야는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모처럼 입은 기모노를 먼지로 더럽히고 지친 것처럼 주저앉아 양손을 바닥에 대고 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몸을 일으키는 것도 괴로울 것이다.
가녀린 어깨가 바삐 거친 호흡에 위아래로 들썩이고 있었다. 낯빛도 희푸른 게 도저히 일본도를 휘둘러대는 소녀론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에선 아직도 전의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꾸짖는 듯한 눈으로 나오토를 올려다본다.
“오라버니… 쓸데없는, 참견을…”
“웃기지 마! 뭐가 쓸데없는 참견이야, 쓸데없는 짓 하는 건 너거든!”
갑자기 기세가 오른 나오토의 노성에 놀란 듯이 라켈이 돌아보았다.
사야가 기가 눌려 입을 다문다.
나오토는 가슴속에서 날뛰는 감정을 어떻게든 억누르듯 강하게 양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갑자기 집에 쳐들어왔다 했더니 소식도 없이 사라지고, 그러곤 또 저딴 규격외랑 치고받고 앉았고, 대체 뭔 생각하는 건데! 날 죽이겠다니 어쩐다니 지껄여 놓고, 자살하는 게 소원이냐 이 바보!”
테르미 사야는 나오토에게 있어 어둡고 무겁고 괴롭고 슬픈 기억의 상징이었다.
그 여동생 때문에 부모님은 죽었다. 친척 대부분도, 함께 지내며 일하던 사람도. 정말 좋아하던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사람도, 다툰 사람도 위로해준 사람도.
전부 사야가 죽였다.
그런데도.
“귀찮은 짓거리만 잔뜩 해대고… 진짜, 웃기지 말라고 제기랄…!”
구토라도 하는 것처럼 나오토는 악담을 토해낸다.
그런데도 여동생이라고, 가족이라고 생각해버린다.
미워하고, 멀리하고,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발켄하인이 마무리를 지으려하는 걸 본 순간 분노가 전신을 꿰뚫은 것 같았다. 구해야한다는 생각에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너무 걱정돼서,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사야를 향한 분노도 한 데 모아, 나오토는 물어뜯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발켄하인을 노려보았다.
머릿속을 첫 조우시의 공포가 스쳐간다. 관통당한 배, 밟아 으깨진 발. 떠올리니 위장 근처가 시큰하게 움츠러든다.
그때 그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것이다. 약간 사도와 싸울 수 있게 되었다곤 해도 지금의 나오토가 발켄하인과 맞붙을 수 있을 거라곤, 나오토 자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핫, 리턴매치라도 할까? 그쪽이 그럴 생각이면 이쪽도 사양은 안 하는데.”
“위세 한 번 좋군, 애송이. 좋지, 이번에야말로 그 머리를 으깨고 죽여내주마.”
가볍게 던지는 듯한 나오토의 도발에, 발켄하인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살의를 담아 대답한다.
되도록 질려서 가주는 게 이상적이었지만, 자세를 잡는 발켄하인을 보고 나오토는 각오를 굳혔다.
‘라켈이 사야를 데리고 도망치게 하고, 그 다음 나도 어떻게든 도망친다!’
그리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말 그대로 터지려던 풍선을, 몇 걸음 나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억눌렀다.
“기다려, 나오토.”
“기다려라, 발켄하인.”
둘 다 말대꾸를 허락하지 않는 강한 목소리였다.
두 방향에서 동시에 걸려온 목소리에 나오토와 발켄하인의 맥이 동시에 끊겼다.
“아, 갑자기 뭔…”
“조용히 해. …아오의 기척이 느껴져. 그것도 급속도로 접근 중인…”
따지려던 나오토를 작은 손을 들어 제지하고, 라켈은 굉장히 절박한 표정으로 의식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잘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빨간 눈동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끄러진다.
그 심상찮은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라켈처럼 무언가 이변을 느낀 것인가, 레리우스와 발켄하인도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고 주변에 감각의 실을 펼치고 있었다.
팟, 하고 튕기듯 라켈이 나오토를 돌아본다.
“당신 여동생과, 저 발켄하인. 강력한 드라이브가 격돌한 탓에 이 장소의 아오의 잔재는 이상할 정도로 짙어져 있어. 그리고 아오의 잔재는 아오의 힘을 끌어들여. 강하면 강할수록… 알겠어?”
“아―, 그런 건 다 쳐내고 결론만 알려줘. 급한 거 맞지?”
“여긴 지금, 아오에 관련된 자… 특히 아오의 기척을 쫓는 자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눈에 띄는 이상영역이라는 거야.”
“알겠으니까 결론!”
“스피너가 감지할 거야.”
그 이름이 라켈의 입에 오른 순간, 나오토 일행이 뛰어든 창문 밖이 갑자기 새카맣게 명도를 잃었다.
나오토는 당황해 돌아선다.
결단코 날이 저문 것은 아니다. 해가 지고 있긴 했지만, 아무리 밤이 됐다고 해도 밖이 어둠에 잠기는 일은 없다.
하지만 한 바퀴 둘러본 나오토의 시야에는, 그저 검은색만이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바닥에 간 금에서 배어나온 먹처럼, 새카만 것이 창문과 그 주변 벽을 남김없이 칠하고 있다.
검은색이 있는 건 창문 밖이 아니다. 안쪽이다.
나오토는 그 기괴한 어둠을 본 기억이 있다. 밤 학교의 복도에서 봤다. 스피너가 대동하고 온, 사람을 씹어 삼켜버린 그 어둠 덩어리다.
“이 자식…”
급히 앞으로 나서 나오토는 라켈을 등 뒤에 감쌌다.
어둠은 점점 넓어지며 기분 나쁜 움직임으로 꿈틀거렸다.
그 두께도 깊이도 알 수 없는 검은색 안쪽에서, 터진 둑에서 물이 넘쳐나는 듯한 기세로 무수한 팔이 튀어나온다.
그림자를 잡아 늘린 것 같은 가늘고 긴 팔은 곧장 뻗어, 목표 대상을…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던 사야를 손쉽게 붙잡아 튀어나올 때의 기세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삼켜버린다.
“뭐… 사야!!”
사야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집어삼켜져, 모습이 사라졌다.
나오토는 목이 찢어질 것 같은 기세로 부르짖으며 달려 나간다.
노리던 게 사야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어째서냐, 하고 사고회로가 혼란해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아우성친다. 실제로 아우성치고 싶은 기분으로 나오토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어둠에 달려들었다.
제지하는 라켈의 외침이 들렸지만, 그럴 때가 아니다. 붙잡힐지 어떨지도 모르면서 어둠에 손을 뻗어 그 끝자락을 잡아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나오토의 손가락 사이를 그림자는 마치 액체처럼 빠져나가 창문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거기 서! 사야!”
곧바로 뒤쫓아 나오토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둠은 모래주머니라도 끄는 듯한 소리를 내며 벽을 기어오른다. 그 위, 옥상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고급 양복으로 몸을 감싸고 잿빛 머리칼을 가지런히 쓸어 붙인, 기분 나쁘게 비쩍 마른 남자.
스피너 스페리올.
모멸의 시선을 나오토에게 보내고, 스피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발꿈치를 돌려 옥상 안쪽으로 모습을 거뒀다. 그걸 쫓아, 어둠인지 그림자인지도 나오토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젠장… 젠장!”
벽을 달릴 순 없다. 나오토는 주변도 살피지 않고 2층 점포에서 뛰쳐나왔다. 비상계단을 전속력으로 뛰어올라간다.
‘왜… 왜 사야를! 왜 사야가!’
자신과 라켈의 문제완 상관없었을 터. 인질이라도 잡으려는 건가. 무엇을 위해.
‘모르겠다고!’
빨라지는 고동에 숨이 막힌다. 정상적인 호흡 따윈 잊어버리고 초조함을 따라 달려, 그 끝에 있는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힘껏 발로 차 단숨에 쪼개 버리고.
넘어질 뻔하면서 뛰어나온 잡거빌딩 옥상엔, 그 누구의 모습도 없었다.
서쪽 하늘에서 구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윽고 밤이 온다.
오늘 밤은 보름달이 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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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페인 때문에 늦은 거라고
타이머 사야 vs 시계 안 보고도 3분 정확히 재는 레리우스 라먼 끓이기 승부존
이제 피날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네. 의외로 짧음 이 소설.
그나저나 오라버니는 내가 죽일 거지만 네가 죽이는 건 용서 못함^^이라니, 이건 진 포지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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